《간첩 잡는 특무대장 김창룡 제7회 》
8. 여수 14연대 반란군에 가담했던 최남근 중령 체포
최남근 중령은 1917년 만주 길림성에서 출생하여 길림제1중학교를 졸업하고 봉천군관학교 제7기로 임관하여 간도 특설대에서 근무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해방후 월남하여 다른 동료들과 함께 군사영어학교에 입교 하여 46년 2월에 군번 53번을 받고 대위로 임관하였다.(만주군 대위 인정)
여기서 잠깐 만주 군관학교 출신들에 대해 소개해 보겠다.
*일본 관동군은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건설하면서 1932년에 봉천에 2년제 군관학교를 세웠는데 여기가 봉천군관학교이다.
한국인은 1기생에 김주찬(창군멤버에 없음), 2기에 김정호(예 준장/국회의원), 4기에 김응조(예 준장), 5기에 김백일(예 중장), 정일권(예 대장/국무총리), 김일환(예 중장/한은총재), 신현준(예 중장/해병대), 윤춘근(예 소장), 김석범(예 중장/해병대) , 6기에 양국진(예 중장), 7기에 최남근(좌익, 사형), 박승환(월북), 8기에 석주암(예 소장), 이병주(군적 삭제)
9기에 백선엽(예 대장/교통장관)
이상 9기까지 배출하고 봉천군관학교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신경(만주국 수도)에 4년제 군관학교를 1939년에 개교를 하였다.
봉천군관학교에서는 9기생을 졸업시키고 난후 신경군관학교에서 장교가 배출되려면 4년을 기다려야 함으로 그 공백을 메꾸기 위해 부사관들 중에서 우수한 자원을 선발하여 단기교육을 시켜 장교를 배출했는데, 그 때 배출된 사람 중에는 5.16혁명 때 강원도지사를 역임했던 이용 장군이 있다.
다음 신경군관학교 출신으로는 1기생에 박임항(예 중장), 이주일(예 대장), 최창언(예 중장), 김동하(예 중장/해병대)
2기생에 박정희(대통령), 이한림(예 중장/건설장관), 3기 최주종(예 소장), 5기 강문봉(예 중장), 6기 김윤근(예 중장/ 해병대), 김학림(남로당 간첩). 김동훈(서울대 교수)ㆍ육광수(인하대 교수)
7기는 교육중 해방으로 임관하지 못함
최남근 중령도 역시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 이재복에게 포섭되어 박헌영에게 충성하는 간첩이 되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 14연대 반란사건이 일어나자 경비사령부에서는 반란 진압을 위해 여수ㆍ순천으로 부대를 투입하였는데 마산 15연대장 최남근 중령도 1대대를 앞세우고 진주-하동을 지나 광양방면으로 투입되었다.
광양군 옥곡면 S자 커브길 우측 산봉우리에서 차량종대를 향해 총을 쏘는 군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여수에서 반란을 일으킨 14연대 병력이었다.
반란군 주력은 20일 아침에 순천으로 올라와 순천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광양 백운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그때가 10월 21일 오후 4시쯤이었다.
선발대로 앞서가던 1대대 3중대장이 부상을 입고 쓰러지고 1중대장이 전방으로 추진하여 적을 제압하려 했으나, 뒤따라오던 대대장 한진영 대위가 총을 맞고 쓰러졌다.
상황이 불리해진 3중대와 1중대가 뒤로 빠지는데 최남근 연대장은 "내가 앞으로 나가서 처치하겠다며 3중대장 조시형 소위를 대동하고 갔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다.
날은 어두워지고 상황파악이 어려워지자 부연대장 신00소령은 잔여부대를 이끌고 철수하였다.
연대장 최남근이 행방불명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육군본부(1948.9.5 경비대를 육군본부로 개칭)에서는 최남근이 반란군에 납치되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런데 1주일 후인 10월 27일 하동군 화개장터에 최남근이 군복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나타났다는 신고가 육군본부 정보국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얼마 후에 5여단으로부터 부산에 나타났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최남근은 부산으로 이동하여 5여단 장교들로부터 자신에 대해 육본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염탐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5여단장 채병덕 대령과 그의 몇몇 참모들은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저녁식사까지 대접하고 채병덕 여단장이 상부에서 당신을 찾고 있으니, 빨리 서울로 가보라고 귀뜸을 했다.
이에 최남근은 그러면 빨리 가봐야겠다며 부산역으로 가서 야간열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고 5여단 정보참모는 육군본부에 이 사실을 보고하니, 김창룡 정보팀은 서울역에 나가 대기하였다.
그러나 최남근은 열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그는 대전에서 내렸던 것이다.
사실 최남근이 광양에서 행방불명 되었다는 보고를 받았 을 때는 그걸 믿었으나, 일주일만에 화개장터에 나타났다는 신고를 받고는 의심하였다.
만일 반란군 수중에서 탈출했다면 피골이 상접해야 하고 경찰서로 달려가서 신변보호를 요청하거나, 제발로 자신의 부하들이 기다리는 마산 15연대로 가야 옳은 일인데, 그렇게 하지 안했고 복장도 너무 깨끗하고 화색도 좋았다는 것, 그리고 왜 부산으로 갔는지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그래서 육군본부 백선엽 정보국장은 김창룡 팀장에게 은밀하게 체포하라는 밀명을 내려 놓았던 것이다.
새벽에 대전에서
내린 최남근은 한복으로 갈아입고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서울로 잠입했다.
서울에 잠입한 최남근은 수도극장 옆에 자동차 부속가게를 열어놓고 행상을 가장하고 있는 김삼룡의 아지트를 찾아갔다.
거기서 김삼룡은 최남근에게 다시 지리산으로 내려가서 빨치산을 지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무래도 계급이 중위인 김지회 보다는 중령인 최남근이 믿음직스러웠던 것이다.
며칠 후 최남근은 지리산으로 내려가려고 인사동 자신의 아지트를 나오다가 정보팀 수사관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때가 48년 11월 2일이었다.
정보팀은 최남근을 체포하기 위해 며칠밤을 인사동 설농탕 집에서 잠복을 하면서 식당 보이로부터 잘 생긴 신사가 혼자서 설농탕을 먹으러 자주 드나든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보니, 최남근과 인상착의가 비슷했다.
최남근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49년 5월 26일 수색에서 3발의 총성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나이 서른 두살이었다.
최남근의 죄상은 대구 6연대장 시절부터 군 내부에 좌익세포를 양성하고 남로당에 군 정보를 넘겨주었으며, 반란군을 토벌하지않고 반란군에 귀순하여 지리산에서 김지회와 제2의 반란을 일으키자고 모의한 것 등이었다.
#최남근은 평소에 동료들이나 부하들에게 인간성이 좋은 사람으로 소문이 나서 그런지 그날 형장에는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던 동료들이 그의 마지막을 모습을 지켜보려고 많이 모였다고 한다.
그는 동료들에게 술 한잔을 얻어 마시며 "내가 졌다. 내가 너희들에게 졌어. 대한민국은 유망한 나라야! 대한민국을 위해 충성을 다 해다오."라고 했고 그의 동생 최동근에게는 "큰형은 빨갱이들에게 맞아죽고 나는 우익에게 죽는구나, 너는 대한민국 땅에서 잘 살아다오."라는 부탁을 하며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