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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성서 해석, 기독교와 충돌
일단 기독교와 유사하다. 통일교에서 성서처럼 신봉하는 ‘원리강론’도 기독교의 성서를 논리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말하자면 통일교는 성서를 재해석한 새로운 원리에 바탕한 신앙 체계라고 할 수 있다.
(통일교는 성서는 교과서이고 원리강론은 참고서라고 본다.)
1.통일교에서도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이고 성경을 믿는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같다.
2.타락에 대한 해석이 기성교(기독교)와 전혀 다르다.
통일교는 하와가 뱀(사탄)의 유혹을 받은 것을, "공주와 같은 하와"를 "종의 입장인 루시엘(천사)"이 사랑의 유혹을 했다고 보고 있다. 성적 유혹이라고 하면 틀린다. 성적 유혹은 제비나 창녀의 육체적 유혹인 반면, 사랑의 유혹은 어쩜 순수한 사랑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와에게는 이미 배필이 있었다. 바로 아담이다. 암튼 하와는 계속 대접 잘해주면서 구애하는 루시엘(사탄이됨)를 뿌리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걸 미리 한 하나님이 루시엘의 사랑 공세에 굴복하지 않도록 사랑을 이겨낼 수 있는 지침을 주었으니 그게 바로 "따먹지 말라"는 계명이라고 보는 것이다.
즉 잘못된 사랑 관계로 곧 타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젠 타락으로 하와의 몸 속에는 루시엘의 원리를 벗어난 사랑이라는 악의 피가 스며들었다. 타락으로 원죄가 생겨나게 되었으며, 이 죄는 계속 유전돼 인류를 지배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분노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성혼(成婚)도 못한 채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한 인간의 부모이기 때문에 그런 인간을 그냥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인간을 다시 구원해 주기로 했다.
3.구원의 의미는 무엇인가.
기독교와 좀 다르다.
통일교는 일단 하늘나라가 지상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내세를 궁극적 세계라고 보면서도 지상에서 그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내세에 천국 삶을 살 수 있고 본다는 것이다. 따라서 통일교는 기독교와는 달리 지상에다 먼저 에덴을 건설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지상에서 에덴을 이루어 살지 못한 사람은 천상에서도 에덴 곧 천국에 살 자격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4.그렇다면 누가 그런 구원을 받는가.
인류가 지은 원죄(原罪)를 청산하고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모두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그가 곧 사탄의 피를 씻어내고 순수한 하나님의 본래 혈통으로 복귀한 인간이다. 통일교에서 행하는 축복(결혼)의식이 바로 혈통을 중생케 하는 의식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 믿음이나 축복의식 만으로 완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믿음의 바탕 위에 ‘지상(地上)에서 천국생활을 한 사람’만이 구원받는다. 메시아를 믿고 축복 받고 천국인답게 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지상을 하나님이 애초에 원했던 에덴으로 바꿔야만 한다. 환경의 중요성을 이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상에서의 천국생활은 또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원죄를 청산하고 순결한 참가정을 이루어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 형제 자매의 사랑 등 4대 사랑을 체휼하고 완성한 인격체가 되어 자신과 가정, 이웃과 사회를 더불어 위하는 삶을 실천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상태를 뜻한다. 이 지상에서 그렇게 평화로운 상태를 누리며 살아본 사람만이 천상의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그것이 곧 구원이다.
그런데 언젠가 천국이 지상에도 도래하고 모든 인류가 구원된다. 세상 모든 사람이 참사랑을 실천하는 평화로운 상태를 이룰 때 지상천국이 건설되는 것이다. 그것이 곧 ‘다시 찾은 에덴동산’이다. 세계가 그렇게 에덴동산의 상태가 될 때, 하나님의 인간 구원 섭리는 완결된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한 세계가 올 때까지 모든 인간은, 종교와 교파를 초월해 노력해야 한다.
5.구원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구원의 방법)
구원을 받을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오직 한가지 혈통을 바꿔줄 즉 중생해줄 메시아가 이 땅에 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메시아가 와서 구원섭리를 진행할 수 있도록 환경(보호막)을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바로 그런 메시아의 울타리요 보호막이 곧 유대교와 유대민족이다. 그렇지 않다면 메시아가 구원도 하기 전에 사탄에 의해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메시아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무리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순종의 상징으로 어린양, 암소, 비둘기 등을 제사하게 하면서 그런 동물처럼 살길 바라셨다.
구약으로 들아가서 보자.
구약을 보면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에게 알리기 위해 하나님은 수많은 선지자를 보냈던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곧 하나님의 섭리를 완성할 중심인물이다. 그들의 말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믿고, 받아들이고, 회개하고, 믿음의 생활을 하는 이들을 하나님은 구원하기로 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역시 그러한 사명을 가지고 세상에 왔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에 어린양과 같은 제물의 입장에 서지 못하고 오히려 메시아를 대마왕으로 오인하여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지상에 천국을 이루지 못하고 십자가의 대속으로 영적 구원의 기대만을 완성하게 되었다. 전에는 불신하던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님 앞에서 비로소 어린양의 입장을 완성하여 순종굴복하여 중생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게 바로 영적 구원인 것이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영육 아우른 완벽한 구원으로 알고 있지만 성서는 예수님 부활 후에도 육신은 여전히 사탄 것임을 증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통일교의 가르침도 일정한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6.그래서 다시 하나님이 중심인물(재림주님)을 보냈다.
바로 문선명 선생이다. 문선생의 말을 따라 하나님을 믿고 결혼 축복을 받고, 생활 속에서 순결을 유지하고, 가정을 중시하면서 선한 실천을 계속하면 구원, 곧 진정하고 영원한 평화를 얻게 된다. 하나님은 문선생을 통해 지금 구원의 섭리를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읽어본 사람들 혹은 기독교에 대해 좀 아는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대목들이 속속 등장한다. 다른 그 무엇보다 당장 문선생이 ‘하나님의 섭리의 중심인물’로 자처한다는 점부터 기성 기독교계 입장에서는 ‘경을 칠 노릇’이다.
7.문선생은 하나님인가 아닌가
실제로 통일교인들은 문선생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또한 문선생과 부인을 ‘참부모님’이라고 한다. 그리고 통일교 축복가정 모두는 참부모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만인 메시아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도 믿고 따라야 할 신앙의 대상이 돼 있음을 인정한다. 그렇다고 문선생 자신이 궁극적인 ‘하나님’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통일교의 문선생이 하나님이 될 수 없는 것은 원리강론에서 삼위일체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통일교 측에 따르면 “문선생 자신도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문선생도 하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모시고’ 있는 ‘중간 존재’라는 것이다. 다만 인간에게 하늘의 말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려고 한다는 하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 인간 세계에 내려온 존재라는 설명이다. 인간보다 한 단계 더 하나님에게 가까이 있는 존재, 예수처럼 이 세계에 구원의 섭리를 전하고 실천하러 강림한 존재라고 일컫는다.
8.믿음과 실천 모두 구원의 요건으로 본다.
통일교는 기성교(기독교)와 달리 개인 구원보다 세계의 영구 평화운동을 강조한다.
이에 반해 기성교에서는 2,000년 전 이스라엘 나사렛의 말구유에서 태어나 하늘의 말씀을 전하다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붙잡혀 유대인들의 주장으로 십자가에 못박힌 그 예수만 인정한다.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신해 보혈(寶血)을 흘리고 죽어갔다는 사실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해 하늘에 올랐다는 사실만 받아들인다. 그 같은 예수의 말씀과 이적, 대속(代贖)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1920년 평안북도 정주 땅에서 난 문선생은‘내가 곧 예수의 뒤를 이어 인간 세상에 내려온 하나님의 섭리의 중심인물’이라고 하니, 아예 신앙의 처음 대상부터 흔들어 놓는 상황이 된 것이다.
구원에 대한 개념도, 또 구원에 이르는 길도 판이하다. 통일교에서는 사람이 먼저 ‘지상에서 참사랑을 실천하는 완전하게 평화로운 삶’을 누려야 천국에 가서도 평화와 영생을 누릴 수 있으며, 그것이 곧 구원이라고 해석한다.
지구에서의 평화로운 삶이라는 것은 ‘하늘 말씀에 따라 참사랑을 통한 참가정을 이루고 이를 소중히 여기고 선한 생활을 하며 이웃을 위해 살아가는 실천적인 삶’을 의미한다. 또 인간들이 모두 그런 마음으로 노력해 지구상에 완전한 평화를 이루게 되면, 그날이 바로 지상에 ‘에덴동산’이 열리는 날이며, 그렇게 해서 영원한 지상천국이 시작된다고 갈파한다.
그러나 기존 기독교에서는 육신이 죽은 뒤 이승을 떠나 ‘천국에서의 영생’을 얻는 것을 구원이라고 본다. 나아가 신·구약 성경 66권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 쓰인 것처럼 ‘세상 심판의 날’에 하나님이 내리는 불의 심판을 받지 않고 이미 천국에 들어간 이들과 함께 ‘영생의 세계’에서 살게 되는 것을 구원으로 본다.
구원에 이르는 길도 다르다. 기독교에서는 ‘믿음’이 관건이다.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 구원의 섭리,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 내려오고 세상을 구원하려고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며, 사흘 만에 부활했고, 그가 다시 세상에 올 때 심판의 날이 올 것이며… 하는 사실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곧 믿음이 구원의 필요충분조건인 셈이다.
반면 통일교에서는 믿음만으로는 완전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믿음은 구원받기 위한 필요조건이며 여기에 ‘지상에서의 실천’이라는 충분조건을 갖춰야 구원받는다고 본다. 어떤 실천인가. 앞서 본 것처럼 가정을 소중히 여기고, 이웃을 사랑하며, 세상에 봉사하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과 실천, 두 가지가 병행될 때 인간에게는 비로소 진정한 평화가 찾아오며 그렇게 평화를 누려본 사람만이 하나님에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9.통일교의 종교관
여기서 나아가 통일교는 ‘종교는 수단일 뿐,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종교는 개인이 궁극적으로 몸과 영혼의 평화를 얻기 위한 수단이다. 종교는 어디까지나 인간을 위한 것이지, 종교가 인간 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종교는 그런 점에서 학교다. 학교에서 정해진 공부를 마치고 몸에 실력이 다 붙으면 졸업한다. 완전한 평화를 이룬 사람에게 무슨 종교가 필요하겠는가. 하나님이 세상을 처음 창조하고 에덴동산에 인간을 지었을 때, 거기에 무슨 종교가 있었는가. 참 평화만이 있었다.
신앙생활은 개인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자신의 평화를 찾아가는 과정이요, 수련과정이다. 그것이 반드시 통일교일 이유는 없다. 어느 종교든 그 종교에서 가르치는 선한 생각과 선한 삶을 몸에 익혀 평화를 얻은 사람은 그 종교를 넘어설 수 있다. 그런 모든 이가 모여 평화의 세상을 만들 때, 그것이 곧 지상천국이다. 그런 점에서 종교와 교파는 서로 배척할 필요가 없다. 모두 어울려 평화를 이루고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데 의미가 있다.”
이런 교리에 따라 통일교는 전도와 교회 개척에 별다른 열성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계열 기업이나 단체에 몸담고 활동하는 사람들에게도 ‘통일교 신앙’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한다. “전도를 하고 교회를 개척하는 쪽으로 힘을 쏟기보다 그 시간과 노력을 아껴 오히려 성실한 생활에 매진함으로써 주변에 통일교 신앙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생활하는가를 보여 주는 것으로 전도를 대신한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그래서인지 계열 기업이나 계열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 가운데 통일교 신도가 아닌 사람도 있지만, 그들 가운데 통일교를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고 덧붙인다. 나아가 자신을 배척하는 기성 기독교든 불교든 천주교든 이슬람교든, 통일교는 모두 끌어안고 화합한다는 것도 특징으로 내세운다. 무슨 기독교 교파니, 종단이니 하는 명칭 대신 공식 명칭을 ‘연합’이라고 한 것도 거기서 연유한다. “교파를 초월해 다 같이 평화를 향해 나아가자”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본 것처럼 이미 신앙의 의미, 구원의 의미, 구원의 방법에서 차이가 나는만큼 기성 기독교는 통일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기독교와 갈등으로 통일교는 지난 50년 역정에서 국내에서만 두 차례에 걸쳐 큰 수난을 겪었다.
하나는 1955년의 이른바 ‘이화여대 사건’으로 문총재가 구속까지 됐던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1980년대의 이른바 ‘피가름’ 논쟁이었다. 이 두 사건은 결국 모두 통일교가 근거 없이 ‘훼손’당한 것으로 결론났다. 그러나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통일교는 “심지어 지금까지도 그 때의 이미지로 통일교를 보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보았다.
먼저 이화여대 사건의 전말을 보자. 청년 문선명이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현판을 처음 내건 곳은 서울 성동구 북학동의 한 판잣집이었다. 그 때가 1954년 5월. 집주인은 양윤영으로, 이화여대 음악과 시간강사였다. 그는 앞서 문청년에게 감화된 대학생 유효원 씨와 지인 사이로, 유씨를 통해 문청년의 새로운 성서 해석을 받아들인 터였다.
양씨가 집을 장충단공원 부근 약수동 야산 기슭으로 옮긴 이후 문청년이 현판을 내건 판잣집교회는 특히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삽시간에 북적거리게 된다. 이화여대에 몸담고 있던 양교수를 통해 학생들이 문청년의 교리를 접한 이후다. 문청년의 교리를 들으려는 이들이 불어나더니 손바닥만한 판잣집교회 안팎으로 300여 명이 몰렸다. 그런 가운데 뜻밖의 사건이 터졌다.
1955년 7월 경찰에서 나와 문청년과 유효원 씨 등 그의 초기 제자 4명을 전격 체포한 것이었다. 사연인즉, 이화여대생들이 문씨의 교리를 듣기 위해 몰리자 학교 측에서 조바심이 났다.
당시 이화여대는 캐나다의 기독교 재단의 지원을 받아 학교를 운영하던 터였다. 그런데 학생들이 듣도 보도 못한, 감히 기성 기독교에 도전하는 새로운 성서 교리에 ‘현혹’된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사실이 캐나다 재단 쪽에 알려지면 누가 봐도 문제가 될 것이 뻔했다. 그래서 학교 측이 일부 교수들을 통일교와 학생 측에 보내 ‘통일교가 사교(邪敎)라는 사실을 계몽하고 학생들이 거기서 발을 뺄 것을 종용’하게 했다. 그런데 그런 ‘임무’를 띠고 파견된 교수들이 통일교와 접촉하면서 자신들도 문청년의 성서 해석에 빠지고 말았다.
이에 놀란 학교 측에서 통일교에 경도된 학생 14명을 퇴학 처분하는 일이 벌어졌다. 1955년 5월14일이었다. 언론이 이 문제를 일제히 거론하고 나서면서 통일교 사태는 곧 사회문제가 됐다. 당시 기사와 사설들을 모아 보면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는 나라’라는 전제 아래 ‘이화여대 측의 퇴학 처분은 문제가 있다’는 논조 일색이었다.
김활란 씨가 이화여대 총장이었고, 이기붕 국회의장의 부인인 박마리아 씨가 부총장이던 시절이었다. 이들은 물론, 기성 기독교계에서도 통일교를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어디에서 어떤 고발이 들어갔는지, 7월4일 문청년이 경찰에 전격 연행됐다. 당시 경찰(치안국 특수정보과)이 그에게 적용한 혐의는 여교수와 여학생 등 다수의 여인을 농락했으며 온갖 문란한 행위로 사회 기강을 어지럽혔다, 이북에서 넘어온 간첩 혐의가 있다는 것 등이었다.
문청년과 제자 4명은 미결수로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채 이후 석 달 동안 검찰 조사를 받고 법정에 섰다. 석 달 만인 10월4일 서울지방법원은 문청년은 무죄라고 판결하고 석방했다. 다른 사람들은 처벌됐다. 그러나 그들에게 적용된 죄목도 기소 내용인 풍기문란 혐의가 아닌, 통일교와 무관한 병역 기피 등 모두 병역법 위반이었다. 결과는 무죄였고, 기간도 석 달뿐이었다. 그러나 문청년의 연행을 전후한 시기부터 그가 재판받고 석방되기까지 통일교는 기성 기독교계의 집중 공격을 받아 소위 ‘음란하기 짝이 없는 사이비 종교’라는 이미지를 덮어쓰게 된다.
10.통일교의 가정관(가정은 평화의 근원)
1980년대에는 기성 교계와 신흥 종교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종교 연구가 T씨가 ‘연합’으로 통일교를 공격했다. 그들이 문제시한 것은 ‘피가름의 논리’였다. ‘하와의 몸속에 뱀(사탄)의 피가 흘러들었으며, 교주 문씨와 성교하면 그러한 사탄의 피를 씻어낼 수 있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돌았다. 급기야 T씨의 연구소에서 발간되는 정기간행물에 모 교회 목사의 기명 기사로 그 같은 내용의 글이 실렸다.
창설 이래 기독교 측의 어떤 공격에 대해 단 한 차례도 반격한 적이 없던 통일교 측도 이 때는 너무 피해를 보게 된다는 판단 아래 이 글을 가지고 법정 소송에 들어갔다.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는 공격한 측에서 근거 없는 낭설을 퍼뜨린 것으로 판결났다. 통일교 측의 주장은 선명했다. “태초에 인간의 몸 속에 사탄의 부정한 피가 흘러들어갔다는 교리는 맞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지상에서 가정을 지키며 성실하게 생활하면 깨끗하게 사함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의미”임을 밝히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통일교가 본 피해는 실로 컸다. 초창기 때 이화여대 사건으로 덧씌워진 이미지에 이 ‘피가름’사건이 언론에 보도되고, 또 이를 기화로 기독교계의 집중적인 공격이 이어지면서 통일교는 ‘사악하고 음란한 종교’라는 인식이 대중에게 오히려 더 각인되고 말았다. 그러나 통일교 측은 가해자 측의 ‘사과’만 받았을 뿐 아무런 손해배상도 요구하지 않고 사건을 끝냈다.
이 두 사건은 통일교의 교리가 무엇인지, 기성 기독교와 무엇이 다른지를 사회적으로 공식 확인시켜 준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 기성 기독교가 왜 그렇게 통일교를 적대시하고 공격하는가를 보여 준 계기이기도 했다. 통일교가 어떤 종교인지, 무엇을 추구하는 것인지 위에서‘겉핥기’한 내용을 감안하면서 다시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과연 이런 교리를 가진 통일교가, 또 그런 교리로 인해 기성 기독교의 엄청난 반발과 수난을 당해야 했던 통일교가 어떻게 50년 만에 지금처럼 성장했을까. 그 힘은 과연 무엇일까.
비신도의 눈으로 분석하면 몇 가지 외연(外延)이 우선 눈에 띈다. 흔한 말로 ‘교주’가 생존해 있으면서 한 번도 흔들림 없이 이 교단이 안정을 유지해 왔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돈과 사람, 신앙의 응집력이 발휘됐다. 더욱이 돈과 사람의 규모가, 경제로 치면 말 그대로 ‘규모의 경제’를 이루었다. 세계화가 이뤄지면서 신도와 조직이 방대해지고 그만큼 헌금도 늘어난 것이다. 그것은 곧바로 ‘힘’이다.
여기에 종교활동뿐 아니라 다수의 기업활동을 병행하면서 탄탄한 ‘제국의 구조’를 이루었다. 이런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통일교를 승승장구, 급성장하게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것뿐일까. 종교계 안팎에서 통일교를 아는 사람들에 대한 기자의 취재 결과는 다음과 같은 4가지, 통일교의 특징을 추출하게 했다.
첫째, 가정을 강조한다는 점이 유별나다. 세계 종교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종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개인의 구원, 거기서 더 나아가 세상의 구원이다. 교리 가운데 가족의 화목이나 질서를 규정한 종교들은 있지만 종교 자체가 가정을 뿌리로, 기본 단위로 설정한 것은 없다. 통일교는 당초 기독교의 교파를 넘어 종교 화합을 이룬다는 의미로 ‘통일신령협회’라고 했지만, 나중에는 ‘가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서 아예 교단의 이름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으로 바꾸었다.
통일교 교리에 따르면 가정은 모든 개인에게 평화와 안정의 시작이며 끝이다. 혼자 구원받고 가족은 구원받지 못하면 어떻게 진정으로 기쁠 수 있겠는가라는 믿음에서 가족에 대한 전도의 당위성도 나온다. 그것이 친지, 이웃, 사회, 국가, 세계로 확대돼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신도들은 모두 가정에 충실할 것을 요구받는다. 남편은 아내 앞에서, 아내는 남편 앞에서 정절과 순결을 지켜야 한다. ‘외도’는 허용되지 않는다. 이 같은 교리에서 저 유명한 통일교의 합동결혼식이 나온다.
합동결혼식은 한 마디로 순결한 한 남자와 순결한 한 여자가 ‘축복’을 받고 ‘성혼’하는 것을 의미한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가 이루지 못했던, 받지 못했던 ‘축복’을 받는 성스러운 행위다. 지상에서의 ‘축복자’는 바로 문총재다. 그래서 문총재의 주례로 부부가 되는 이들은 다같이 ‘축복’을 받는 의식을 치른다. 맨 처음 3쌍에서 시작한 이 ‘축복’ 의식은 최근 4억쌍까지 동시에 이뤄졌다. 위성방송과 인터넷을 통해서다.
해마다 몇 쌍이 합동결혼식을 올리는가 하는 것도 일정한 교리에 따라 정해진다. 그렇게 ‘축복’받은 신랑 신부는 서로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며 가정을 꾸리고 가꿔 나갈 의무를 지게 된다. 개인의 차원에서 가정의 차원으로, 구원과 평화와 행복의 단위를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통일교는 대중에게 한 걸음 다가서는 종교로 인식됐다.
통일교의 또 다른 힘은 개방성에서 나온다. 기독교의 다른 교파는 물론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개방된 태도를 견지한다. 앞에서 본 것처럼 종교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이 같은 태도가 가능하다. ‘내가 통일교를 통해 평화를 얻으려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자신의 종교를 통해 평화를 추구한다’는 입장이다. 자신의 종교만 옳다고 주장하면서 결국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도그마요, 독선이라고 본다. 종교를 통해 스스로를 닦고 평화를 얻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더욱 큰 평화, 세계평화, 지상천국을 이뤄야 한다는 마인드다.
그래서 설사 다른 종교가 통일교를 때리고 공격해도 통일교는 묵묵부답이다. 그것은 문총재의 지시이기도 하다. 더욱 지시 때문에 외부에 대해 다툼은 물론 소송도 못 낸다. 사실 앞서 기독교계와의 소송도, 통일교 재단에서 제기한 것이 아니라 신도 가운데 한 사람이 제기한 것이다. 말하자면 마주 때리는 것이 아니라 맞으면서도 끌어안는다. 부드러운 것은 부러지지 않는다. 생명력을 갖는다.
“지상에서 먼저 평화를 이루어라”
통일교의 창시자인 문선명 총재와 부인 한학자 씨. 통일교 신도들은 이들을 ‘참부모’라고 부른다. 이와 함께 통일교의 큰 힘은 실천하는 종교라는 데서 나온다. 신도에게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열심히 믿고 하는 것만큼 생활 속에서 하늘말씀과 가르침을 실천할 것을 주문한다. 금주, 금연, 금욕 등 절제는 물론 사회 각 영역에서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교리는 강조한다.
신도는 가정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이웃에 봉사를 다 하고, 쌓아놓기보다 나눠 줄 것을 요구받는다. 교회를 키우고 신도를 늘리고 하는 일보다 자신의 삶을 통해 주변 사람에게 저절로 ‘빛과 소금’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렇게 해서 선교가 이뤄지고 전도가 이뤄질 때, 그렇게 해서 새로운 신도가 늘어날 때 통일교는 그것을 진성(眞性) 교인이라고 부른다. 억지로 끌어다 앉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마음을 움직여 스스로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해야 한다는 논리다.
끝으로 저 멀리 있는 구원을 바라보기 전에 먼저 지상에서, 자기 생활에서, 가정에서 평화를 이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대단히 현실적이다. 구원까지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때가 되어 구원이 찾아올 수 있도록 지금 자신의 가정에서, 일터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먼저 평화를 추구하고 실현하라, 말하자면 그것이 신앙의 1차 목표다.
가정을 소중히 여기고, 열린 태도를 견지하며, 성실한 삶에 힘쓰면서, 주변의 가장 작은 단위부터 평화를 이뤄 나가라…. 그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너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가 작용한다’는 것이 곧 통일교 교리의 요체일 것이다. 하나님이 정한 구원의 섭리, 구원의 프로그램에 따라 인간이 일정한 노력을 기울이면 구원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이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든 것 아닐까.
개인 차원을 넘어 통일교 재단 역시 “하늘이 정한 프로그램에 따라” 사회와 국가를 위해 많은 일들을 ‘실천’해 왔다고 설명한다. 1960년대 개발 연대에 통일교의 젊은이들은 우리나라 농촌 각지를 돌며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70년대에는 신을 부정하고 유물론을 내세우는 공산주의에 맞서 승공운동에 전력투구했다.
지금 기성세대라면 아마 당시 통일교 산하 승공연합이 주최하는 동네별 강연회에 한두 번쯤 참석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1980년대부터는 냉전구도를 타파하고 한반도의 평화 정착을 위한 대북활동에 매진했다. 공산주의는 반대하지만 평화를 위해 기꺼이 대북사업에 앞장섰다는 얘기다.
1990년대는 통일교가 본격적으로 ‘가정’을 푯대로 들고 나선 시기다. 이 때부터 모든 활동의 시작과 목표를 가정의 행복, 가정의 평화, 가정의 화목에 두었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 지금 통일교는 세계평화 쪽으로 활동의 중심을 잡고 있다. 공산주의를 넘어 이웃과 국가를 받들고 가정을 기본 단위로 한 세계의 영구적 평화운동에 매진하는 것, 그것이 지금의 통일교다. 개인으로 치면 성실한 삶이고 교리의 ‘실천’인 셈이다. 바로 그러한 궤적이 사회와 국가, 세계에 속된 말로 ‘먹혀 든’ 것이 아닐까.
통일교가 ‘본업’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활동, 선교활동 외에 수많은 활동을 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사회복지, 문화예술, 교육, 언론, 국제학술 등 그야말로 전방위적 활동을 펴나가는 것도 궁극적으로 인간세계를 위한 ‘실천’이라는 것이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기 전 모든 것을 지어 놓으셨다. 왜 그랬는가. 인간의 행복, 인간의 평화를 위해서다. 통일교가 행하는 모든 활동도 바로 그런 의미를 갖고 있다.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한 많은 일을 해서 궁극적으로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환경, 인간이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려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통일교에서 경영하는 기업들이 수익을 많이 내서 누가 부자가 되고 하는 일은 별로 없다. 그것이 어떤 활동이 됐든 결국 인간에게 도움이 되고 인간의 평화와 행복에 기여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믿음과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말로는 풀어놓아도 개인이 어떻게 구원받는 것인지, 아니 당장 구원이 무엇인지, 신앙이 없는 기자로서는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통일교 측은 “문총재가 통일교를 창시한 지 50년밖에 안 됐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사람에게 신앙을 전했고 또 실질적으로 인간세계에 도움이 되는 수많은 일들을 이루지 않았느냐”면서 “그것이 바로 지상에서 구원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 반세기를 지난 통일교가 이 지상에서 과연 인간과 세계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얼마만큼의 일을 더 해 나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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