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산송씨(礪山宋氏)의 연원
문헌상으로 송씨(宋氏)는 중국 주무왕(周武王)이 미자(微子)를 송(宋)에 봉(封)하여 자성(子姓)이 되었다는 구절(句節)이 있다. 一說에 의하면 우리나라 宋氏의 都始祖는 唐나라의 戶部尙書인 宋柱殷의 六代孫 舜恭의 後孫 自英이 惟翊, 天翊, 文翊등 3子를 두었는데 첫째 惟翊이 礪山, 둘째 天翊이 恩津 셋째 文翊이 瑞山宋氏의 始祖가 된다고 하였으나 宋柱殷이 언제 어떻게 우리나라에 歸化하였는지 알수없다고 했다.관성(貫姓)은 여산(礪山), 은진(恩津), 진천(鎭川), 연안(延安), 홍주(洪州), 신평(新平), 서산(瑞山), 야성(冶城), 청주(淸州)등 제송씨(諸宋氏)이고 오늘날 고문헌(古文獻)등에 나타난 송씨(宋氏)의 관향은 무려 172본이나 된다. 그러나 그중의 대부분은 여기저기 흩어져 살면서 관적(貫籍)을 상실했거나, 또는 특수 사정으로 인하여 그들의 현주지(現住地)를 관향으로 하고 그중에서 걸출한 인물을 관조(貫祖)로 삼는 예도 있다. 결론적으로 한국 내에 현존하는 모든 송씨(宋氏)중에서 남양송씨(南陽宋氏)를 제외한 여타(餘他)의 송씨(宋氏)는 중국 당대(唐代)에 우리나라로 귀화한 것으로 보인다.우리 여산송씨(礪山宋氏)는 휘(諱) 유익(惟翊)을 시조(始祖)로 하며, 휘(諱) 천익(天翊)의 후손에서 은진군(恩津君) 휘(諱) 대원(大原)을 시조로 하는 은진송씨(恩津宋氏)가 있고 그외 서산(瑞山), 진천(鎭川), 신평(新平), 야성(冶城)등 10여본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모두 여산(礪山), 은진(恩津), 진천(鎭川) 송씨에서 분화되었다고 한다.우리 여산송씨의 시조 휘(諱) 유익(惟翊:일명 修益 有益)은 고려조의 진사(進士)로 상계와 자세한 세적은 전하지 않으며 벼슬하기를 꺼려해서 고향에 은거했다고 한다. 그러나 공의 아들 휘 숙문(淑文)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름으로써 공에게 추영(追榮)의 은전(恩典)이 내려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추증(追贈)되었다. 본관은 공의 증손인 정렬공(貞烈公) 휘(諱) 송례(松禮)가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여량은 지금의 여산)에 봉해짐으로써 3대(代)를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추봉(追封)하였다. 그러므로 휘(諱) 유익(惟益)을 시조로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중흥하였다. 또한 南陽宋氏를 除外한 모든 宋氏끼리는 異本이라도 절대로 通婚하지 않고 있다.
2. 대종회 연혁(沿革)
조선(朝鮮) 숙종대(肅宗代) 전북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全北益山市礪山面壺山里) 주위 7리(里) 지역(地域)을 사패지지(賜牌之地)로 하사(下賜)
서기(西紀) 1580년(선조 14) 15세 언신조(言愼祖)께서 표석입석(表石立石)
서기 1606년 여산송씨 최초의 족보가 만들어지고
서기 1743년 19세 인명조(寅明祖)께서 비문(碑文)을 지으시고
18세 징래조(徵來祖)께서 입표석(立表石)
서기 1898년(광무 戊戌) 구영호재(舊永護齋) 건립
서기 1910년(순종 庚戌) 묘비(墓碑, 幷書) 건립
서기 1949년(己丑) 신영호재(新永護齋) 및 호운정(壺雲亭) 건립실묘(失墓)된
2세 문학공조(文學公祖, 淑文) 설단(設壇)
서기 1960년(庚子) 봄에 중건하였고
서기 1989년(己巳) 영호재(永護齋) 중건(重建) - 현재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