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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의정 충헌 관복재공 휘 구 신도비명
을축(1649인조27)년 ~ 갑신(1704숙종30)년
유명조선 대광보국숭록대부 원임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사감 춘추관사 증시충헌 김공 신도비명 병서
(有明朝鮮 大匡輔國崇祿大夫 原任 議政府右議政 兼 領經筵事監 春秋館事 贈諡忠憲 金公 神道碑銘 幷序)
대광보국숭록대부 원임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치사 봉조하 이의현 찬
(大匡輔國崇祿大夫 原任 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致仕 奉朝賀 李宜顯 贊)
사위 대광보국숭록대부 원임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사감 춘추관사 서명균 서
(女壻 大匡輔國崇祿大夫 原任 議政府左議政 兼 領經筵事監 春秋館事 徐命均 書)
대광보국숭록대부 원임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사감 춘추관사 유척기 전
(大匡輔國崇祿大夫 原任 議政府右議政 兼 領經筵事監 春秋館事 兪拓基 篆)
숙종께서 등극하고 이후 29(1703)년에 왕도의 선정을 위하여 정성을 기우려 실제 여명을 따라, 관복재김공(觀復齎金公)을 의정부 우의정에 발탁하였더니, 다음해 봄에 공의 대부인(어머님)이 돌아가심에 공은 그 자리를 물러나, 대부인상사에 애통함이 지나쳐 몸이 쇠약해지고 병이 생겨, 그 해(1704숙종30년)12월18일에 마침내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56세였다.
임금(숙종)이 듣자 놀라고 슬퍼하시며, 특별히 황양목(黃楊木(회양목) : 고갱이가 누른 소나무)로 관을 내렸으며, 앞으로 3년까지 요미(料米 : 녹봉을 말함)를 주도하도록 하였으며, 충헌(忠憲)이란 시호를 내렸으니 청렴하고 공정하니 충(忠)이요, 널리 듣고 능력이 많으니 헌(憲)이라 하였다.
공의 두 아들(희로, 재로)은 내가 일찍이 공에게 배워서, 그 덕을 사모함이 누구보다도 깊은 처지이니, 공의 비명(碑銘)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여 사양 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으므로 삼가 행장을 상고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공의 휘는 구(構)요 자는 사긍(士肯)이며, 관복재(觀復齎)는 그 호이니 청풍부의 사람이다. 그의 시조 대유(大猷)공은 고려조의 문하시중이었고,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벼슬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내려와 명망 있는 집안이다.
휘 계(繼), 휘 인백(仁伯)공 부자 대에 이르러 선비의 집안으로 더욱 명망이 높아졌으니, 이들은 공의 고조, 증조가 된다. 공조정랑인 휘 극형(克亨 : 호는 사천(沙川))은 조부인데 더욱 학행의 일컬음이 있었고, 아버님이 휘는 징(澄)이니 전라도관찰사로서 깨끗한 이름과 곧은 절개로 효종, 현종 때 유명하였다, 어머님은 함평이씨(咸平李氏)인데 참봉 의길(義吉)의 따님이다. 뒤에 공이 귀히 되므로 하여 관찰사공에게 영의정, 그리고 2대를 추존해서 사천공(沙川公)은 찬성으로, 인백공(仁伯公)은 판서로 증직이 되었으며, 부인들 또한 이에 따르는 봉작이 있었다.
모부인이 공을 임신하였을 때 표범의 꿈을 꾸었으니, 낳을 때부터 귀인의 징조가 있었다. 17세에 강을 건너는데 바람을 만나 위기를 여러 번 겪었으나 공은 홀로 태연한 태도로 조금도 당황함이 없었다. 21세에 생원 초시에 합격이 되고 병진년(1676숙종2년)에 아버님의 상을 당함에 슬픔 속에서도 예법을 다하였다. 때에 간사한 무리들이 정권을 잡고 있어 전횡하여 도리가 막힌지라 상기를 마치고 호서의 청양 땅에 물러가 밭 갈고 글 읽으며 지냈다.
병신년(1680숙종6년)에 이르러 정의가 회복됨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조에 의하여 헌릉(獻陵 : 태종 능)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가, 다시 장릉(章陵 : 원종 능)참봉에 임명되며 나갔다.
임술년(1682숙종8년)에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전적 감찰과 예조, 병조의 낭관 등을 거쳐 사헌부지평에 나갔다. 때에 청나라사신이 왕비의 고명(誥命 : 왕비 됨을 승인하는 중국황제의 승인서)을 우리나라 임금께 전하는 절차와 방법에 대하여, 그 깍듯한 예법대로 할 것을 다투며 명확히 하여 불손한 태도를 봉쇄하였다.
그 뒤 몇 번 대각(臺閣 : 사헌부 사간원)의 또는 병조낭관이나 직강 등에 임명되었다가, 정언(正言 : 사간원의 정6품)이 되었다. 이때 상소하여 홍수나 큰 화재 등 재앙이 발생하였을 때, 하늘이 임금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라 하여, 중죄인까지 풀어주는 것의 불가함과 아전이 어떤 농간을 부렸다 하여, 그 사정을 불문곡직하여 일률적으로 고을 수령을 파직 시키는 것이 부당한 즉, 너그러운 법을 베풀 것을 논하였다. 또 임금에게 갖은 말을 다하여 의견을 올리니 안쪽은 다스려지나, 바깥쪽이 어지럽고, 체통이 엄격하지 못함에 기강이 떨치지 못하고, 해이한 것들의 폐해를 말하였고, 언론의 길이 막혀 현인(賢人 : 배움과 덕이 많아 세상에 스승이 될 만한 인물)을 대접함이 성실하지 못한 것과 그리고, 세금을 부과하는 것과 각궁에서 차지하고 있는 돈, 밭에 관한 폐단을 들어 곡진하고 자세한 만 마디에 가까운 글을 올렸다.
문곡 김공(文谷 金壽恒의 호 : 金尙憲의 손자)이 읽고 좋은 의견이고, 훌륭한 문장이라고 몹시 칭찬하며 옥당(玉堂 : 홍문관)에 천거하여 수찬에 제수되었다. 이때 선비들이 논의가 서로 충돌하고 괴리(乖離 : 서로 어그러져 떨어짐)를 더하였다. 공은 오르지 이와 같은 분열을 통합하려는 일념으로 그 어느 편에도 치우침이 한 번도 없었다.
어버이를 봉양하고자 청원에 의하여, 용강현령으로 나아감에 고을 백성들은 정사의 혜택을 받았고, 얼마 되지 않아 수찬에 다시 임명되었다가, 다시 교리로 옮기었고 잠시 경기감영에 도사로 나갔으나 또 다시, 옥당(玉堂 : 홍문관)으로 들어왔는데 이때, 이징명(李徵明)과 한성우(韓聖佑)가 임금이 후궁을 총애하는 것을 논하다 견책을 당하자, 공이 매우 간절히 간하였으며 경연에서 또, 옛 밝은 임금도 여색으로 말미암아 나라가 어지러웠던 일을 낱낱이 들어 경계하였다. 또 태양의 이변이 있음을 말하는 상소에서 “요사한 기운이 태양을 가리는 것은 간사한 기운이 임금에 총명을 가리는 상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밖으로는 간신배이며 안으로는 내시, 후궁이 이 기운에 해당합니다.”하였다. 그 말이 아프도록 절실하고 거리낌이 없음에 임금도 좋아하지는 않으나 한편, 공의 충직함을 안지라 특히,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오씨 성의 사람이 인사 취급하는 직책에 앉아서 오만하고 간특한 꼴이 말이 아니었기로, 공은 미워하며 그들을 바라보지 않았는데, 그 사람의 고약한 언동이 미처 거론하지 않던 차에 조정해서 여러 사람의 의논이 공을, 그 자리에 앉히려 하자 이 자는 제 무리들을 꼬드겨서 막았다.
공은 의정부 검상으로 부교리로 승차하여 중학의 한학교수로 밀려다니다가 사관에 옮겼다. 때에, 종친으로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이 후궁과 결탁하여 그 도움으로 특별한 직위로 승진하는데 대하여, 공은 종친이 할 수 있는 벼슬자리가 아님을 따진바 있거니와, 인망없는 그 사람이 또 정승에 기용되는 삼사(三司 :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가 공동으로 논란하였으나 임금이 물리치고 용납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 삼사에서는 갑자기 논란을 멈추었는데, 이번엔 종신(宗臣)들이 공을 비롯한 삼사에 대하여 헐뜯으며, 물의를 일으키니 일을 피할 수도 없고 논란하는 측의 직위를 바꿀 수도 없는 일이라, 임금은 이래저래 고민하여 명령하는 교지에도 공평함을 잃었다. 이에 공은 승지들과 함께 어전에 나아가 조리 있게 따져 설명을 한 결과, 임금은 그대로 사헌부의 전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동시에 지제교를 겸임하게 하였다.
마침 궐내에 화재가 발생함에 공이 논하기를 이는 병관, 장신들이 임기응변을 못한 실수라 하니 임금은 옳게 여기시고 즉시결제 하였고, 잠시 집의에 있다가 특별히 승지에 올랐는데 곧, 병조참지에 옮기고 다시 황해감사로 보내려 하는데, 대신이 공은 방금 장정을 조사 파악하는 중임을 맡고 있음을 이유로, 현직에 그대로 두기를 청하였으나, (병조판서 이시명이 반대하였고, 영의정 남구만은 동의하였다.) 임금이 용강현령 재직 중에 그의 치적을 높이 평가하고, 칭찬하며 허락하지 않고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임지에 부임하면서 스스로를 단속하여 솔선하여 직무에 충실하고, 도내 전체가 숙연이 생업에 종사하게 되었고, 과만(瓜滿 : 근무연한이 끝남)하니 전례에 따라 서추(西樞 : 중추부를 칭함)로 옮겨졌다. 간사한 무리들이 다시 전직에 조그마한 일을 트집 잡아, 상소까지 함으로 인하여 삭직되었다가, 갑술년(1694숙종20년) 공이 46세에 충청감사에 특명이 있었으나, 노모의 봉양을 이유로 받지 않으니, 다시 승지의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 때의 정승은 곤궁(坤宮 : 왕비를 말함)을 모해 하는 역적들을 힘써 두호(斗護)하는지라, 공이 탑전(榻前 : 임금이 앉은 자리의 앞)에 나가 이들과 논쟁하여 예조참판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우승지가 되었다. 영남의 유생이 전임 정언의 일을 들추어 무고하며 잘못되었다고 상소까지 함에 이르러, 공은 도리어 그 상소가 잘못된 것임을 반박하여 명백히 하므로, 도리어 유생을 변방에 귀양 가게 하였다.
겨울이 되어 형조참판으로 특별히 승진 임명되었다. 재상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몇 사람을 뽑아서, 전국을 여러 방면으로 나누어, 백성의 실정을 살펴서 어려움을 어루만져 주는, 순모사업을 실시하는데, 공은 호남지방을 맡아 성의껏 공정하게 민원을 처리하였음에, 거리에서 그를 칭송하는 소리가 드높았다. 임무를 마치고 호조의 두 번째 자리(호조참판)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강화유수로 나아가 장령전(長寧殿 : 숙종의 영정을 모신 전각)을 중수하였고 품계가 한 계급 올랐다.
평소 공을 마땅치 않게 여겨오던 한 재상에 아들이 옥당에 있었는데, 이 사람이 공의 승격분부를 거두라고 임금께 청하더니 또, 대관(臺官 : 사헌부) 희상(熙相)이 공을 탄핵함이 자못 심하고, 더구나 오씨 성을 가진 자가 대사관으로서 계속하여 여러 사람의 감정을 충동질하여 부추기고 있었다. 숙종은 그들의 속셈을 환하게 알고 있었으므로 끝내,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공을 마음 편하기 위하여, 벼슬을 그만두겠다는 것을 받아들이니 공은, 시골로 내려갔다. 그러는 가운데 공에게는 좌윤(左尹 : 지금의 서울시 제1부시장)을 제수 하였으나 사양하였고, 청풍부사로 나갔었다. 다시 평안감사의 임명되었으나 끝내 사양하고 가지 않았다. 이어서 형조참판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나라에서는 그해 큰 흉년이 있었으므로, 청나라가 곡식을 팔아 줄 것을 요청하여, 그 곡식을 운반하여 온 청나라 관원이 항구(압록강)에 이른지라, 조정해서 상신(相臣)을 보내 사의를 표하고, 공을 호조참판으로 삼아 일을 보게 하되, 접반사(接伴使)라는 이름으로 접대하도록 되어 있었다.
공이 일찍이 곡식을 운반하여 온 청나라 하급 관리에 대하여, 우리나라 재상 급이 영접하러 나간다는 실책과, 이것이 도대체 우리나라 재상과 신하들이 일을 그르친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이 일로 반대당에 탄핵을 받고, 공에게 의심을 뒤집어 씌워, 공을 무고하여 임금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며, 접대 일을 맏지 않으려 한다 하고 일렀으니 끝내, 탈직되었다가 공을 무고한자들의 거짓을 밝히고, 공의 뜻을 올바르게 한 사람이 있어서 곧, 예조참판에 다시 기용되었다가 대사관에 전보되었다.
국가에서 왜와 더불어 무역을 하는데, 왜는 우리를 업신여기고 우리나라 수출품에 대한 대금결제를 순도가 낮은 하품 은으로 쓰겠다 하였는바, 통역관이 절충 한답시고 하품이 아니라 중품 은으로 할 것을 부탁하였고, 당시에 정승은 이것을 승낙 하려고 하였다. 공이 부당함을 강력히 반대하였고, 임금 신하가 학문을 강론하는 자리에서까지 극구 설명하고 논쟁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더니, 훗날 과연 국가 경제에 큰 손실과 폐단을 맞고 말았다.
판결사로 자리를 옮긴 후, 공이 여러 번 상소하여 성사된 단종(端宗)의 복위가 이루어져 숙종(肅宗)이, 부묘제(柎墓祭 : 신주를 사당에 모시고 처음으로 지내는 제사)를 지낼 때 공이 도승지로서 홀(圭)을 잡고 예식을 진행하여, 향사가 끝나고 자헌대부에 승진하여, 판윤이 되었다가 형조판서에 승문원제조를 겸하였다.
대사헌 겸 춘추빈객 다시, 예조 겸 비국(備局 : 비변사 유사당상)이 되고, 호조판서에 지의금부사(知金吾)를 겸하였다.
당시 금부(義禁府)에는 과거의 부정사건으로 하옥 된 자가 있었으며, 시험관이 부정하게 정실(情實 : 실제의 사실)을 참작한 일도 드러났는데, 전임자는 사건의 기록도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이 내용을 다른 수감자가 엿듣고 옥중에 사정을 글로 써서, 가만히 그 친속(親屬 : 친족)에게 알림에 이르러 소문이 크게 전파되자, 그 자는 사실을 은폐 할 수 없게 된 것을 알았다. 공이 여러 낭관을 불러 사실 여부를 물은 즉, 모두가 “그런 일이 있다” 함으로 인해 글을 올려 규명할 것을 청한 후, 공이 조사와 심문을 착수하자 시험관 무리들이 크게 겁내어 익명의 투서질을 하였다.
공이 흔들리지 않고 더욱 엄하게 진실을 규명한 즉, 또 갖가지로 저지하며 번갈아 방해하였다. 그러나 공의 사건규명진술서는 분명하게 시험관과 수험생이 공모한 사실을 들춰냈다. 수감 중인 자가 더욱 두려워 다급한 꾀로 공의 아버지에 대한 무고사건을 거론하며, 공으로 하여금 부끄럽게 여겨서 엄정한 처리를 못 하게끔 하였다.
공이 물러나 자리가 바뀌고 지경연을 겸하여 판의금에 발탁되어, 그 일을 차관에게 맡겼으나 부득이 공의 일을 보게 된 즉, 대간(사간원)에서 또 헐 듣기를, 저 사람이 시험부정이 죄인을 두호하여 경범으로 처리 할 것이니 내시를 시켜서, 그 행동을 정탐 하도록 상감께 청하는 것이었다. 대체로 공은 상대의 지위가 높거나 낮거나 공사처리에 차별이 없는 상품이지만, 공교롭게 죄인의 부형(父兄)이 공과 오랜 친구 사이었는바, 저들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하여 김 아무개는, 이 사건처리에 공정을 기할 수 없는 처지라고 강조하여, 상감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공이 손을 떼게 함으로써 시험관들도 죄를 모면쾌한 것이다. 공은 또 한 번 사임할 것을 청하였는데, 마침 아버님을 무고한자가 나타나서 남의 꼬임에 빠져서 한 짓이라고, 자복함에 이르러 그동안에 간특한 사정들이 밝게 드러났다. 이리하여 상감은 앞으로 더욱 힘써 달라고 권하는 한편 병조판서로 자리를 옮겨 주었다.
때마침 임금이 사직단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의금부에 들려서 죄수에 명부를 검열하여 억울한 죄수는 없는가를 살폈는데, 이때 직무상의 수행원 중에서는 공을 가르쳐 의금부의 직책을, 완수하지 못하였는데도 지나치게 승급 하였으니, 파직 시키라고 청하여 물고 늘어졌다. 공은 여섯 차례나 상소하여 굳이 벼슬을 사양하겠다고 청하였다. 임금도 마지못하여 사면을 들어주고 수일 뒤에는 도로 임명하고 말았다.
김정승(석주:錫冑) 집과는 세혐(두 집안 사이에 대대로 가지고 내려오는 원한과 미움)이 있어 왔는데, 그 생질이 언관으로 들어옴에 혹독하고 각박한 말로서 공뿐만 아니라, 공의 선공(아버지 감지당)까지도 중상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엄하게 배척 하였으며 참석하였던 조정 신하들도 크게 놀라 그를 파직 시켰다. 이때 대신을 비롯하여 모든 신하들이 번갈아 공을 위하여 변명하였으나, 공은 침통한 기색으로“이 험한 길을 머뭇거리고 벗어나지 않으면 욕이 땅속 구천(九泉:정승)까지 미칠 것이라”하며, 물러날 것을 결심하였지만 늙은 대부인(어머니)을 모시었으므로, 멀리 숨지는(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궁벽한 지방에 살다) 못한 것이다.
조정이 공의 정상을 참작하여 병조판서를 갈고, 판중추부사에 공조판서를 겸하고, 다시 판의금부사를 겸하게 하였으나, 모두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다음해 정월에 숙종이 별도로 특별히 공을 불러 면대하여, 효유(曉喩 : 알아듣게 타이름)와 설득함이 간절한 동시에 이조판서를 제수하고 다시, 수차에 걸쳐 따뜻하고 돈독한 임금에 부탁이 공의 가슴에 사무침에 받겠노라 하고 어전을 물러나왔으나, 옥당에서 공을 모함하여 올리는 상소를 만나 창황(蒼黃 : 매우 급함)히 성문을 나오고 말았다.
숙종은 비록 참소하는 무리들을 미워하였으나, 마침내 공은 사직하고 말았으니, 그렇게 한 장본인인즉, 위에도 보이는 오(吳)씨 성의 종손으로 가장 음흉하고 교묘한 말이 근거 없으며, 하나같이 날조된 모함뿐이었다. 못된 자가 착한 공에게 아무리 악하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시 공조판서를 재수 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8월에 임금이 대신들과 의논하고 정승(우의정)을 재수 하였으니, 조정과 민간이 모두 함께 기뻐하였다. 공은 사양하였으나 위로부터 재주와 인덕이 겸비 하였다는 칭찬이 있었지만, 공은 12번 사직의 간절한 호소문을 올렸으나 상감이 분부하시는 뜻은 더욱 육성하였다. 다시 진전(眞殿 : 역대임금의 화상을 모신 선원전의 다른 이름)에서 공을 기다리고 있던 임금을 배알한 자리에서, 그 권고의 은혜가 비할게 없음에 황공감읍(惶恐感泣)하여 제수된 우의정자리에 나가기로 하였다. 조정에 나가서는 정색하고 일편단심 나라에 몸 바쳤으니, 임금께서 덕으로 베푸실 것과 조정공론을 화합시킬 것과, 백성을 편안히 돌봐주실 것을 공손하고 친밀이 아뢰었는바, 숙종은 항상 공을 믿는지라 공의 건의는 번번이 받아들여졌다.
공이 병 있음을 듣고는 궁중에서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액예(掖隸 : 액정서에 매인 관원)을 시켜서, 먹을 것을 하사 하시니 공은 엎드려 황공 감사함을 말하되 “신이 살아서는 성은에 보답하지 못하고 죽어 지하에서나마 이 광영 된 은혜를 기어코 결초보은 하겠다.”고 다짐하더니 궁중에서 나온 신하가 공의 집 대문을 나서자마자 이내 공은 운명하였다.
공은 사람됨이 장중하고 의표가 정연하였으며 정신이 두 눈에 빛나 번쩍이고, 수염이 아름다웠으며 음성이 맑았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출천지효(出天之孝 : 하늘에서 낸 효자)라 할 만하였으니, 그 아버님을 섬기되 조석으로 문안하고 보살핌이 한 결같이 극진하였다. 나이 많은 어머님을 봉양함에 있어서는, 그 앞에서 어린아이 같은 희롱을 하되, 지위가 높아 귀하게 되었거나 나이가 많아 늙었다고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부모상에는 예법을 굳게 지켜 빈틈이 없어, 그 몸이 버티어 가기 어렵겠다는 실정을 어느 대신이 임금에게 아뢰었더니, 임금은 가엽다고 탄식하며 신하를 보내 오래된 매운 생강과 육계와 같이, 더욱 굳은 지조를 펴 나갈 것을 격려하였다. 공은 몸을 단속하여 선조를 받드는 데는 예절을 깍듯이 따르며, 집안 법도는 준엄하여서 점쟁이, 무당 등속은 일체 얼씬하지 못하게 하였다. 아랫것들을 거느리되 큰 소리를 내거나 낯빛을 붉힌 일이 없어서 저마다 스스로 어려워서 복종하였다.
권요. 권직(權要. 權職 : 의금부의 판사, 지사, 공, 형, 병, 호, 이조 등의 현재 장관직을 말함)의 벼슬에 오래 있으면서도 단속이 얼마나 엄하셨는지, 포저(苞苴 : 선물꾸러미 즉 뇌물) 따위는 감히 대문 안에 들어온 일이 없으며, 거처하는 방은 낡고 누추하여 흙먼지가 쌓여도 태연하였다. 조정에 나아가 임금을 섬김에 곧은길로만 인도하였고, 임금에게 아뢰는 것은 자상하고 간곡하였으며, 간혹 임금의 불쾌한 낯빛과 마주친다 해도 움츠림이 없었고, 매사에 반드시 의리를 앞세웠으며 자신 한 몸에 이해관계는 돌볼 줄 몰랐다. 사물을 통찰하는 눈이 밟았고, 기회 잡는 지혜가 민첩하였으며, 일에 득과 실을 논할 때는 꼭 주역의 거북점 같았다.
언제나 공무를 집행하는 데는 부지런하였으며 항상 말하기를 “신하된 자는 물러날 때 물러나더라도 자리에 있는 동안은 힘을 다해 해야 한다. 일 처리를 느릿느릿 끌면서 공연이 체통을 높이는 따위의 행동을 나는 알지 못한다.” 하였다.
대를 이어 선비 집안으로 옛 경서의 가르침을 터득한 것은 일상다반사처럼 몸에 뱄고, 마음을 세상 돕는 수업에 두어 온 세상 만물의 위치에 궁극을 다 하고자 하였다. 젊어서는 병법을 좋아하여 그 깊은 곳까지 연구를 쌓았는가 하면, 별자리모양과 천문지리에 태을(太乙 : 태을성(음양설에서, 북쪽 하늘에 있으면서 병란, 재화, 생사 따위를 맡아 다스린다는 신령한 별)의 준말)로 그 몸은 위치에 따라, 사람의 길하고 흉함을 안다는 점성술과 기황(岐黃 : 의술)에까지 달통하고 있었으며, 선축이교(仙竺異敎 : 인도에서 일어난 불교를 말함)도 상당히 연구하였으며 새로운 해석을 보태지는 않았다.
글 제주도 타고난 천품에다 뛰어난 총명마저 있어서 어려서 겨우 글 배우기를 시작하였을 때, 어른들이 시험 삼아 책속의 글자의 순서를 바꿔놓고 물으면, 서슴치않고 대답하기를 막힘이 없었다. 이때 반대당파의 한 사람이 건착도(乾鑿度 : 건곤착도(乾坤鑿度) 양력(昜曆) 부록중의 하나, 일종의 미래 예언서라서 난해함) 주를 해석 못 하는 데가 있어서 물어봤을 때, 공은 물 흐르듯이 풀이하여 그는 깜짝 놀라며 데리고 가서, 가르치고자 하였으나 공은 응하지 않았다. 이때가 스무 살도 안 되었을 무렵이다.
호남순검사로 나갔을 때는 산, 내, 도로명과 리며, 호수와 인구, 관문이며, 애로(隘路 : 좁은 길 또는 막힌 길) 등을 모두 살펴서 기억하고 있었고, 송사가 번잡하여도 당장에 판결할 뿐 아니라 오랜 뒤에까지도, 그 송사에 날짜나 어디에서 있었던 일과 사람들의 이름 등을 기억하고 있어, 확인하여 보면 과연 틀림이 없었다. 조정에서 공문서가 많아 한 아름이 되어도 읽어 가기를 바람결같이 빠르게 하셨고, 임금의 재결을 받는 어전에 가서는 그 공문에 첫머리에서 너뎃줄식을 외우데, 틀림이 없었음에 모든 재상이 혀를 내두르며 귀신같다 하였다. 글 만드는 데는 붓을 쥐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간결하고 적당한 것이 만들어져, 사람마다 자신이 공에게 미치지 못함을 스스로 알 수 있었다. 이러하므로 농암 김공(農巖 金昌協)이 일찍이 말하기를, “마땅히 예문관의 책임자를 줄만하다” 하였다. 글씨 또한 법도에 맞고 정교 하였으니, 옥첩(玉牒 : 왕실의 계보 제문 송덕문 등을 말함)이나 총각(가각(家刻) : 비석에 새기는 글자)을 많이 챙겼으니, 예술의 재주도 넘쳐흘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을 한데 묶어서 가만히 평론 하던데 공은 과장(과거보는 시험장)에서는, 세상에 문장으로 추천 받았고(장원으로 급제한 것을 말함), 감사로 나가서는 행정수완이 놀라와 세상에서 명관이라 하였고, 농촌에 살면서는 모든 사람들이 조용하고 태연함을 칭송 하였고, 호조판서로서는 세상에서는 세금이 잘 정돈되었음을 일컬었으며, 의금부사가 되어서는 세상에서 소송이 밝고 공평함을 칭송하였고, 병조, 이조의 인사행정에 나서면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뛰어남에 감복하였으며, 정승자리에 오르면서 세상은 그 큰 덕에 친화 감화되었다. 만일 그 효도의 지극함을 말하자면 연(連世瑜(연세유) : 송나라 사람으로 이름 있는 효자), 시(柴世需(시세수) : 명나라 사람 유명한 효자)와 짝이 될 만하고 충성은 교, 힐(公孫僑(공손교), 羊舌肹 (양설힐)중국 춘추시대 사람으로 유명한 충신)과 견줄만하며 학문은 구류(九流 : 儒(유).佛(불).仙(선).陰陽卜(음양복).縱橫(종횡).風水(풍수).墨說(묵설).잡사(雜祀).농지(農枝)등 아홉가지 종류의 학설)에 통하였고, 지혜는 일만가지 사물을 두루 보살필 수 있었으니, 참으로 한 세상에 걸출한 인물로 한번 나왔으나, 워낙 정치 사회가 혼돈한 시절에 만나 공의 고매한 정신에 시속은 맞지 않는 시기었다. 원체 뛰어난 높이가 다 시속 벼슬아치들과는 어우러지지 못하였다.
벼슬살이 수십년에 언제나 불안함에 지친 가운데서 거의 그 반생을 살다가, 종말에는 상 옷을 입은 몸으로 가시처럼 파리하여(棘人樂樂(극인락낙) : 시경에 보이는 말) 수명이 끝났다. 비록 알아주는 임금을 만났다하겠으나 실은 가슴속의 포부는 거의 펴보지 못하고 말았다. 세상을 염려하는 식자들은 애석하고 원통히 여겼다. 왜 진작 공을 존중하여 나라 위한 그 포부를 펴게 하지 않았는고, 그러나 교양과 학덕 높은 선비는 본시 세상에 나와 행세함에 오직, 이름과 절개를 중히 알았을 뿐 이밖에 것들이야 모두 군살에 불과한 것이다. 공은 신사년(1701숙종27년)에 큰 옥사(獄事 : 숙종 27년 복위 된 민비가 죽고, 장희빈이 제기를 꽤하다 이루지 못한 채 사사 되는 사건)가 있을 즈음에서 온 조정이 날 뛰듯이 다투어, 한 장에 상소라도 올려두어서 훗날 유공했다는 증표로 삼고자 분주하였으나, 오직 공은 홀로 우뚝 서서 도무지 그 속에 끼어들지 않았다. 여기에 그 본보기를 세웠음이니, 이 어찌 역사를 빛내고 영원히 모범을 가르친바가 있음이 아닌가. 나의 선친(先親 :신도비문의 필자 이의현 공의 아버지 이세백(李世白) 좌의정 시호 충정) 충정공이 대신으로 이 사건(장희빈 사건) 처리를 더욱 엄정히 함에 있어, 공이 옆에 있으므로 하여 외롭지 않았던 것이다.
공이 일찍이 자신의 초상화에 글제를 적었으니, “아직도 벼슬자리에 마음을 잊지는 못하면서도 이름과 재물을 다투는 마당에는 나가지 않았으며, 성 중의 저자거리 풍진세속에서 살고 있으면서, 나의 본뜻은 샘 소리 들리고 흙 내음이 물씬한 시골에 물러가 있노라.” 하였더니 사람들은 공이 진심을 사실대로 적은 것이리라 하였다.
공은 충주 목계촌(忠州 牧溪村)에 안장 하였고, 배위 정경부인전주이씨(貞敬夫人全州李氏)는 돈령도정 몽석공(夢錫公)의 따님이니, 효심이 지극하고 동기간에 우애있고, 자비로우시며 어질고 단정하며 엄숙하고, 부지런하고 검소하였으며 집안법도를 갖추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공보다 나이가 한살 아래이며, 공보다 21년 뒤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76세였고, 공과 별도로 광주 경안촌(廣州 慶安村)에 장사지냈다. (註:후에 현재의 몽촌에 이장하여 공과 합장하였다.)
두 아들과 세 딸을 두었으니 맏아들 희로(希魯)는 형조참의(刑曹參議)고, 둘째 아들 재로(在魯)는 이조판서(吏曹判書:註:후에 영의정)이며, 맏딸은 수찬 황계하(黃啓河)에게, 둘째딸은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에게, 셋째 딸은 주부 박사엄(朴師淹)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참의(희로)가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치만(致萬)인데 교관이고, 판서(재로)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치일(致一)은 참봉, 다음이 치인(致仁) 치언(致彦 )이요. 딸은 이명중(李明中)에게 출가하였다. 황계하 사위는 계자 익(榏)이 있고, 딸은 참봉 김도택(金道澤), 생원 홍계현(洪啓鉉)에게 각각 출가하였고, 서명균 사위는 아들 둘이 있으니 지수(志修)와 무수(懋修)요. 세딸은 진사 이명집(李命集), 조재명(趙濟命), 송택인(宋宅仁)에게 각각 출가하였고, 박사엄 사위의 아들 선원(善源)은 봉사요, 딸 자매는 정석장(鄭錫長), 홍경하(洪景河)에게 각각 시집갔다. 필로(必魯)는 공의 서출 소생 아들이다.
아래와 같이 명(銘:새김)을 적는다.
人物之生(인물지생) : 사람의 일생이
在晩罕全(재만한전) : 그 말년에 완전하기는 드문 일 이도다.
有彊而室(유강이실) : 굳세었다가 막히고
有通而顚(유통이전) : 통달하였다가 자빠지고
受器或偏(수기혹편) : 혹 재능이 있으면 치우쳐서 편협하니
曷裨大專(갈비대전) : 어찌 오롯이 할 수 있으랴
曰維我公(왈유아공) : 오직 우리 공만은
其稟杰然(기품걸연) : 천품이 장하고 아름다웠도다.
三古粹精(삼고수정) : 요(堯). 순(舜). 우(禹) 3대의 정수를 지녔음이어
一代英賢(일대영현) : 일세의 영매함(영리하고 뛰어남)이요 어짐 이로다.
明肅果毅(명숙과의) : 도리에 밝고 엄숙하면서 과감하고
行方智圓(행방지원) : 행실의 방정함이요 지혜의 원만함이로다.
以而利見(이이이견) : 공으로 하여 세상에 이로움이 나타남이여
龍在干田(용재간전) : 용이 밭에 있음이로다.
之才之德(지재지덕) : 그 재조의 그 덕
有褒自天(유포자천) : 하늘이 어여삐 여겨 내린 것이거늘
孰謂未究(숙위미구) : 어찌 다하지 못하였다 할고
奄催中年(엄최중년) : 중년에 꺾었으되
彛粉尙在(이분상재) : 의젓한 도의는 지금껏 남아 있건만
冠韠長損(관필장손) : 조복(관원의 예복을 이르던 말)의 그 모습은 다시 볼길 없도다
際過之融(제과지융) : 모처럼 성군을 만나 융합하더니
司命何遄(사명하천) : 수명은 어찌 그리 짧았는고
而具大節(이구대절) : 그러나 그 대절(대의를 위하여 목숨 바쳐 지키는 절개)
邈焉難肩(막언난견) : 드높이 우뚝하여 견줌이 없도다.
垂聲汗竹(수성한죽) : 드리운 성망(상감의 바램) 역사책에 적어두어
千祀可傳(천사가전) : 천년도록 받들어 전해지리니
緬彼玄扃(면피현경) : 저 유택(묘소를 말함)을 우러르니
忠原之阡(충원지천) : 충원의 목계로다.
靈爽不昧(령상불매) : 아아 공의 영혼 밝아 어둡지 아니하고
炳朗重泉(병랑중천) : 저승에서도 눈이 부신 명랑함이여
我銘具懿(아명구의) : 내 공의 그 맑은 덕을 비명에 써서
竪珉是鐫(수민시전) : 옥돌에 고이 새겨 세워두느니
使後過者(사후과자) : 이곳에 들른 후대사람들
贍仰靡愆(섬앙미건) : 우러러 추모하여 어기지 말고
武維貞臣(무유정신) : 곧은 신하 정성스러운 공을 본받아
光我朝鮮(광아조선) : 부디 우리 조선 빛내라 일러둠이니라.
숭정기원후 두 번째 계해년 시월 일 립
(崇禎紀元後 再癸亥年(1743) 十月 日 立)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충헌공 김구 묘역 (忠憲公 金構 墓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