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 내리기
석현수
연세 들어 한담을 나누면서 소일하는 어른들을 보면 대개 눈길이 참 부드럽다. 삶의 여정에서 이래저래 닳고 씻기어 어떤 상황에도 잘 적응하는 무던한 처세가 몸에 밴 탓이리라. 여럿 모여도 큰 소리도 없고 조신하고 사근사근한 아름다운 노년의 모습이다.
그렇게 크게 그르칠 일이 아니라면 늘 상대의 말에 수긍하고 장단을 처 올리는 맛에, 이야기의 물꼬를 트이게 해 준다. 말 속이 격해지는 상대에게는 ‘이런!’, ‘아니 저런!’ 하여 수다스럽지 않는 몇 마디 맞장단으로 고수鼓手역할을 해 줌으로 상대의 억한 마음을 봇물처럼 토해 내도록 함으로써 듣는 이도 말하는 이도 속이 후련해 져서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어쩌다 눈꼴을 치든 사람이라도 끼어들게 되면 분위기가 쉬이 깨뜨려 진다. 오래 동안 ‘머리’ 노릇한 사람이 왔나보다. 회중을 휘젓는 근성이 은연중 남아있어 단번에 표가 나기 마련이다. 꼭 필요하지도 않는 판단을 내려 주려하고, 청하지 않은 쌈 가르기를 하려해서 분란이 일어난다.
쇠털같이 하고 많은 날 우두머리 타령했으면 됐지 이제는 남의 속에도 좀 들어가 주면 어떨까 싶어 보이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다. 나이가 들어도 ‘머리’만을 고집하는 사람은 명예욕이 강한 사람이다. 사람이 튀어 오르면 시샘 하는 자가 생기게 되고[人怕出名], 돼지가 살이 찌면 잔치 날이 가까워진다[猪怕壯]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나 보다. ‘머리’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은 빨리 자기 모습을 비춰 보고 인생이란 경기 후반전에 임하는 자세를 달리해야 한다.
올린 눈 꼬리를 내리고, 빳빳이 치켜세운 꼬랑지는 밑으로 감아 넣고, 말 꼬리 조차도 시비조가 아닌 매너모드로 바꾸어 주어야 한다. 그동안 먹고 사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나이 들어 살기등등한 눈 꼬리만 남았을까. 열심히 가족 부양의 의무를 위해 십리 밖에서도 먹이의 냄새를 맡고 달려들고, 일을 향해 날듯이 꽂히던 맹수의 모습이었기에 눈만 살아 번득였을 것이다.
눈에 힘을 풀고 땅을 보고 걷는 생활도 벌써 어언 10년이 가까워진다. 지금은 편안하게 죽어지내니 세상은 그런대로 살만한 곳이다. 우선 꼬리를 내리니 공연한 시비에 휘말리지 않아서 좋다. 꼬리를 사타구니에 붙이고 백기를 들고 있는데 누가 집적거릴 것인가? 아무도 자기 먹이를 나에게 빼앗기지 않을 것 같으니 안중에 두지 않는 것이다.
장자의 도덕경에 목계木鷄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나무로 만든 닭에 관한 이야기다. 상대를 보고 무조건 날뛰며 기세 등등 싸우려고 전의를 보이는 것보다는 무릇 싸움닭의 소양이란 깎아 만든 나무 닭처럼 표정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죽어야 산다. 애꿎게 이 말을 공자나, 예수 앞에 갖다 놓고 책 제목으로 하는 학자가 있어 한동안 ‘죽어야 산다.’가 유행어가 된 적이 있다. 실로 죽어 사는 일이란 여간한 인내와 훈련이 아니고는 우리 같은 범부凡夫에게는 어렵고도 어려운 과제다. 그렇게 펄펄 날던 사람들이었는데 싸움닭 기질이 퍼드덕 살아 날 때가 영영 없어질 리가 있을까.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는 어느 학교 출신, 무슨 전공을 했던 간에 지식의 차이는 모두 거기가 거기라고 한다. 상당히 시끄러운 사람도 기껏해야 오늘 아침 읽은 신문이나, 방금 듣고 나온 방송에 지식을 기대고 있다. 또 가진 것에 대한 평균화도 이루어져서 모두가 지갑 속에는 밥 한 끼 해결할 정도의 용돈만 지니고 외출하기 때문에 옛날처럼 쉬이 깃발을 잡거나 휘저을 경제력도 없다. 가진 것도 아는 것도 고만고만한데 꼬리를 올린다고 해서 겁먹고 달아날 사람도 없으니 나무 닭처럼 무표정하게 살아가는 것이 편하다.
첫댓글 공감이 가면서도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참으로 좋은 말씀 잘 새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