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든(Haydn, Franz Joseph : 1732 ~ 1809 ) 오스트리아의 로라우 출생으로 당대에 가장 명성을 날린 작곡가였다.그는 다수의 교향곡과 현악4중주곡으로 유명하며 특히'교향곡의 아버지','현악사중주곡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고전주의음악을 시작한 작곡가이다. 그는 고전파 기악곡의 전형을 만들었으며 특히 제1악장에서 소나타형식을 완성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주요작품] 104개의 교향곡, 20개의 협주곡, 68개의 현악사중주, 29개의 건반 트리오,126개의 바리톤 트리오, 4개의 건반 소나타, 15개의 오페라, 12개의 미사곡, <천지창조>, <사계>등의 오라토리오,수많은 기타 앙상블,건반과 성악곡 [작품번호]: Hob.또는H. 네델랜드 음악학자인 호보켄(Anthony van Hoboken)이 정리한 작품 목록 번호. ▣ 일대기 ■ 유년 시기 요셉 하이든은 헝가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오스트리아의 로라우에서 태어났다.그의 아버지는 수레 목수였으며 어머니는 로라우의 귀족을 관장하는 하라흐 백작집의 요리사로 일한 적이 있으나 둘 다 악보를 읽지도 못하는 처지였다.그러나 아버지는 열광적인 민속음악가로 마차여행 중에 하프를 혼자 익혀 연주할 정도였다.훗날 하이든의 유년시절에 대한 회상에 의하면 그의 가족들은 매우 음악적이어서 곧 잘 이웃과 어울려 노래를 불렀다 한다. 그의 부모는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고는 그가6세 때 로라우에서11 km떨어진 하인부르크에 있는 친척인 초등학교 교장이자 교회음악가인 프랑크라는 사람의 집에가서 교육을 받게 했는데,이로서 그는 부모 곁을 영원히 떠나게 되었다. 프랑크의 집에 있으면서 하이든은 굶을 때도 많았고 남루한 옷차림새 때문에 모욕을 받곤 했지만 음악교육을 받기 시작하여 하프시코드와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으며,교회 합창단에서 그의 두드러진 고음은 하인부르크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있었다.
△성 슈테판 성당 생활(1740~49년) 1740년에 전국을 순회하며 소년합창단원을 모집하던 빈의 슈테판 성당의 음악감독인 로이터(Reutter)에 발탁되어 성가대원으로 채용되어 성악부문을 위주로 한 음악교육을 받게 된다.그는 틈을 내어 푹스의 탁월한 대위법 저서<그라두스 아드 파르나슘>과 마태존의<완벽한악장>과C.P.E.바흐(Carl Philipp Emanuel Bach)의 작품을 교재로 독학으로 음악이론을 공부했다. 하이든은 변성기가 지나서도 얼마동안 성가대를 떠나지 않았는데,훗날 하이든은 로이터 선생이 그의 소년 소프라노를 탐내어 성가대에 붙들어 두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프랑크와 마찬가지로 로이터와 있을 때도 항상 배가 고파서 공연이 끝나면 그동안의 허기를 채워 다시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귀족들을 위한 공연만을 기다리며살았고,로이터는 더 이상의 성악교육도 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슈테판 성당은 당시 유럽 음악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유럽을 이끌어 나가는 유명한 작곡가들의 새로운 음악을 접하고 관찰함으로써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 프리랜서로서의 몸부림 시기(1749~1757년) 1749년에 하이든은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어 성가대로부터 나왔으나 갈 데가 없던 차에 마침 스팽글러라는 친구를 사귀게 되고그 가족이 북적대는 다락방에서 프리랜서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이 힘든 시절에 하이든은 피아노 교사 아르바이트와 거리의 세레나데악단 등의 여러 가지일을 하다가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로 런던 오페라계에서 헨델의 라이벌이기도 했던 니콜로 포르포라(Niccolo Porpora,1686~1768)의 성악을 반주하는 수행 하인으로 취직하여빈에서의 생활 근거를 마련하게 되고,비로소 포르포라로부터 작곡의 기초를 배우게 되었다. 그의 기교가 늘어나자 하이든은 펠릭스 쿠르츠라는 희극 배우를 위해 오페라“꼽추 악마”(Der krummeTeufel)를 작곡하고, 1753년에 초연하게 되자 그의 명성은 더 한층 높아졌다.이로 인해 하이든은 비로서 귀족 후원자를 얻게 되는 데,최초에는 툰(Thun)백작부인의 피아노와 성악교사로 고용 되었고 그 후 바인치엘에 있는 퓌른베르크 남작의 장원으로가게 되고 여기서 그의 최초의 현악4중주인‘E♭장조(1757경)’를 작곡한다. 1757년에는 퓌른베르크 남작의 소개로 모르친 백작의 궁정악장에 취임하였는데,여기서 조그마한 오케스트라를 위하여 초기의 몇몇 교향곡을 작곡하고 지휘하였다.
■ 궁정 악장 시절(1757~1790년) 1760년11월에 하이든은 자기보다3살이나 연상인 가발 제조업자의 딸 마리아 안나 켈러(1729~1800)와 결혼한다.그녀는 하이든이 본래 사랑하던 테레제 켈러의 언니였는데, 1755년에 테레제가 갑자기 수녀원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이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이 결혼은 전혀 행복하지 못했으나 당시의 법이 이혼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연인을 갖는 결과를 초래했으며,따라서 이들 사이에는 아이도 없었다. 그러다가 백작의 집안 재정상태가 핍박하여 악단이 해산되는 바람에 다시 실업자가 되어 빈으로 돌아왔으나, 1761년5월1일 하이든은 헝가리의 귀족 에스테르하지 후작 집안의 부악장에 취임하였다.당시의 악장은 베르너였으나 그가 사망한1766년부터는 하이든이 명실상부한 그곳 악장으로 승진하였다. 에스테르하치가의 영주(처음에는 폴 안톤,후에 니코라우스)들은 음악 애호가들로 특히 니코라우스의 원래 영지는 빈 바로 남쪽 아이젠쉬타트에 있었지만, 1766년부터는 대부분의 시간을 멀리 떨어진 시골 땅에 베르사유 궁의 위용을본떠 지은 에스테르하치 궁전에서 보냈다 여기에는 오페라와 꼭두각시극을 위한2개의 극장과 호화스런2개의 음악실이 있었는데,하이든은25명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매주 음악회를 열고 특별한 날에는 오페라를 공연하였다. 에스테르하치 궁에서 근30년을 재직하는 동안에 하이든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작품과음악 형식을 개발하였다.그는 고용주를 위하여 가능한 한 많은 곡들을 출판하였으나,이 시기에 가장 유명한 작품들 중에서는<파리 교향곡>, <크리스도의 산상칠언>등은 외국으로부터 위탁받아 작곡한 것도 있다. 이 무렵부터 하이든은 점차 고립감과 외로움에 감싸이게되었는데,그것도 빈에서 가까운아이젠쉬타트에 있을 때 보다 에스테르하차에 있을 때가 더했다.하이든은 특히 빈에 있는친구들과 만나 우정을 나누기를 갈망해왔다. 그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하이든이1789년부터 정신적인 사랑을 나눠온 니크라우스공의 주치의의 부인인 겐징어(Maria Anna von Genzinger,1750~93)였다.그는 에스테르하차에서의 외로움과 그가 가끔 비엔나에 갔을 때 그녀를 만나 행복했던 이야기들을 편지로 써 보냈으며,나중에 하이든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도 자주 편지를 보내곤 했다.그러나1793년에 그녀는 못다 핀 인생을 마감하자 하이든은 큰 충격을 받았으며,그녀에게“F단조 피아노 변주곡,Hob. XVII:6을 바쳤다.
빈에 있던 또 다른 하이든의 친구(24세 연하인 제자 겸 친구)는1784년경부터 사귀게 된모차르트로 둘은 함께 현악4중주를 연주하곤 했다고 전한다.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작품에큰 감명을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입에 침이 마를 정도의 최상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이에 모차르트는 하이든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현악4중주<하이든 세트6곡>를 헌정하게 되었다.
<참고:정 태상, “이 곡만 듣고 나면 살맛이 난다”, pp.384-389 > ■ 런던 방문 시절(1차:1791~1792, 2차:1794~1795) 1790년에 니클라우스 후작이 사망하자 하이든은 악단은 해체되고 하이든은 연금을 받게되어 빈으로 이주하여 자유음악가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이 때 독일 출신으로 영국 극장 지배인으로 있던 잘로몬(Johann Peter Salomon)으로부터 영국에 와서 큰 오케스트라를 거느리고 교향곡을 지휘해 달라는요청을 받는다. 1791~1792년 및1794~1795년의 두 번의 영국 방문 연주에서 하이든은 큰 성공을 거두어 영국에 그의 명성을 더욱 높임과 함께 많은 돈을 벌어 들여서 재정적으로 안정을 이루게 된다. 영국 방문기간의 하이든이 작품 중에서 유명한 곡으로는<놀람(1791)>, <군대(1794)>, <드럼롤(1795>및<런던(1795)>등의 교향곡과 현악4중주<기사(1793)>및 피아노 트리오<Gypsy Rondo>등이 있다. 하이든은 두 차례의 영국 방문 길에 들른 본에서 베토벤의 작곡을 지도했다.하지만 이 두 사람은 성격이 워낙 상이하여 별 다른 인간관계를 맺지 못했다.
■ 빈에서의 여생(1차:1791~1792, 2차:1794~1795) 하이든은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많은 대형 종교작품을 작곡했는데, <천지창조(1798)>, <사계(1801)>의2개의 오라토리오와6개의 미사곡이 있다.이 미사곡은 하이든이 연금을 받고 있던 에스체르하가(家)가 다시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되자후작을 위해 작곡한 것으로<전쟁 미사(1796>, <넬슨 미사(1796)>, <테레지아 미사(1799)>, <관악대를 위한 미사(1802)>를 포함하는 마지막6개의 미사(1796~1802)곡은 거대한 축제곡 성격의 미사곡이다.기악곡으로는 유명한 트럼펫 협주곡과<황제>, <일출>등을 포함한 그의 마지막9곡의 현악4중주곡을 남겼다. 1802년부터 하이든은 오랫동안 알아오던 병세가 심해 져서 끝없이 밀려드는 악상을 작곡을 할 수 없게 되었고,하인들의 극진한 보살핌속에서 끊임없이 저명인사들의 방문을 받고 위로를 받았으나 불행스럽기만 여겨졌다.그는 가끔 피아노 앞에 앉아서1797년에 자기 애국심의 표시로 작곡한<신이여프란츠 황제를 보호하소서(Gott erhalte Franz den Kaiser)>를 연주하면서 기분을 전환하곡 하였다.훗날 이곡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국가가 되었다. 하이든은 나포레옹의 프랑스군이 빈을 포위한 직후인1809년5월 말에 향년7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임종하기 전에 그의 이웃 집들이 포격을 받자 그는 하인들에게“얘 들아,하이든이 있는 곳에는 아무런 해도 없을 테니 두려워 마라”라고 말했다고 전해오고 있다.2주 후인1809년6월15일에 쇼텐교회에서 그의 추모식이 열렸는데,이때 모차르트의 진혼곡(Requiem)이 연주되었다. <출처: Wikipedia,김용환, "서양음악사100장면(2),pp.78~89, 그라우트, "서양음악사,제7판(상),pp.565~584>“
■하이든의Best 1. Symphony No. 100 in G major. Hob I:100(1794년) <Military(군대)> ②악장Allegretto④Finale, Presto 2. Cello Concerto No.1 in C major, Hob VII b:1 (1780년?) ③ 3. Symphony No. 45 in F sharp minor, Hob I:45 (1772년) <Farewell(고별)> ①Allegro Assai④Finale. Presto-Adagio 4. Symphony No. 101 in D major. Hob I:101 (1794년) <The Clock(시계)> ②Andante 5. Trumpet Concerto in E flat major, Hob VII e:1 (1796년) ③Finale, Allegro 6. String Quartet(현악4중주),No.77 in C major, op.76 No.3, Hob III:77 (1797년) <황제> ②Poco Adagio, cantabile (with 4 variations) ※②악장: “신이여!프란츠 황제를 보호 하소서”라는오스트리아 국가포함 7. Piano Concerto in D major, Hob XVIII:11 (1782년) ①Vivace②Un poco Adagio 8. Symphony No. 94 in G major, Hob I:94 (1791) <Surprise(놀람)> ②Andante 9. Piano Sonata No.50 in C major, Hob XVI:50 (1794/1795년) ②Adagio 10. String Quartet, No.63 in D major,op.64 No.5, Hob III:63 (1790년) <종달새> ①Allegro Moderato 11. Symphony No. 104 in D major, Hob I:104 (1795년) <London(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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