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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27일 주일 메시지
누가의 두 번째 하나님 나라 이야기 09
제목: 베드로의 편견이 깨지면 새로운 문이 열린다
사도행전 9:32 ~ 10:48
설교 목적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사역에서 중요한 점은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이방인을 향한 사역의 첫걸음이며 베드로에게는 매우 큰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장차 펼쳐질 이방인 선교의 시대로 들어가는 문을 활짝 열기 위한 준비였다. 사실 이방인의 사도는 바울이다. 그렇지만 바울의 사역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의 동의와 협력을 통해서만 결실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은 황소걸음처럼 진전되고 있었다.
하나님의 경륜은 시대마다 그 과제를 달리 제시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에게는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거룩한 민족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조상들에게 과제는 출애굽이었고, 여호수아와 사사 시대의 과제는 안정적인 정착이었다. 그리고 왕정시대의 과제는 이방인들의 우상문화에 동화되지 않으면서 언약백성의 제사장문화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포로기의 과제는 예루살렘의 회복을 기다리면서 신앙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로 상황은 매우 많이 달라졌다. 바야흐로 세계화의 시대가 그 문을 열기 시작했다. 이제 아브라함 언약은 새로운 차원으로 해석되어야 했다.
나는 이번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경륜이 어떻게 베드로를 이끌어 그의 의식세계를 확장했으며 그의 내면에 깊이 자리잡은 인종적이고 종교적인 편견(偏見)을 해소(解消)했는지를 소개할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 시대의 과제를 하나님의 경륜의 빛 가운데 비추어 보면서 오늘 우리들이 보아야 할 ‘욥바의 환상’은 어떤 것인지 제시하고자 한다. 이 설교를 통하여 배타적 유대주의자 베드로가 이방인을 축복했던 것과 같은 각성이 우리 가운데서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오늘의 기독교가 붙들어야 할 과제를 명확하게 포착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 과제는 다원주의적 시대를 살아갈 수 있는 기본 소양을 갖추어 다양한 종류의 연합과 협력을 통해 시대적 위기를 축복의 기회로 바꾸어 생육 번성 충만의 세상을 여는 것이다.
설교 개요
1. 들어가는 말
2. 오순절 이후 베드로의 사역
① 교회의 중심이 되어 예루살렘을 지킴
② 룻다의 애니아와 욥바의 도르가(다비다)
③ 고넬료의 집을 방문함
3. 초기교회 당시의 세계 정세
① 알렉산더의 세계 정복
② 포에니 전쟁을 승리하고 지중해를 제패한 로마
③ 세계화의 시대
4. 유대주의자가 세계시민주의자로 바뀌다
① 바울의 회심과 그의 변화
② 베드로의 경험과 하나님의 섭리
③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
5. 오늘 우리 시대의 과제와 우리의 태도
① 지구적인 협력과 공조가 절실한 시대
② 다원주의 시대의 선구자들
③ 어떤 신학자의 일인시위
6. 나가는 말
1. 들어가는 말
오늘은 2020년도 마지막 주일입니다. 우리는 금년 한 해 동안에 일찍이 없었던 지구적 재난을 겪었습니다. 그 재난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 때 전 세계가 전쟁에 휘말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고 합니다. 제1차세계대전(1914년~1918년)은 유럽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병사 900만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1939년~1945년)에서 전사자는 2,500만명이며, 민간인 희생자는 3천만명 이상이라고 합니다. 이 때는 전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습니다.
전 세계에 불어 닥친 경제위기도 있었습니다. 세계 경제대공황 (1929년~1939년)이 그것입니다. 지난 1997년에 불어온 IMF외환위기는 동남아시아의 경제에 큰 생채기를 남겼습니다. 국내적으로 보면 온 국민이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힘을 모으자는 절박함이 일어날 정도로 두려움이 우리를 엄습(掩襲, 갑자기 습격하다)했습니다. 지난 2007년에 미국에서부터 시작된 금융위기가 발발했을 때는 우리나라의 외환보유고가 바닥날 위기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 기간 내내 온 국민들도 이 거대한 경제적 태풍의 강력한 비바람을 온몸으로 견뎌내야 했습니다.
이 외에도 전 지구적인 재난으로는 이상기후로 인한 흉년과 환경오염도 있습니다. 과도하게 더운 여름날씨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많아진 오염물질로 이미 해상과 육상동물들의 뱃속에는 플라스틱이 쌓여가고 있습니다. 지구적 오염문제도 우리에게 다가올 피할 수 없는 재난입니다. 온실가스라는 이산화탄소의 과다배출로 비롯된 지구적 생태계 위기를 막아보고자 이미 전 세계적으로 기후협약 등을 통해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정부도 2050탄소중립선언을 발표하여 이산화탄소의 배출과 흡수의 균형을 이루겠다고 목표를 세웠습니다. 이는 앞으로 우리의 일상에 구체적인 행동변화를 촉구하고 강제할 것입니다.
그리고 금년에 우리 인류는 코로나바이러스의 대유행으로 다 함께 신음하고 아파하고 있습니다. 700년 전에 유럽을 중심으로 퍼진 흑사병은 그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 채 전체 인구의 1/3이나 절반가량 죽었다고 합니다. 금년 초에 시작된 코로나19 판데믹으로 벌써 8,000만명 이상의 사람이 감염확진(感染確診)되어 전세계적으로 사망자는 175만명에 다다르고 있습니다(12월 26일 현재). 그리고 지금 우리는 여러가지 행동수칙을 신중히 지키면서 어서 빨리 이 재난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런 전쟁이나 전염병 또는 환경오염의 위기를 알지 못하던 시절에도 사람은 고통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심리적이고 영적인 고통입니다. 바울 사도는 일찍이 피조물의 이런 고통 상태를 절감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로마서 8:22
우리는 지금 코로나19로 인한 자가격리와 마스크 착용, 그리고 크고 작은 집회금지의 부자유를 견디면서 한 해를 보내고 새 해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으레 우리는 연말연시에 인사말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덕담을 주고받지만 한 해를 마감하고 새 해를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은 매우 무겁습니다. 왜냐하면 의료전문가들에 따르면,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항체를 가진 국민이 60%에 도달해야 집단면역이 생겼다고 보는데 그 시기를 내년 가을이나 겨울로 내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년에도 현재와 같은 생활방역이 계속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마음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우리에게 어떤 희망이 있는지 성경말씀을 통해 찾아보고자 합니다. 저는 그 동안 사도행전을 설교했습니다. 오늘은 사도행전 10장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오순절 이후 베드로의 사역
사도행전 10장은 베드로의 활동을 들려줍니다. 사도행전 9장이 청년 사울의 회심을 다룬 것이라면, 그 이후에 저자 누가는 예수님의 제자요 사도인 베드로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를 소개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베드로를 어떻게 이끌어 새로운 시대에 동참하게 하셨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시대적 격변기를 살고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그가 어떻게 일찍이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는지를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 자신이 고정관념과 편견을 깨고 하나님의 경륜(계획)에 동참하는 극적인 전환점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삶과 사역에 새로운 마당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도 유익한 교훈과 모범이 됩니다.
베드로는 초대교회에서 가장 두드러진 지도자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단에서 가장 먼저 소개됩니다. 흔히 수제자(首弟子)라고 할 때는 대표적인 지위에 있는 우두머리 제자를 말합니다. 베드로는 사마리아에서 있었던 빌립의 전도현장에 가서 점검하고 축복하며 응원해주었습니다 (사도행전 8장). 그렇게 복음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확산될 때 베드로는 그 일에 중심에 있었습니다.
사도행전9장32절부터베드로의사역이다시소개됩니다. 베드로는유대지역을두루다니다가룻다라는마을에도착했습니다. 거기서8년동안중풍병으로누워있던애니아를보고예수그리스도의이름으로고쳐주었습니다. 그때그마을사람들이다주께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룻다에서 바닷가 쪽으로 가면 해변에 욥바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서 도르가(다비다)라는 여인이 병들어 죽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여인이 생전에 마을 사람들에게 얼마나 잘해주었는지 안타까워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시신을 잘 씻어서 다락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이웃 마을에 베드로 사도가 와 있다는 말을 듣고 속히 와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베드로는 욥바 마을에 갔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도르가가 지어준 속옷과 겉옷을 베드로에게 내보이면서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다락에 올라가 다비다를 향하여 외쳤습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그 때 죽은 다비다가 눈을 뜨고 일어나 앉았습니다. 욥바의 온 마을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주 예수를 믿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이 치료의 기적과 유사한 이야기가 누가복음 5장(중풍병자 치료)에도 나옵니다.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예수께서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에게 전달하라는 말씀을 보면 죽은 자를 일으키기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가복음 7:22
사도행전의 베드로를 보면 예수님이 생전에 하시던 일을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이 이야기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 사도들을 통해서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갈릴리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사역이 어떻게 온 유대 지역과 근방으로 확대되어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 복음이 전파되었는지를 기록한 것이 누가복음이라면, 예수님이 세상에 파송한 사도들을 통해서 그 복음이 어떻게 예루살렘을 넘어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되었는지를 기록한 것이 사도행전입니다.
베드로가 욥바에 머물고 있을 때 가이사랴 지방에서 로마의 직업군인인 고넬료(Cornelius)가 백인대장 (百人隊長, 또는 백부장(百夫長), centurion)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기도하던 중 천사가 나타나 욥바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를 청하여 말씀을 들으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때 기도하면서 환상을 보았는데 그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11.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3.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14.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사도행전 10:11~14
베드로는 이런 환상을 세 번씩이나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무슨 뜻인가 생각할 때에 가이사랴에서 온 고넬료의 사람들이 문밖에 서서 베드로를 불렀습니다. 그 때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의심하지 말고 따라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베드로는 로마인 백인대장 고넬료의 집에 가서 말씀을 전했는데 그 가정이 모두 세례를 받고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 가정을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 때 그 이방인의 온 가족에게 성령이 임했으며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예언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과 동일한 일이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났습니다. 이에 베드로도 놀라고 베드로와 함께 온 유대인들도 놀랐습니다. 누가는 베드로와 함께 온 유대인 신자들을 ‘할례 받은 신자들’이라고 소개했습니다(45절).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 복음을 전한 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 때까지 유대인들은 동족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을 금기(禁忌)처럼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금기(禁忌)란 마음에 꺼려서 싫어하거나 금한다는 뜻으로서 ‘어떤 사회에서 부정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대한 접촉을 신앙적인 차원에서 금하는 풍습’을 말합니다. 지금은 보편화되어 있지만 100년 전만해도 우리나라 사람이 다른 나라 사람과 혼인하는 것은 금기였습니다.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은 그보다 더 심각한 금기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간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누가는 그 배경에 대해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환상이 보였고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의심하지 말고 가라고 명령하셨다는 점을 들려줍니다. 그런 초자연적인 개입이 없었다면 베드로와 그 할례 받은 신자들은 감히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이 실현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빌립 집사에 의해서 사마리아가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한번도 아무도 이방인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고넬료의 가정에 들어가 복음을 전함으로 비로소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될 길이 열렸습니다. 땅끝에 사는 사람들은 이방인이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살던 시대 지중해 주변 세계의 정세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3. 초기교회 당시의 세계 정세
베드로가 전도를 하던 시절 지중해 세계는 로마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지중해는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가 마주하고 있는 바다입니다. 그 바다는 마치 거대한 웅덩이처럼 생겼으므로 옛적부터 ‘땅 가운데 있는 바다’(地中海, The Mediterranean Sea)라고 불렀습니다. 이 바다를 지배하는 세력이 서양 세계를 제패했습니다. 본래 지중해 동쪽에 있던 나라들의 문명이 발달했으므로 지중해는 일찍부터 동쪽 지방의 나라들이 지배했습니다. 그 중에 페니키아인들은 일찍부터 배를 타고 지중해 곳곳에 다니면서 무역을 했습니다. 그처럼 지중해는 페니키아인들의 활동무대였습니다.
그러다가 주전 300년경 유럽 전체를 통일하고 저 멀리 인도에까지 그 세력을 떨친 왕이 있었으니 그가 알렉산더 대왕입니다. 알렉산더는 고대 그리스문화인 헬레니즘을 온 세상에 전파했습니다. 그 결과 유럽과 아시아에 이르는 대제국에서 헬라어가 공용어로 자리잡았습니다. 헬라어는 무역의 언어요 지성인들의 학문언어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계로 뻗어갈 좋은 조건이 되었습니다.
헬라제국을 세운 알렉산더는 단명했지만 그의 후계자들이 제국을 넷으로 나누어 계속 통치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다가 로마가 점점 강성해지더니 지중해로 그 세력을 점점 확대해 나갔습니다. 그 때 지중해를 주름잡던 페니키아인들과 전쟁을 벌였는데 그것이 포에니 전쟁(Bella Punica, Punic war, BC 264 ~ BC 146)입니다. 이 전쟁에서 로마는 승리를 거두었고 그 결과 지중해 연안의 모든 나라들은 로마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유대 지역에 자리잡은 도시 가이사랴(Caesarea)는 로마 황제 가이사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를 기념하여 건설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마는 제국 전체를 관통하는 도로망을 만들어 모든 길을 로마로 통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길로 복음을 든 전도자들도 왕래했습니다.
이렇게 초대교회 당시 세계는 세계화의 격랑 속에 있었습니다. 이미 300년 전부터 시작된 헬레니즘의 문화가 전 세계에 밀어닥쳤습니다. 성경학자들은 구약성경 전도서(傳道書)가 헬라 철학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세계는 지리적으로 통일을 지향하고 있었고 각종 사상과 철학이 서로 부딪히며 영향을 주고받던 시절입니다. 그 시절에 세계화의 중심에 있던 도시 길리기아 다소(Tarsus)에서 태어난 사람이 바울이며, 베드로는 유대의 변두리 갈릴리 해변마을 벳새다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 갈릴리 사람입니다(요 1:44).
초대교회의 세계정세가 이렇게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복음이 유대 지방을 넘어 세계로 뻗어 나가기 위해서는 제자들의 마음자세와 세계관이 넓혀져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짐승을 잡아먹으라는 환상을 세 번씩이나 보여주신 까닭은 바로 그의 생각의 영역을 넓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복음이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도록 열두 사도 외에 다른 일군들을 일으키셨습니다.
4. 유대주의자가 세계시민주의자로 바뀌다
멀리 이방인들에게로 복음을 들고 갈 사람은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복음의 세계화를 위해 하나님이 택하신 그릇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아나니아에게 가르쳐 주시면서 시력을 상실한 채 사흘 동안 지내고 있는 청년 사울에게 가서 안수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주님이 아나니아에게 하신 말씀을 누가는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사도행전 9:15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 주님의 부활을 확신하게 되었고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숨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계화에 익숙한 바울을 불러 복음을 전하는 복음전도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외국어에도 능통하고 지리와 율법에도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천하 만민에게 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부터 계획되고 선포된 것이었습니다. 노아의 가족에게도 동일한 계획이 축복으로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열방을 위한 제사장의 나라가 되라고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 시내산 언약에서 하나님의 눈은 이미 땅끝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실현할 때가 찼습니다. 서방 세계의 공용언어는 헬라어로 통일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알렉산더의 정복욕구와 문화에 대한 애착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세계로 가는 길은 로마인들이 잘 닦아 두었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복음이 온 세계로 확산되어 전파될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땅끝까지 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가장 큰 장애물은 초기교회 제자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할례 받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교제하지 않는다는 금기였습니다. 그 금기는 오랫동안 전해와서 굳어진 전통이며 유대인들의 마음에 견고한 고정관념이며 편견입니다. 편견(偏見)은 양쪽을 모두 고려하지 않고 한쪽만을 보고 생각이 치우친 것을 말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유대와 갈릴리 지역 안에서만 사역을 할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교회가 복음을 들고 유대지역을 넘어 땅끝으로 가려면 유대인의 인종적 종교적 편견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0장은 유대인인 베드로의 그 편견이 어떻게 극복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편견이나 고정관념이 얼마나 극복되기 어려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베드로의 경우에 하나님은 환상과 음성으로 보여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른 베드로는 체험을 통해 하나님이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성령을 주시는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복음이 이방 세계를 향해 나갈 수 있으려면 언어적 통일과 지리적 도로망의 개통, 그리고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문화적 포용성이 필요했습니다.
훗날 사도 바울이 복음을 들고 이방인들에게 전할 때 많은 이방인들이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유대교의 전통을 굳게 붙들고 있던 신자들 중에는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오려면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 문제로 바울 사도는 예루살렘에 있는 지도자들에게 공식 판결을 요청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루살렘에서 회의가 열렸습니다 (사도행전 15장). 결정해야 할 중요한 안건은 ‘이방인들을 교회가 받아들일 때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고백을 하기만 하면 되는지, 아니면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받아들일 수 있는지’ 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토론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발언을 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이방인이었던 로마의 직업군인 고넬료의 집에 가게 된 이야기와 그 집에서 있었던 성령의 역사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인 예루살렘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결정하고 그 결정문을 편지로 써서 바울과 그 일행에게 주었습니다:
22.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23.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24.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25.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27.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28.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29.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사도행전 15:22~29
이렇게 하여 갈릴리 변두리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꽃을 피웠고,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교회를 통해서 온 유대 지역을 넘어 땅끝으로 전파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복음이 세계로 전파될 문이 열렸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유대주의자들의 편견을 벗어버리고 세계만민을 위한 사도와 제사장으로서 자신들을 다시 인식하게 된 결과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경륜이 제자들을 유대민족주의자에서 보편적 세계시민주의자로 변신할 수 있게 이끌었습니다.
5. 오늘 우리 시대의 과제와 우리의 태도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초대교회는 세계화의 격랑 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격랑은 복음을 실은 배의 순풍이 되어 더 빨리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울의 선교사역을 따라가면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또다른 의미에서의 세계화가 진행 중입니다. 오늘의 세계화는 지구 전체의 운명을 결정할 위기 앞에서 세계 전체가 힘을 모아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지역에서 어떤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인이 함께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에 함께 힘을 모아야 비로소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인류는 새로운 문명사적 전환기에 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경륜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며 마스터플랜(Master Plan)입니다. 그것은 아담에게 복주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으로 계시되었습니다. 노아에게도 같은 복이 선포되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너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라’는 말씀으로 계시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시내산에서 계시되기를 ‘너희는 나에게 제사장의 나라가 되리라’는 언약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온 세상이 생명으로 충만하며 그 안에서 천하만민이 복을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바쳐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게 하시려고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 만민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하고 그의 은총 속에서 살아가는 세상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라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땅끝으로 보내셨습니다. 이제 교회를 통하여 온 세상은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받아 누리며 하나님이 오랫동안 마음에 품으신 경륜을 알고 행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가 이룰 그 위대한 사역을 이렇게 간단한 말로 요약했습니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23.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에베소서 1:3~5, 7, 23
하나님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시며,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며,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십니다. 여기서 아들들은 곧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세상을 물려받을 상속자를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교회를 부르셔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삼으시고 만물을 충만하게 하십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 하는 말은 몸이 어떤 사람의 존재를 나타내고 활동을 하듯이 교회가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생명 살리는 일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경륜은 세상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뜻으로서, 이 세상이 하나님의 은총과 복을 받아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모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포함하며,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을 포함합니다.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어 그의 통치를 받아 참되고 따뜻하게 살아 상생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할 때에 열리는 세상이 곧 만물이 충만하게 되는 세상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위대한 경륜의 빛에서 보면 현재 인류는 생명이 충만하기보다는 점점 시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자연재해와 질병과 경제적 불평등, 그리고 환경오염과 각종 갈등과 전쟁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 근본 원인은 인간의 탐욕에 있음은 명백합니다. 그러므로 이 위기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이 되게 하려면 인류에게는 생각의 대전환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탐심을 줄이고 협력과 상생의 세상을 위해 포용적인 자세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용어로 말하자면, 그것은 회개운동이며 복음의 정신을 실천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입니다.
현재 각국의 정부들은 쓰레기 배출을 줄이며 탄소발생량을 축소하기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국민들에게 협력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경륜과도 일치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적극적으로 이 일에 동참하고 모범을 보이며 이 운동을 선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새 생활 운동이며 가장 구체적인 하나님 나라 운동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시급하게 개선해야 할 마음가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베드로에게 있었던 배타적 유대중심주의라는 편견이 깨져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는 종교적 편견을 깨트리고 온 세상을 품으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종교적으로 배타성을 버리고 다원주의적 태도를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원주의(多元主義)라는 말의 의미는 ‘개인이나 여러 집단이 기본으로 삼는 원칙이나 목적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지난 2004년 5월 12일 불교대학인 동국대학교에서 조용기 목사를 초청해서 강연을 들었습니다. 불교경영자최고과정을 위한 그 강연에서 조용기 목사는 기독교인으로서 대단한 포용력을 보여주었으며 그 자리에 참석한 많은 불자들에게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일찍부터 전 세계를 누비며 복음을 전하고 세계인들을 많이 만나 대화하면서 조용기 목사는 어쩌면 다양한 종교에 속한 사람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사는지 깊이 이해하게 된 것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 강연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불교 집안에서 태어나 기독교목사로 있으니까 불교랑 같은 것이 너무 많아요. 내 마음이 부처라는 것도 예수님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마라 예수님은 네 마음에 있다 저 죽어서 서방정토세계가 아니라 지금 내 마음 속에 천당이 이루어져야지 죽고 난 다음에 천당을 바라지 마라
한국에는 지배종교가 없어서 아무리 정부에서 어떤 시책을 세워도 국민이 잘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불교가 왕성해야 겠고 기독교가 왕성해야 되겠고 불교와 기독교 간에 긴밀한 대화를 해야 겠습니다.
질문자: 제가 한 20년 전에 당했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학생이 예수밖에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길래 너희 목사님한테 물어보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물어봤다고 와서는 그 얘기를 또 합니다.
조용기 목사: 그렇습니다. 불교가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로서 장자 종교입니다. 불교가 만약에 차별성을 인정하지 않고 독선주의로 나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목사님들이 그 종교의 특수성과 그 차별성을 인정하지 않고 유아독존적으로 생각하므로 많은 분쟁이 생길 요인이 있기 때문에 제가 은퇴를 하고 나서는 더 많은 대화를 통해서 이해와 화해의 길을 모색해야 되어야 겠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종교는 평등합니다. (참석자들 박수)
우리 동생은 불교를 통해서 구원을 받겠다고 확신을 믿기 때문에 존중하고 인정하고, 나는 기독교 목사니까 기독교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을 인정하고 내 것만 절대 진리라고 인정할 수 없습니다. 너는 죽이고 나는 살겠다 그렇게 되면 상생의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것은 부처님도 예수님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비와 사랑의 원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2016년 1월에 한 개신교인이 경북 김천에 있는 개운사에 들어가 불당을 훼손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서울기독대학교 손원영 교수가 기독교인으로서 대신 사과하고 불당복구를 위한 모금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학교측은 2017년 2월에 손교수를 파면했습니다.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 한국문화신학회, 한국여성신학회는 성명을 내고 손교수의 복직을 촉구했습니다. 그 학교의 이사회가 손교수의 복직을 결정했는데도 대학총장과 학교 당국이 이를 따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4년동안 손원영 교수는 학교측에 복직을 촉구하는 일인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 학생들과 학교 당국은 여전히 그의 복직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6. 나가는 말
사도행전 10장에서 우리는 한 배타적 유대주의자가 세계시민을 품을 수 있는 사도로 거듭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는 부정한 음식을 결코 먹을 수 없다고 두번씩이나 하나님께 항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편견을 깨고 하나님의 경륜에 동참합니다. 그리고 그 경륜을 다른 신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베드로는 이방인의 사도 바울이 그 소임을 다할 수 있도록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도행전에서 그 이후의 이야기는 바울을 필두로 한 교회가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위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길이 얼마나 험난한가를 잘 보여줍니다. 끝내 자기의 편견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들의 방해와 고소를 받아 바울은 옥에 갇히고 맙니다.
조용기 목사가 동국대에서 강연을 한 후 3년이 지난 2007년에 도올 김용옥 교수는 조용기 목사와 만나 대화를 나누고 그 소감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얼마 전에 조용기 목사와 만남을 가졌는데 그는 다른 이웃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같은 입장이 80만 순복음교회 성도들과 전혀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점은 매우 아쉽지 않을 수 없다.”[1]
오늘 우리는 시대적 위기 앞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맡은 대리인들로서 여기에 있습니다. 마치 2천년 전 복음을 들고 이방인들에게 가기 위해서 베드로와 사도들이 배타적 유대주의라는 편견을 깨트릴 때 새로운 문이 열렸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도 배타적 기독교주의의 껍질을 깨고 포용적 세계시민의식을 가지고 다원주의적 세계 속으로 나아가 복음의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협력과 상생의 길을 모색한다면 우리 앞에는 선교를 향한 새로운 기회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끝>.
[1] 오마이뉴스 2007년 3월 29일자. https://news.v.daum.net/v/20070329105811177?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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