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의 월평(2008. 6월호)
주제의식의 의미화, 그 생명의 불꽃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전통적인 장르 분류법에 따르면, 수필은 교술 갈래에 속한다. 평자는 수필을 교술 장르로 구분하는 것보다는 '주제적 양식'으로 분류하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이미 헤르나디는 문학의 양식을 네 등분하면서 수필과 평론을 주제적 양식이라고 하였다. 김준오의 입장도 이 점에 있어서 일치한다. 교술이라는 말 속에는 주장한다는 말이 있어서, 가치 개념으로 볼 때, 교술은 수필의 내포를 다지기보다는 수필 외연의 확대를 가져 올 수 있다. 수필은 내용을 독자에게 직접 전달하는 주제 중심의 문학이기 때문에 '교술'보다도 주제적 양식이라는 갈래 분류가 수필의 장르적 본질을 더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고 하겠다. 내용은 직접화하되, 주제는 간접화하는 게 본격수필의 구성 전략이다. 결국 수필의 문학성은 주제의 의미화에 이르러 생명의 불꽃을 피우게 된다. 오창익의 <해당화>, 김주안의 <안개섬>, 유병숙의 <사마귀의 허세>, 김옥분의 <쉼표 하나>는 제재에 의식을 실어 주제를 겨냥한 작품들이다. 이번 월간평에서는 수필의 문학성과 품격을 나타내 보여주는 의미화의 과정을 "지라르의 욕망이론"으로 규명해 보겠다.
II.
오창익의 <해당화>는 일단 제재를 통해서 수필의 주제를 겨냥하고 있는 작품임으로 본격수필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주제와 제재 중심의 문학인 수필은 제재에 주제가 함축적으로 담김으로써, 즉 주제의식이 의미화됨으로 인해 작품으로 완성된다. 의미화란 주제의식을 구체화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자기화 수법이다. 쉽게 말해서 작가 나름의 눈으로 주어진 제재를 이해하는 마음인 것이다. 의미 부여인 동시에 의미 발견인 것이다. 의미화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감정의 표출만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대상을 보고 느낀 정서를 실감과 유리된 정서로 표현하고, 생활일상에 역류시켜거나 여과시켜 솔직한 자기 관조 또는 반조로 나아가야 한다. ‘해당화’는 바다의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뒹구는 흰 모래밭이 있기만 하면 아무 데서나 다부지게 피는 꽃이다. 작가는 바다 건너로 멀리 떠나간 임을 그리는 여인을 해당화에 비유하고, 그를 기다리다 지친 여심을 비바람에 진 빨간 꽃잎으로 상관화시켜 해당화를 ‘30대 여인의 각혈’이라 의미화하였다.
‘열정’이라는 주제를 구체화하기 위해 작가는 해당화의 애달픈 설화에서 ‘단장화’란 이름을 빌려 오기도 하고, 군번도 없는 전몰용사의 무덤가에 핀 가시나무 꽃을 이야기하고, 연분홍, 진분홍으로 피는 다알리아, 튤립, 카네이션 등의 서양 꽃을 불러와 해당화와 비교하기도 한다. 그리고 망부석의 꽃, 춘향을 닮은 꽃으로 상관화하여 주제를 열정과 기다림의 미덕으로 잘 승화시켜낸다. 전략적 글 쓰기의 표본이 될 정도로 이 수필은 체계화된 구조를 가지고 있어 미적인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지라르의 욕망이론에 따르면 제재인 해당화는 주제를 함축하고 있는 중간 매개체다. 주체와 대상 사이에 놓여 있는 주제를 수직적으로 그리는 수필은 주제가 외면화되어 작문이 되어버리지만, 주제를 중간 매개체를 통해 간접화하면 주제가 내면화되어 본격수필이 된다는 원리다. 이 작가가 자신이 원하는 대상 즉, 열정에 얽힌 사연을 말하기 위해 중간 매개체인 '해당화'를 이용하지 않았다면 이 수필은 그 이름 앞에 '본격'이라는 에피세트를 얻지 못하고 생활수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작품의 문학성은 주제와 제재의 상관화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언어예술적인 측면에서도 우수성을 발견할 수 있다. 수필은 논픽션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리얼리즘의 영역에 속하는 장르다. 따라서 수필어는 구체적인 표현을 진술 특징으로 해야 한다. “거센 바닷바람이 달려와 젖가슴을 풀어헤친 빨간 꽃잎을 포옹하고 격정적으로 몸부림치는, 뒹굴며 흰 모래를 뒤집어쓰는 진한 그 한밤을 상상해 보라. 강인한 생명력이야 어찌 되었건, 빗질도 하지 않은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초원을 향해 맨발로 달려가는 젊고 발랄한 20대 여인의 뜨거운 사랑이, 야성적인 정열이 거기 않지 않은가”라는 진술에서 ‘야성적인 정열’은 바로 이어지는 문단의 첫 문장, “격정의 밤이 깊어 한 줄기 밧줄 같은 소나기라도 쏟아져 보라” 는 문장으로 발전되면서, ‘정열’은 ‘열정’으로 승화되고, 그 꽃잎은 십여 년을 기다리다 지쳐버린 여인의 각혈로 의미화됨으로써 이 수필은 여기서 절정을 이룬다. 이 절정이 부담스러웠을까 아니면 수미상관의 오묘한 조화를 생각해서일까. 작가는 결말부에서 숨고르기를 시도한다. 해당화는 어느 새 원한에 사무친 망향의 넋으로 변환되어, 군번 없는 전몰용사의 무덤가에 핀 꽃으로 피어 있다.
김주안의 <안개섬>은 현대 사회의 한 특징으로 대변되는 ‘단절’과 ‘소외’현상을 ‘안개’ 이미지를 활용하여 잘 형상화한 작품이다. 현대인은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자기 모순이란 인간소외의 깊은 심연에 빠져 있다. 따라서 현대의 분위기는 한 마디로 소외 의식으로 가득 차있으며 소외 현상은 현대 상황의 모든 국면에 드러나 있다. 프리츠 파펜하임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물질적 재건의 놀라운 속도에도 불구하고, 음울함과 절망이 유럽의 사고를 강력하게 장악하고 있다면서 "인간소외의 자각"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설명하였다. 이 작품의 서두는 “충주댐이 들어선 후부터 고향 마을은 안개에 자주 갇힌다.”는 진술로 시작된다. 여기서 ‘충주댐’과 ‘안개에 자주 갇힌다’는 말은 주제의식을 상상화하는 시그널 코드로써 수필의 전개 방향을 암시해준다고 하겠다. 작가는 안개를 소리 없는 점령군으로 묘사하며, 고향에 살았던 원씨 아저씨네의 비극을 떠올린다. 원씨 아저씨가 죽고, 온 가족이 많은 빚을 안고 야반도주를 감행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그들의 잠적은 ‘안개처럼 사라졌다’로 묘사된다. 작가는 주제의식의 구체화를 위해 안개 이미지가 강하게 투영된 ‘안개마을’이라는 영화와 한수산의 ‘안개시정거리’라는 소설의 내용을 빌려 온다. 영화와 소설은 모두 인간의 이중성과 산업화로 인한 인간 관계의 소외와 단절을 고발하는 작품이다. 작가는 원씨 아저씨의 비극적 삶을 안개와 상관화시켜, ”우리 마을은 매일같이 들어차는 안개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섬으로 가두고 있다“고 진술하고, 이어 ”고향 마을의 원씨 아저씨도 평생을 지독한 안개에 싸인 깊은 섬을 안고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무게에 눌러 아무도 모르는 사이 날마다 무너져 갔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 작품은 우리 사회 또는 우리 인간의 내면, 그 보이지 않는 곳을 예리하고 관통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
스피어즈는 그의 주지주의 문학론인 <디오니소스와 도시>에서 현대의 특성을 '단절'(discontinuity)이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다. '단절'이란 어떤 대상과도 관계를 끊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이 시대에 오면서 모든 사물들이, 내적이든 외적이든, 서로 맺고 있던 관계를 상실하고 하나의 원자적 개체가 되어 존재함을 의미한다. 일종의 불연속의 관계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 인간과 사회의 관계, 나아가 인간과 신의 관계마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소외라고 불러 왔다. 현대인들이 보여주는 삶의 특성인 이러한 단절 현상 혹은 소외 현상은 김주안의 수필에서 ‘안개섬’으로 의미화되고 있다. 인생무상의 세태에 한 번쯤 경종을 울려줄 만한 내용이다. 사회 현실의 민감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한 김주안 특유의 섬세한 묘사가 부조리하고 암울한 사회현실을 잘 그려내고 있으며, 결국 통속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의지력으로 인한 인간과 사회와의 갈등을 ‘안개 이미지’로 잘 형상화하였다고 하겠다. 이 수필 속에 들어있는 인간 내면의 소외는 앞에서 진술된 바와 같이 원초적이라기보다는 댐의 건설이라는 문명 비판의 관점과 함께 형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현대인의 위기가 무엇이었나를 짐작하게 해 준다. 그리고 김주안의 수필은 당대 사회 현실의 조명이라는 차원에서 읽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성벽을 쌓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소외의 양상을 보편적으로 다루었다는 측면에서 주목된다.
III.
문학은 전체성의 범주에서 보면 현실을 일깨우는 작은 충격이어야 한다. 수필의 출발은 작지만 큰 발견이고 인식이어야 한다면, 유병숙 작가의 <사마귀.의 허세>는 그런 측면에서 자기 성찰의 발견과 인식이 돋보이는 수필이다. 수년에 걸친 자신의 영어 공부 편력을 수레 앞에 서서 앞발을 머리 위로 추켜든 사마귀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한 표현이 본격수필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영어 공부의 중압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마음의 부담만 안고 살아가는 이 형국을 두고 작가는 ‘허세’라 하였다. 반어적인 의미를 담아 현재의 영어 교육 정책을 넌지시 비판한다. 주제의식을 사마귀의 무모함에 빗대어 의미화하고, 그 허세를 성찰의 기회로 삼아 현실 비판적 의도를 살며시 드러낸 작가의 기량에 박수를 보낸다. 영어 정복으로 가는 길의 모습을 발가벗겨 그 참상을 문학적 감동으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문학적 안목이라는 것은 대상을 그 대상의 속성 자체로 재인식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연결고리를 만들어 가는 작업이다. 그 연결고리의 한 켠에는 언제나 인간과 삶이 존재한다. 작가는 주제의식을 생활 속에 여과시켜 내었기 때문에 독자와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자라르의 욕망이론에 따르면, 주체의 욕망은 주제 자체에 대한 순수한 욕망보다는 대상과 중개자 서로간의 상관 관계에서 촉발되는 측면이 크다. 중개자는 주체가 상대를 욕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주제를 간접화하는 것이다. 김옥분의 <쉼표 하나>는 병과의 전투 중에 있으면서도 긍정적인 태도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는 맏동서의 빠른 쾌유를 비는 소원을 ‘쉼표 하나’란 말로 잘 의미화시켰다고 하겠다. 투병 생활이 짧은 쉼표 하나에 머무는 휴식이길 바라는 작가의 기도가 담겨 있는, 서정이 넘치는 감동의 글이다. 본격수필은 결말에서 제재가 주제를 의미화하고 있어야 한다. 작가는 지라르가 말했던 결말의 극치를 주제와 제재의 '상관화'를 통해 여실히 보여주어야 한다. 위에 열거한 수필들은 나름대로 주체의 의도를 숨기고 있는 제재를 통해 주제의 내면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는 작품이라 하겠다. 미적 구조로서 문학은 미적 감동의 창출이 필수적이다. 수필이 제재를 통해 주제를 겨냥하는 문학인지도 잘 모르고 수필을 쓰는 사람은 이번 기회에 "문학을 독자에게 주는 효과만으로 판단하려는 것은 '감정의 오류'에 빠진다"고 한 버즈레이나 윔세트의 말에 귀를 기울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