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맥(6)-가야국(加耶)의 성립과 허황옥(許黃玉)
註) 어떤 분이 역맥 시리즈가 진실 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진실인지 아닌지는 그 시대에 살아보지 않은 본인으로서도 확인할 길은 없다.
허지만 역사는 기록과 구전과 유물의 고증을 통한 후세사람들이 쓰는 것이다.
공자의 춘추와 사마천의 사기(史記)가 진실이냐 묻는다면 누가 대답할 것인가.
역사의 왜곡은 외부적 세력과 내부적 자료빈곤으로 이루어지는 게 대부분이다.
우리의 역사는 대부분 고려와 조선, 일제 침략기를 통하여 쓰여진 것을 감안하면
어느 시대 한번 중국과 일본과의 역학적 관계를 고려치 않을 수 있었겠는가.
우리가 배운 역사는 주로 고려 때 쓰여 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존한다.
그것도 가야국의 역사는 일연스님의 삼국유사에만 의존하다보니 전설이나 신화(神話)처럼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또 우리의 자료와 유물도 주요부분이 해외 반출된 상황이라 부득불 중국과
일본에서 비기(秘記)로 감춰진 주변자료들을 참조치 않을 수 없는 것이었기에
역사 학자도 아닌 어떤 재미한국인 무역업자가 중국, 만주, 일본, 한국을
넘나들며 10년에 걸쳐 자료, 구전, 유물등을 확인하여 정리한 자료이다.
단군사관을 正史로하기에는 아직도 주변국들의 눈치를 봐야하는 사대국이고
일제침략기를 통한 식민사관은 아직도 우리 6000년의 주체적 역사관을 피력하는
사학자들을 무시하는 풍토이지만 우리도 강국이 될 때는 주체적 사관과 객관적 사료에
의한 우리의 역사가 바로 세워질 것이라는 바램 하에 이글을 연재한다.
역사는 민족적 감과 믿음만 있으면 그 민족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창작 소설 같은 이스라엘 역사도 누가 시비를 거는가...
죽기 전에 우리의 역사, 우리의 정체성을 생각하며 읽어주는 몇 분만이라도
계신다면 이 기록은 두고두고 보존될 것임을 보람으로 여긴다. 사설이 길어 죄송...
1. 김수로의 구야한국(拘耶汗國)설립
2천년 넘게 이어오던 대쥬신 제국이 어이없이 자멸하고 해모수가 북부여를
일으키고 고두막칸이 졸본부여를 세웠으나 구쥬신 제국의 잔존 중신들에 대한
처우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중국에서는 산동지역의 지배권을 찾이 할려는 한(漢)족의 침탈이 계속되니
북방의 전란에서 실패한 영웅들은 남으로 남으로 밀려 내려왔다.
B.C.200년-A.D.50년 사이 말쥬신의 관활 지역으로서 공지(空地)와도 같이 평화
롭던 한반도의 남쪽지역은 이러한 인물들에 의하여 나라가 새로 세워진 셈이다.
삼한(馬,辰,卞韓)의 왕들은 봉지(封地)로 축출된 몰락한 쥬신 제국의 왕손들
이었고,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아버지 우거수호공은 흉노족에 패하여 이주한
장군이었고, 百齊시조 비류와 十齊시조 온조 역시 고구려 왕위계승에서 밀려
내려온 왕자들이었고, 석탈해는 낙랑 침범에 쫓겨 배를 타고 남하한 용성국왕
이었다.
이러한 때 이미 망해버린 불쥬신의 왕손 이비가(夷毘訶)도 일단의 추종세력을
이끌고 반도의 남쪽으로 새로 정착할 땅을 찾아 내려왔다.
처음 도착한 곳이 미오야마(지금의 陜川, 高靈) 땅이었다. 미오야마의
감산(지금의 가야산)에는 정견모주(正見母主)라는 원주민 여인이 산신지기
무당으로서 백성들의 삶을 완전 장악한 군왕과 같은 존재로 살고 있었다.
남의 땅에 정착하려는 이비가로서는 너무도 순박한 원주민들과의 싸움보다는
협력을 구하는 게 도리인지라 원주세력의 중심인 정견모주에게 결혼을
신청하게 된다.
영웅을 애타게 기다리던 정견모주 여인 역시 이비가의 영웅 됨을 알아보고
쾌히 응락 하여 함께 새 나라를 세우니 이를 미오야마(彌烏耶馬)국이라 한다.
당시 지리산 서쪽은 평야지역이라 서로 찾이 할려고 으르렁거리는 패들이
많았으나 동쪽은 산으로 둘러 쌓여 있다 보니 싸움 한번 없이 조용히 살던 곳이었다.
정견모주는 이비가의 두 아들을 두게 되는데 큰아들 이름이 뇌실주일(惱室朱日;
붉은해)로서 이비가의 뒤를 이으니 이분이 후에 대가야의 시조로 불리는
이진아고(伊珍阿鼓) 왕이시다.
둘째아들이 뇌실청예(惱室靑裔;푸른자손)로서 기골이 장대하고 위풍당당 하였는데
이분이 후일 김수로(金首露)왕이시다.
형 뇌실주일(이진아고 왕)은 동생 뇌실청예(김수로)를 대장군으로 삼아 마한에
조공하던 소국들을 정복, 5개의 연방국을 세우니 1)미오야마(陜川) 2)아라(阿羅)
3)고령(高靈) 4)별뫼(星山) 5)구지(古資)국등 이다.
5개연방국의 5칸(땀)회의에서 푸른자손(김수로)대장군을 전공(戰功)보상으로
빈 영지로 있던 구야(拘耶;지금의 김해)지역에 새 나라를 설립, 형님 나라인
5칸(땀)연방국을 보호토록 승인하며 미오야마 보기 군 900명을 배속시켜 주었다.
강력한 통치자가 없었던 구야(김해)지역 원주민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장군을 맞이하여
새 나라를 세우니 이를 김수로왕의 구야한국(拘耶汗國)이라한다.(서기5년)
김수로의 수로(首露)는 이름이 아니고 우두머리 호칭이다.
용성국의 석타래가 김해 앞바다에 배를 정박해 두고 있던 때가 그 후였고
여기에서 김수로와 협상하여 석타래는 큰무라(경주)로 옮기게 된다(서기50년경)
2.가야(加耶)와 보주대후 허황옥(許黃玉)
인도 열국의 대제국 코살라국의 수도 아유타 남쪽에 가야(GAYA)라는 소왕국이
있었는데 막 전파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엄격한 인도의 신분제도를
없애는데 가야국이 앞장서고 있으니 대국 코살라가 소국 가야를 가만 둘리 없었다.
(참고; 가야(加耶)는 가라(加羅)라고도 하는데 인도말로 물고기가 있는 못(池)을
뜻하며 쌀과 물고기가 주식인 가야(인도)의 국가문양도 물고기 표시를 하였다.)
코살라에 초토화된 인도북부의 가야국왕은 주민들을 데리고 망명하여 중국남쪽의 쓰촨
(四川)지방 안악, 보주(普州)에 자리 잡았다.
마침 이곳을 순찰 중이던 전한(前漢)의 중앙관리가 미색이 빼어난 한 여인을
발견하여 장안성의 원제(元帝)에게 바치니 그녀가 바로 인도가야인 출신 왕정군
(王政君)이다. 왕정군은 집안 조카 왕망(王莽)에게 대사마 벼슬을 주어 실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펴니 중국인들은 그녀를(왕정군) 안한공(安漢公)이라 칭송하였다.
왕망(王莽)이 한(漢)의 유간(劉杆) 평제(平帝)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으나 15년만에
漢군의 손에 역적으로 죽게 되니 (왕망 이후를 東漢이라 부름) 가야인들은 또다시 뿔뿔이 흩어져 살길을 찾았다.
이중 브라만 계급의 허씨 (許는 버르마 신전의 巫師였으나 후에 姓이됨)가
이끄는 한척의 배가 양쯔강을 거쳐 황해를 건너 구야(拘耶;김해)땅에
도착하게 된다.
이 배안에는 브라만 허씨를 중심으로 많은 무사들과 금은보화를 가득 싣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값진 보배는 지도자 허(許)씨의 여동생 허 황옥(許黃玉) 이었다.
김수로왕을 알현한 허씨 일행은 금관, 보물과 함께 여동생을 진상하며 살 곳을
간청하자 김수로는 이를 쾌히 승낙 하였다.
뜻밖의 선물 16세의 아리따운 처녀를 하늘이 준 선녀로 착각할 만큼 반해버린
김수로왕은 즉시 혼례식을 올리니 이분이 보주대후 허황옥(허황후 라고도 함)
으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결혼인 셈이다.
김수로왕은 허황옥이 가져온 많은 재물을 이용 국력을 크게 일으키고 나라
이름도 처갓집 나라 국명을 따라 가야(加耶)로 바꾸고 황금 관을 지녔다하여
금관가야(金冠加耶혹은 금관가라(加羅)로 지었다. 국력이 쎄어진 김수로와 허황옥의
금관가야는 스스로 오칸동맹(五汗同盟)의 종주국이 되어 나라이름을 모두
가야(加耶)로 고쳐 부르게 하고
미오야마(합천)국을 대가야(大加耶)로 불러 형님대접을 하면서 자신의
금관가야를 합쳐 고령가야, 별뫼(星山)가야, 아라가야, 구지가야를 통틀어
6가야 동맹체를 형성하여 낙동강 일대를 석권 하였다.(이때가 서기24년)
(註;가야(加耶)나 가라(加羅)는 우리말로 주변 땅이라는 의미인데 인도가야국
의 물고기가 있는 연못을 의미하는 GAYA와 발음상 일치하고 있음)
삼국유사에 의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금합속의 황금알6개가 부화하여 6명의
동자가 태어나니 이들이 장성하여 6가야를 세웠다고 했는데 이는 다만 설화
일뿐 현실역사로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삼국유사도 주변국눈치를 봐야하는
고려 때 쓰여 진 책이다.
(김해金씨의 시조 뇌실청예(惱室靑裔)가 김수로(金首露)로 불리게 된것은 혹시 금관(金冠)가야국의 우두머리 라는 데서 유래된 것은 아닌지 추측해 볼 수도 있다.
김수로왕의 아버지 이비가와 형님 이진아고 왕을 金씨로 부르지는 않았다.)
김수로왕과 허황옥 왕비 사이에는 10왕자를 두었는데 첫째 왕자 거등(居登)은
김수로를 이어 2대왕이 되고, 둘째, 셋째 왕자는 거등태자의 성격이 포악한 점을
염려, 왕위계승 다툼을 없애고자 허황후는 둘째, 셋째 두 아들들의 성을 어머니 성씨
허(許)씨로 바꾸게 하였으니 아직도 김해김씨와 허씨는 혼인을 꺼린다.
넷째 왕자는 절을 지어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전파에 노력하였으나 수두삼신(天,
地,人)사상에 철저한 민간신앙의 벽에 걸려 실패하고 만다.
나머지 6형제는 대마도와 규슈로 진출하여 임라(任那) 6가라(加羅)를 세운다.
이와 같이 가야(加耶)는 건국초기부터 신라, 백제보다 더 찬란한 문화가
있었건만 신라와 백제의 그늘에 가려 역사의 뒤안길에 뭍혀 있음이 애덟다.
다음은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와 일본천황의 역사및 십제의 백제계승에 대하여 알아본다. 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