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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국훈독경 (天一國訓讀經)
제4권 참부모와 나 - 제9일
참부모와 나
날짜 : 1973. 6. 27(수)
장소 : 미국 벨베디아수련소
1. 참부모의 현현은 소원성사의 출발점
오늘날까지 역사가 찾아 나온 중심, 세계가 찾고 있는 중심, 그리고 미래가 바라는 중심은 무엇이냐? 참사랑을 중심 삼은 참가정입니다. 참가정은 역사적인 소원의 실체요, 시대적인 소원의 중심이요, 미래적인 소원의 출발입니다. 다시 말해서 참가정은 역사적인 결실, 즉 역사적인 부활체요, 온 세계 앞에는 세계적인 중심이요, 미래 앞에는 원칙적인 출발의 기점입니다. 참사람과 그 참사람을 중심 삼은 가정은 역사적인 소원이 이루어져야 나타납니다. 참사람으로서 참가정의 목적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신랑입니다. 그 다음에 신부와 신랑이 합해져서 참가정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참사람이 나와서 참가정을 이룸으로써 무엇이 벌어지느냐? 참가정이 나왔으니, 그 다음에는 참부모가 나와야 됩니다. 참부모가 나오면 참가정이 정착되는 것이요, 참사람의 목적도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과거나 현재 혹은 미래에 영원히 찬양받을 수 있는 이름이 무엇이냐 하면 참부모입니다. 참부모가 이 땅 위에 현현했다는 사실, 참부모가 이 땅 위에 계신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기쁜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인간을 악이 주관함으로써 방향이 갖추어지지 못한 사망권의 세계에 참부모의 인연이 성립된 것은 오늘날 한국 강토를 중심 삼은 통일교회의 역사 17년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6천 년 동안 하나님이 수고하신 공적의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많은 인간들이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방향을 가리지 못하는 이 시대에 갈 곳을 찾아 주고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하나의 중심적인 모델로서 나타난 것이 참부모입니다.
참부모의 이름이 나옴으로써 창조이상의 세계, 에덴 동산에서 출발되어야 했던 영원한 미래의 천국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전체적인 역사를 통틀어 볼 때, 이 땅 위에 현현한 참부모라는 이름은 우주의 중심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여기에서부터 열매가 맺히고, 역사는 여기에서부터 수습되고, 역사는 여기에서부터 출발되는 것입니다. 역사가 여기에서 열매가 맺히기 때문에 과거가 여기에서 부활되는 것이요, 세계가 여기에서 하나의 세계로 수습되는 것이요, 그 하나의 세계가 기원이 되어 새로운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부모가 나오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역사시대에서 인류의 소망이 어디에 있었느냐? 그 소망은 미래에 있었습니다. 인류는 소망을 미래의 것으로만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면 인류는 어디를 향하여 가느냐?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의 세계를 향해서 갑니다. 미래를 두고 하나의 세계를 모색합니다. 그러므로 거짓된 인류 가운데서 참부모를 맞이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모두 다 기뻐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의 소원은 참부모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참부모는 인간의 최고의 희망이기 때문에 참부모가 현현하면 역사적인 전통은 미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참부모가 현현한 현실권 내에서 성사되는 것입니다. 참부모가 나타나면 참부모가 나타난 곳이 역사의 출발점입니다.
그런 때가 오면 앞으로의 역사는 어떻게 되느냐? 참부모가 나오게 되면 그 참부모를 중심삼은 생활권은 영원토록 전통의 기준으로 남아지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천 년을 걸어가게 되면 인간이 미래를 바라보며 소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천 년 전의 이 때를 본받는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타락한 인간은 하나의 세계를 모색해 나왔지만, 하나의 세계를 이룰 수 있는 중심으로서 참부모가 나오게 되면 만민은 그 참부모의 전통을 본받아 나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면 갈수록 그 판도가 넓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역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참부모의 가정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6천 년 역사는 무엇 때문에 있었느냐? 참부모의 가정을 남기기 위해서 있었습니다. 오늘날 인류는 무엇 때문에 허덕이고 있느냐? 참부모의 가정을 만나기 위해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또, 우리의 후손들은 무엇 때문에 있느냐? 참부모의 후손들을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참부모의 나라를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니요, 참부모의 세계를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참부모의 나라와 세계는 참부모가 나오면 자연히 나타나게 됩니다. 참부모의 후손들을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나라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참부모를 중심삼은 생활을 필요로 하는 때가 바로 우리의 시대입니다. (44-133)
2. 모든 것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기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참부모가 와야 됩니다. 타락한 부모가 아니라 참부모가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참부모라는 말은 생각지도 않은 입장에서 찾아지고 만나지는 그러한 말이나 내용이 아닙니다. 이것은 역사상에 처음 나타난 말이요, 혁명적인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역사에 없었던 기적적인 것입니다.
참부모라고 할 때, 참이라는 말은 지금까지 왔다갔던 수많은 부모들의 사랑을 능가하면서 한 번밖에 없는 사랑을 가지고 나타났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런 기준을 지녔기 때문에 참부모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이때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면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이 비로소 처음으로 받는 최고의 기준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왔다갔지만 예수님도 상상하지 못한 최고의 이상적인 것입니다.
참부모를 중심삼은 거기에서부터 이상적인 역사의 출발, 새로운 문화의 출발, 새로운 사랑의 출발, 새로운 인생의 출발, 새로운 가정의 출발, 새로운 국가의 출발, 새로운 세계의 출발이 벌어지고 하늘나라와 하나님의 사랑의 출발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 참부모라는 말은 그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그런 내용의 말이 아닙니다. 이런 자리까지 올 때는 역사과정에서 그 대가를 치르고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는 수많은 제물의 피가 호소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아벨이 피를 흘림으로써, 가인한테 죽임을 당하고 피를 흘림으로써 하늘에 참소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 역사를 전부 다 해원성사할 수 있는 자리가 참부모라는 자리입니다. 인간은 타락함으로써 고향을 잃어버렸습니다. 또, 나라를 잃어버렸고 세계를 잃어버렸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늘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까지 잃어버렸고, 하나님의 사랑까지도 잃어버렸습니다. 이런 방대하고 엄청난 모든 것을 다시 찾을 수 있는 하나의 기원이 무엇이냐 하면 참부모라는 놀라운 명사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소원해 오신 섭리의 목적이 무엇이냐? 참부모의 기준입니다. 인간의 타락 이후 지금까지 탕감역사를 해 나오신 것은 참부모를 찾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지금까지 재림의 날을 기다리는 것도 이것을 위한 것이요, 수많은 종교가 바라고 있던 것도 이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할 때, 참부모가 나타난 것은 무섭고도 놀라운 사건입니다.
참부모의 기준이 나오면 자기는 근본적으로 패배할 것을 알았던 사탄이 이때가 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거짓부모의 자리에서 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고 수많은 피의 대가를 치르게 했습니다. 이 날이 오기까지 끔찍한 희생이 치러졌다는 것입니다.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와 세계적으로 희생시켜 나온 사탄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부모의 길을 찾아 나오던 우리의 형제들이 얼마나 끔찍한 피의 대가를 치렀는가를 알아야 됩니다. (67-226)
3. 참부모란 말은 기쁘고 좋으면서도 무섭고 두려운 말
선생님은 이 자리에 올 때까지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렇지 않고 확실한 신념이 없이 그저 따라만 나왔다면 뜻을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확실한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절대적이고 틀림없는 길로 알고 틀림없는 승리를 다짐하면서 출발해 가지고 오늘과 같은 승리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선생님의 신념을 꺾기 위해서 수많은 개인들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까지 반대했지만 선생님이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전통을 통일교인들이 이어받아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결심을 하고 이어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다시 말하면 “세계의 끝까지, 하늘 끝까지 달려가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하는 신념을 가지고 강하고 담대한 자리에서, 하나님이 보시게 될 때 놀랍도록 감사하는 자리에서 이어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세를 보고 상속해 주고 싶은 것이 하늘의 마음이요, 스승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것들, 세상이 어떻게 되는지를 모르는 것들을 데려다가 가르쳐 주는 이 자체가 처량합니다. 이런 교육을 받는다는 자체가 부끄러운 일입니다. 선생님이 80이 넘도록 수난의 길을 거쳐왔는데 그것을 몰랐다는 사실 자체가 부끄럽고, 그런 입장에서 선생님을 대해 왔다는 게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라도 일년에 그 몇 백배의 수난의 길을 가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루어 드리겠다고 결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통일교인들이 잘나서 통일교회에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나 한 사람을 여기에 들여보내기 위해서 수많은 선조들이 몇 백년, 몇 천년을 표준해 가지고 이때를 준비해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볼 때, 무슨 자격이 있습니까? 아무런 자격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어서 이런 자리에 들어오게 되었느냐? 그것은 자기 때문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선조들의 공적을 통해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잘못하면 선조들의 앞길이 막힙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받들지 못하여 이스라엘의 모든 운명이 막혀 버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은 많은 피를 흘린 탕감의 역사를 치렀습니다. 자기 자신이 이러한 축복을 받았는데, 여기서 자신이 잘못하면 자기의 후손이 얼마나 큰 탕감을 치러야 할지 모릅니다. 이런 무서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제1이스라엘이 영육을 중심삼은 승리의 터전을 갖추지 못하고 전부 다 제2이스라엘에게 넘겨주고 아무것도 없었던 자리, 버려진 백성과 같았던 자리에서 어디에 가든지 차이고 몰리던 역사를 거쳐왔습니다. 그래서 통일교회에 들어왔다가 떨어져 나가는 날에는 아무것도 되는 법이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우리 통일교회를 정면으로 반대하던 장본인이 탕감받지 않으면 그 아들딸이 탕감을 받게 됩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가정, 종족, 민족, 국가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참부모라는 말은 무섭고도 두려운 것입니다. 이것이 기쁘고 좋은 말이지만, 반면에 무섭고 두려운 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발짝을 잘 내딛는가, 잘못 내딛는가에 따라서 내 일대는 물론이고 조상들과 후손들까지 왔다갔다하는 것입니다. (67-229)
4. 참부모의 아들딸로서의 권위와 위신과 체면을 세워야
외적인 세계의 문제보다도 내적인 세계의 문제가 더 복잡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내적인 세계의 복잡한 것을 수습한 다음에 외적인 세계를 수습하려고 합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까지 내적인 세계의 복잡한 것을 수습해 놓았습니다. 기독교에서 외우고 있는 주기도문 가운데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내적인 세계에 이룬 것을 외적인 세계에 이룬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문제를 지금까지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수습해 나왔기 때문에 지금 통일교인들이 선생님을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않고 외형적으로 대할 수 있지, 만일 그러지 않았다면 그냥 대하려야 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통일교인들은 원리를 배움으로써 그것을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배후에서 어떤 길을 거쳐왔는지 몰라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냥 “내가 여기서부터 살고, 여기서부터 가고, 여기서부터 죽겠다.” 하는 신념만 가지면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전기공학 같은 방면의 과학자들이 일생을 걸려서 연구해 가지고 만든 공식도 있고, 수십 명의 과학자들이 협동해서 만들어낸 공식도 있습니다. 그 공식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배후에서는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몰라도 괜찮습니다. 공식만 외우면, 그것을 인계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그 내용을 파고 들어가야 됩니다. 깊은 자리까지 가려면 그렇게 찾아 들어가서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앉아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통일교회의 내용이 사실이냐? 하나님이 진짜 그렇다고 인정하시고, 진짜 역사가 그렇게 되었고, 이 진리가 사실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이것은 굉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사실인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깊은 심정의 세계에서부터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문제를 경험해야 합니다. 여러 역사적인 위인이나 성현들과 현재 영계를 통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증거시킬 수 있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이제는 안 믿으려야 안 믿을 수 없는 자리에 섰습니다. 영계를 통하는 사람들한테 물어보더라도 “문 총재….” 하게 되면, 벌써 어느 수준에 올라간 영들은 말을 못 하고 머리를 숙이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그런 기반이 닦아졌습니다. 이제는 모든 학문적인 견지에서도 선생님의 사상을 안 받아들일 수 없는 끝날이 되었습니다. 역사를 부정하지 않는 한 선생님의 말씀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실정을 안다면 일국의 왕이 문제가 아니요, 일국의 대통령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러한 굉장한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우리들, 그럴 수 있는 나로서의 권위와 위신 그리고 체면이 있습니다. 어떤 왕족이라도 권위가 있고, 어느 국가의 대통령이라도 권위를 자랑하고 있는데 역사이래 처음 나온 참부모의 아들딸이 되겠다고 하는 통일교인들이 그런 자세를 못 갖추고 위신을 못 갖추어서야 되겠어요? 그러니 껄렁껄렁해서는 안됩니다.
미국에서 유명한 하버드 대학이라든가 권위 있는 대학에 들어가려면 어느 누구도 참소할 수 없는 기준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통일교인들이 형편없다면 하나님의 위신이 서겠어요? 머리로 생각하는 것도 전부 다 공적이요, 공식적인 생각을 해야 할 텐데 시시하게 개들도 생각지 않을 것을 생각하고 있다면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통일교인들은 참부모의 아들딸로서의 권위, 하나님의 아들딸로서의 권위와 위신 그리고 체면을 세워야 됩니다. (67-232)
5. 역사상의 어떤 조상보다도 나아야 한다
그러니 우리는 이래도 좋아하고 저래도 감사해야 됩니다. 그러면서 “야, 선조는 나에게 이런 복을 주기 위해서 고생을 했다. 그것을 알았으니 내가 역사를 점령할 수 있는 한 기쁜 날을 가져야 되겠다.”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내가 활동함으로써 역사가 나와 더불어 부활되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부활하려면 죽은 자리에서부터 부활해야 되기 때문에 내가 죽을 자리에 가서 수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통해서 거기서부터 솟구쳐야 됩니다. 그래야 부활됩니다.
이제부터는 불평해서는 안되고 무조건 감사해야 됩니다. 통일원리를 공부할 때 힘들지만 깊이 앎으로써 심정세계에서 내 소유와 활동무대가 넓어진다고 생각하면 잠이 문제가 아니고 노는 게 문제가 아니고 먹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한 것 이상, 그 몇 백배로 열심히 공부했다는 기록을 남겨야 됩니다. 졸음이 오는 시간에 배우는 한마디 한마디가 자기의 일생에 있어서 성공을 가져오는 문제일 수 있습니다. 졸음이 올 때 일생을 좌우하는 문제가 지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천년의 한이 맺힐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통일교인들은 뜻을 대해서 심각해야 됩니다. 부모가 죽었을 때보다도 더 심각해야 되고, 아들딸이 죽을 때보다도 더 심각해야 되고, 나라가 망했을 때 슬픔을 느끼는 것보다도 더 심각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미급했던가를 생각해야 됩니다. 뜻을 중심삼고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얼마나 불경스러웠던 자신들이었던가를 발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한마디 한마디의 원리말씀에는 선생님의 피눈물이 젖어 있고 역사적인 피눈물이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나올 때까지 선생님이 눈물을 얼마나 많이 흘렸을 것 같아요? 이 길을 찾아오면서 솜바지가 다 젖도록 기도하면서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룻밤 안 자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일주일을 뜬눈으로 새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선생님은 어느 누가 “당신은 이런 사람이지요?”라고 한 마디만 하면 목을 놓고 통곡할 수 있는 심정을 지니고 사는 사람입니다. 선생님은 불과 80년 정도밖에 안되었어도 그러는데, 수천 년의 역사시대를 거치시면서 무수한 수난을 당하신 하나님은 어떻겠습니까? 그런 것을 선생님은 알았기 때문에 고문을 받고 피를 토하던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해 본 적이 없었고, 도리어 위로해 드렸습니다.
선생님은 피를 토하면서도 “아버지여, 이 아무개의 피는 옛날에 죽어갔던 기독교인들의 피와는 다릅니다. 저는 당신 앞에 피 흘리니 알아 달라는 그런 졸장부가 아닙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에게는 당신의 동정이 필요 없습니다.” 하는 기도를 하면서 나왔습니다. 하나님한테 협조해 달라는 기도를 안 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을 때 “내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하면서 기도했지만, 선생님은 그런 기도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생님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세계의 통일교인들은 선생님과 말도 통하지 않고 풍습도 다른데 마음속으로 선생님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런 걸 보면 선생님을 동정하는 마음을 갖게 하지 않으면 안 될 하나님의 책임이 있는 모양입니다. 살아생전에 이렇게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그와 같은 심정을 가지고 사모하는 역사에 처음 있는 사나이가 선생님입니다.
예수님을 보더라도 죽은 다음에 그렇게 되었고, 공자나 석가도 죽은 다음에 그렇게 되었으며, 마호메트도 죽은 다음에 그렇게 되었지만 선생님은 일대에 그런 기반을 닦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인들을 아무리 고생시키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안됩니다. 고생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여자라도 강하고 담대해야 됩니다. 역사시대의 우리 조상들보다도 나아야 됩니다. 조상들 가운데 어떤 할머니보다도 나은 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남자들도 역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67-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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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주
하늘부모님 천지인 참부모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