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곡(玄谷) 조공(趙公, 조위한)은 행실이 탁절(卓絶)하고 우뚝 빼어나서 젊은 나이에 어려움을 당하였고, 다시 몸을 펴서 밝은 세상을 만나서도 또 뜻을 따라 일을 말하였으니, 그 용사(用捨)가 서로 반반이었다. 논자(論者)가 말하기를, “한구(韓歐)의 복의1)(濮議)는 여러 선현(先賢)들과 자못 달랐기 때문에 심지어 팽공2)(彭公)에게 무거운 탄핵을 받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 일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한구를 하찮게 여기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공은 휘(諱)가 위한(緯韓)이고, 자(字)는 지세(持世)이며, 본관(本貫)은 한양(漢陽)으로, 그 원대(遠代)의 계보(系譜)는 정암 선생(靜庵先生, 조광조(趙光祖))과 같다. 증조(曾祖)는 조방언(趙邦彦)으로 참판(參判)을 지냈고, 할아버지는 조옥(趙玉)으로 현령(縣令)을 지냈다. 아버지는 조양정(趙揚廷)으로 벼슬하지 않았고 판서(判書)에 추증(追贈)되었는데, 예법으로 집안을 잘 다스렸다. 어머니는 한씨(韓氏)로 모관(某官, 청안 현감(淸安縣監)) 모(某, 한응성(韓應星))의 딸이다.
공이 태어난 지 서너 해 되었을 때 할머니인 오 부인(吳夫人)이 그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한 것을 좋아하여 말하기를, “이 소리는 내 귓가에 들리는 사죽(絲竹, 관현악을 말함)이다.”라고 하였다. 10세 때에 시를 지었는데 그 나이에 벌써 사치(思致)가 있었고, 16세 때 선진(先秦)의 고문(古文)을 두루 읽었으며, 장옥(場屋)에서 누차 상등(上等)을 차지하였다. 기축년(己丑年, 1589년 선조 22년)에 상(喪)을 당하여, 겨우 염빈(殮殯)을 하자마자 모부인(母夫人)의 병이 위독하였는데, 공은 모부인의 대변[泄痢]을 맛보아 병세를 살피고 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서 모부인에게 드렸다. 갑오년(甲午年, 1594년 선조 27년)에 모부인의 상을 당하여 예제(禮制)보다 더욱 슬퍼하였다.
신축년(辛丑年, 1601년 선조 34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계묘년(癸卯年, 1603년 선조 36년)에 중림 찰방(重林察訪)에 제수되었으며, 평천(平遷)하여 주부(主簿)와 감찰(監察)에 올랐고 마침내 기유년(己酉年, 1609년 광해군 원년)의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에 앞서 10여 년 동안에 왜구(倭寇)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므로 일찍이 김덕령(金德齡) 장군을 따라 군려(軍旅)의 일을 시험하였는데, 명(明)나라 장수 중에 공을 사랑하는 자가 있어서 공은 그를 따라 중국에 들어가 천하를 두루 구경하려고 하였으나, 조정에 있는 선배(先輩)가 공이 세상일을 유락(遺落)하려는 것을 알아채고서 공을 석주(石洲) 권필(權鞸)과 함께 관직에 제수함으로써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옭아매었다.
대과(大科)에 급제하고 나자 광해주(光海主)가 막 즉위하여 뭇 소인배들이 더욱 설쳐댔다. 소인배들은 공이 일찍이 상소하여 정 송강(鄭松江, 정철(鄭澈))과 황 지천(黃芝川, 황정욱(黃廷彧))을 논핵했다는 이유로 화를 내고 또 공의 재주를 시기하여 용한(冗閑)한 벼슬에 억눌러 두었는데, 오히려 지제교(知製敎)를 맡는 자리에 있게 하였다. 사명(使命)을 받들어 명나라에 갔다가 볼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즉시 북청 판관(北靑判官)으로 나갔다가 얼마 안 되어 그만두고 돌아왔다. 얼마 뒤에 국구(國舅)의 무옥(誣獄, 선조의 장인 김제남(金悌男)의 옥사(獄事)를 말함)을 당하여 공은 여러 명경(名卿)과 더불어 함께 감옥에 갇히어 폐고(廢錮)당하였고, 그 당시에 폐모(廢母)의 논의가 한창 거세었다.
무오년(戊午年, 1618년 광해군 10년)에는 남원(南原) 땅으로 영영 돌아갔는데 도 연명(陶淵明, 진대(晉代)의 은사(隱士)인 도잠(陶潛). 연명은 자(字)임)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화운(和韻)하여 글을 지음으로써 자기의 뜻을 나타냈고, 또 유민탄(流民歎) 1편(篇)을 지어 인민(人民)들이 고통을 겪고 나라가 뒤엎어지려는 상황을 극력 말하니, 광해주가 그 글을 보고서 미워하여 누가 지었는지 찾아내도록 하였으나 찾아내지 못하였다. 뒤에 광해(光海)의 실록(實錄)을 수찬할 때 사신(史臣)이 그 글을 거두어 넣어 신사(信史)로 삼았다.
인조[仁廟]가 반정(反正)하여 현준(賢俊)들을 수용(收用)하자 공도 사성(司成)으로부터 상의원 정(尙衣院正)을 거쳐 사헌부(司憲府)에 들어가 장령(掌令)과 집의(執義)가 되었는데, 무릇 관직에 제배(除拜)될 때마다 공은 자못 핑계를 대고 나아가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호당(湖堂, 독서당(讀書堂))에 선발되어서는 더 이상 사양하지 않았다. 신화(新化)의 거조(擧措)들이 자못 인심에 들어맞지 않자 공이 쟁론(爭論)한 바가 많았고 또 (인렬 왕후(仁烈王后, 인조의 후비(後妃)) 한씨(韓氏)의 형부인) 초친(椒親, 왕비의 친척) 정백창(鄭百昌)을 논박(論駁)하여 그 말이 시행되었는데 임금이 또한 기뻐하지 않았으므로, 체직되어 상의원 정(尙衣院正)이 되었다가 그 일로 인하여 양양 수령(襄陽守令)으로 나갔다.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공은 군대를 거느리고 서울에 가서 왕사(王師)와 함께 역적을 토벌하겠다고 청원하였으나 주장(主將)이 공을 문리(文吏, 문관 출신의 수령을 말함)라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병인년(丙寅年, 1626년 인조 4년)에는 원접사(遠接使)인 김유(金瑬)공을 따라 조사(詔使)를 영접하러 갔고, 정묘년(丁卯年, 1627년 인조 5년)에 또 구난(寇難)에 달려갔다가 노적(虜賊)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서 군대를 해산하여 돌아왔다. 얼마 뒤에 파직되어 돌아왔다가 서용(敍用)되어 예전의 관직에 복직되었으며, 이로부터 누차 연석(筵席)에 들어가서 마음을 다하여 임금을 계옥(啓沃)하였고 또한 훈귀(勳貴)의 잘못을 논핵하였다.
임금이 장차 사친(私親)을 숭봉(崇奉)하려고 하니 조정 신하들의 논의가 그 불가함을 극력 쟁집(爭執)하였는데, 공은 홀로 “이번 일은 한(漢)나라의 정도왕3)(定陶王)이나 송(宋)나라의 복원(濮園)과는 같지 않다.”고 하여, 마침내 제공(諸公)들과 의견이 서로 다르자 공을 비방(誹謗)하는 말이 사방에서 일어났는데 공은 돌아보지 않았다. 홍변(虹變)으로 인하여 여러 동료들과 차자(箚子)를 올려, 임금에게 간쟁(諫諍)을 받아들일 것과 취렴(聚斂)을 종식시킬 것과 사치(奢侈)를 없앨 것과 편사(偏私)를 경계할 것과 초심(初心)을 더욱 면려하여 극복하는 일에 힘쓰도록 청하자,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임신년(壬申年, 1632년 인조 10년)에 집의(執義)를 거쳐 승지(承旨)로 승진하였는데 대간(臺諫)의 논핵이 있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체로 대신(臺臣)이 공을 사친(私親)에 대한 논의로써 임금의 마음에 맞춘 것으로 의심하였기 때문이었다. 병조 참지(兵曹參知)를 거쳐 다시 승지가 되자 상소하여 자핵(自劾)하였으므로 병조 참의(兵曹參議)로 이임(移任)되었다. 이로부터 수년 동안에 승정원과 병조ㆍ예조를 떠나지 않았다.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에 승정원의 동료들과 함께 재이(災異)로 인하여 상언(上言)하기를, “전하께서 진실로 능히 지성(至誠)으로써 상제(上帝)를 대하시고 지공(至公)으로써 하토(下土)에 임어(臨御)하시어 무너진 기강을 진숙(振肅)시키고 뭇 신하들을 격려(激勵)시키면, 조정이 바로 서고 인심이 기뻐하며 천지(天地)가 조화되고 재이(災異)가 사라질 것이며, 정령(政令)은 수거(修擧)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수거될 것이고, 재앙을 물리치는 일은 재앙이 없어지기를 기대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사라질 것이니, 이는 전하의 일념(一念) 사이에 달려 있지 않겠습니까? 오호(嗚呼)라, 유독(幽獨)이 비록 깊지만 삼가지 않으면 밖에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곧장 드러나는 법이니, 전하께서 이미 그것을 아셨다면 수신(修身)과 치국(治國)의 방도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절반이 넘은 셈입니다.”라고 하자, 임금이 또 좋은 말이라고 칭찬하였다. 이어 병 때문에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그해 겨울에 노적(虜賊)의 변고가 갑자기 들이닥치자 공은 어명을 받고 먼저 강도(江都, 강화(江華))로 갔는데, 임금이 길을 바꾸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서, 공은 중도에서 뒤따라 그곳으로 달려갔으나 들어갈 수가 없었으므로 적을 피해 이리저리 달아나 숨느라고 온갖 위험을 겪었으며, 사태가 진정되자 예전의 관직에 복직되었다.
임오년(壬午年, 1642년 인조 20년)에 특명으로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승진하였는데, 대체로 임금께서 공이 기로(耆老)로써 오랫동안 엄체(淹滯)되어 있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병술년(丙戌年, 1646년 인조 24년)에 나이가 80세가 된 까닭에 자헌 대부(資憲大夫)에 승진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기축년(己丑年, 1649년 인조 27년) 정월에 공이 말하기를, “예전에 선군(先君)께서 이해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지금 세행(歲行)이 마침 핍박하니, 나도 올해가 위태롭구나.”라고 하였는데, 마침내 그달 21일에 세상을 떠났다. 임금이 부음(訃音)을 듣고서 깜짝 놀라 애도하여 조시(朝市)를 정지하였고 제전(祭奠)과 부의(賻儀)를 전례(前例)에 맞게 내려 주었다. 그해 3월에 파주(坡州)의 칠정리(七井里)에 장사지냈다.
공은 사람됨이 준위(俊偉)하고 호걸스러워 안중(眼中)에 일세(一世) 사람들을 허여(許與)하지 않았으며 곧잘 우스개로 농담을 하였다. 그러나 또 현인(賢人)을 존경하고 벗을 취하는 일과 자기 몸을 닦아서 행실을 조심함에 있어서는 스스로 그 규도(規度)가 있었다. 효성과 우애가 천성으로부터 나왔으니, 나이가 이미 노인이 된 뒤에도 얘기하다가 부모에 대한 말이 나오면 반드시 울먹이며 눈물을 흘리곤 하였으므로, 심지어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육아편(蓼莪篇, 효자의 효심을 읊은 ≪시경(詩經)≫의 편명(篇名)임)을 폐(廢)하게 하였다. 형제들과 더불어 큰 이불을 함께 덮고 자면서 즐겁게 지냈고 차마 서로 떨어지지 못하였으며, 출입할 때에도 항상 형제들과 함께 길을 나섰으므로 집안사람들이 때때로 그가 있는 곳을 잃기도 하였다. 돌림병이 돌아 죽어가는 때에 공이 행한 것은 사람들이 유곤4)(庾袞)에게 견주어도 남음이 있다고 하였다. 우계(牛溪) 성 선생(成先生, 성혼(成渾))은 장중(莊重)하고 엄숙(嚴肅)하였으나 공의 가행(家行)을 착하게 여기어 처음부터 끝까지 공을 친애하였고, 명공(名公)과 거경(巨卿)들도 전후로 공의 실행(實行)을 천거하여 마침내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항상 불인지심(不忍之心)이 있었으니, 왜구(倭寇)가 침입하였을 때 마침 전사(戰士)가 죄 없이 죽게 된 것을 보고서는 공이 포의(布衣)로써 원수(元帥)에게 뵙기를 청하여 그를 살려 준 일이 많았다. 이이첨(李爾瞻)이 장차 계축년(癸丑年, 1613년 광해군 5년)의 일곱 신하5)들에게 죄를 가하려고 할 때에도 공이 또한 그를 찾아가서 일곱 신하들을 위하여 애를 써주었으니, 이야말로 조수(弔豎)가 나라를 온전하게 한 공로에 견줄 만하였다. 급기야 출신(出身)하게 되어서는 일에 따라 납약(納約)하고 경의(經義)로써 가르치어 당저(當宁)가 귀를 기울여 들었으므로 도와준 것이 매우 많았다.
생각건대, 공은 날카롭게 애안(崖岸)을 세우지 않고 남들과 부드럽고 매끈하게 처하였으며, 또한 아울러 빈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다지 두려워하거나 꺼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스스로 이치가 있어서 듣는 자들을 경계하고 깨우치는 것이 많았다. 대체로 그 의상(意象)이 초연(超然)하고 흉회(胸懷)가 탄이(坦夷)하여 또한 풍진(風塵)에 머리를 숙이는 취미가 없었으며, 사물(事物)의 너머에 유신(游神, 마음을 즐겁게 함)할 수 있었으므로, 진실로 제공(諸公)들에게 추허(推許)를 받았고 그 우애(友愛)가 강개(慷慨)하고 측달(惻怛)하여 감발(感發)하는 성의는 진실로 다른 사람이 엿보거나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광해(光海) 때에 풍악산(楓嶽山)에 유람하러 갔다가 꿈속에서 선조 대왕(宣祖大王)을 모시게 되었는데 자신의 진심을 상세히 진달하고서, 꿈에서 깨어난 뒤에 근체시(近體詩) 한 편(篇)을 읊었는바, “만번 죽음을 무릅쓴 외로운 신하가 눈물을 흘리고, 일천 개 산봉우리는 홀로 밤을 지새우는 마음일세.[萬死孤臣淚 千峰獨夜心]”라는 구절이 있었고, 베개에 눈물을 흘린 얼룩이 있었다. 청음(淸陰)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이 일찍이 뭇 소인들에게 밉보인 까닭에 그 제류(儕流)들까지 싸잡아서 다스렸는데, 공은 그 소식을 듣고서 슬프게 탄식하고 걱정하고 분개하느라고 거의 병이 날 지경이었다.
공은 문사(文詞)에 있어서는 장자(莊子), 이소(離騷), 한유(韓愈), 사마천(司馬遷), 전국책(戰國策), 소릉(少陵, 당대(唐代) 두보(杜甫)의 호)을 위주로 삼았으며 그 이하로는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지은 글들은 웅혼(雄渾)하고 준발(峻發)하여 마치 하해(河海)처럼 드넓고 산악(山岳)처럼 우뚝하였으므로, 논하는 자들은 공의 글이 그 사람 됨됨이와 같다고 말하였다. 석주(石洲) 권필(權鞸)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시가(詩家)의 궤도(軌度)에 조금 터득한 것이 있으나 그 근기(根基)가 넓고 기염(氣焰)이 성대함은 어찌 감히 모(某, 조위한)를 따를 수 있으랴?”고 하였고,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도 공에게 시를 지어 증여하기를, “바람과 천둥을 무궁하게 겪을 때에 왕패를 논한 재주 더욱 훌륭하네.[風霆歷覽無窮際 王伯論才更着高]”라고 하였으며 또 공을 “천하의 기이한 남자 왕적이 이르렀네.[天下奇男王適至]”라고 칭찬한 싯구도 있었으니, 그렇다면 공이 남들에게 추중(推重)받은 것이 단지 사조(詞藻)에만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온공(溫公, 송대(宋代)의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과 회암(晦庵, 주자(朱子))의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좋아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담장을 마주한 것과 같다.”고 하였고, 그가 노년에 편집한 ≪발기(拔奇)≫라는 책은 또 육경(六經)을 위주로 하고 아래로 제자(諸子)에게까지 언급한 것이었다.
공의 부인은 홍씨(洪氏)로 학생(學生) 홍찬(洪纘)의 딸인데 일찍 요절하였다. 계취(繼娶)는 좌랑(佐郞) 송구(宋耈)의 딸인데, 2남 3녀를 낳았다. 장남 조의(趙倚)는 문학과 행실이 있었으나 요절하였으며 그에 관한 일은 공이 지은 그의 제문(祭文)에 보인다. 차남은 조억(趙億)으로 공조 좌랑(工曹佐郞)이다. 장녀는 윤확(尹確)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박유(朴濰)에게 시집갔는데 모두 사인(士人)이다. 막내딸은 부사(府使) 심황(沈榥)에게 시집갔다. 부인은 성품이 인자(仁慈)하고 온혜(溫惠)하였으며 식견도 있고 행실도 있었다. 부인은 겨우 유모(乳母)에게 나아갈 나이에 모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상례를 치르고 제사를 모시는 일을 모두 어른처럼 해내었고, 조금 자라서는 계모(繼母)가 자못 장엄(莊嚴)하게 대하였으나 부인은 공경하고 조심하면서 게으르지 않았으며, 시집을 와서도 정성과 예절로써 살피고 모시어 오래 지날수록 더욱 경건하게 하였으므로, 계모도 만년에야 느껴 깨닫고서 도리어 자기가 낳은 자식보다 더욱 부인을 사랑하였다. 부인은 공을 섬김에 있어서도 매우 엄격하여 일이 아무리 미세하더라도 감히 자신이 나서서 해버린 적이 없었으며, 공을 따라 중외(中外)에 출입한 지 수십 년 동안에 공에게 사사로운 청탁을 하지 않았고 시누이와 동서 사이에도 또한 난처한 일이 없지 않았으나 또 능히 조정(調停)하여 즐겁게 지냈다. 공의 관위(官位)와 봉록(俸祿)이 조금 높아지더라도 재물을 쌓아 풍요롭고 사치하려는 마음을 한번도 갖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우리가 지난날에 궁색하고 가난하게 살 때와 비하면 이것도 이미 많은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다른 사람의 환난(患難)과 질고(疾苦)를 들으면 그들을 위하여 마음으로 놀라며 가슴 아파하고 한탄하였다. 자녀를 가르치고 중첩(衆妾)들을 상대하고 궁색한 사람들을 보살피는 것들을 모두 도리에 따랐으니, 이 때문에 공이 늙어서까지 서로 공경하면서 매양 탄식하기를, “비록 옛날의 군자도 따라가지 못할 것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좌랑(佐郞) 조억(趙億)의 아들은 조임중(趙任重)ㆍ조득중(趙得重)ㆍ조만중(趙萬重)ㆍ조익중(趙益重)이고, 딸은 박태성(朴泰成)과 김만선(金萬墡)에게 시집갔다. 외손(外孫) 중에 윤시량(尹時亨)과 윤시양(尹時亮)은 윤확의 소생이고, 응교(應敎) 심수량(沈壽亮)은 심황의 소생이다.
나는 공을 찾아뵌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공이 세의(世誼)로써 나에게 근후(勤厚)하게 뜻을 부치었고 이어 내가 장옥(場屋)에서 지은 글을 칭찬하였는데, 나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감히 공의 집에 찾아가 덕(德)을 바라보지 못하였다. 지금 박세채(朴世采) 화숙(和叔) 공이 공의 가장(家狀)으로써 나에게 묘문(墓文)을 부탁하였는데, 감히 글재주가 없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 없었다. 대체로 그 까닭은 전일의 잘못을 뉘우치고 만분의 일이라도 속죄(贖罪)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가장을 토대로 하여 차례대로 기록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공은 높은 재주와 훌륭한 기도(器度)로써 인묘(仁廟, 인조)의 청명(淸明)한 세상을 당하여 다만 사묘(私廟)에 대한 논의 때문에 제류(儕流)들에게 의심을 받고 불우하게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것은 그 소견이 때마침 그러하여 그 마음에 자신(自信)한 것에서 나온 일이었으니, 가정(嘉靖) 연간의 장계6)(張桂)와는 같지 않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공이 한갓 문장을 잘한 선비라고 말한다면, 실제의 정사가 세상에 모범이 되고 세속을 깨우칠 만하였고, 공이 시대를 잘 만나서 용이 날아오른 것을 보았다고 말한다면, 진도(進途)에는 그 발을 집어넣는 것이 졸렬하였네. 진실로 마음을 인하여 행동을 하였고 또한 세상을 흘겨보아 거침없이 농담하였네. 대체로 탁월하고 기위(奇偉)하여 규도(規度)와 승묵(繩墨)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네. 이야말로 일세(一世)의 웅호(雄豪)이고 백부(百夫) 중에 뛰어난 인물일세. 후세에 공을 알고자 하는 자는 어찌 그가 지은 글을 살펴보지 않겠는가?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