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덕랑 이공 묘지명 병서 〔通德郞李公墓誌銘 幷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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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모(某)요, 자는 모(某)이니, 태종(太宗)의 별자(別子) 경녕군(敬寧君) 비(裶)의 후손이다. 4세를 지나 친진(親盡)되기에 이르러, 병조 판서 희검(希儉), 이조 판서 수광(睟光), 영의정 성구(聖求), 좌승지 동규(同揆), 대사성 현기(玄紀), 정언 한종(漢宗)이 6세에 걸쳐 벌열(閥閱)을 이루어 세상에서 화주(華胄)로 일컬으니, 정언은 바로 공의 선고(先考)이다. 모친 풍산 홍씨(豐山洪氏)는 교리 만수(萬遂)의 따님이다. 본생가의 선고(先考)는 진사 한조(漢朝)이며, 선비(先妣)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부정자 극제(克濟)의 따님이다. 진사와 정언은 형제 사이이다.
공은 숙종 무인년(1698, 숙종24) 겨울 12월 8일에 태어났다. 음직(蔭職)의 품계가 통덕랑이다. 임신년(1752, 영조28) 봄 3월 9일에 별세하여 양주(楊州) 서산(西山)에 있는 선영의 우측 산록 진좌(辰坐)의 언덕에 임시로 장사 지냈다. 공의 본생가의 백씨(伯氏)가 지은 제문에 이르기를,
“우리 아우는 성품이 돈후하고 염정(恬靖)하여 담박하니 물욕이 없었다. 남을 해치고 재물을 탐하는 마음이 속에서 싹트지 않았으며, 비방하고 헐뜯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사람을 대할 때는 관대하고 넉넉하여 일찍이 미간을 찌푸린 일이 없었다. 비록 모자라고 노둔한 듯하였지만 실은 깨달음이 투철하였다. 글을 볼 때에는 자세히 살펴 연구하기를 잘하였고, 효성스럽고 우애로운 행실은 남들을 열복하게 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모두 흠잡을 데 없는 진실한 말이다.
미욱한 여식(女息)이 시부모로 모신 지 열두 해가 되므로 내가 또 공의 가행(家行)을 들을 수 있었다. 공은 매일 일찍 일어나 소세하고 사당에 배알하였으며, 제사가 있으면 반드시 몸소 참여하고 병 때문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백씨를 엄부(嚴父)처럼 섬겨 하루도 곁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모셨으며, 출입할 때는 뵙고서 고하고 춥고 따뜻한 것이 알맞은지 살펴드렸고, 혹 백씨가 늦게 귀가하면 밥을 먹지 않고 기다렸다가 반드시 함께 식사하니, 백씨가 편안하게 여겼다. 선비(先妣)께서 국수를 드시다가 병을 얻은 것을 항상 한스럽게 여겨 종신토록 다시는 국수를 들지 않았다.
친구가 상을 당하면 고기를 물리치고 온종일 슬퍼하였으며, 남을 도와주기를 좋아하여 남들의 어려운 사정을 보면 있는 힘껏 베풀었다. 어린 아들 극성(克誠)이 우연히 장로의 이름을 들먹이자 타이르기를, “감히 그리해서는 안 된다. 의당 아무개 성 아무개 어른이라고 일컬어야 한다.” 하니, 극성이 부친의 뜻을 준행하여 온유하고 공손하게 행동하였고 입 밖으로 한만한 말을 내지 않았다.
공은 평생토록 오직 필가(筆家)에 취미를 붙였다. 필획이 단정하여 원근에서 와서 글씨를 부탁하였고, 상자에 가득한 많은 글들의 필적도 방사(放肆)한 뜻을 볼 수 없었다. 비각(碑刻)이나 편액(扁額) 및 집집마다 보관하고 있는 첩자(帖子)가 마침내 세상의 중시를 받았다.
부인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학생(學生) 석규(碩圭)의 따님이니, 국초(國初)의 명신 석용(石瑢)의 후손이요, 현감 오시겸(吳始謙)의 외손이다.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극성이다. 성균관 진사로 뽑혔고, 성품이 고요하고 문재가 있어 가통을 넉넉히 계승하였다. 큰딸은 권수(權脩)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성혼하기 전에 요절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바탕이 이미 순수한 데다가 / 質之旣純
말은 신실하고 뜻은 참다웠나니 / 言忠而意眞
이 말을 들어 이 사람의 명을 삼노라 / 擧斯而銘斯人
[주-D001] 미욱한 …… 되므로 : 성호의 외동딸이 이극성(李克誠)에게 시집갔는데, 이극성은 이 묘지명의 주인공인 이계주(李啓胄)의 아들이다. 《星湖全集 卷52 觀頤齋序, 卷63 大司成李公墓誌銘》
通德郞李公墓誌銘 幷序 a200_110a 편목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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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諱某字某。太宗別子敬寧君裶之後。及四世親盡。有判兵曹希儉,判吏曹睟光,領議政聖求,左承旨同揆,大司成玄紀,正言漢宗。六世閥閱。世稱華胄。正言卽其先考也。妣豐山洪氏校理萬遂之女。本生考進士漢朝。妣南陽洪氏副正字克濟之女。進士於正言昆弟也。公生於肅宗戊寅冬十二月八日。蔭階爲通德郞。至壬申春三月九日圽。權葬于楊州西山先隴右麓辰坐之原。其本生伯氏操文祭曰。吾弟敦厚恬靖。澹無物欲。忮求之心。不萌于內。訾謗之言。不形于外。接人寬裕。未嘗作皺眉事。雖若少魯。其實透悟。觀文字善於考究。孝悌之行。俾人悅服。此皆實際語。無間然也。憃息事尊章餘一紀。吾又與聞其內行。每夙頮拜廟。祭必躳與。不以疾病爲解。事伯氏如嚴父。寢興無一日離。出入告面。寒溫節適。或値歸晩則廢食而待。必與共餐。伯氏安之。常恨先妣病祟湯餠。終身不復啗。知舊有喪。卻肉而竟夕不樂。喜周卹。遇人之艱難。悉力施之。小子
克誠偶擧長老名。誨責曰毋敢爾也。宜稱某姓某丈。克誠遵志柔恭。口不出漫語。平生惟寓趣筆家。點畫端正。遠近來求。盈箱累牘。不見放意。碑版綽楔與夫家戶帖藏。遂爲世重。配昌寧成氏。學生碩圭之女。國初名臣石瑢之後。吳縣監始謙之外孫。有一子克誠。選補國子上舍生。性靜有文。優成承家之主。女長適權脩。次未字而夭。銘曰。
質之旣純。言忠而意眞。擧斯而銘斯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