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위 대사헌 정윤복의 묘를 중심으로 아래 그 후손의 묘 8기 정도가 잔디로 가지런히 잘 정돈된채 있었다
더우기 그 앞에 거인처럼 지키고 있는 고목의 나무는 전나무 종류인 것 같은데 그 위상을 한껏 높이는 존재였다
8대 옥당(집현전,홍문관) 가문의 대표격인 대사헌공 묘역
옥당에 들어가려면 자신의 능력과 청렴뿐 아니라 몇대 직계선조, 외가쪽 직계까지도 흠이 없이 완전한 선비의 품격을 갖추어야만 낙점되는데 그 명예스런 벼슬을 조선 500년 세월에서 8대를 이어 유지시켰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가문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592년 임진왜란에 병조참판을 제수받고 선조의 피난을 호종하다 가산군에 이르러 병사하여 그 곳에 임시로 묘를 썼다가 나중에 황해도 배천으로 이장하게 된다 그러나 그곳도 지형이 좋지 않아 이 곳으로 옮긴 터이니 이곳이 얼마나 좋은 길지인지 그것이 말해준다
대사헌공 묘역 바로 오른쪽 한자 아래에 아들인 동원 정호선의 묘가 있다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사우(士優), 호는 동원(東園). 병조판서 정옥형(丁玉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찬성 정응두(丁應斗)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정윤복(丁胤福)이며, 어머니는 사헌부감찰 한경상(韓景祥)의 딸이다. 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과 교유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장령·사간을 거쳐 강원도관찰사로 부정을 범한 춘천부사 이원엽(李元燁), 양양현감 신경우(申景遇)를 파직시켜 지방의 관기를 바로잡았다. 1613년 집의·전한을 지내고, 1616년 사인으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가 득세, 계축옥사를 일으켜 영창대군(永昌大君)·김제남(金悌男) 등을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이 대두되어 정세가 크게 혼란하자 상주목사로 나가면서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은퇴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 다시 기용, 안변부사로 있을 때 이괄(李适)의 역모를 알리는 고변서에 그 이름이 기재되었으나, 아우 정호서(丁好恕)가 정주목사로서 이괄의 사자를 베고 군사를 일으켜 근왕(勤王)을 함으로써 화를 면할 수 있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파수대장(把守大將)으로 좌도의 병사를 거느리고 죽령(竹嶺)에 진을 쳤다가 강화가 성립되어 철수, 이듬해 병으로 사임하였다.
우리 동복오씨와의 인연은 구사공 오정일 선조가 이 동원공 정호선 선생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일곱 아들(오시태, 오시익, 오시정, 오시겸, 오시진, 오시항, 오시만)을 낳아 그야말로 북두칠성처럼 발전시켰으니 아주 각별한 사이가 된다
대사헌공 묘소 아래에는 정호관의 묘가 위치한다
정호관은 본관은 압해(押海). 자는 희율(希栗), 호는 금역(琴易). 정옥형(丁玉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응두(丁應斗)이고, 아버지는 정윤복(丁胤福)이며, 어머니는 사헌부감찰 한경상(韓景祥)의 딸이다.
1602년(선조 35)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607년 회답사 여우길(呂祐吉) 일행의 일본사행에 서장관으로 다녀왔다. 1613년(광해군 5) 사헌부지평 때 영창대군을 죄주자는 주장을 맨 처음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1614년 군자감정으로 있을 때 정온(鄭薀)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에 대하여 부당함을 상소하였다가 논죄되자, 정온의 죄를 가벼이해줄 것을 상소하였다가 파직되었다.
묘역 맨 아래 성균진사 정도원의 묘.
자는 인백으로 정시한의 아들이다 조부는 정언화 증조부는 정호관이다
조부의 서재 사휴당에서 학업을 익혀 21세에 소과에 합격 진사가 되었으나 23세에 사망하였다
묘역을 돌아보고 다시 지산으로 와
저녁을 먹고 정훈이가 스키 한 타임을 안 탄다 하여
옷을 갈아입고 저녁 한 타임 스키를 탔다
근 7~8년 만에 타보는 것인데 역시 몸으로 익힌 것이라 녹슬지는 않았다
중상급까지 슬로프를 한차례씩 쭉 돌아보며 즐기고 탄 후 오후 8시가 되어 천안으로 그냥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