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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마음의 알레르기 없는 평안>의 줄거리:
알레르기란 과민증이나 과민반응을 말합니다. 특정한 알레르겐에 접촉함으로써 일어나는 과민증 상태이지요. 전형적인 알레르겐은 꽃가루, 약물, 식물성 섬유, 세균, 음식물, 염색약, 화학물질 햇빛 등이 있습니다. 이유는 신체의 건강을 유지시켜주는 다양한 밸런스가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체뿐 아니라 마음에도 알레르기가 있습니다. 평안이 깨어지는 이유는 전적으로 마음이 알레르기 증상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 치료법을 살펴보겠습니다.
마음의 알레르기 없는 평안
(호세아 10:1~15)
1.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2.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을 허시리라
3. 그들이 이제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므로 우리에게 왕이 없거니와 왕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리요 하리로다
4. 그들이 헛된 말을 내며 거짓 맹세로 언약을 세우니 그 재판이 밭이랑에 돋는 독초 같으리로다
5. 사마리아 주민이 벧아웬의 송아지로 말미암아 두려워할 것이라 그 백성이 슬퍼하며 그것을 기뻐하던 제사장들도 슬퍼하리니 이는 그의 영광이 떠나감이며
오늘 말씀 중심으로 <마음의 알레르기 없는 평안>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마음의 알레르기 없는 평안’
알레르기(allergy)라는 단어는 헬라어에서 유래한 ‘다르게 반응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신체는 외부의 물질과 접촉하게 되면 면역반응을 일으킵니다. 이 면역반응이 정상적이지 않고 다르게 일어나는 것이 바로 알레르기입니다. 이것이 주로 과민반응으로 나타나기에 과민증이라고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 신체로 하여금 과민반응을 유발하는 요인을 알레르겐(allergen) 혹은 항원이라고 하는데 꽃가루, 약물, 음식물, 세균, 염색약 같은 화학물질, 햇빛조차도 그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또 내부적인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건강한 상태와 비교할 때에 신체의 균형이 깨지면 알레르기가 쉽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건강한 상태에서 심장의 온도는 36.5도 정도인데 고작 0.5도만 떨어져도 신진대사가 12% 저하되고 면역기능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또 인스턴트 음식 등을 통해 간이 독소를 많이 흡수하거나 장내의 좋은 균과 나쁜 균의 균형이 깨져도 면역기능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한의학에서는 이러한 신진대사를 기(氣)로 표현하고, 기가 약해질 때에 기를 강화하기 위한 치료법을 사용합니다. 제가 한 10년 전 쯤에 한의사에게 진맥을 받게 되었을 때에 들었던 비유가 하나 떠오릅니다. 저를 진맥해보더니 몸의 기가 많이 약해진 상태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기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축구공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공기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공기가 가득 찬 축구공이 탄력 있게 튀듯이 기가 원활하게 돌면 몸이 활기찹니다. 반면 저의 상태는 바람이 빠진 축구공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무척 오랫동안 알레르기를 앓았습니다. 특히 꽃가루 알레르기가 심했는데 백합, 진달래, 철쭉, 국화가 있는 곳에 가면 천식이 발동하면서 숨을 쉴 수 없었습니다. 요즘은 십자가 생활화로 마음을 평안하게 가지면서 많이 개선되었습니다. 봄철에 진달래와 철쭉이 피었을 때 사진 찍는 분들을 보면 무척 부럽기도 했습니다. 또 상가(喪家)를 방문하게 되면 백합이나 국화가 많은데 저는 한 시간만 있으면 기도가 좁아져서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 고생을 했습니다.
환절기 때마다 재채기와 콧물이 지속돼서 고생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 재채기가 나오면 몇 십번씩 반복되고 맑은 콧물이 계속 흘렀는데 지금은 그것도 고쳐졌습니다. 제가 찬물로 샤워하고 머리 감는 것을 좋아했는데 몸을 따듯하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따듯하게 샤워를 시작했는데 그 이후로 재채기와 콧물이 사라졌습니다.
이처럼 알레르기는 몸을 괴롭게 합니다만 마음을 괴롭게 하는 알레르기가 있습니다. 심지어 몸의 알레르기는 일부의 사람만 가지고 있다지만 마음의 알레르기는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습니다.
알레르기가 생겼을 때의 고통이란 겪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면역력이 약한 아이들에게 더욱 심각합니다. 꽃가루 때문에 눈이 퉁퉁 부어서 괴로워하는 아이의 모습을 직접 본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욱 괴로운 알레르기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서 발생하며 평강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는 풍랑 만난 배 위에서의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깜깜한 밤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일엽편주에 몸을 싣고 바다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풍랑이 일어났고 배가 뒤집힐 위기에 처했습니다. 바닷물이 넘쳐흐르고 배가 요동을 치는데 예수님은 주무시고 제자들은 죽겠다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상한 것은 예수님이고 제자들의 반응이 매우 정상적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자 믿음이 없다고 나무라십니다. 믿음이 없다는 것은 과민반응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깜깜한 밤에 풍랑을 만나서 살기위해 아등바등하는 것이 과민반응이라니 주님은 무슨 의도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일까요?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깊은 잠에 빠지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이었습니다. 그런데 풍랑에 대한 제자들의 모습은 알레르기 반응이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풍랑 자체가 아닙니다. 한의학에서 알레르기를 기가 약해져서 외부의 물질에 대해 과민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말하듯이, 마음의 알레르기에 대해서도 문제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마음에 문제가 있기에 풍랑을 두렵게 느끼는 것이지 실제로 풍랑은 두려워할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제자들의 마음 상태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이심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계셨습니다. 반면 제자들은 하나님이 창조주 되심과 살아계심과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현실로 받아들이지는 못했습니다.
우리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뉴스를 통해 보며 사실로 인지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여서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습니다. 제자들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태도 또한 이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서 알았지만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지는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육체로 와 닿는 풍랑이라는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자 마음에 평안이 깨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반대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조물주 되시고 나의 아버지 되심을 현실로 받아들인다면 풍랑 만난 배 위에서도 잠을 잘 수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천국은 무릉도원 같은 이상향이 아닙니다. 이상향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무릉도원은 상상할 수는 있지만 실존하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신 천국은 사실로써 존재하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죽을 때를 기다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천국에 가는 것을 기다리십니다. 다시 말해 천국이 사실에서 현실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릉도원의 산신령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현실이 되셔야 합니다. 우리가 무릉도원을 상상한다고 해서 현실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마음이 가서 닿는 현실로 부르고 있는지, 무릉도원의 산신령과 같은 사실에도 미치지 못하는 존재로 부르고 있는지에 대해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많은 교인들이 풍랑 만난 배 위의 제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현실과 분리된 대상으로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은 사실 인식의 단계를 넘어서 마음이 가서 닿아야 하는 현실이십니다.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으면 하나님이 현실이 되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현실이기만 하면 이 세상에서 만나는 일들에 대해 과민반응 또한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이 세상일들을 현실로 느낀다면 마음에서는 알레르기가 나타나게 됩니다.
돈이 없으면 마음에 두려움과 염려가 생겨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마음에 세상을 담음으로 생겨난 알레르기입니다. 몸이 아픈 것을 걱정하고 짜증내야할 이유는 없습니다. 마음의 상태로 인해 알레르기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이 형통치 못하다고 생각할 때에 걱정하는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본래 이 모든 일은 마음에 걱정과 염려라는 반응을 줄만한 일이 아닙니다. 반응을 일으킬 필요가 없는 일들에 대해 과잉반응을 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오늘 본문 5절을 보면 ‘사마리아 주민이 벧아웬의 송아지로 말미암아 두려워할 것이라 그 백성이 슬퍼하며 그것을 기뻐하던 제사장들도 슬퍼하리니 이는 그의 영광이 떠나감이며’라고 하였습니다. 벧아웬은 벧엘의 별명입니다. 그런데 그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인 반면에 벧아웬은 허무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 1세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으로부터 갈라져 나와서 나라를 세울 때에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 유다 땅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는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으로 섬기게 하였습니다. 열왕기상 12장 28절을 보면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로보암은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그 이름을 분리시킨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을 출애굽 시키시고 광야생활을 지나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셔서 정착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이름을 금송아지에 붙임으로써 실제 하나님과 그 이름을 분리시켜 버린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하나님께 마음이 닿아서 하나님을 현실로 느끼는 것을 막았습니다. 하나님은 무릉도원의 산신령처럼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껍데기로 남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선민들의 마음에서는 심각한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나게 됩니다. 1절에서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라는 말씀을 통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을 몸의 상태에 비유하자면 아토피 증세가 생긴 것과 같습니다. 외부의 항원에 대한 과민반응으로 인해 피부에 아토피가 생깁니다. 그것을 계속 긁으면 상처가 점점 더 커집니다.
먼저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고 비유하였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자기를 위해’라는 의미의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얼핏 당연하게 여겨지는 말입니다. 그러나 포도나무와 주인 즉 선민과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생각해본다면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앞서 금송아지에 하나님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입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마음이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만을 부르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을 위해 부르게 됩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는 풍요와 다산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바알과 아세라 숭배가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상적인 마음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마음도 하나님께 향하고 있는 정상적인 선민들이라면 돈이 없어도 마음으로 돈을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마음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만족으로 인해 결핍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입으로만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북 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의 결핍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을 현실로 느끼지 못하기에 결핍감을 느끼게 하는 상황에 대해 직접 반응하게 되었고, 그것이 우상숭배라는 과민반응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환절기 알레르기로 고생하는 사람의 대처법은 나의 상태를 바꾸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환절기라는 항원 자체를 없앨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북 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있는 방법을 잊었기에 마음의 상태를 바꿀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 항원에 대해 과민반응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이 없는 상황에서 마음에 불안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불안이 생긴 진짜 이유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하나님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가질 수 없기에 돈을 많이 버는 것을 통해 불안을 해결하고자 하게 된 것이 바로 마음에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1절 말씀에서 나타난 자기를 위해 열매를 맺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해서 실제로 돈을 벌었으면 마음의 불안은 해소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안의 원인이 애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음에 있었기에 돈을 벌어도 불안은 해소되지 않습니다. 돈을 벌어도 불안이 해소되지 않으니 오히려 결핍은 더욱 크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1절 하반부를 보면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먹고 살만해졌으면 바알을 섬길 이유도 줄어들어야 하는데 오히려 더욱 열심히 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회사가 돈을 벌기 위해서 연구개발비에 투자하듯이 당시 북 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알과 아세라는 부자가 되기 위한 방법론이었습니다. 더 많은 투자를 통해 더 많은 풍요와 다산을 얻고자 한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열매 맺지 않는 상태란 무엇일까요?
바로 입으로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마음으로도 향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당장 돈이 없을지라도 그로 인해 불안해하고 염려하는 것이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음으로 인해 생겨난 과민반응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불안과 염려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일어난 알레르기 반응임을 깨달았다면 하나님을 현실로 느끼는 길을 찾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서도 쉽게 발견됩니다. 돈이 없다고 울고불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풍랑 속에서 허둥대던 제자들의 모습과 다름없습니다. 예수님은 과민반응을 보이지 말라며 나무라실 것입니다. 돈 뿐만이 아닙니다. 건강이나 집안의 문제를 비롯한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그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현실로 느끼지 않는 마음에 이 세상 일들이 부딪히면 과민반응이 일어나게 됩니다.
말씀드렸듯이 선민으로써의 정상적인 상태는 자기를 위해 열매 맺지 않는 것입니다. 풍랑과 같은 문제들이 다가왔을 때에 반응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현실로 느끼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열매 맺지 않는다는 것은 곧 이 세상의 일을 문제로 삼고 스스로 해결하거나 부족함을 채우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을 현실로 느끼는 길을 걷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현실로 느끼게 되면 세상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개입으로 선민들의 출애굽이 이루어졌던 것과 같습니다.
본래 이 세상에서는 나를 위해 구해야 될 대상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를 위해 무엇이든 구한다면 그것은 결핍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해 느끼는 모든 결핍은 하나님을 현실로 느끼지 못함으로 인해 생겨난 과민반응이고 알레르기 증상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결핍감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향해서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결핍감을 느끼면서 하나님을 현실로 느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육체로 접하는 세상의 일들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원죄의 체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체질을 십자가에서 죽여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과민반응을 일으키는 나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은 자로서의 자아의식을 계속 유지할 때에 마음에서 세상이 밀려나고 하나님으로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나의 마음을 채우시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나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나를 사랑하시되 독생자를 희생시키실 정도로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가 나의 마음에 현실이 된다면 내게 주어진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더 이상 과민반응을 일으키는 항원으로 작용하지 않게 됩니다. 나와 연관된 모든 일들에 대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 개입하시게 되고, 그 결과 삶에서는 하늘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나는 하나님의 손에 끼워진 장갑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때의 삶은 더 이상 나를 위해 구하는 삶이 아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생활화로 이루어지는 기적이고 놀라운 은혜입니다. 내가 살아서 움직이고 말하지만 결코 나를 위해 열매 맺지 않는 삶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을 현실로 삼은 자들에게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현실이 되시기 위해서는 내 마음에 과민반응을 일으키는 모든 세상의 항원들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음이 지속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십자가 자아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의 현실이 되실 것이고 우리는 더 이상 세상에 대해 알레르기 증상을 보이며 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십자가 자아의식으로 사람을 대하고 사건을 대하고 상황을 대함으로써 마음의 평안이 깨어지는 알레르기 반응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나를 위해 열매 맺는 삶이 중단되고 이 땅에 하늘나라가 임하고 아버지의 뜻만이 이루어지는 진정한 복지를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