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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學捷要 41-43終
41-1
書肇於畫라 象形之書의 書卽畫也라 籀變古文은 斯邈*因之라 楷眞草行之變하여 書離於畫矣라 昆蟲草木山水人物黼黻藻繪傳采飾色의 畫異於書矣라 後人遂以畫字分二音하여 以字畫之畫爲入聲하고 繪畫之畫爲去聲하니 書畫同源失指甚矣라
문자는 그림에서 비롯하였다. 상형문자에서의 문자는 그림이다. 주문이 변천하여 고문이 된 것은 이사와 정막 때문이다. 해서(즉 팔분서)ㆍ진서(즉 해서)ㆍ초서ㆍ행서로 변천하여 문자가 그림에서 분리되었다. 곤충ㆍ초목ㆍ산수ㆍ인물과 보불(복식)에 수놓은 화려한 문양은 그림이 문자와 다른 것이다. 후세 사람들이 마침내 화(畫)를 두 음으로 나누어 자획의 획(畫)은 ‘긋다’는 뜻의 입성(入聲)으로 하고, 회화의 화(畫)는 ‘그리다’는 뜻의 거성(去聲)으로 하였으니 문자와 그림은 같은 근원이나 그 가리키는 뜻을 잃은 것이 심하다.
*斯邈(사막): 이는 소전을 만들었다는 진나라 이사와 예서를 만들었다는 정막을 이른다. 이사(李斯, 기원전 280경-기원전 208)는 전국시대 초나라 상채 사람으로 한비자와 함께 순자에게서 육례와 제왕술을 공부한 사상가이며 정치가이다. 진나라가 육국을 통일한 뒤 군ㆍ현 제도의 확립, 도량형 설정, 사상의 통일 등은 모두 그의 입안(立案)에 의한 것이며, 문자를 통일하기 위해 대전(大篆)에 바탕을 두고 소전을 제정했다. 이는 중국 대륙의 문자를 통일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자의 변환기로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역산각석〉ㆍ〈태산각석〉ㆍ〈낭야대각석〉ㆍ〈지부각석〉ㆍ〈갈석각석〉ㆍ〈회계각석〉 등은 이사가 직접 쓴 것이라고 한다.
정막(程邈, 생몰미상)은 자가 원잠(元岑)으로 진나라의 내사(內史)를 지낸 서예가로 예서를 만들었다. 채옹은 성황편(聖皇篇)에서 “정막은 고문을 다듬어 예서문자를 수립하였다[程邈刪古立隸文]”라고 하였다. 당나라의 장회관은 서단(書斷)에서 “처음에 아현의 옥리가 되었으나 진시황에게 죄를 얻어 운양에 사로 잡혔다. 옥중에서 십 년 동안 깊이 연구하여 대전ㆍ소전과 모나고 둥근 것을 더하여 예서 삼천 자를 만들어 바쳤다. 진시황이 칭찬하고 어사로 등용하였다. 아뢰는 일이 많고 번거로운데, 전서로 이루기 어려워 이에 예서를 사용하고 관리[예인(隸人)]들을 돕는 문자로 삼았다. 그러므로 예서라고 한다[始爲衙縣獄吏, 得罪始皇, 幽繫雲陽. 獄中覃思十年, 益大小篆方圓而爲隸書三千字, 奏之. 始皇善之, 用爲御史. 以奏事繁多, 篆字難成, 乃用隸字, 以爲隸人佐書. 故曰隸書.]
*黼黻(보불): 화려한 문양을 수놓은 예복으로 제왕이나 고관의 복식을 이른다. 한기ㆍ무제기(漢紀ㆍ武帝紀)에 “천자는 보불을 걸치고 취피를 입었다[天子負黼黻, 襲翠被]”라는 내용이 보인다.
41-2
古者書於竹帛*하고 後世遂爲刻竹하여 點漆以爲書라 引韋編三絕*爲口實이나 韋編三絕은 喻辭也라 豈實有其事哉리오 且夫竹者는 造紙之物也라 紙從絲帛하여 乃綿繭之屬이니 卽紙之本色也라 楮藤敝布魚網*黃麻白麻之類는 後世得以本色名其紙라 何古人竹帛之稱은 而必謂其刻竹乎리오
옛날에 죽백에 글씨를 썼는데, 후세에 이르러 대나무에 새기고 까맣게 칠한 것을 글씨로 여겼다. ‘위편삼절’을 인용하여 이야깃거리로 삼았으니 위편삼절은 비유하는 말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어찌 있겠는가? 더군다나 대나무는 종이를 만드는 물건이다. 종이는 명주실과 면직물을 잇는 누에고치의 종류이니 곧 종이의 근본이다. 닥나무와 칡, 폐포와 어망, 황마와 백마 등은 후세에 종이의 근본으로 명명한 것이다. 어찌하여 옛날 사람들이 죽백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대나무에 새기는 것만을 이르겠는가?
*竹帛(죽백): 죽간과 흰 깁 또는 서적이나 역사책을 이르는 말이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는 대나무나 비단에 글씨를 써서 기록하였기 때문에 죽백이라 한다.
*韋編三絕(위편삼절): 공자가 주역을 즐겨 읽어 책을 맨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고사를 이른다. 뒤에 부지런히 독서하고 열심히 공부함을 이르는 전고로 썼다.
*敝布魚網(폐포어망): 낡은 베와 고기 잡는 그물을 이르는 말이다. 폐포와 어망을 잘게 부수어 종이 만드는 재료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41-3
然이나 竹可刻而帛不可以刀刻漆點也라 且古人慎事博記하고 有笏簡鉛槧*之執佩하여 隨時記事하고 過則拭之러니 而刻竹點漆은 葢別是一種書耳라 西晉之汲郡魏冢*과 南齊之襄陽楚墓*是也라 夫魏襄安釐*在孟莊*之後로 下迨秦漢不遠하여 筆墨具備러니 豈皆刻竹點漆乎리오 考後漢吳祐*傳祐父恢가 爲南海太守하여 欲殺青*以寫經書러니 祐諫而止라
그러나 대나무는 새길 수가 있으나 비단은 칼로 새기고 칠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옛 사람들이 사건을 신중히 하고 널리 기록함에 홀ㆍ간ㆍ연참을 휴대하여 수시로 사건을 기록하고, 지나가면 깨끗이 닦아내었으니 대나무에 새기고 칠한 것은 어쩌면 하나의 글씨일 따름이다. 서진의 급군 위총과 남제의 양양 초묘가 이것이다. 위나라 양왕과 안리왕은 맹자ㆍ장자의 후대 사람으로 진나라ㆍ한나라에 멀지 않아 필묵이 갖추어졌는데, 어찌 대나무에 새기고 칠을 하였겠는가? 후한서ㆍ오우전에 “부친 오회가 남해 태수가 되어 살청을 하여 경서를 쓰려하니 오우가 간하여 그만두게 하였다”는 것을 상고 할 수 있다.
*홀간연참(笏簡鉛槧): 홀간은 홀과 간독을 이르고, 연참은 글씨 쓰는 도구인 연분필(鉛粉筆)과 목판을 이르는 말이니, 휴대용 필기도구이다.
*汲郡魏冢(급군위총): 이는 급군에 있는 위나라 양왕의 무덤을 이른다. 진서ㆍ무제기(晉書ㆍ武帝紀) 함녕 5년(279) 10월 조에 “급군 사람 부준(不準)이 위양왕의 무덤을 도굴하여 죽간ㆍ소전ㆍ고서[과두(科斗)] 10만여 자를 얻어서 비부에 수장하였다[汲郡人不準掘魏襄王冢, 得竹簡小篆古書十餘萬言, 藏于祕府]”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발견된 주역(周易)ㆍ주왕유행(周王遊行)ㆍ쇄어(瑣語) 등은 후세 학문연구에 귀한 사료가 되었다. 급총주서(汲冢周書)ㆍ급총서(汲冢書)라고도 한다.
*襄陽楚墓(양양초묘): 이는 양양에 있는 초왕(楚王)의 묘를 이른다. 남제서(南齊書)ㆍ권21ㆍ문혜태자(文惠太子) 조에 “당시 양양에 도굴꾼이 있었는데, 초왕총이라 전해오는 무덤을 도굴하여 옥으로 장식한 신발ㆍ병풍ㆍ죽간서 등 많은 보물을 얻었다[時襄陽有盜發古塚者, 相傳云是楚王塚, 大獲寶物玉屐玉屏風竹簡書青絲編]”는 기록이 있다.
*魏襄安釐(위양안리): 이는 전국시기 위나라의 국군(國君)으로 양왕(襄王, ?-기원전 296, 재위 기원전 318-기원전 296)과 안리왕(安釐王, ?-기원전 243, 재위 기원전 276-기원전 243)을 이른다. 위혜왕(魏惠王 혹은 梁惠王)의 아들로 위ㆍ한ㆍ조ㆍ초ㆍ연(魏韓趙楚燕)나라와 연합하여 진(秦)나라와 대항하였다.
*孟莊(맹장): 맹자ㆍ장자를 이르는 말이다.
*吳祐(오우): 오우(吳祐, ?-?) 는 남해태수 오회(吳恢, ?-?)의 아들로 효렴으로 천거되어 교동후상(膠東侯相)에 이르렀다. 후한서ㆍ권94ㆍ열전 제54에 기록이 전한다. ‘저구지교(杵臼之交)’라는 고사의 주인공이다.
*殺青(살청): 죽간을 만드는 과정의 하나로 대나무를 불에 쬐어 수분을 없애고 푸른 표피를 제거하는 작업이다. 살청을 하면 글씨 쓰기에 편리하고 좀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
41-4
葢恢去古未遠인 故로 欲放而爲之라 殺青者는 火逼竹青하여 令汗出이니 則易書而不蠹라 若夫汗青*青史*는 史官刻竹書事로 義取鐵筆*不移하니 此亦相傳之說이라 古者天子諸侯는 左史記事하고 右史記言이며 后妃則女史彤管*으로 記功書過하니 彤管은 赤管筆也라
오회는 옛 사람들과 거리가 멀지 않은 까닭에 그것을 모방하려 했다. 살청은 푸른 대나무를 불에 쬐어서 대나무 수액을 빼내는 것으로 글씨 쓰기가 용이하고 좀이 슬지 않게 하는 것이다. 한청과 청사는 사관이 죽간에 사건을 기록하는 것으로 마땅히 철필을 취하여 변하지 않게 해야 하는 것이니, 이는 또한 전해오는 말이다. 옛날에 천자와 제후의 좌사는 사건을 기록하고 우사는 말을 기록하며, 황후와 왕비는 여사관이 동관으로 공과 과실을 기록하였으니, 동관은 붉은 붓대의 붓이다.
*汗青(한청): 이는 살청(殺靑)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青史(청사): 이는 역사서로 죽간에 기록했던 것을 이르는 말이다.
*鐵筆(철필): 이는 죽간에 글씨를 새기는 칼을 이른다.
*彤管(동관): 필관에 붉은 칠을 한 붓으로 고대에 여자 사관이 궁중의 일을 기록하는 데 사용하였다.
41-5
至於筆墨書畫하여 見於經傳者는 如詩之貽我彤管*과 論語子張以夫子之言書諸紳*이러니 紳非竹爲之이요 而可以刀刻漆書也라
필묵ㆍ서화에 이르러 경전에 나타나는 것은 마치 시경의 이아동관(貽我彤管)과 논어ㆍ위령공에 “자장이 공자의 말씀을 큰 띠에 기록하였다”는 것과 같은데, 큰 띠는 대나무로 만든 것은 아니지만 칼로 새기거나 옻칠로 글씨를 쓸 수 있는 것이다.
*貽我彤管(이아동관): 시경ㆍ패풍ㆍ정녀(詩經ㆍ邶風ㆍ靜女)에 “아름다운 정녀가 나에게 동관을 보내왔네[靜女其孌, 貽我彤管]”가 보인다. 모전(毛傳)에 “고대에 군주의 부인에게는 반드시 여사관 동관의 법이 있었는데, 사관이 그 허물을 기록하지 않으면 죽음으로 죄를 물었다[古者后夫人必有女史彤管之法, 史不記過, 其罪殺之]”는 기록이 보인다.
*紳(신): 고대의 사대부들이 예복(禮服)에 띠는 큰 띠를 가리킨다. 논어ㆍ위령공(論語ㆍ衛靈公)에 “자장이 큰 띠에 글씨를 썼다[子張書諸紳]”는 기록이 보인다. 「소(疏)」에 “띠로 허리를 묶고 그 나머지를 늘어뜨려 장식하였으니 ‘신(紳)’이라 한다[以帶束腰, 垂其餘以爲飾, 謂之紳]”라고 하였다. 고대 중국의 복식용 끈(帶紐)으로 폭 수 cm가 견직물 띠(大帶)의 단 아래에 늘어진 부분을 말한다. 길이는 3척(약 70cm)이고, 이것을 앞에서 매어 띠를 죄고 아래로 내려뜨렸다. 주나라, 한나라 시대에 널리 사용되었고, 신분ㆍ관직에 따라 색ㆍ재질 등 만드는 법에 차이가 있었다.
41-6
莊子與孟子同時라 其田子方篇有云, 宋元君集畫工*한대 皆舐筆和墨이라하니 則筆墨豈僅施於畫하고 不得施於書리오 恐無是理也라 葢自有書契*하고 卽有紙筆하니 唐李石續博物志와 明解學士縉曾略言之矣*라 事無關於書學이나 而書畫源流로 不可不辯而晰之也라
장자와 맹자는 시대를 같이 하였다. 장자ㆍ전자방에 이르기를 “송원군이 화공을 모집하였는데, 모두 붓을 핥고 먹을 알맞게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필묵만으로 어떻게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쓸 수 있었겠는가? 아마도 이와 같은 이치는 없었을 것이다. 서계가 있고부터 곧 종이ㆍ붓이 있었다. 당나라 이석의 속박물지(續博物志)와 명나라 해진은 일찍이 그것을 간략하게 말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글씨를 배우는 것과는 무관하나 글씨와 그림의 원류는 변별하여 밝히지 않을 수 없다.
*宋元君集畫工(송원군집화공): 장자ㆍ전자방(莊子ㆍ田子方)에 “송나라 임금이 장차 그림을 그리려고 할 때 여러 화공들이 모두 당도하여 송원군의 읍을 받고 시립해서 붓에 침을 바르고 먹을 알맞게 하며 밖에 있는 자가 절반이었는데, 어떤 화공 한 명이 뒤늦게 이르러 느긋하게 종종걸음으로 걷지 않으며 읍을 받은 뒤 서 있지 않고 곧바로 집안으로 들어갔다. 공이 사람을 시켜 엿보게 했더니 옷을 벗고 벌거벗은 채로 앉아 있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화공이다[宋元君將畫圖, 衆史皆至, 受揖而立, 舐筆和墨, 在外者半, 有一史後至者 儃儃然, 不趨受揖不立, 因之舍, 公使人視之, 則解衣般礴臝. 君曰 可矣. 是眞畫者也]”는 내용이 보인다.
*書契(서계): 이는 나무에 새긴 글자, 곧 문자를 이른다. 주역ㆍ계사하(周易ㆍ繫辭下)에 “상고시대에는 결승으로써 다스렸으나 후세에 성인이 그것을 서계로 바꾸어 백관을 다스리고 만민을 살폈으니 모두 쾌괘(夬掛)에서 취한 것이다[上古結繩而治, 後世聖人易之以書契, 百官以治, 萬民以察, 葢取諸夬]”라고 하였다.
*唐李石 …… 曾略言之矣: 왕예는 속박물지(續博物志) 권10에서 “서계가 있고부터 응당 붓이 있었으니 몽념이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그릇되었다[王叡云, 有書契以來, 便應有筆. 世傳蒙恬制, 非也]”라고 하였다. 해진은 서학상설(書學詳說)에서 “글씨는 포희씨로부터 비롯하였고 붓ㆍ먹ㆍ종이ㆍ벼루는 모두 상고시대부터 사용하였으며 후세에서는 그것을 다르게 만들었을 뿐이다[書肇於庖犧. 筆墨紙硏, 皆始古用, 後世異其制爾]”라고 하였다.
42
書法에 有⺅壴筆이라 ⺅壴音豎요 立也라 與豎字로 同音義라 ⺅壴筆者는 短努也라 夫旣有努法이나 而復設此條는 誠贅文也라 而各刻本은 又皆誤作⺅壹筆이라 ⺅壹은 無其字하여 不詳繹音義故也라
필법에 ‘수필’이 있다. ‘𠊪’는 음이 ‘수’이고 세운다는 뜻이다. 수(竪)자와 음과 뜻이 같다. 수필은 짧은 노획이다. 이미 노획의 필법이 있으나 다시 이 조항을 설치한 것은 진실로 군더더기 문장이다. 그러나 각각 간행한 판본에는 또한 모두 ‘𠍼筆(일필)’이라고 그릇되게 쓰여 있다. ‘𠍼(일)’은 그 글자가 없어서 자세하게 음과 뜻을 해석하지 못한 까닭이다.
43
書有衄挫*之法[俗作衂. 音肉, 挫也. 挫, 折也]이라 折鋒은 方筆也라 法出於指러니 斂其筆豪하여 用於點⺅壴하면 棱側緊峭하고 如摧峰磔石*하여 斬釘截鐵*이라 施於字畫之閒하면 則風格峻整하고 加以八面拱心하면 功夫到處에 始稱遒媚라 草書尤重此法이면 則斷續顧盼과 轉折分明이라
서예에 육좌의 법[보통 육(衂)이라고 쓴다. 음은 육(肉)이고 (비틀어)꺾는 것이다. 좌(挫)는 (방향을 바꾸어]꺾는 것이다]이 있다. 절봉은 방필이다. 필법은 손가락에서 나오니 그 필호를 거두어 점과 수획에 운용하면 모난 가장자리가 웅건하여 산봉우리를 무너뜨리고 돌을 깨부수는 것 같으며, 못을 끊고 쇠를 자르는 것 같다. 글자 획의 사이에 베풀면 즉 풍격이 엄숙ㆍ장중하고, 더하여 팔면을 에워싸듯이 하면 공부가 이르는 곳에 비로소 굳세고 아름답다고 할 것이다. 초서는 더욱 이 법을 중시하면 끊어졌다 이어지고 돌아보며 전절이 분명하다.
*衄挫(육좌): 용필에서의 육봉(衄鋒)과 좌봉(挫鋒)을 가리키는 것으로 ‘육봉’은 노(努)획의 끝에서 적(趯)획으로 바뀔 때 역필로 비틀어 위로 거두는 것이다. ‘좌봉’은 늑(勒)획에서 노(努)획으로 전환하여 꺾어 운용운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손과정은 서보(書譜)에서 “하나의 필획 사이에 일어나고 엎어짐은 필봉 끝에서 변화하며, 하나의 점 안에 비틀고 꺾음은 붓털 끝에서 다르게 한다[一畫之間, 變起伏於鋒杪, 一點之內, 殊衄挫於豪芒]”라고 하였다.
*摧峰磔石(최봉책석): 산봉우리를 무너뜨리고 돌을 깨뜨려 부순 형상을 표현한 말로 필획이 모나고 날카로운 모습을 비유하는 말이다.
*斬釘截鐵(참정절철): 못을 끊고 쇠를 자르듯 확고하여 변하지 않음을 표현한 말로 직각에 가까운 기필의 상태로 웅건하고 힘이 있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주이정은 본서 31조에 팔분을 쓰는 비결에 말하기를 “모나고 굳세고 거칠게 꺾고, 못을 끊고 쇠를 자르듯 해야 한다[訣曰 方勁古折, 斬釘截鐵]”라고 하였다.
跋
秀水朱閑雲은 以布衣而工書法하여 嘗纂書學捷要一編하고 出以示余하니 余惟古今論書者多矣라 編籍之繁이 奚啻充棟이리오 散漫浩瀚하여 幾使學者有望洋之嘆이라 後世著述雖多이나 又皆沿襲陳言하여 漫無甄別하고 細研是編이라 刪繁就簡하고 殫思古法하며 發揮意指하여 釐正譌誤하고 而於孫過庭書譜에 尤精研確覈하여 辨晰微茫하고 發前賢之祕奧이니 其有裨書學을 豈淺鮮哉리오 吾友淥飲*刊入叢書러니 用爲後學津梁이면 亦不負閑雲苦心已이니 因爲識之라
嘉慶戊辰秋八月望日에 晉齋趙魏*는 書하노라
수수 사람 한운 주이정은 평민으로서 서예를 잘하여 일찍이 서학첩요 한 편을 편찬하고 출간하여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에게도 고금의 논서가 많이 있다. 책을 편찬하는 번잡함이 어찌 서재에만 가득할 뿐이겠는가. 산만하고 광범위하여 아마도 배우는 이들에게 바다만 바라보는 탄식이 있게 하였을 것이다. 후세에 저술된 것이 비록 많으나 또한 다 전례를 따라 말을 펼쳐 뜻대로 살펴보고 식별함이 없었으니 세세하게 이 편을 연구하였다. 번잡한 것은 깎아내고 간략함으로 나아가 모두 옛날 법도를 생각하고 의지를 발휘하여 그릇되고 잘못된 것을 개정하였다. 그리고 손과정의 서보에서 더욱 정미하게 연구하고 확실히 조사하여 아득한 것을 분별하여 밝히고 옛날 현인들의 은밀하고 심오한 것을 잘 펼쳤으니, 그 서학에 도움이 있는 것을 어찌 보잘 것이 없다 하리오. 나의 친구 녹음 포연박(鮑延博)이 출간하여 총서에 들게 하니 후학들의 나루와 징검다리로 사용한다면 또한 한운 주이정의 고심을 등지지 아니할 따름이니 때문에 그것을 알 것이다.
가경무진(1808)년 가을 8월 15일에 진재 조위는 쓰다.
*淥飲(녹음): 포연박(鮑延博, 1728-1814)을 이른다. 자는 이문(以文)이고 호는 녹음(淥飲)ㆍ통개수(通介叟)ㆍ득한거사(得閑居士) 등으로 청나라 건륭(재위 1736-1796) 연간의 장서가였다. 건륭 37(1772)년 사고전서관을 개설할 때에 가장 많은 고적과 문헌을 진헌하였다.
*晉齋趙魏(진재조위): 조위(趙魏, 1746-1825) 자가 진재(晉齋)이고 호는 녹삼(錄森)이며 인화(仁和, 今杭州) 사람이다. 청라나의 수장가로 많은 비판들을 수장하였다고 墨林今話ㆍ清畫家詩史ㆍ清朝書畫家輯略등에 기록되어 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