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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0
창세기 1장 1절
오늘부터 사도신경 자체에 대해서 살피겠는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4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사도신경은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첫째는 성부 하나님과 우리의 창조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성자 하나님과 우리의 구속에 관한 것이고, 셋째는 성령 하나님과 우리의 성화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부만 창조하시고, 성자만 구속하시고, 성령만 성화하시는가? 그렇지 않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성부 성자 성령은 한 분 하나님이시요, 한 분 하나님으로서 분리할 수 없고 또한 분리할 수 없는 채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창조든 구속이든 성화든 분리할 수 없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일하심으로 있지, 요리문답이 창조를 성부께 또 구속을 성자께 또 성화를 성령께 돌리고 있다고 해서 그것만 행하신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개혁자들의 일반적인 표현 방식을 따르자면 성부께서는 자신으로부터 성자와 성령을 통하여 모든 일들, 즉 창조와 구속과 성화의 일들을 행하시며, 성자께서는 성부로부터 성령을 통하여 모든 일들, 즉 창조와 구속과 성화의 일들을 행하시며,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모든 일들, 즉 창조와 구속과 성화의 일들을 행하십니다.
이 사실을 전제하고 성부와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겠는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6문을 이렇게 묻습니다.
26문.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말할 때에 그대는 무엇을 믿습니까?
답.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들을 무(無)로부터 지으셨고(창1-2장, 출20:11, 욥33:4, 39-39장, 시33:6, 행4:24, 14:15, 사45:7) 또한 그의 영원한 작정과 섭리로 그것들을 지탱시키시고 다스리시는 것을 믿으며(마10:29, 히1:3, 시104:27-30, 115:3, 마6:30, 10:29, 엡1:11), 그가 그의 아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의 하나님과 나의 아버지가 되심을 믿으며(요1:12-13, 롬8:15-16, 갈4:5-7, 엡1:5), 그가 몸과 영혼에 필요한 모든 것들로 내게 채워 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시55:22-23, 마6:25-26, 눅12:22-31), 이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 내게 어떠한 악을 보내신다 할지라도 그가 그것을 나의 선으로 바꾸실 것임을 믿으니(롬8:28), 이는 그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므로 그 일을 하실 수 있으며(롬8:23, 10:12, 눅12:22, 사46:4), 또한 신실하신 아버지이시므로 기꺼이 그리하시기 때문입니다(마6:25-34, 마7:9-11).
여기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가 나의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이란 존재가 계시다는 것, 성경을 통해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지식과 함께 신뢰하고 의지한다는 차원에서 그가 나의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불가합니다.
그런데 앞서도 말했지만 사도신경의 구조는 성부 하나님과 창조를, 성자 하나님과 구속을, 성령 하나님과 성화를 말하고 있지만,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할 때 성부에게만 하나님이라는 말을 돌릴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성자도 하나님이고, 성령도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라는 표현은 어떠합니까? 지난 시간 삼위일체와 관련해서 말씀을 드렸지만 위격 상호간의 관계를 따라서 말하면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를 표현한 것으로 성자의 아버지, 성부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아버지라는 말을 사용할 때 위격 상호간의 관계를 따라서만 말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즉 위격 상호간의 관계를 따라서만 말하지 않고, 피조물과의 관계 속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라고 할 때 위격 상호간의 관계를 따라서는 성자 하나님의 아버지, 성부라고 말할 수 있지만, 피조물과의 관계 속에서 아버지는 반드시 성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9장 6절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때 한 아기는 누구입니까?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표현으로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만 하지 않고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도 표현합니다. 즉 성부에게만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성자에게도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피조물의 근원으로서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성자에 대하여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면, 성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첫 마디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하도록 하십니다. 이때 아버지는 성부만을 의미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피조물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은 피조물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내가 믿는다는 것은 위격 상호간의 관계를 따라 성자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내가 믿는다는 것이요, 뿐만 아니라 그가 나의 아버지이심을 믿는다는 것인데, 이때 그가 나의 아버지가 되신 것은 본성적으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본성적으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할 때,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 할 때, 성부에게만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성자에게도, 성령에게도, 다시 말해 삼위일체 하나님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도 염두 해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전능하시다고 표현합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할 때 위격 상호간의 관계를 따라 성자의 아버지이신 성부께서 전능하시다는 것이고, 나아가 성자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령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도 전능하시다는 겁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입니다. 이때 전능하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가 뜻하신 바를 이루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어려움 없이 그가 말씀하시면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시편 115편 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전능’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못하는 것이 없다, 모든 일을 다 행할 수 있다는 것인데, 성경에 보면 때로 비유적으로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것으로 그의 전능성을 표현할 때가 있습니다. 시편 115편 3절이 그런 의미고, 우리가 잘 아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때도 그런 의미입니다(마6:9).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다는 것은 단지 땅이 아닌 하늘에 계시다는 그런 장소적 의미가 아닙니다. 장소적 의미라면 하나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단지 하늘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땅 위에도 충만히 계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계시다는 것은 어떤 의미냐? 땅에 사는 피조물과는 대조적으로 하늘 높은 곳에 계시며, 나아가 하늘 높은 곳에 계실만큼 그 능력에 있어서 한이 없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시는가? 지금 우리가 기도하는 내용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다 들으실 수 있고, 들으신 대로 응답하실 수 있고, 나아가 들으셨지만 보다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하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뜻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의 소유자이시기 때문에, 그 능력에 있어서 한계가 없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자신의 전능성을 행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을 행하십니다. 그래서 시편 115편 3절은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지만, 그러나 그가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전능성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사하신다는 겁니다.
이와 대조적인 말씀이 4절 이하에 나오는데, 우상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시115:4-7) 우상의 특징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인데 반해 우상은 피조물인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사람은 우상의 입을 만들고 눈을 만들고 귀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입을 만든다고 해서 말하는가? 눈을 만든다고 해서 보는가? 귀를 만든다고 해서 듣는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상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면, 그래서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면, 우상은 땅에 있는 것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9절 이하를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시115:9-11) 한 마디로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 때문에 너희는 그만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그가 너의 도움이시고 너의 방패가 되신다는 겁니다.
사도신경은 이런 아버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따라 그가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고백하는데, 성자의 아버지이신 성부께서 천자를 창조하셨다는 것이고 성부만이 아니라 피조물의 근원으로서 아버지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천자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가장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 창세기 1장 1절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 구체적인 내용은 나머지 창세기 1장 전체와 2장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데, 창조는 하나님께서 무로부터 모든 것을 창조하시되, 그의 권능의 말씀으로 6일 동안 모든 것을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은 모든 것을 보시면서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는 데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할 때 ‘창조하다’란 단어의 의미는 무로부터 뭔가를 만들어낸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4장 17절 끝에 보면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라는 표현을 하는데, 하나님만 계시고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있게 만드신 것이 창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는 무로부터의 창조입니다.
그럼 무엇을 창조하셨는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지금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다 창조하신 것입니다. 물론 조금 있다가 언급하겠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만드시고 난 뒤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달리 말하면 선하게 만드셨기 때문에 죄와 악을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죄와 악을 제외한 모든 것을 만드셨는데, 그것을 오늘 본문은 ‘천지’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1장 전체를 통해 설명하는데, 대략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첫째 날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심으로 빛을 만드셨고, 빛과 어둠을 나누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습니다. 둘째 날은 궁창을 만드시면서 위의 물과 아래 물로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그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셨습니다. 셋째 날은 아래에 있는 물을 한 곳으로 모으시면서 뭍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뭍을 땅이라 부르셨고, 모인 물을 바다로 부르셨습니다. 특별히 땅에는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고 하셨습니다. 넷째 날은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을 만드심으로 낮과 밤을 나뉘게 하시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다섯 째 날에는 하늘 궁창의 새와 바다의 고기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여섯 째 날에는 땅의 생물을 만드셨는데, 모든 것을 만드시고 난 뒤 마지막에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천사를 창조하신 것에 대한 내용은 없습니다. 또한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마25:34)에 대한 내용도 사실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드셨다고 할 때 창세기 1장은 6일 동안 만드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더불어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있으라’ 명하시매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에는 권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조금 전에 말씀을 드렸지만 6일 동안 창조하시면서 하나님은 창조하신 모든 것에 대하여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이 선했다, 거기에 죄나 악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격적 피조물인 사람도 마지막에 만드시고 난 뒤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시지만, 심지어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셔서(롬2:14-15) 그것을 이룰 능력도 지니게 하실 만큼 정직하게 지으셨지만(전7:29) 범죄의 가능성 아래, 변화에 종속된 그들 자신의 의지의 자유에 놔두셨습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4장 2항). 즉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해서 더 이상 좋아질 수 없을 만큼 완성된 모습으로 만드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생각할 수 있는데, 우선 모든 피조물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시고 하나님 없이는 어떤 피조물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만드신 이유가 피조물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할 때, 무엇보다 인격적 피조물인 사람과 천사를 만드신 목적이 이와 같다고 할 때 마땅히 창조주 하나님만을 높이고 그만을 경배하며 그를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아담과 하와를 만들어 거기에 두시면서 모든 것을 허락하시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한 것은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결코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그런 명령이 아닙니다. 오히려 만나를 주시면서 시험하셨다고 하신 것처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도 시험이라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을 창조주로 여기느냐의 시험, 자신을 피조물로 여기느냐의 시험, 그렇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참되게 인정하느냐의 시험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이 시험에서 맨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다시 창조의 대략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몇 가지가 있다고 할 때 하나님은 6일 동안 모든 것을 창조하셨는데, 아무런 계획 없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계획을 가지고 매우 질서 있게 창조하셨다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나누어 낮과 밤을 만드시면서 하늘과 바다 그리고 땅을 만드셨습니다. 땅에서는 식물들이 자라나게 하셨고, 하늘과 바다에 동물들을 채우셨습니다. 그리고 땅에 동물도 채우셨는데, 맨 마지막에 누구를 만드셨는가? 그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배경과도 같은 하늘과 바다, 땅을 만드시고 그곳을 채울 수 있는 것들을 만드셨는데, 이런 질서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질서의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질서 속에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 한 가지를 보게 되는데, 해와 달과 별은 넷째 날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낮과 밤은 언제부터 있었는가? 첫째 날부터입니다. 해와 달을 만드심으로 낮과 밤을 주관하도록 하셨지만, 창조의 역사는 해와 달이 있기 때문에 낮이 있고 밤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해는 넷째 날 만들어진 데 반해 땅에서 자라는 풀과 씨 맺는 채소,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는 언제 만들어졌느냐? 셋째 날에 만들어졌습니다. 소위 광합성 작용이라고 해서 녹색식물이 빛 에너지를 이용하여 자신이 필요로 하는 유기 양분과 에너지를 만드는 것은 해가 있어야 합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자면 식물보다는 해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식물을 먼저 만드시고 해를 나중에 만드셨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린도전서 3장 7절입니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고린도전서 3장 7절은 말씀 사역과 관련된 말씀이지만 핵심은 같습니다. 누가 주체냐? 하나님이 주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논리는 간단히 말하면 세상 학문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녹색 식물은 광합성 작용을 해야 하고 광합성 작용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식물보다는 해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해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해 없이도 식물로 하여금 광합성 작용을 할 수 있게 하시고, 필요한 유기 양분과 에너지를 만들어내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섭리에 대한 고백 가운데 하나님은 통상적인 섭리 안에서 방편들을 사용하시지만, 그가 기뻐하실 때에는 방편들 없이, 방편들 너머, 방편들을 거슬러 자유롭게 일하신다고 하는 겁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5장 3항). 방편들을 사용하실 때는 일반적이라고 생각하고 방편들 없이, 방편들 너머, 방편들을 거슬러 일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마치 기적처럼 여겨질 수 있고 또 놀라기도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께는 전혀 놀랄 일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지만 하나님께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고 모든 것의 주체로 계시다는 것입니다.
앞서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의 구체적 내용인 창세기 1장과 2장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창세기 1장의 내용이 창조의 대략이라면 창세기 2장은 특별히 사람을 창조하신 것과 관련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이승구,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Ⅰ 참조). 그런데 창세기 2장 19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라는 말씀, 그리고 이후 아담의 아내인 여자를 만드신 것을 기록함으로 마치 창조의 순서가 남자 그리고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 그리고 여자 순서로 되어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되 그의 권능의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이 창세기 1장의 내용이라면, 창세기 2장은 그 방식이 흙으로, 티끌로 지은 것으로 말씀하신다는 것도 차이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차이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일단 창세기 2장 19절은 아담 이후에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전에 지었던 것을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즉 1장에서의 창조 순서와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또 1장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라고 되어 있지만, 2장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떤 순서로 창조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담의 창조 그리고 난 뒤 하와의 창조 순입니다. 마지막으로 1장에서는 말씀으로 창조되었지만 2장에서는 흙으로, 티끌로 지으셨다고 할 때 흙으로, 티끌로 지으셨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게 아니라, 말씀으로 창조하시되 그 구체적인 방식이 흙으로, 티끌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우리처럼 육체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물질적인 존재도 아니십니다. 그런 분이 우리처럼 손으로 흙을 빚어 만드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씀으로 그리고 어떤 재료를 사용하시느냐 하면 흙, 좀 더 정확하게는 티끌이라는 재료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6문으로 오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내가 믿는다고 할 때 이런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믿는다는 것입니다. 요리문답의 답변은 간략하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들을 무(無)로부터 지으셨다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내가 믿는다고 할 때 단지 창조의 내용만을 믿는 것인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창조와 함께 섭리까지를 믿는 것으로 고백합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또한 그의 영원한 작정과 섭리로 그것들을 지탱시키시고 다스리시는 것을 믿는다고 설명합니다. 단순히 섭리로만 설명하지 않고 작정과 섭리로 설명함으로 모든 섭리가 작정하신 바에 대한 섭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영원 전에 작정하셨고 작정하신 그대로 섭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섭리와 섭리에 대한 유익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7문과 28문을 통해 다시금 살필 것입니다.
어쨌든 사도신경의 첫 부분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내가 믿는다는 것인데, 거기에 창조와 함께 섭리에 대한 고백까지 하고 있다는 게 우리의 해석으로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6문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통해 그가 그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의 하나님과 나의 아버지가 되심을 믿는다고 것,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뿐만 아니라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그가 몸과 영혼에 필요한 모든 것들로 내게 채워 주실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이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 내게 어떠한 악을 보내신다 할지라도 그가 그것을 나의 선으로 바꾸실 것임을 믿는다는 것까지 포함한다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 부분도 사실은 섭리 부분에서 다룰 수 있지만, 간략하게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의 첫 부분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앞서도 말했지만 피조물의 근원이시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피조물의 근원으로서 하나님은 아버지이시지만,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은 것이 우리의 죄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피조물의 근원이시고, 근원이시기 때문에 아버지이시지만, 죄인 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현상이 어떤 것입니까? 로마서 1장 21절에서 23절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을 우상으로 만들어 그것들을 마치 아버지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면서 그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결코 모든 피조물로서의 사람이 아닙니다. 반드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깨어진 관계가 회복된 자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믿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말미암아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고백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계시느냐? 몸과 영혼에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6장 25절과 26절에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30절도 보시면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물론 항상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채워주시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쓰고도 남음이 있게 하시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쓰고도 남는 게 아니라 쓰기에 부족하게 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마태복음 6장 26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다른 모든 피조물을 기르시는 것처럼 그것보다 더 귀한 너희를 기르지 않는다고는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시라면 너희 아버지로 반드시 너희를 기르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요리문답은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이라는 표현도 씁니다. 그것이 물질일 수 있고 또 다른 어려움일 수 있습니다. 특히 이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 ‘내게 어떠한 악을 보내신다 할지라도’라고 표현합니다. 욥기 1장에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욥을 시험한 사탄, 그리고 사탄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그들 스스로 악을 행한 자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그러나 사탄이나 악인들로 인하여 눈물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녀로 삼은 우리를 결코 그냥 내버려두는 법이 없습니다.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이 사실을 잘 표현하고 있는 말씀이 로마서 8장 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좀 더 구체적으로는 이렇게도 말씀하시는데, 로마서 8장 38절과 39절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어떻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수 있는가? 그가 전능하시기 때문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아들로 삼으아주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32절로 하자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 대신하여 아들을 주셨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이 변치 않고 신실하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조차 우리를 사랑하시되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기로 하셨고, 그래서 아들조차 아끼지 않고 내어놓으셨는데, 어떻게 그 사랑을 거두시겠습니까?
결국 사도신경의 첫 부분은 단순히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정도의 내용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창조하신 하나님이 섭리까지 행하시되 그 섭리로 누구를 유익하게 하시는가 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를 그렇게 하신다는 고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