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olin Concerto in D major, Op.35
차이코프스키 / 바이올린 협주곡
Pyotr Il'ich Tchaikovskii 1840∼1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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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 - 니콜라 베네데티 야쿠프 흐루샤 &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전악장 이어듣기
오늘날 베토벤(독일), 멘델스존(독일), 브람스(독일)의 이른바 3대 바이올린 협주곡과 나란히 애호되는 이 명작도 완성 당시에는 심한 악평으로 거들떠 보지 않는 상태였다. 좋은 이해자·협조자인 메크 부인도 칭찬은 하지 않았고 초연을 의뢰받은 러시아 최대의 바이올리니스트 레오폴트 아우어(Leopold Auer 1845~1940)는 ‘연주 불가능’으로 단정하여, 덕분에 페테르스부르크에서의 초연은 빗나갔다. 이 곡을 손에 넣은 사람은 라이프치히 음악원 교수인 아돌프 브로드스키로, 1881년 12월 빈 필 연주회에서 겨우 빛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지휘를 맡았던 한스 리히터는 전혀 마음이 내키지 않았고 단원들 또한 산만한 상태여서 이 초연은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끝났다. 게다가 비평계의 원로 E. 한슬릭에게는 혹평을 받는 등 어쨌든 여지없는 결과였다.
그러나 브로드스키는 이 불상사에 굴하는 일 없이 그 후에도 소개에 힘썼기 때문에 겨우 그 진가가 세상에 인정받게 되면서 그 유명한 아우어도 스스로 연주하게 되었다. 이후로는 짐발리스트, 하이페츠, 엘만 등 그의 위대한 제자들의 중요한 레퍼터리가 된 것이다. 곡은 말한 것도 없이 초연자 브로드스키에게 헌정되었다. 작곡의 동기는 랄로(프랑스)의 [스페인 교향곡](협주곡)에 있다고 하는데 악상은 어느 것이나 극히 러시아적인 색채가 풍부한 것으로 정열적인 협주곡이다. 관현악 편성은 4대의 호른을 제외하고는 표준 2관 편성이다
제 1악장, Allegro moderato - Candenza
소나타 형식의 악장이다. 서주에서 잠시 주제가 암시된 후 바로 바이올린에 의해 낭랑히 울려펴진다. 전개부에서는 화려한 바이올린의 테크닉의 향연이 펼쳐지며 폭발하듯 터져나오는 오케스트라의 야성적인 외침은 짜릿한 쾌감을 느끼게 한다. 카덴짜 (독주자가 반주없이 자신의 기교를 최대한 과시하는 즉흥연주를 하는 부분)가 끝나면 다시 처음의 주제가 반복되고 곡이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끝나게 된다.
1악장 (Allegro moderato - Candenza) Heifetz, Violin
일반적인 바이올린 협주곡이 오케스트라가 먼저 제1,2 주제를 연주한 다음 바이올린이 그것을 받아서 주제를 연주하게 되는 형식인데 비해서 이 곡에서는 오케스트라의 짧은 서주에 이어 바로 바이올린이 제1주제를 연주하게 된다.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제1악장은 바이올린의 화려한 기교와 오케스트라의 장쾌함이 절묘하게 어울린 소타나 형식의 악장으로 서주에서 시작되는 주제 부분이 카덴짜(즉흥 연주부분)와 서로 밀고 당기며 계속해서 반복되다가 마지막에 절정에 이르게 되면 숨가쁘게 전개되는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의 연주들이 정말 눈부신 감동을 느끼게 한다. 가슴속이 서늘할 정도로 장쾌함이 밀려 와서 문득 정신을 가다듬으면 바로 1악장의 연주가 끝이 난 것이다..
제 2악장, Canzonetta (Andante)
'칸쪼네타 (작은 노래)' 라고 되어있는 A-B-A의 3부형식으로 되어있다. 애수어린 멜로디가 곡전체를 지배하며 깊은 감동을 자아내는데, 이는 매우 슬라브적인 정서가 풍부한 선율이다. 곡은 명확히 끝나는 부분이 없이 3악장으로 연결된다.
2악장 (Canzonetta (Andante)) Heifetz, Violin
슬라브적 애수 어린 선율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악장이다. '칸쪼네타(Canzonetta)' 로 되어있는 A-B-A의 3부 형식인데, '칸쪼네타'는 이탈리아의 포퓰러송을 뜻하는 칸초네(canzone)의 축소형으로 주로 16~17세기에 유행했던 가벼운 기분의 작은 가곡작품을 뜻하는 말로, 그냥 '작은 노래' 라고 하면 된다. 흐느끼듯 아름답고 애수어린 멜로디가 곡전체를 지배하며 깊은 감동을 자아내는데, 듣는 이들로 하여금 절로 황홀한 매력에 빠지게 하는 이 2악장은 차이코프스키만의 매우 슬라브적인 정서가 풍부하게 나타나는 선율이라고 평가된다. 이 곡은 명확히 끝나는 부분이 없이 첼로 등 현악기들의 저음을 바탕으로 혼(Horn)과 함께 애절함을 장식하다 끝난 것 같지도 않게 연기처럼 사라지고 만다. 이어서 깜짝 놀랄만큼 강렬한 음량이 터지면서 곧바로 열광적인 3악장 연주와 연결된다.
제 3악장, Finale (Allegro vivacissimo)
자유로운 소나타형식의 악장이다. 전악장에서 이어진 곡은 갑자기 분위기가 확 바뀌면서 열광적인 리듬의 축제로 변한다. 중간에 잠시 우수어린 선율이 고개를 내밀다 제시부의 첫선율이 다시 나타나기를 되풀이 하다 점점 열기를 고조시켜 나가면서 마지막에는 환희에 찬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의 총주로 끝맺는다.
3악장 (Finale (Allegro vivacissimo)) Heifetz, Violin
피날레. 화려하고 여유로운 소나타형식의 악장이다. 2악장에서 이어진 곡은 깜짝 놀라게 할 만큼 갑자기 분위기가 확 바뀌면서 열광적인 리듬의 축제로 변하게 된다. 중간 부분에서 클라리넷, 바이올린 등의 선율로 잠시 우수어린 연주가 이어지다가 제시부의 첫선율이 다시 나타나기를 되풀이 하면서 점점 열기를 고조시켜 나간 후 마지막에 환희에 넘치는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의 총연주로 화려한 대미를 장식하게 된다.
Arabella Steinbacher - Tchaikovsky Violin Concerto
Janine Jansen performs Tchaikovsky Violin concerto 1
Janine Jansen performs Tchaikovsky Violin concerto 1. movement part 1
Janine Jansen performs Tchaikovsky Violin concerto 1. movement part 2
Janine Jansen performs Tchaikovsky Violin concerto 2. movement
Janine Jansen performs Tchaikovsky Violin concerto 3. movement
[장영주]Tchaikovskii -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35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35-solo vn.장영주(11살) 전곡 공연실황
장영주(Sarah Chang, 1980. 12. 10~ )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는 세계에서 가장 매혹적이고 재능있는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그녀는 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미국의 여러 음악 중심지에서, 뉴욕 필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시카고 필, 보스턴 심포니, 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 LA 필,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및 피츠버그 심포니를 포함한, 거의 모든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또한 그녀는 유럽에서 베를린 필, 로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 그리고 영국의 주요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그녀가 함께 협연했던 지휘자로는 다니엘 바렌보임, 콜린 데이비스 경, 샤를르 뒤트와, 베르나르드 하이팅크, 제임스 르바인, 쿠르트 마주어, 주빈 메타, 리카르도 무티, 앙드레 프레빈, 볼프강 자발리쉬, 레오나르드 슬라트킨 등이 있다. 그녀는 콘서트 실황 중계나 음반의 방송 등을 통하여 그동안 방송에 많이 출연하여,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장영주는 1996년 여름 시즌, 남미 순회 연주를 가졌고, 아스펜 음악제에 재출연하기로 계약하였으며, Hollywood Bowl에서 사이먼 래틀 경 지휘로 LA 필과 협연하였고, 라비니아 축제에서 에센바흐 지휘로 시카고 심포니와의 협연하였다. 또 Mann 센터 및 Saratoga 공연센터에서 영국의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였고, 이어서 헬싱키 필, 로테르담 필, 로열 스톡홀름 필과 차례로 협연하였다.
장영주는 1996-97 시즌(즉, 겨울 시즌) 동안에 테미카노프 지휘로 뉴욕 필과 협연하였고, 워싱턴에서 내셔널 심포니와 협연하였으며, 이어서 몬트리올 심포니, 신시내티 심포니,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 몬테 카를로 필과 협연하였다. 또한 그녀는 샤를르 뒤트와 지휘로 한국, 일본, 홍콩에서 몬트리올 심포니와 연주를 가졌다. 그 후 그녀는 주빈 메타의 지휘로 빈 필과 협연하였고, 이 기간 동안 베를린에서 얀손스 지휘로 베를린 필과 시벨리우스 협주곡을 녹음하였다.
1995년과 1996년 사이에 있었던 그녀의 연주 중에는 뉴욕 필과의 협연 및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발티모어 심포니, 달라스 심포니, 디트로이트 심포니와의 협연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녀는 르바인 지휘로 메트로폴리탄 오케스트라와 카네기 홀에서 연주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 시기 유럽에서는 주빈 메타의 지휘로 파리에서 이스라엘 필과 협연하였으며, 틸레만 지휘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래틀 경 지휘로 버밍햄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이어서 그녀는 침머만의 지휘로 톤할레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것을 비롯하여 블롬스테트의 지휘로 밤베르크 심포니와 협연하였으며, 자발리쉬와는 함부르크 필과 호흡을 맞추었다. 그녀는 유럽에서 이 시기에 처음으로 리사이틀을 가졌는데, 그녀가 리사이틀을 가졌던 곳은 더블린, 리딩, 하노버와 볼로냐였다. 장영주는 EMI에서 음반을 발매하고 있다. 그녀의 첫번째 앨범인 'Debut'에서 그녀는 사라사테, 파가니니, 엘가, 프로코피에프 등 대가의 소품들을 선보였는데, 이 앨범을 녹음할 당시 그녀의 나이는 9세였고, 1/4 사이즈의 바이올린을 가지고 녹음했다. 이 앨범은 1992년 대단한 인기를 모았고 단숨에 빌보드 차트의 클래식 분야 1위를 차지했다.
그녀의 두 번째 앨범은 콜린 데이비스 경의 지휘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Op.35 (위 음원)과 볼프강 자발리쉬의 지휘로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생상의 소품들 그리고 샤를르 뒤트와 지휘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비외탕 바이올린 협주곡 제 5번을 담고 있다. 이어서 그녀는 베르나르드 하이팅크의 본 윌리엄스 시리즈(런던 필) 중 삽입된 "종달새의 비상" 을 녹음했다. 1997년에 그녀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품집 "Simply Sarah"를 선보였다. 뒤이어 1998년에는 마리스 얀손스 지휘로 베를린 필과 협연한 시벨리우스, 멘델스존 협주곡 앨범을 발매했다. 그녀는 1993년 그라모폰 상 중 "올해의 젊은 음악가" 부문을 수상했고, 같은 해 독일의 "에코 음반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1993년에 로열 필의 음악데뷔상, 1994년 국제고전음악상의 "올해의 신인음악가" 부문을 수여받았다.
그녀의 또다른 주요한 경력으로는 쿠르트 마주어 지휘로 링컨 센터에서 뉴욕필과 생중계로 협연했던 것을 꼽을 수 있으며, 그녀가 플로렌스에서 주빈 메타와 함께 했던 베를린 필과의 협연은 전유럽에 생중계되었다. 또 그녀는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라이프치히 등에서 순회 공연을 가졌는데, 그 중에는 유엔에서의 공연도 포함되어 있다. 그녀는 1994년 카네기 홀에서 데뷔를 가졌는데, 이 때에는 샤를르 뒤트와의 지휘로 몬트리올 심포니와 협연했다.
그리고 1995년에는 탱글우드 음악 축제에서 보스턴 심포니와의 협연으로 데뷔를 가졌다. 그 외에도 바이에리셔 룬트풍크 오케스트라, 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 로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 홍콩 필, NHK 심포니, 토론토 심포니 등과 연주했다. 그녀는 또한 존 윌리엄스 지휘 아래 보스턴 팝스와 두 번의 연주를 가졌다. 그녀는 한국의 가장 권위있는 음악상인 난파 음악상을 수상한 기념으로 1990년 서울에서 갈라 콘서트에 참여하였고, 1992년 6월에는 UN 정상회담이 열리는 리오데자네이로에서 "지구를 위한 음악회"에 출연하였다. 그녀는 1995년 8월, 서울에서 한국 광복 50주년 기념 갈라 콘서트에 출연하여 KBS 심포니와 협연하였다. 당시 이 콘서트에는 한국 출신의 유명 음악인들이 대부분 출연했다.
이런 까닭에 장영주는 언론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그녀는 The New York Times, The Washington Post, San Francisco Chronicle, The Philadelphia Enquirer, Life, People, USA Today, The Strad, The Times (London), Le Figaro, Berliner Morgenpost, Stern 등의 세계 유수 언론에 의해 소개되었다. 그녀는 TV에도 여러 번 출연했다. "The Tonight Show"와 "Good Morning America"를 비롯하여 NBC 방송의 "Today" 쇼, "CBS This Morning", "CBS Sunday Morning", "Live with Regis and Kathy Lee", "CBS new' 48 Hours", a PB special on gifted children 그리고 BBC 방송의 "Blue Peter"와 "Our Common Future"(이 방송은 100개 이상의 국가에 방영되었다.) 에 출연하였으며, 프랑스와 독일의 방송에도 출연하였다. 그녀가 존 윌리엄스 지휘로 보스턴 팝스와 가졌던 첫번째 연주는 PBS의 "Evening at Pops"에 방영되었고, 그녀가 런던 심포니와 가진 데뷔 연주는 영국의 가장 유명한 예술 전문 프로그램인 ITV의 "The Young South Bank Show"에서 다큐멘터리로 구성되어 방영되었다.
장영주는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부모는 모두 한국인이다. 그녀는 4세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배운지 1년이 채 되지 않아서 필라델피아 지역의 오케스트라들과 연주했다. 그녀는 8세 때 주빈 메타와 리카르도 무티 앞에서 오디션을 받았는데, 이들은 곧 뉴욕 필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연주해 줄 것을 요청해왔다. 1992년 5월 그녀가 에이버리 피셔 커리어 그랜트상을 역대 최연소로 수상함으로써,그녀의 놀라운 재능은 세상에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그녀는 음악 외에 TV 시청을 즐기고, 독서나 수영, 롤러 스케이팅을 좋아하며, 동생 영진(미국명 Michael)이와 놀기도 좋아한다.
1878년 봄, 차이코프스키는 결혼생활에서 온 우울증(차이코프스키는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밀류코바라는 여성과 마지못해 결혼했지만 석 달 만에 파경을 맞았다) 치료차 스위스 제네바 호수 연안의 클라렌스 리조트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그 즈음 그곳을 그의 제자인 요시프 코테크(Yosif Kotek)가 찾아왔다. 베를린에서 요제프 요아힘(Joseph Joachim)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던 코테크는 랄로의 <스페인 교향곡> 악보를 보여주었고, 두 사람은 이 곡을 함께 즐겨 연주했다. 그러던 중 차이코프스키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 철도왕의 미망인으로 자신의 평생 후원자가 되는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때의 사정을 적어 보냈다.
"들리브나 비제의 작품처럼 랄로는 진지하고 심각하게 쓰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새로운 형식을 찾아냈고 대부분의 독일 작곡가들처럼 전통을 답습하는 대신에 음악의 아름다움을 자신의 힘으로 발견할 수 있었던 겁니다. (...) 오늘 아침 나는 불타는 영감 안에서 한없이 타올랐습니다. 내가 작곡하는 이 협주곡이 심장을 파고들 만큼 강력한 음악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드는군요. (...) 정신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있어서 그런지 작곡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바이올린 협주곡의 1악장은 완성되었고, 내일부터는 2악장을 시작할 겁니다. 이 협주곡을 작곡하는 동안 내내 즐거웠고 처음부터 왠지 모르게 작품에 끌렸습니다. 방문객이 없을 때는 하루 종일 작곡에 몰두할 수 있어서 이런 속도라면 예상보다 빠르게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차이코프스키와 그의 평생 후원자가 되어준 폰 메크 부인
차이코프스키는 바이올린 연주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곡의 바이올린 독주 부분은 코테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작곡은 매우 빨리 이루어져 한 달 안에 곡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차이코프스키는 2악장이 마음에 걸렸다. 작품 전체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차이코프스키는 결국 처음 작곡했던 2악장을 버리고 새로운 안단테 악장을 썼다. 그리고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악보가 그 해 10월에, 오케스트라 파트 악보가 이듬해 8월에 출판되었다.
차이코프스키는 이 곡을 완성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 코테크가 초연해 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연주 경력이 많지 않아 명성이 없었던 코테크는 이 작품의 연주를 망설였다. 게다가 그는 자신과 차이코프스키의 관계에 대한 소문을 두려워했다. 차이코프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인 레오폴드 아우어(Leopold Auer)에게 악보를 주면서 초연을 부탁했다. 아우어는 자서전에서 그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차이코프스키가 내게 보여준 협주곡을 우정의 표시로 받아들였다. 나는 작곡가에게 감사하다고 말했고, 우리 둘은 곧바로 연습을 해보았다. 첫 번째 연습에서 작품의 전체적 맥락을 파악하기는 어려웠지만, 1악장 2주제 선율의 서정적인 아름다움과 슬프게 변화하는 2악장 칸초네타에서 매력이 느껴졌다. 나는 초연을 맡겠다고 약속했고 차이코프스키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악보를 주었다. 그런데 악보를 자세히 보니까 이 협주곡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가치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손을 보아야만 했다. 작곡가는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끝내 아우어는 차이코프스키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2년여를 기다리다 지친 차이코프스키는 넌더리를 냈다. "우리의 우정에도 불구하고 아우어는 나의 협주곡을 까다로운 작품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유명한 비르투오소가 '연주 불가능'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애꿎은 나의 협주곡만 오랫동안 내팽개쳐져 있었다. 마치 영원히 잊혀진 것 같았다."
그러다 마침내 구원자가 찾아왔다. 모스크바 출신으로 라이프치히 음악원의 교수였던 아돌프 브로드스키(Adolph Brodsky)가 1881년 12월 4일, 빈 필하모닉 협회의 콘서트에서 한스 리히터(Hans Richter)의 지휘로 초연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당신의 바이올린 협주곡 악보를 처음 본 순간부터 콘서트에서 이 작품을 연주하는 것을 꿈꾸었습니다. 벌써 2년 전 일이었죠. (...) 러시아에 돌아와서 몇 달째 하루 종일 당신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습했습니다. 거의 미친 듯이 매달렸는데 어찌나 즐거웠는지 모릅니다. 그토록 오래 연습했는데도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물론 테크닉이 쉬운 작품은 아니었습니다만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 작품을 이제 알게 되었다고 느꼈을 때, 빈에서 초연하겠다는 결심을 내리게 된 거죠."
그러나 초연은 성공하지 못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빈의 음악계를 주름잡던 음악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Eduard Hanslick)는 "음악이 이토록 심한 악취를 풍길 수 있다는 사실을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증명했다"고 혹평했다. 또 다른 비평가들도 이구동성으로 야유했다. "거칠기 짝이 없는 러시아의 허무주의" "괴이한 음악이 많은 사람들을 유혹한다"는 둥둥. 초연자 브로드스키는 절망 대신 몇 개월 후인 1882년 4월 런던에서 한스 리히터의 지휘로 다시 협연함으로써 거대한 성공의 서막을 열었다. 이어 8월 20일 모스크바 초연을 했고 여기서도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제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아돌프 브로드스키란 이름을 떼어내기는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상황을 인식한 차이코프스키는 원래 예정되었던 헌정자였던 레오폴드 아우어 대신 브로드스키에게 이 작품을 헌정했다.
4대 바이올린 협주곡중의 하나
누가 붙인 별명인지는 알 수 없으나 베토벤, 브람스, 멘델스죤 그리고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들은 '4대 바이올린 협주곡'이라는 칭호를 누리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멘델스죤 (E단조)을 제외한 세 곡의 협주곡이 모두 D장조로 쓰여진 것인데, 이것은 아마도 바이올린이 가장 아름다운 울림을 낼 수 있는 조성이 D장조이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 중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그 화려함과 애절한 멜로디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있는 곡이며, 베토벤이나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비해 이 장르의 작품을 처음 접하기에 좀 더 적당하다고 생각된다.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그의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마찬가지로 처음 작곡될 당시 많은 말썽을 일으켰었던 작품이었다. 이 곡은 차이코프스키가 결혼생활에 실패하고 심한 우울증 증세에 빠져서 이탈리아와 스위스 등에서 요양생활을 하던 중에 작곡되었다 (1878년, 당시 38세). 이 기간은 그가 교향곡 제 4번과 "에프게니 오네긴" 등을 작곡한 시기이기도 한데, 이 때 그는 바이올리니스트인 코데크라는 친구와 함께 지내게 되면서 그의 도움으로 이 곡을 완성할 수 있었다. 초고가 완성된 후 차이코프스키는 당대 러시아 바이올린계의 거장이었던 레오폴드 아우어 교수에게 헌정할 목적으로 그에게 작품에 대한 자문 및 초연을 맡아줄 것을 구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답변은 차갑기만 했다. 아우어는 차이코프스키에게 "기교적으로 보아 도저히 연주가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초연을 거부했던 것이다.
실망한 차이코프스키는 이 곡을 3년 동안이나 발표하지 않고 묻어두었는데, 아돌프 브로드스키라는 러시아의 바이올리니스트가 이 곡을 칭찬하면서 발표할 것을 적극 권하여 1881년 12월에 빈 필과 한스 리히터의 반주로 브로드스키에 의하여 초연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초연당시의 평은 무척 나빴다. 지휘자나 오케스트라 단원들부터 이 곡에 호의적이지 못했고 브로드스키의 완성되지 못한 기교는 청중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으며, 결정적으로 독설가였던 평론가 한슬리크는 이 곡에 대해 다음과 같이 혹평하였다.
"우리는 천하고 품위없는 얼굴만 봤고 거칠은 고함소리만 들었으며, 싸구려 보드카의 냄새만 맡았다. 프리트리히 피셔는 짜임새없는 그림을 비평할 때 '보고 있노라면 냄새가 나는 그림이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차이코프스키의 이 곡은 음악작품에도 들어서 냄새가 나는 작품이 있을수 있다는 두려운 생각을 우리에게 처음으로 알려주었다."
한슬리크의 혹평을 들은 차이콥스키는 실망을 금치 못했으나 이 곡의 가치를 굳게 믿고 있던 브로드스키는 유럽 각지에서 이 곡을 계속 연주하여 결국 청중들의 인기를 얻는데 성공하였고, 나중에는 아우어 교수도 이 곡의 가치를 인정하여 스스로도 연주함으로써 대성공을 거두고 그의 제자들에게도 적극적으로 가르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곡은 많은 공로를 가진 브로드스키에게 헌정되었다.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한슬리크가 말한 것처럼 강렬한 러시아적인 냄새가 나는 것이 특징이다. 1악장의 야성적인 주제나 2악장의 슬라브적 애수가 어린 선율, 3악장의 광포한 리듬과 열정적인 끝맺음 등은 러시아외의 유럽 작곡가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독특한 민족색채가 넘치는 것들이다. 또한 아우어 교수가 처음에 연주가 불가능할것이라 예견했을 정도로 어려운 기교를 요구하는 난곡이기도 하다. 그러나 요즘의 신예 바이올리스트들은 거의 대부분이 이 곡을 자유자재로 연주함으로써 자신의 기교를 세상에 과시하고 있으니 세월이 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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