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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 장 잃은 양 찾은 예수님, 잃은 드라크마 찾은 여자
1.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5.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7.내가 너희에
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8.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1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
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눅15:1-10)
오늘은 잃은 양과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께서 성경에 하나님 자신을 계
시하여 주신 바대로, 천지 창조와 사람을 지으신 유일한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그 외에 다른 신은 없
다고는 것을 받아 고백한 신앙이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성경의 말씀을 사실로 믿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수 있도록 돕는 분은 성영님이시라는 것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신
참 하나님은 말 그대로 한 하나님이지만, 존재에 있어서는 세 인격,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영님의
세 인격으로 계십니다. 이것을 삼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신학적으로는 삼위일체라고 하는데 삼위
일체라는 말은 성경엔 없지만, 한 하나님이 세 인격으로 계시면서 하나의 뜻을 가지고 일하시고 그
일을 하시는 데는 각각의 분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삼위의 하나님, 또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하나님 안에 아버지의 인격이 있고 아들의 인격이 있고 성영님
의 인격이 있어, 삼위 하나님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천지 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 아버지 안에 함께 하신 인성(생명,아들)과 신(성영님)이, 하나
님의 형상을 따라 모양대로 사람을 지으시고, 천지를 창조하실 것과 지으신 그 사람이 죽으리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그것을 죄로 정하여 그 죄에서 구원하여 생명을 주시는 뜻을 계획하셨습니다. 함
께 계획하신 그 뜻을 이루실 때는, 아버지 하나님은 모든 일의 지휘를 하셨고, 인성(아들)은 아버지
에게서 나와 육신(사람)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죗값을 치러 구원을 이루어 놓으셨고, 또 아버지
와 아들에게서 나오신 성영님은 예수님의 이루신 이 모든 구원의 사실을 사람 안에 오셔서 믿게 하
시고 이루어지도록 일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다 이해하고 있지요? 또한, 성경 기록의 감동도 성영님
이시고 기록된 말씀을 믿도록 도우시고, 인간이 죄인인 것도 예수님이 구주이신 것도,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는 것도, 믿을 수 있게 하시는 것도 성영님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계속 변호해 주
시고, 말씀을 근거로 하여 계속 변호하시고 증거하십니다.
요16:13에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예수님과 더 깊은 경험의 관계가 되도
록 도우시고, 다시 오실 예수님과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일, 이 같은 모든 장래 일에 대하여 믿
게 하시고 보증하시는 분이 성영님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삼위의 하나님을 정확히 알고,
믿는 것이 되어야 바른 믿음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믿는 믿음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반
드시 성영님의 도우심을 구하여 성영님으로 믿는 믿음이 되고, 일생 성영님을 의지하고 교제하는
관계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일생만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 가서도 성영님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영님으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나는 것도 성영님으로 나는 것이요, 내가
믿음이 성장하고 영적인 사람으로 자라는 것도 성영님으로 되는 것이요, 육을 벗고 하나님 나라로
가는 것도 성영님으로 가는 것이요, 몸으로 부활하는 것도 성영님으로 부활하는 것이요, 하나님
나라에 가서 영원히 사는 것도 성영님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성영님과의 관계가 절대적이기 때문에 반드시 성영님을 알고 교제를 이루는
믿음이 돼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를 참으로 바랍니다.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런데 성영님께서 제가
말씀을 준비할 때 무엇을 깨닫게 하셨는가 하면, 아버지 하나님을 성부라고 부르는 것, 아들 예수
님을 성자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성부''성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부, 성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는 맞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성부 하나님'하는 것이나
'아버지 하나님'하는 것이나 하나님(아버지)을 말하는 것은 맞지만, 그래서 우리는 맞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성영님은 아니라고 분명히 가르쳐주셨습니다. 저도 지금까지 아버지 하나님을 성부로
아들 예수님을 성자로 표현해 왔습니다. 왠지 친근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지만, 내 안에서는 친근
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성부라고 하면 아버지는 아버지인데 차원 있는 부름인 것 같은 느낌 때문에
다른 생각 하지 않았습니다. '성부''성자'라고 하는 것에 마음에서는 거부가 있었지만 다른 생각을
해보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다시 점검해보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을 성부라고, 예수님을 성자라고 부른 곳이나
그렇게 불러도 되는, 흐름이라는 것도, 느낌을 들게 하는 것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부르는데 있어 성경이 하지 않았고, 사람이 임의로 변경한 것으로서 성영님께서 아니다
하셨으면 아닌 것이니, 이것을 말씀하신 후부터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으로 여겨 저도 사용
하는 것을 깨끗이 금했으니 여러분도 금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미 나간 설교에는 그렇게 부른
곳이 꽤 있을 것이니 이해하기 바랍니다. '성부 성자'의 '성'을 하나님께 붙일 수 없는 이유는
'성'을 한자어로 '성인 성(聖), 성스러울 성(聖)'을 썼습니다. 한문 성경을 보니 '성인 성'으로
표기가 돼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성인입니까? 하나님을 성스러운 분이라고 합니까? 하나
님은 성인이 아닙니다. 성스럽다고 표현하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 중에서도 사람들로부터 존경받
는, 높임을 받는 그런 정도의 사람을 성인이라 칭하는데, 하나님을 그런 정도나 되는 것처럼 칭
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거룩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룩을 다른 말로 하면 '의'입니다. 흠이 없
다는 말이에요. 거룩을 원어로는 '하기오조'라 하는데 하기오조는 '구별'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닌 창조주다. 어떤 피조물과도 구별된 신으로서 창조주다. 피조물 중에는 거룩함이 없
고 오직 하나님만이 거룩하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거룩은 하나님께만 사용됩니다. 그런데 하나
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께서 사람 안에 오시면 거룩할지니라 하신 그 거룩이 이뤄진 것입니다. 바로 거룩하신, 의이신,
흠 없으신 예수님이 내 안에 오셨으니 거룩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을 하나님께는 사용할 수 없지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으로 된 것, 여러분이 이
해를 잘하십시오.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은 하나님께서 거룩케 하셨다는 의미에서 '성'을 붙였습
니다. 하나님과 관계된 것, 관계되는 것 등은 하나님께서 구별시키셨다,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구별
된 것이라는 뜻에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전, 하늘 성전을 모세에게 지으라고 명하시고 피
로 정하게 하여 구별하셨으므로 성전이라고 하셨고, 또는 성도라고 한 것, 성영님으로 다시 나
하나님의 거룩한 자가 되었다는 뜻에서 성도라고 불렀습니다. 또 성일,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거룩
하게 구별하셨으므로 성일이라 하고, 구약에 성일이 있잖습니까, 그같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
하나님의 것을 성일, 또는 성회라 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것에 붙여졌습니다. 이해됐습니
까? 우리가 한 분 하나님을 어떻게 알아야 하고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예수님께서 그 호칭을 '아
버지와 아들과 성영님'이라고 정확히 가르쳐주셨습니다. 또한 성경은 그 관계에 대해서 정확히 가
르쳐주고 있습니다. 바로 한 하나님이 삼위로 계시면서 일체이신 것과 아버지와 아들과 성영님,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도 '성부 아버지''성부 하나님'하고 부른 적이 도무지 없습니다. 계속 내 아
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성부라 부르라고 하신 것도 아니고 '아버지'로 부르라고 가르쳐주셨
습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는 아버지요, 한 위는 아들이요, 한 위는 성영님임을 분
명히 구분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면 성영님은 왜 앞에 '성'을 붙여서 성영님이라 하였는가? 본래는 성영님을 '영'이라고 합니
다. 영! 요14:17에 저는 '진리의 영'이라 하셨고, 행2:17에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해서 영이라고 했고, 행16:7에 '예수의 영'이라고 했고, 고전2:12에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다'고 했고, 갈4:6에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했고, 요일
4:2에 '하나님의 영'이라고 했고, 아무튼 성영님을 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영, 예수님의 영이 사람 안에 들어오시는 것이기에, 사람 안에 오셔서 사람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으시는 것이기에 성영님이라고 한 것입니다. 사람 안에 오셔서 영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시고, 믿음을 도와주시는 일을 하시니 그래서 성영님이라고 하셨다는
말입니다. 직접 사람 안에 오시기 때문에, 사람 안에 오셔서 믿음을 도와 거룩케 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성영님'입니다. 모든 생물이 기동하는 것도 바로 영이신 성영님에 의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영의 기운으로 사는 거예요. 그렇기에 성영님입니다. 사람 안에 들어오셨을 때는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영이 되어주셨으므로, 그래서 성영이라고 한다는 것, 여러분이 이 부분에 대해서 이해되어
알기를 바랍니다. 좀 뻥 뚫리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우리가 우리 안에 오신 성영님으로 예배드리는
것이요, 말씀으로 사는 능력을 갖추도록 도와주시는 성영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과 성영님이 함께하는 영적인 예배, 신영과 진정으로 드리는 복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의 말씀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잃은 양 찾은 목자와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자를 비유
로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읽어보았습니다. 1에서 7까지의 내용은 예수님이 죄인을 찾아오셨다는 말
씀이고, 8에서 10까지는 죄를 사하여 주시고 생명과 복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그 언약을 받은 이스
라엘, 즉 유대인들이 찾아야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말씀한 비유입니다. 그러니까 잃은
양 찾은 목자는 죄인 찾으시는 예수님을 비유한 것이고, 잃은 드라크마 찾은 여자는, 하나님의 말
씀을 받고 하나님의 언약을 가진 이스라엘이 찾아야 하는 것은 그 예수님임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
러면 이 비유가 우리와는 상관없는 것입니까? 더욱 상관있다는 것, 거듭 말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아십니다. 우리가 찾아야 하는 분, 우리가 만나야 하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비유의 말
씀으로 깨달아 알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찾으시고, 우리는 그 죄인으로 예수님으로부터
찾아진 바 되어야 하고, 그래서 말씀 안에서 구해야 하는 분, 찾아야 하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요,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과 계속 만남이 이루어지고 그 말씀이 말하는 예수님을 자기 안으로 모셔들
여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비유입니다.
목자는 자기의 양 무리를 우리에 안전하게 넣을 때까지는, 양 무리가 풀을 뜯는 중에 이리나 다른
사나운 짐승들에게 잡아먹히지 않도록 지키고 보호하는 데 온 마음과 힘을 다합니다. 항상 마음과
눈을 두고 살핀다는 말입니다. 짐승에게 물리면 사력을 다해 짐승의 입에서 기어코 양을 건져내어
상처를 싸매주고 각별히 돌봅니다. 또한 자기 양들이 배불리 먹게 하려고 푸른 풀밭을 찾아다니고
물가로 인도하여 언제나 부족함이 없도록 하는데 열심을 다합니다. 양을 치는 목자에 대해서 그
목자상을 대표로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이스라엘의 이대 왕이었던 다윗은 왕이 되기
전에는 어려서부터 부모를 도와서 양 치는 일을 했습니다.
삼상17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싸움으로 늘 항오를 벌이고 있는 상태인데, 블레셋의 용사
골리앗이 키가 약 2미터 90센티 정도라니 그 크기가 상상됩니까? 이 구척장신인 골리앗이, 자기와
일대 일로 싸울 자를 내보내라 만일 우리가 싸움에 지면 너희의 종이 되겠다. 그러나 골리앗이 그
를 죽여서 이기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겨야 한다고 이스라엘을 계속 위협하고 야유
하며 싸움을 거는 것을 이 소년 다윗이 보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울과 온 이스라엘은 놀라고
심히 두려워하며 그 앞에서 도망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자나 깨나 골리앗이 두려운
존재가 되어 마음에 쉼이 없는 가운데 있으니 심지어 이스라엘을 모욕하러 온 골리앗을 죽이는 사
람에게는 사울 왕이 많은 재물과 딸을 줄 것이라는 말까지 돌게 되었습니다. 소년 다윗이 이 광경
을 보고 듣고는 도대체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
느냐"라고 했으니, 여러분이 소년 다윗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얼마나 확고한지를 알 수 있지 않
습니까? 그냥 예사로 해본 말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기에 골리앗 보기를 자기 양을 물어가는 한
마리 이리에 불과한 자로 보았습니다. 짐승을 쳐서 죽이듯 골리앗을 죽이는 것은 다윗에겐 아주
쉬운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쳐서 죽일 것을 사울에게 고하자 사울이 걱정하며 "아니다, 넌 아직 어려서 안
된다. 네가 어디 감히 그 큰 장수인 골리앗을 죽인다고 하느냐, 더구나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였는
데 그러니 말아라, 말아"하고 다윗을 말렸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사울에게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
까?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 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
고 그것을 쳐 쳐죽였었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했
습니다. 물론 다윗의 이런 선의 모습은 예수님에 대한 예표적인 것입니다만, 저는 이 같은 다윗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진정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의 참 인격과 마음의 진실에서 우러나는 다윗의
신앙을 보면서, 얼마나 내 마음이 흐뭇하고 기쁘고 사랑스러운지, 크게 감동이 되어 다윗에게 그렇
게 사랑이 가더라는 말입니다. '아,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자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진정
알고 있었구나!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니 그렇게 담대할 수가 있었구나!'하고 다윗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소년 다윗이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했으니, 소년, 이때 17세라고 성경이 밝히고 있는데, 이 소년의 이
말이 얼마나 당당합니까? 얼마나 멋집니까? 조금도 마음이 비굴하지 않은 당찬 이 말은, 바로 하나
님을 아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졌다는, 하나님의 마음이
라는 말입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려고 반역을 일으킨 사단의 교만한 행위에 분노
하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단번에 머리를 깨실 것이라는 것을 보이신 예표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
의 이 분노는 사람의 혈기에서 나는 분노가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서 나는 분노이십니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목동으로 양 무리와 함께 생활했습니다. 다윗이 양을 돌보는 데 있어 양의 부족
한 부분들을 살피고 양을 사랑하여 돌보는 일에 마음을 다하였습니다. 다윗이 양을 향한 자기의 그
같은 선한 열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복입니까, 자기
의 치는 양들을 위해 푸른 초장을 찾고, 잔잔한 물가로 이끌어 물을 마시우고, 양들의 풀을 뜯고
물마시고 쉬는 평화로운 모습을 보면서 다윗의 마음도 그같이 행복감에 젖는 것입니다. 새끼 양을
움켜가는 사납고 포악한 짐승에게 자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위태함보다는 먼저 새끼
양이 그 짐승의 먹이가 되어 처참하게 찢겨 죽을 것을 생각하면 지체할 수가 없습니다. 잡혀먹힐
위기에 처한 새끼 양을 구하려는 것에만 마음이 있으니, 그같이 위험을 무릎 쓰고 사자나 곰을 상
대하여 기어코 그 입에서 양을 건져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다윗이 그 같은 양을 향한 자기 열심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자기 백성을 향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과 열심이 얼마나 크신지를 다윗의 마음에 크게 감동으로 깨
달아지고,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목자처럼 자기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고 보호하시며 지키시고, 힘
을 주시며 쉴 만한 물가로,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
면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봅니까? 자신에게서 하나님을 봐요? 그렇다면
이것만큼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윗이 그렇게 목자와 같은 하나님을 날마다 경험하게 되었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을 목자로 비유하여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
으리로다"하고 계속 그 은총을 노래하고 찬양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진실한 다윗은 늘
자신의 죄를 알고 심영에 통회하며 자복하여 진심의 회개를 잘하였습니다. 진리이신 여호와 하나님
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경외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자,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자였습니다. 다윗
이 장성한 뒤에 깨달았기 때문에 그렇게 진실해져서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그 부모에게 신앙을 배우고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하는 일이 다윗의 그 마음에도 합하였기
때문에 자기의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사랑을 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또한 하나님께서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라고 하셨습
니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하셨습니까, 안 하셨습니까? 그 말이 행13:22와 삼
상13:14에 기록돼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셨
습니다.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하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그의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신다고 하는 그 중심도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중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말씀하는 중심에 대해서도 분
명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삼상16:7에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에게 다윗을 왕으로 기름을 부
을지니라 하시면서 이르시기를 그 용모와 신장은 보지 말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
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중심을 보신
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진정 진리를 찾는가, 하나님과 같은 마음인가를 본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다윗의 중심이 그렇게 하나님과 같은 중심을 가졌으므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예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가져
야,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입니다. 잘 알아듣기 바랍니다. 우리 중심이 예수님의 중심과
같은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보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5에 너희 안에 이 마
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마18:35에도 보면 우리가 용서에 대해서
말씀을 나눴잖습니까?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
와 같이 하시리라 하셨잖아요? 여기서 말씀하는 중심도 바로 너희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마음과 같아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그 말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용서가 되어야 바
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믿기를 원한다고, 뜻대로
믿게 해주시라고 대부분 그렇게 기도하는 경우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과 같
은 자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뜻대로 믿는 것임을 말합니다. 하나
님의 뜻이 그에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바로 성전이 되었다고 한다는 말입니다. 성전!
양은 자기 목자의 음성만 압니다.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요. 양은 자기 목자의 음성만 알도록 창
조되었어요. 왜냐?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비유하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자를 양
으로 비유하여 목자이신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는 자의 관계를 알게 하기 위해서, 양을 자기 목자의
음성만 듣도록 창조하시고 그같이 목자와 양의 관계를 비유로 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양은 자기 목
자의 음성만 듣고 그 인도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자기 목자의 음성이 아니면 아무리 양이 좋아하는
꼴을 주며 불러도 그 음성을 따르지 않고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를 양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또 성경은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
하지요? 왜 어린 양입니까? 어린 양은 어미의 돌봄을 받고 오직 그 어미에게서 젖을 받아먹고 성장
합니다. 그처럼 예수님께서도 오직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양육을 받으시고, 오셔서 또 그 아버지 것
을 자기의 양들에게 먹이시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비유하셨어요. 독자의 씨로 심어져, 곧 어린 양으로 그 신앙의 혈통 속에 계시면서 아버지 것을 받
는 양육을 받아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그 영혼에 가진 사람들의 그 신앙이,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드러내 주면서, 오셔서 하실 일에 대하여 말하게 하신 것입니다. 선지자
들로 말하게 하였고, 또 누구보다도 다윗이 가장 크게 예수님을 드러냈습니다. 잠언도 대부분 예수
님을 말한 것입니다. 신앙의 사람들을 통해 예수님을 말하였기 때문에 그래서 구약에서는 비밀로
계셨다고 하는 것이요,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비유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요10장에서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양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멀리서도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예수님의 양이면, 예수님의 양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
을 듣고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진짜 예수님의 양인지 아닌지를 아는 것은 멀리 볼
것도 없습니다. 자기 목자 음성 듣기를 원하여 그 말씀 따르기를 기뻐하느냐, 오직 자기 목자 음
성에만 온 마음을 두고 있느냐, 그것이 예수님의 양입니다. 양이라면 자기 목자가 아닌 음성은
절대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10장에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
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
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
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맞는 말씀입니
까? 교회 다닌다고 해서 다 양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목자의 음성 듣기를 원치 아니하고 목자인
것처럼 가장한 거짓 목자, 사단의 누룩 넣은 떡에 취하여 따라다닌다고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기
에 예수님 외에는 사람이 양의 목자가 될 수 없습니다. 만일에 자신을 목자로 말하는 자가 있거나,
직분을 목자로 호칭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100프로 거짓 선지자나 거짓 그리스도인입니다. 거짓
목자인 사단의 종입니다. 예수님만 양의 목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자가 양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도 '네 양을 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예수님의 양이라고 하셨습니다. 아셨습니까? 그러니까 누구만 목
자에요? 목사가 목자입니까? 목사는 목자가 아니에요. 오직 예수님만 양의 목자입니다. 그래서 오
늘날 목사를 목자라고 하여 그 목자의 말을 따라간다고 하는 것이면 그것은 예수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을 목자라고 해도 거부감 들지 않고 따라간다는 것, 분명히 알기 바랍니다.
그런데 양이 고집이 세고 무능합니다. 그렇기에 목자의 음성이 들리지 않으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모
르고 방황합니다. 방향도 모르고 방향감각도 없습니다. 혹 무리에서 떨어지면 자기가 왔던 길도 모
르고 돌아갈 길도 모릅니다. 그래서 양은 목자의 음성과 목자의 막대기가 없으면 안 됩니다. 자기
를 해치러 오는 적이 있어도 몇 발짝 뛰어 도망가는 것 외에는 방어할 능력도 없습니다. 목자가 지
키지지 않으면 그냥 잡혀먹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에서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
느냐 하셨습니다. 목자는 자기 양을 알기 때문에, 특히 어린 양을 각별히 돌보기 때문에 자기 양
무리에 양이 다 있는지 없는지 목자는 알아차립니다. 또한 하루를 마감하면서 양을 우리에 넣으며,
이탈한 양은 없는지 수를 헤아려 봅니다. 그런데 만일에 양 하나가 눈에 띄지 않는다면 목자는 그
양 무리를 두고 잃은 양을 찾으려고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 있을 만한 곳을 다 찾아다닙니다. 그
한 마리의 양을 포기하지 않고 찾기까지 찾아다닌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불쌍한 그 양이 짐승의
먹이가 되지 않았기를 마음으로 빌면서 애타게 양을 부르며 찾아다닙니다. 그러다 그 목자의 음성
을 듣고 멀리서 울부짖으며 목자를 찾는 그 양을 만났을 때, 주인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을지를
저는 충분히 상상이 갑니다. 안도하며 기뻐하는 목자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비유를 드신 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 잃은 양 찾으시는
목자로 오셨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함입니다.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심정처럼 예수님께서도 간절히
찾는 자가 있다, 애타게 찾는 자가 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누구를 찾는 것일까요? 목자의 음성을
기다리는 길 잃은 양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바로 아버지의 집을 나가 탕자로 살던 죄인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돌아오고자 하여도, 자신이 아버지께 죄를 지었으므로 차마 돌아오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아버지 집을 그리워하는 집 나간 탕자, 곧 자신이 아버지께 죄지었음을 아는 죄인을 찾
는 것입니다. 죄인! 바로 수가성 사마리아 여자가 아버지 집을 그리워하는, 목자를 애타는 찾고 기
다리던 잃은 양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집 나간 탕자로 죄인임을 아는 잃은 양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잃은 양은 목자의 음성에서 떠나 먹이에만 정신이 팔려 자기 배 채우기에 급
급해 있는 그런 양을 말하는 것 아닙니다. 목자의 소리를 외면하고 자기 배 채우기 위해 정신이 팔
려서 제멋대로 행동하여 무리에서 이탈한 그런 이기적인 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잃
은 양이라고 하는 것 아닙니다. 양 무리 중에서 무시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약한 양입니다. 힘 있
는 양들이 서열적인 것도 있고, 힘을 과시하려고 제 눈에 힘없는 약한 양을 타깃(target)으로 삼고
계속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것입니다. 괴롭힐 만한 대상이 눈에 꽂히면 포기하지 않습니다. 눈에 띌
때마다 흥분하여 머리로 받아치고 쫓아다니며 괴롭힙니다.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약한 양이 무리
에서 밀려 쫓겨나게 되고 또는 숨다가 그 양 무리에서 떨어져 길을 잃게 된 그런 경우를 말합니다.
주인이 그 사정을 다 알고 있습니다. 무리에서 밀려나서 길 잃어버린 것을 안다는 말입니다. 그렇
기에 불쌍한 그 양이 짐승에게 발견되어서 먹이가 되기 전에 찾아야 하니 양 무리를 들에 두고 급
히 찾으러 가는 것입니다. 애타게 울며 주인의 소리를 찾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한시가 급합니다.
바로 우리 영혼이 이같이 생명이 갈하여 꼴을 먹이시는 목자를 간절히 찾는 영혼으로서 예수님의
양이어야 하고, 예수님께 찾아진 바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잃은 양의 비
유 뜻입니다. 믿는다는 사람이 세상의 것으로 배를 불리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절대로
관심을 둘 수 없고, 자신이 죄인인 것도 관심을 둘 수 없습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오직 목자이
신 예수님의 음성, 말씀에 귀 기울여 따라가는 것만이 양이 할 일이요, 예수님의 양입니다. 참으
로 여러분이 예수님의 양이면 예수님이 자기 목자임을 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목자이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의 그 기쁨, 짐승에게 잡아먹히지 않은 그 안도감, 그 위로가 크게 있을 것입니다. 짐
승에게 잡아먹힐 수밖에 없던 자기가 목자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으므로 두려움과 무서움에서
놓여난 그 위안이 크게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목자는 "야! 이놈아! 도대체 왜 이탈해서 나를 이렇게 힘들게 괴롭혀! 나를 이렇게 애먹이고
이런 고생을 시키느냐"고 호통한 것이 아니라, 그 기쁨이 얼마나 큰지 당신은 걷고 그 양은 어디에
다 멨어요? 어깨에다 메고 즐거워하며 집에 돌아와서는, 이웃을 불러 음식을 나누며 내가 잃었던
양을 찾았다고 양을 찾은 이야기꽃을 피우지 않습니까? 그래서 목자가 찾는 것은 무리에서 밀려나
길 잃은 한 마리 양입니다. 또한 길 잃은 양이 애타게 찾는 것은 주인의 음성입니다. 주인의 음성!
유대인들은 목축이 대부분 업이었으므로 예수님의 이 비유 말씀을 알아들어야 했습니다. 눅19:10에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 하신 말씀대로, 유대인들에게 친숙한 비유를
들어 바로 예수님 자신이 그 목자와 같이 아버지의 집에서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러 세상에 오셨다
는 것을 비치신 것입니다. 잃어버린 자가 예수님이 찾는 자요. 잃어버린 자만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잃어버린 자만이 예수님의 음성을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듣기를 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기쁨이 있고 예수님의 위로와 함께 예수님의 영광에 함께 앉는 것
입니다. 5에서 찾은즉 즐거워하여 어깨에 메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에
함께 앉게 한다는 것, 함께 앉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여기서는 잃어버린 자가 누구라는 것입니까? 1,2에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
까이 나아오니 누구만 말씀을 들으러 나왔어요? 죄인만 들으러 나왔어요. 세리도 죄인이라고 비난
받고 조소를 받았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유대인들에게 왕따를 당했습니다. 무리에 함께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세리와 죄인들만 말씀을 들으러 나왔어요. 바로 이들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잃은
양입니다. 2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
는다 하더라 했듯이 이들이 세리를 보고 자기 동족의 세금 걷어서 로마에 주는 자라고, 그 죄인들
과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원망하며 서로 수군거린 겁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면 어떻게 저 죄인
들과 음식을 같이 먹을 수 있는 것이냐는 거지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누굽니까? 스스로 의인인
척하는 자들입니다. 스스로 의인이 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
면서 스스로 의인인 척하는 사람, 죄인인 척만 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키기 때문에, 나는 주일 예배는
빠지지 않고 잘 나오기 때문에, 십일조는 떼먹지 않고 잘 내고 있기 때문에, 나는 죄와 상관없는
자라는 자칭 의인인 이런 바리새인이 자기 속에 있고, 나는 성경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성경에 대
해서는 너보다 더 잘 안다고,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성경을 수십 독하여 성경을 꿰고 있어서
성경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다고 하는 서기관, 세상 지식을 높이는 서기관이 자기 속에 있으며, 물
질로 부자가 돼야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고, 땅에서 잘 사는 복을 받는 것이 예수 잘 믿는
증거라고 하는 사두개인이 자기 속에 있으면, 도무지 예수님의 알아볼 눈도 알아들을 귀도 없어,
예수님의 말씀이 그 속에서 거부당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 속에
서 거부당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듣는다고 말씀 앞에 앉아 있지만 그 영혼은 거부하는 것입니다.
자기 속에 바리새인이 나서서, 자기 속에 서기관이 나서서, 자기 속에 있는 사두개인이 나서서 수
군거리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막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 서기관 등 이들은 죄를 보게 하시려고 주신 율법을, 자기들은 잘 지키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거리끼는 것이 없다고 스스로 의인으로 자처했습니다. 한편은 자신이 죄를 지
은 죄인이라 하여 감히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살던 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의인으
로 자처하던 이들이 이 죄인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여 정죄하고 경멸했습니다. 스스로 의인으로
자처한 종교 지도계층에 있던 이들에게, 예수님께 말씀을 들으러 나온 세리와 죄인들이, 소외계층
사람들이 멸시와 조소를 받으며 죄인으로 내몰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으로 불리던 이들 자신
도, 비난과 경멸당함을 받을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 앞에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 죽을 죄인
으로 살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렇기에 이들이 예수님께 찾아진 바가 된 잃어버린 양이요, 예수님의
양입니다. 스스로 죄 없다고, 의인이라고 자처한 바리새인 서기관은 바로 주인의 음성을 듣지 않고
자기가 힘 있다고, 능력 있다고 약한 양을 무시하고 받아치며 괴롭혀 무리에서 밀어낸 고약한
양들입니다.
7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늘에서도 회개할 것 없는 의
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데 그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더 기뻐한다 그런 말이 아닙니
다. 바리새인이 누구냐, 서기관이 누구냐? 회개할 것이 없다고 하는 자들, 회개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율법을 받아 그 일을 행한 그것으
로는 하늘에서도 기뻐하는 것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한 것, 하나님의 주신 율법의 본뜻은 죄인임을
깨닫는 데 있고, 예수님으로 죄 용서받게 하는 데 있으니, 그러므로 율법의 뜻대로 너희가 죄인임
을 아는 것을 기뻐한다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죄인임을 알 때에, 너희 앞에 와계신 하나님을 볼 것
이라고, 그러므로 하늘에서는 죄인이라야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니 그 죄인 하나를 원하시고 기뻐하
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늘에서 원하는 것은 아흔아홉이 아니라 아흔아홉에서 하나를 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
켜 행하는 것만이 하나님이 원하신 뜻이 아니라, 그 아흔아홉 속에 넣은 근본의 뜻, 사람이 하나님
의 뜻에 완성이 돼야 할 하나가 더해져야 한다는 말씀이에요. 율법의 모든 것을 지키고 행한 그것
도 기뻐하시는 것이지만, 그러나 율법의 모든 것이 집중되어야 하는 그것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가 빠지면 아흔아홉이 다 소용없다는 뜻이에요. 이스라엘이 아흔아홉을 했으면 백으로 완전케
되는 가장 중요한 하나, 바로 너희가 죄인임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죄인 = 예수님'이니 그
러므로 죄인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 죄인임을 알 때에 죄인의 구주이신 예수님을 만나 한몸을 이루
는 것이니, 그것을 알라는 말입니다. 너희가 아흔아홉을 이뤘어도 율법의 뜻대로 죄인임을 알고,
죄인의 하나로 죄인 찾아오신 예수님께 찾아져야 그것이 하늘에서도 기뻐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
니다. 죄인으로 예수님을 맞아 영접해야 그것이 율법의 뜻이요, 백(100)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백은 예수님의 수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예수님으로 완성이 돼야 백의 수에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가 그 죄인이라는 하나를 잃었으니 예수님도 잃게 되었고, 그렇게 목숨을 다하여 행하여 온 너
희의 그 아흔아홉도 다 잃은 것이 되었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가장 귀중한 하나
를 잃어버린 것이 있다. 인간은 의가 없는 죄인이라고 했지, 언제 너희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했느냐? 그 귀중한 하나를 너희가 어느 때 잊어버리고 그런 잘못된 것을 가졌는지, 잃어버린 그 하
나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 오늘 8에서부터 여자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
은 비유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잃어버린 그것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8에서 '어떤 여자가'한 것은 하나님의 신앙을 가진 이스라엘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드라크
마는 그때 은전으로 된 화폐 명칭인데, 한 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 정도였다고 합니다. 돈
의 가치로는 크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드라크마를 비유로 하신 것은 은이라는 것과 열 개라는 것
과 돈이라는 각각의 그 특성에 있습니다. 은도 열 개도, 돈도 다 사용된다는 점에서 의미를 두었다
는 말입니다. 그때 당시 유대 풍습에 남자가 자기와 혼인할 여자에게, 남편으로서 일생 변함없이
사랑하고 남편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겠다는 그 의무 사항들을 각각 은전 하나하나에 약속으로 둔
(새긴) 열 개의 은전 드라크마를 한데 꿰어 증표로 주었습니다. 또한 그것을 여자가 받아들이면 여
자 자신도 아내로서 생사고락을 같이하여 남편만 바라며 존경하고 아내의 도리를 성실히 이행하겠
다는 약속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드라크마는 여자의 일생이 걸린 일입니다. 혼인 약속의 증표
인 이 열 드라크마는 일평생 간직하여야 할 가장 귀한 서약의 증거이므로, 자기 목숨과도 같은 의
미를 가졌습니다. 여자의 일생이 걸린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자가
증표로 받은 열 드라크마를 머리에 장식으로 하고 혼인에 임하여 축하객이 그에 대한 증인이 되고,
그러므로 하객의 축하와 축복을 받으며 혼인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기에 이 열의 약속의 의미는
하나가 깨지면 안 됩니다. 하나가 깨지면 다 깨진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만일 여자가 혼인날이 곧 다가오는데 하나의 드라크마를 잃었다면 그 여자가 찾겠어요,
안 찾겠어요? 여러분이라면 찾지 않겠습니까? 열 개가 약속의 증표입니다. 열 개가! 하나를 잃으면
증표는 효력이 없어 스스로 그 약속을 버린 것이 됩니다. 그래서 아홉 개의 약속이 온전히 집중된
그 하나를 잃으면 다 잃은 것입니다. 약속의 증표는 열이어야 합니다. 하나가 없으면 아홉의 의미
도 효력이 없습니다. 열이라야 온전한 효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혼인날 그 하나가 없으면 혼인은
성사가 안 되는 것입니다. 여자가 남자를 맞아들일 근거를 버린 것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 8에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하신 말씀이 이해가 되겠습니까? 바로 여자가, 신앙은 신앙의 결국이신, 신앙의
실체가 되시는 그 예수님을 찾는다는 뜻입니다. 반드시 찾아야 하는 것임을 이제 알겠어요? '아니,
그까짓 돈 가치 없는 은전 하나 잃은 것인데,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렇게 찾고 또 찾고, 온
방을 쓸고 찾아야 되냐'라고 쉽게 생각하여 말하지만, 이제 이제 찾아야 한다는 것 상상이 되겠습
니까? 자기 일생의 문제, 목숨의 문제가 걸린 것이니 반드시 찾아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서 등불을 켜고 온 집을 쓸며 구석구석까지 살펴보고, 그래도 없으면 또 쓸며 살펴보고 기어코 찾
을 때까지 부지런히 찾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여기 '부지런히'는 '다급한 일이므로 지체함 없
이 찾기에만 집중한다'는 의미입니다. 9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마침내 잃은 그 드라크마를 찾았을 때의 기쁨은 예수님께
서 '또 찾은즉'하셔서 잃은 양 찾은 목자의 기쁨과 같은 기쁨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참고하도록 열에 대해 부연 설명을 합니다. 성경에서 '열'하는 것은 딱 열 개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꽉 찬 완전의 의미에서의 열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에 필요
한 모든 뜻을 사람이 알고 받아 행하게 하신 것이 바로 완전한 것인데, 그것이 예수님을 만나는
성전의 길입니다. 그래서 '열'했을 때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겨주신 일, 땅에서 백성이 해야 할
하나님의 전 일을 의미하면서 그 뜻을 행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완전한 총수(數)
와 함께 온 땅에서의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뜻으로 메시아를 만나게 되는 총수(數)를 의미하는 겁
니다. 또 백이라고 했을 때는 백 명이나 백 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루신 십자가의
완전한 승리의 수, 곧 예수님의 수로써, 예수님의 그 승리하심으로 구원받아 예수님과 하나가 된
수입니다. 하나님의 곡식밭에 온전히 익은 열매들로 예수님 안에서 거두게 된 그 총수(數)의 의미
입니다. 또 천이라고 했을 때는 땅에서의 구원하시는 열의 일과 백의 일이 끝나고, 하늘에 들어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때의 수로써 하늘 수, 천국 수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완전함은 하나님의 구원
하시는 뜻의 완전함, 구원을 이루신 것의 완전함, 구원의 온전한 성취로 하늘에 들어간 것으로서의
완전함을 말하고, 그리고 한 사람이라고 했을 때는 하나님은 한 사람, 아담이냐, 예수님이냐, 오직
예수님 한 사람만 보신다는 의미입니다. 아담(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 안에 있느냐, 예수님
이 그 안에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만 보신다는 말입니다. 이해됐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영원한 생명의 복(하늘나라)을 주실 것을 피
로 언약하시고, 이스라엘은 아멘으로 받아 피차에 언약을 맺었는데, 그 언약을 이스라엘이 받아들
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정혼한 사이와 같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
다. 이제 그 약속을 피 흘려 이루시려고 하나님께서 정혼한 그 이스라엘에 오셨는데 이스라엘이 신
랑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정표 하나, 없으면 절대로 혼인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 하나, 자기가
구원받아야할 죄인인 것과 그 자신(이스라엘)을 위해 피 흘리러 오실 메시아를 잃었더라는 것입니
다. 그것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버린 것과 같아서, 그래서 그들과 혼인이 성사되지 못하게 되었
다는 말입니다. 죄인과 예수님은 하나로 이퀄(=)입니다. 그래서 죄인 = 예수님이에요. 그렇기에 너
희 앞에 와계신 예수님이 너희가 잃어버린 그 드라크마 하나다. 너희가 죄인임을 잃어버린 그 드라
크마 하나다. 예수님과 죄인이 만나야 하는 것이 드라크마 하나인데, 그것을 잃었다고 하는 것을
말씀한 뜻입니다. 아홉이 집중되어야 하는 것, 가장 중요한 그 하나를 잃어버렸다. 신랑을 만나
혼인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을 잃어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이 여자가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함께할 혼인이라도, 그렇게 중히 여겨 파기하지 않으려
고, 그 약속을 붙잡으려고 잃은 것을 기어코 찾고 찾음으로써 찾았듯이, 너희가 바로 하나님의 언
약 하신 것, 너희가 누구며 너희가 그 언약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마음을 돌이켜 여자가 드라크
마를 찾은 것과 같은 열심으로 찾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밖에서 잃은 것이 아니라 집에서
잃은 것이니 찾아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방인 속에다 잃은 것이 아니다. 밖에서 잃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이방인 속에다 언약을 넣으신 것이 아니고, 다른 종교에다 넣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집의 권속들 속에 넣은 것이니, 그러므로 집에서 잃은 것이니 구하라 찾으라 하신 것입니
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셨다는 말입니다. 자기 백성에게! 자기 집안사람들에게 주신 언약
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집안사람에게 주신 것에서 잃은 것이니 찾으면 찾는다고, 찾을 수 있
다고 하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성경을 말씀합니다. 성경이 곧 하나님의 집안일을
기록한 것이니 성경 안에서 찾고 찾으면 찾아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그
것이 곧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일로써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오늘 두 가지의 비유 결론이 무엇입니까? '죄인 하나'라는 것입니다. 잃은 양 찾은 목자의
7에서도, 여자가 열 드라크마를 잃은 것을 찾은 10에서도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 사람마다 각
각 자신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인임을 알고 회개하면, 아버지께 듣고 배워 죄인임을 깨달아 회
개하면, 그 죄인을 위해 오신 예수님을 만나 한몸을 이루게 되니, 그것이 곧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 드라크마를 잃은 것이 되었으니, 신랑은 만날
수가 없게 돼 버렸습니다. 열 드라크마, 즉 언약의 말씀과 사건과 율법과 행하는 그 일 속에서 감
춰지듯이 계셨던 메시아와 죄인인 자기를 보고, 그분과 한몸을 이루는 뜻이 되어 함께 기쁨을 나눠
야 함에도, 결국 팔아 버린 인본을 다시 사들여 하나님의 그 언약에서 나간 자들이 돼 버린 것입
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행위 완전하다고 자신을 의인처럼 생각하는 자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가 아니요,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이 기쁨이고, 하나님의 사자들, 구원
얻을 후사들을 돕기 위해 보내진 천사들도 그것이 기쁨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말씀에도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 그것이 예수님이 오신 뜻이라는 것도 말씀드렸고, 오늘 비유도 예수님께서 죄인만 찾으시
고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그것이 하늘의 기쁨이라고 했으니, 여러분이 예수님이 오신 뜻을 확실히
알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누가 성공했고 누가 복을 받았고 누가 출세를 했고 하는 등등의 이야기
들로 성경의 본질을 흐리고 왜곡하며 성경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고들 있지만, 그래서 모든 이야기
를 다 알고 말씀을 다 안다고 해도,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죄인으로 죄를 보지 못하면, 그것
은 성경 다 모르는 것이요,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 종교지도자일 뿐입니다. 인간은 백 퍼센트
죄인입니다. 백 퍼센트! 인자로 오신 예수님은 백 퍼센트 의입니다. 의! 사람이 그래도 윤리나 도
덕에 흠이 없고 남을 도와 자기를 희생하고 착한 마음과 선함이 있으면, 저 사람보다는 내가 더 착
한 성품이고 양심적이면 그중 한 칠십 퍼센트 정도는 죄인이라 치고, 그래도 한 삼십 퍼센트 정도
는 죄인 아닌 부분도 있지 않으냐 하는 것, 하나님께는 없습니다. 그것은 말라 부스러지는 나뭇잎
과 같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인인 척만 하는 사람, 자기를 좀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에게서 죄를 보지 않고 그
마음이 하나님께 온전히 굴복되지 않습니다. 요일1:7과 9에 말씀하길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자요,
또한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자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평가하기 좋아하고, 세
상 것에서 만족을 얻고자 하는 것에만 마음을 둡니다. 참으로 자신이 지옥의 사망으로 끌려들어
갈 죄인이라는 것을 안다면 회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회개가 무엇인지 듣고 다 배워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배워 알고 있는 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자기 마음에서부터 회개가 일어나
야 죄인이 맞습니다. 입으로 고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회개의 뜻은 하나님이 제시하신 길로 방
향을 돌이키는 것, 내 생각도, 내 삶도 다 예수님께 맞히는 것, 그것이 회개입니다. 자기가 예수
님의 의가 아니면 지옥으로 떨어질 처참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자는, 예수님의 의로 살게 되고,
그 의로 사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행복한 것인지를 알게 되니 진정의 회개가 깨끗이 일어나게 되
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한 죄인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같이 기도하러 올
라왔어요. 그런데 바리새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지키니, 죄인이 아닌 의인인 줄 알고
하나님 앞에 가슴을 펴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인 이 세리가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으시는 자는 죄인입니다. 죄인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
습니다. 하늘에는 죄인만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갈 수 있습니다. 오늘 2에서 예수님께서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했습니다. 영접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우리에게만 해당하
는 것인 줄로 알았는데, 예수님께서도 죄인을 영접하더라는 것입니다. 죄인을! 그러니 내가 죄인이
면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하나님께서 죄인인 나를 영접하시다니요, 또 식탁을 같이하더라
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과 함께 보좌에 앉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내가 있고,
내가 있는 곳에 예수님이 계신 것, 그 영광의 자리에 함께 앉히신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죄인만이 구주이신 예수님의 양이므로 음성을 듣습니다. 요10장에 예수님께서 내 양은 내 음
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하셨습니다.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목자이면 목자의 음성을 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양은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만 듣고 따라가는 것이지, 다른 음성은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
어 도망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고, 내 양이 아니므로 듣지 않고
믿지 않는 것이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도 나를 따르느니라고 하셨습
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
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맞는 말씀인지 참으로 얼마나 얼마나 맞는 말씀을 하셨
는지, 저는 이 같은 말씀 앞에 나 자신이 예수님의 양인 것이 기뻐서, 내가 예수님을 세상 누구보
다도 더 필요로 하는 죄인이었던 것이 기뻐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동의와 감사함에 내 온 마음
으로 '아멘'을 외치곤 했습니다. 내 영혼이 참으로 물 만난 고기가 되어서 얼마나 자유로운지,
얼마나 말씀의 배부름을 얻어 만족함을 얻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죄인인 것을 알고 자기의 죄를 보는 자는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의 음성(말씀)을 들으며 그
말씀을 따르기 원하고, 예수님의 음성 외에는 다른 것 듣는 것 원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
다. 정말 그렇습니다. 다른 음성은 다 속이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 말씀 외에는 듣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자기의 죄를 보지 못한 지도자들과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은 예수님 보지 못했
습니다. 그들 앞에 계셨어도 예수님 보지 못했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를 보지 못하
는데, 어떻게 죄를 대속하실 예수님을 볼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죄인으로 예수님 만나지 못하면, 그에게 예수님이 없으면 오늘 밤에라도 그 영혼이 떠나
면 그는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네 먹고사는 것, 사람 때문에 좀 고통당하는
것,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네가 죽음 앞에 섰을 때 네 영혼이 갈 곳이 어디냐? 그것을 생각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성경에서 반드시 찾아야 하는 것, 누가 땅의 복을 받아
거부가 되었느냐? 그런 것이나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를 왜 죄인이라고 하는 것인지를 찾
으라는 것입니다. 그 죄인을 찾으시는 구주 예수님을 찾고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
비유의 이 말씀, 잃은 양 찾은 목자와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자에 대해서 여러분이 다 이해하고
들으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적용하는 말씀으로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뜻을 깨달아 알 수 있도록 도와주신 성영님께 감사하고, 말씀의 복을 주신 삼위의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아멘!!
제 10 장 잃은 양 찾은 예수님, 잃은 드라크마 찾은 여자.p247-p2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