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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엘 3장 9-21절
그 백성의 피난처요 산성이 되시도다
요엘서의 마지막 내용은 교회 회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교회가 회복된다는 것은 역으로 교회가 비참한 상태에까지 내려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가 비참한 상태에까지 내려가는가? 그것은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실지언정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을 저버리실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죄로 말미암아 징계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처럼 하실 때도 있지만, 이런 이유에서 이방 나라를 일으키시고 자기 백성에게 보내심으로 징계하시고 심판하실 때도 있지만,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교회를 회복시키십니다. 비참함 가운데 내버려두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조차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이가 어떻게 자기 백성을 버리실 수 있겠습니까?
이때 분명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회복케 하십니다. 그러나 교회 회복의 이면에는 교회 밖에 있는 자들, 다시 말해 이스라엘 나라를 괴롭혔던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심판도 있는데,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 저들을 심판하시는 것으로 있습니다. 요엘서는 여기서 더 나아가 내가 내 백성인 너희를 나의 심판의 대리자로 삼아 저들을 심판할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심판의 주체이시지만 그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저들로 심판하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본래는 죄로 말미암아 이방 나라라는 도구를 통해 징계 받고 심판을 받는 대상으로 있었지만, 그런 교회를 회복시켜주시면서 높여주시는데 얼마나 높여주시는가? 심판자 되시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심판할 자로까지 높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동일한 주제로 말씀하시는데, 먼저 9절과 10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든 민족에게 이렇게 널리 선포할지어다 너희는 전쟁을 준비하고 용사를 격려하고 병사로 다 가까이 나아와서 올라오게 할지어다 너희는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지어다 낫을 쳐서 창을 만들지어다 약한 자도 이르기를 나는 강하다 할지어다” 바로 앞에서 하나님은 교회의 회복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그들을 너희가 팔아 이르게 한 곳에서 일으켜 나오게 하고...”(7) 교회의 회복뿐만 아니라 바로 그 교회가 교회를 핍박한 자들을 심판할 것이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너희가 행한 것을 너희 머리에 돌려서 너희 자녀를 유다 자손의 손에 팔리니 그들은 다시 먼 나라 스바 사람에게 팔리라...”(7-8)
이것을 실행하기 위해 먼저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에게 이렇게 널리 선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전쟁을 준비하라. 용사를 격려하라. 병사로 다 가까이 나아와 올라오게 하라.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라. 낫을 쳐서 창을 만들라. 약한 자로 할지라도 나는 강하다는 생각으로 나아오라. 의미를 좀 더 살려서 말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전쟁을 준비하라. 이것이 마지막 전투가 된다는 생각으로 네 모든 힘을 다하여 이 전쟁을 준비하라. 용사를 격려하라. 병사로 다 가까이 나아와 올라오게 하라. 강한 자로 하여금 더욱 용기를 가지고 전쟁에 임할 수 있도록 하라. 무기가 없다고 불평하지 않게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고 낫을 쳐서 창을 만들라. 마지막 전투가 될 지도 모르기 때문에 약한 자라 할지라도 그 전쟁에 참여하라. 그냥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각오하고 나아오라.
특히 10절 말씀은 이사야 2장이나 미가 4장의 내용과는 반대의 내용입니다. 거기서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라고 되어 있습니다(사2:4, 미4:3). 그리고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고 그들에게 형제애를 가르치실 때 세상이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점을 비유적으로 알리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요엘서에서 말씀하신다면 평화가 아니라 전쟁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을 누구에게 명하고 있는가? 모든 민족에게 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괴롭게 한 이방 나라에게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11절 “사면의 민족들아 너희는 속히 와서 모일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9절에서 모든 민족이라고 말했다면 지금 여기서는 사면의 민족들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지리적으로 보자면 4절에서 언급한 두로와 시돈, 그리고 블레셋과, 19절 애굽과 에돔이라는 나라의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두로와 시돈의 경우 이스라엘의 북쪽에 위치해 있고, 블레셋은 서쪽, 애굽은 남쪽, 그리고 에돔은 이스라엘의 동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만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관점에서 보자면 주의 몸 된 교회 밖에 있는 자들을 그 대상으로 합니다. 바로 그들에게 속히 와서 모이라는 것입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신속히 한 곳에 모여 싸울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시편 2편의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시2:1-3) 차이가 있다면 시편 2편은 이방 나라들과 민족들이 주어로 되어 있다면, 지금 요엘서는 하나님이 주체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2편에서 이방 나라들과 민족들을 주어로 두고 있다 할지라도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들을 주어로 둘 수 있는 것조차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2편의 말씀처럼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고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대적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두려워 할 이유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는 우연이 없다는 것,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 역사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많은 부분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려움의 시기가 끝나면,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이키면, 그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교회를 어렵게 만든 이방 나라를 심판하십니다. 왜냐하면 이미 말씀드린 바 있는 것처럼 저들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다고 할 때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거나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하여 그 일을 행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뜻과 목적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에 있을 뿐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죄를 나타내고 악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저들은 저들의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회복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모든 민족들에게 전쟁을 준비시키는 것은 바로 이 사실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누가 모든 만물의 주관자인가? 하나님입니다. 물론 저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 나타나게 되느냐? 시편 2편의 말씀처럼 나타나게 됩니다.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 식으로 나타납니다. 세상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조차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고, 그것이 곧 저들의 마지막 전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패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전쟁의 승패를 모든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좀 더 명확하게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들, 사방의 모든 족속들만 나오라고 하지 않고 11절 하반부에서 자기 백성도 부르시는데 선지자의 입을 통해 부르십니다. “...여호와여 주의 용사들로 그리로 내려오게 하옵소서” 이때 ‘주의 용사들’이란 주와 함께 싸울 자라는 의미에서 표현되고 있는 말입니다. 주체는 하나님이시요, 따라서 하나님께서 싸우실 것이지만, 누구를 도구로 해서 싸우시느냐? 하나님의 백성을 도구로 해서 저들과 싸우게 하십니다.
사실 이런 역사가 다윗 시대의 역사요, 이후 열왕들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들의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를 대변한다고 할 때 이스라엘 나라가 주변 나라들에 대하여 항상 승리하기만 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패하기도 했습니다. 왜 패하는 일이 있었는가? 계속해서 말씀드리지만 저들의 죄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기도 하고, 성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처럼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을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싸움은 에베소서 6장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 대한 것입니다(엡6:12). 이때 이스라엘 백성이 주변 나라에 패한 것처럼 패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의 부패성 때문에 패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패하는 경우는 결코 없습니다.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패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마지막 전투에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전쟁의 승패를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요, 마지막 전쟁에 대하여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승리의 깃발을 세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승리의 깃발을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워 놓으셨습니다. 바로 그 사실을 보게 하고자 하나님은 선지자로 하여금 “여호와여 주의 용사들로 그리로 내려오게 하옵소서”라고 말하게 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주의 몸 된 교회라 할지라도 마지막 전투가 있기까지는, 다시 말해 승리를 쟁취하여 더 이상의 전쟁이 없다고 할 때까지는 끊임없는 전쟁의 연속 가운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난 뒤 한번도 휴전한 적이 없습니다. 즉 주의 몸 된 교회가 이 땅에 살아간다고 할 때 그들의 전 생애는 이 전쟁 가운데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는 결국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고야 말 것입니다. 때문에 승리가 우리에게 주어질 때까지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가야 합니다. 죄를 죽이는 싸움,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가는 싸움을 싸워가야 합니다. 특히 그 과정 가운데 우리는 인내함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전쟁으로 인한 어려움이 있지만, 로마서 5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을 소망을 이루는 것이기에(롬5:3-4) 인내와 연단과 소망을 열매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12절을 보시면 “민족들은 일어나서 여호사밧 골짜기로 올라올지어다 내가 거기에 앉아서 사면의 민족들을 다 심판하리로다” 지난주 요엘 3장 2절에서 ‘여호사밧 골짜기’에 대한 설명을 드렸지만 역사적 사실로 바탕을 두자면 유대인들의 경이적인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구원은 민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히브리어 단어의 뜻대로 하자면 판결의 골짜기 혹은 심판의 골짜기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민족들에게 일어나서 여호사밧 골짜기로 올라오라는 것은 너희를 판결하고 너희를 심판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이 사실을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내가 거기에 앉아서 사면의 민족들을 다 심판하리로다. 그러나 이 심판으로 말미암아 무엇이 확증되는가?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이 더욱 확증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경이적인 구원이 분명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13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밟을지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사면의 민족들에 대한 심판을 추수로 비유하여 설명하십니다.
특히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추수와 관련된 비유로 알곡과 가라지 비유를 드시는데, 이 비유는 단순히 교회 밖에 있는 자들이라기보다는 알곡과 함께 교회 안에서 자라는 자들입니다. 그들조차 마지막 추수할 때가 되면 알곡으로부터 구별되어 결국 심판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데, 교회 밖에 있는 자들은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왜 그들이 심판을 받는가? 교회 안에 있는 가라지, 그리고 교회 밖에 있는 불신자들이 추수 때 심판을 받게 되는 이유는 저들의 죄 때문입니다. 그들의 악이 크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게 되지만, 그들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기 때문에 결국 심판을 받게 되는 겁니다.
14절은 “사람이 많음이여, 심판의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심판의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지, 심판의 골짜기에 사람이 많다고 말씀합니다. 그 말은 역으로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한 자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만 대적합니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도 대적합니다. 그러나 많아도 그들이 모인 자리는 심판의 자리임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대적하지만 그 많은 사람의 대적을 물리칠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요, 그 많은 사람을 누구도 예외 없이 다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으로 하나님의 교회에게는 너무나도 큰 위로가 될 수밖에 없는데, 이전에는 수없이 많은 원수들이 있었다면 이제는 그 모든 원수들이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수없이 많은 대적들과 전쟁을 할 때는 어려움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승리를 취할 때까지는 인내할 수밖에 없고, 주께서 오시기를 소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가 승리할 수 없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주께서 우리의 대장이 되셔서 오실 때는 우리의 인내와 소망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나타내게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의 성취가 나타날 때까지 영적인 싸움을 싸우되 인내하면서 소망을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저들을 향한 추수는 심판을 위한 것이지만, 동일하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추수는 심판이 아니라 영생을 위한 것으로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위하여 우리는 인내해야 하고,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계속해서 15절은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그 빛을 거두도다”는 말씀인데, 요엘 2장 10절의 내용과 같습니다. 마지막 때, 다시 말해 심판의 때가 가까워 오면 올수록 심판을 알리는 두려워할만한 일들이 하늘에서 보일 것이라는 겁니다. 하늘에서만 보이느냐? 땅에서도 보이는데, 요엘 2장 10절은 땅이 진동한다고 표현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인가? 요엘 2장 11절에서 증거 하는 것처럼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피 두려운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날이 우리의 구원의 날이요, 영생으로 들어가는 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두려워해야 할 것인지를 심판의 때가 가까워 오면 올수록 하늘과 땅에서 여러 가지 징조를 보여주시지만, 이런 현상들 앞에서 주의 백성은 깨어 있으라는 권면으로 교훈 받게 됩니다. 두려워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깨어 있으라는 권면으로 교훈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날이요, 영생으로 들어가는 날이기 때문에 거기에 걸맞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자신을 준비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내가 있어야 하고, 또 여기에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합당한 열매로서 사랑도 나타나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께서는 왜 이토록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시는가? 이어지는 16절 이하를 통해 그 사실을 더욱 드러내는데, 먼저 1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내시리니 하늘과 땅이 진동하리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시리로다” 시온, 예루살렘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임재하리라고 약속하신 장소입니다. 거기서부터 그가 부르짖고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비록 이방 민족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땅, 그리고 그 땅을 하나님께서는 ‘나의 땅’이라고 할 만큼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일치시켜 말씀하셨는데, 바로 그 땅이 이방인에 의해 훼파되었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말씀하시는 분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내가 거기에 계시겠다고 하셨다면 약속하신 바가 결코 헛되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약속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하늘과 땅이 진동한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게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모세 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실제로 경험한 바가 있고, 또한 선지자 이사야조차 경험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은 결국 두려움과 자신의 죄를 보게 됨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데 있는데, 실제로 영원한 멸망이 선포되는 자들은 이스라엘 주변의 나라요, 이방인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주기도 하고, 또 자신의 죄를 보면서 죽을 수도 있다는 고백을 하게 되지만, 결국 하나님 자신이 그의 백성의 피난처요,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즉 왜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강조하시는가? 심판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피난처요, 산성이 되신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물론 저들의 죄로 인하여 이방 나라로부터 어려움을 당할 때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피난처가 아닌 것처럼, 산성이 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 스스로 자기 백성의 피난처와 산성이시기를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피난처와 산성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징계를 줘서라도 자신이 자기 백성의 진정한 피난처요 산성으로 있다는 사실을 알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혹 우리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진노 중에서라도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 하나님이요, 자신을 피난처와 산성으로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 심판 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우리의 실력으로만 보자면 저들과 비교해서 낫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러나 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심판하는 자의 위치에까지 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요, 산성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즉 저들에게 가장 두려워할 만한 날이 우리에게는 가장 큰 위로의 날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어 17절에서는 “그런즉 너희가 나는 내 성산 시온에 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알 것이라 예루살렘이 거룩하리니 다시는 이방 사람이 그 가운데로 통행하지 못하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모른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행위로 하나님을 부인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러한 죄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로부터 어려움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이방 민족을 심판하실 때는 누구도 하나님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날이 되기까지는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드러내실 때는 누구도 모른다고 할 수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저들에게는 심판이요, 우리에게는 구원으로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알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의 하나님이신가? 자기 백성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하여 일하십니다. 왜 심판을 행하시는가? 한편으로는 이방 나라에 대한 심판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런 심판은 결국 이스라엘 나라의 구원을 더욱 분명히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를 위하여 그 일을 행하시는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백성을 위하여, 그리고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그렇게 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이 계시는 예루살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교회는 그가 거룩한 것처럼 거룩하다고 불리게 됩니다. 거룩하기 때문에 이방 사람이 그 가운데 통행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거룩한 반면 저들은 부정한 자로 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고 자기 백성들과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이르게 되면 거기에는 부정한 것이 결코 들어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의 죄를 찾아볼 수 없는 곳에서 생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이 땅에서의 모든 전쟁의 역사가 그친다는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평화를 맛보게 됩니다.
그 결과에 대해 18절에서 말씀하시는데,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성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고 하십니다. 그 날, 즉 예루살렘이 거룩하게 될 때, 그래서 더 이상 이방인들이 통행하지 못하게 될 때, 다시 말해 더 이상 부정한 것이 들어올 수 없게 될 때 큰 산 작은 산 할 것 없이 풍성한 열매를 쏟아낼 것이요, 유다의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특별히 여호와의 성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 싯딤 골짜기에까지 댄다는 것입니다. 싯딤 골짜기는 지리적으로 모압 민족의 경계선 가까운 곳인데, 이스라엘 땅의 남쪽 끝 지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기까지 여호와의 성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 물을 댄다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이스라엘 전체에 하나님의 은총이 흘러넘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좋은 것을 주시되 수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조금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땅이 훼파되고 먹고 마실 것이 없는 땅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거룩한 땅으로 만드실 때는 젖과 꿀이 흘러 이스라엘 전 지역이 풍족하게 할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복의 실체는 단순히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습니다. 요엘서의 표현은 구약 시대 구약 백성을 가르치는 방식으로 말할 뿐입니다. 따라서 지상의 것을 말한다고 해서 지상에 것만 주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하늘의 것을 주목하도록 해야 하는데,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바로 이 복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고자 하신다는 겁니다. 놀라운 것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지상에 있는 교회가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복의 완성으로 누리게 될 처소는 이 땅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반드시 완성으로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어려움 가운데서도 인내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가 어려움 가운데서도 소망해야 할 이유 역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가 어려움 가운데서도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늘 외적인 것으로 인하여 흔들립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로 염려합니다. 그러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복을 주의 몸 된 교회에게 주실 뿐 아니라, 완성으로 약속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은총이 교회의 한 부분만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 주의 몸 된 교회 전체에 이르기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이방 나라는 어떻게 되는가? 19절입니다. “그러나 애굽은 황무지가 되겠고 에돔은 황무한 들이 되리니 이는 그들이 유다 자손에게 포악을 행하여 무죄한 피를 그 땅에서 흘렸음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복을 받지만 그들을 대적했던 모든 나라들은 그 반대의 결과를 맛보게 되는데, 여기서는 애굽과 에돔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애굽은 황무지가 되겠고 에돔은 황무한 들이 될 것이다. 그럼 왜 이런 일이 있는가? 그들이 유다 자손에게 행한 포악함 때문이요, 무죄한 피를 그 땅에서 흘렸기 때문입니다.
특히 에돔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오바댜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바가 있는데, 거기 보면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원히 멸절되리라”(옵1:10) 말씀을 하십니다. 구체적으로 그 일이 무엇인가?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빼앗아 가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느니라”(옵1:11)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이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며 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고난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재물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며 네거리에 서서 그 도망하는 자를 막지 않을 것이며 고난의 날에 그 남은 자를 원수에게 넘기지 않을 것이니라”(옵1:12-14)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는데, 하는 자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다 자손의 고통을 기뻐하면서 그들도 유다 자손에게 고통을 주는 자로 있었다는 것, 심지어 다른 이방 나라로부터 어려움을 당하여 도망하는 자가 있을 때 에돔은 도망하는 자로 하여금 도망가지 못하고 막고 그들을 원수의 손에 넘겨주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무자비하게 대했다는 것이요, 잔인하게 대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하나님께서는 오바댜 선지자를 통해 멸절되리라고 하신 겁니다.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애굽과 에돔을 말하고 있다고 해서 그들에게만 제한된 내용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모든 자들, 하나님의 교회를 이런저런 모습으로 박해하는 모든 자들이 마지막 때 이 말씀의 결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말은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이 있고, 또 하나님의 교회를 이런저런 모습으로 박해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교회를 회복시키실 뿐만 아니라 주의 몸 된 교회를 완성하실 때는 저들이 행한 그 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정리하고 넘어가자면 그들이 유다 자손에게 포악을 행하며 무죄한 피를 그 땅에 흘렸다고 말씀하시는데, 이때 무죄하다는 것은 죄가 전혀 없다는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과 그의 공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표현입니다. 실제로 무죄한 것이 아니라 법적으로 무죄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어떻게 만드시는가? 17절 ‘예루살렘이 거룩하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거기에 살게 되는 하나님의 백성 역시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점과 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거기에서 살게 하시는 겁니다.
선지자는 다시금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말하는데, 20절입니다. “유다는 영원히 있겠고 예루살렘은 대대로 있으리라” 한 때는 이방 나라로부터 어려움을 당하여 유다 자체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라지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택하여 부르신 백성 역시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거센 박해가 오더라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주의 몸 된 교회를 박해한다 할지라도 머리 되신 주님이 계신 이상 주의 몸 된 교회를 사라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마지막 때 분명히 드러내시는 것은 유다가 영원히 있다는 것이요, 예루살렘이 대대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좀 더 분명히 말씀하시기 위해 21절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전에는 그들의 피흘림 당한 것을 갚아 주지 아니하였거니와 이제는 갚아 주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에 거하심이니라”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 나라에게 당하더라도 갚아 주지 않은 때가 있었습니다. 왜 갚아 주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처럼 거룩해야 되는데, 거룩하지 않고 세상을 따라, 이방 나라와 이방 백성을 따라 마음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구별되어야 할 자들이 구별되지 않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혹은 드물지만 의인의 고난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시고, 자기 백성이 당한 것을 갚아 주실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분으로서 결국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요엘서는 심각한 재앙의 내용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재앙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이 아니라 죄와 악을 즐겨한 데 있습니다. 그러나 죄와 악으로 말미암는 재앙이라고 할 때 그 재앙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이 돌이키는 데 있습니다. 돌이키기만 하면 더 이상 재앙이 아니라 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복은 분명 이 땅에서부터 시작되지만 그 완성은 마지막 때 가서야 비로소 이루어지게 됩니다. 요엘 3장은 그런 마지막 때를 우리로 하여금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마지막 때를 소망하게 하십니다. 하지만 과정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지금도 우리는 죄와의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이 죄 때문에 어려움이 있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려움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죄와 싸우고 그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더욱 가까이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 목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 인내가 필요하고, 믿음과 믿음에 합당한 사랑의 열매가 나타나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끝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괴롭게 한 모든 원수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내가 전에는 그들의 피 흘림 당한 것을 갚아 주지 아니하였을지라도, 이제는 갚아 주실 것입니다. 그때가 우리 구원의 완성의 때이며, 그때가 더 이상 죄와의 싸움을 그치는 때입니다. 이 마지막 때가 되기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가시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자로 싸워 가시길 바랍니다. 거기에 참된 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