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원 - 십자가를 내가 지고 - 4. 신앙을 이유로 퇴학당하고
1 드디어 5월 10일 우리 집으로 퇴학 통지서가 배달되어 왔다. 모두 14명이 퇴학처분을 받게 되었다. 그 통지서에는 하등의 이유가 될 수 없는 내용이 적혀져 있었다.
“이대의 정통 신앙인 감리교 신앙과 다른 통일교회에 나가므로 이대에서는 퇴학을 통고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5월 11일부터 등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2 그때 이미 동교 교수 5명도 면직을 당했다. 그때 퇴학 통고를 받은 사람은 신미식, 사길자, 김정은, 서명진, 김경식, 지생련, 임승회, 정대화, 박승규, 최순화, 김숙자, 박영숙, 이계순, 강정원이었다. 2학년인 내가 제일 안타까운 것은 4학년 언니들 때문이었다. 퇴학 당한 14명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었다.
3 그리고 김활란 총장을 만나러 총장실로 향했다. 총장을 만나서 우리는 호소했다. “신앙의 자유를 주십시오……” 그러나 김활란 총장은 “너희들은 음란 집단에 빠졌다. 눈에는 검은 커튼이 가려 있단 말이야” 하고는 말대꾸도 안 했다. 그리고 우리는 총장실에서 쫓겨났다. 우리가 아무리 학교에 호소해도 우리의 말을 들어주질 않고 학교에 못 나오게 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매일 등교하여 수업에 들어갔다가 쫓겨나기도 하였다.
4 그래서 우리는 보도기관에 뛰어다니며 호소했다. 처음에 보도기관에서는 우리를 옹호해 주었다. 1955년 5월 23일 자의 한국일보는 ‘신앙의 이유로 퇴학을 시킬 것인가’의 사설에서 아래와 같이 밝혔다.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라는 단체에 가입했다 하여 감리교계의 이화여자대학교에서 5월 11일 학생 15명을 퇴학시킨 뒤를 이어 장로교계의 연희대학교에서 같은 이유로 학생 7명에게 퇴학을 구두 통고하였다한다. …… (중략) 그것이 만일 기독교의 신앙을 부인하거나 신앙에서 탈락하는 「아포스타씨」라 하더라도 이미 이교나 무신앙의 학생이 허용되는 이상 퇴학의 이유가 없는 것이요. 그것이 만일 종래의 교회에서 분리하여 별개의 해석을 가짐으로써 교회의 일치를 깨뜨리는 「쉬스마」라 할지라도 또한 기존 각 교파와 교회 내 각 세력이 서로 정통을 자랑하고 있는 이상 어느 것이 분파인지의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비록 분파라 하더라도 신앙이 법률적 의의를 갖는 중세 시대가 아닌 이상 제재를 가할 이유가 없는 것이며……”
5 동아일보도 ‘덕화력(德化方)의 경쟁(競爭)’이란 사설로 우리의 정당성을 밝혀 주었다. “각기 종교의 덕화력의 경쟁이어야만 종교로서의 가치가 인정될 수 있는 것이지, 압박이나 박해로써 타 종교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것은 도시 종교로서는 택해서는 절대로 안 될 수단이다……” (5월 17일 자)
6 이처럼 우리를 옹호해 주는 분위기로 매스컴이 보도를 하자 그 당시 부총장이던 박마리아씨(이기붕씨 부인)를 통해 정치적인 손이 닿았는지 매스컴은 돌변해서 우리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호소했다. 우리에게 신앙의 자유를 달라고. 우리는 여러 신문사를 방문하여 편집국장을 만났다.
7 여러 차례 우리의 정당성을 주장했더니 “통일교회 본부가 어디요?” 하고 물었다. 우리는 한결같이 “통일교회 본부는 하늘입니다. 하늘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어떤 분은 “진리의 말씀은 좋지만 학교로 돌아가 공부에 열중하라.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 싸우라”라고 말해 주었다.
8 그로 인해서 가정에서 쫓겨난 친구도 있었다. 사회에서도 몹쓸 죄를 저지른 사람처럼 외면당했다. 학교에서는 더욱 기세등등하여 우리들을 학교에 오지도 못하게 했다.
9 “하나님 아버지! 당신은 우리의 아픈 가슴을 아시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슬프지 않습니다.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렵니다. 당신이 얼마나 분하고 서러운 길을 걸어오셨는가를 돌아보며 저희 스스로를 다짐하겠습니다. 저희의 적은 일에도 저희 가슴에 솟는 울분이 이토록 크거늘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억울한 길을 걸어 오셨겠습니까……”
10 우리들은 이와 같이 기도하면서 가회동 10번지에 있는 김활란 총장 댁을 찾아갔다. 그러나 우락부락하게 생긴 수위에 의해 우리는 내쫓김을 당해야 했다. 소슬대문 돌충계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다시 공부하게 해달라. 신앙의 자유를 찾게 해 달라”라고 외쳤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백골이 진토 되어/넋이라도 있고 없고……” 단심가를 부르며, 차가운 돌을 붙들고 우리들은 호소했다.
11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로 총장 댁을 찾아갔으나 역시 쫓겨났다. 12시경 어디선가 경찰 백차가 다가오더니 경찰들이 내렸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 누구야! 춤추다가 늦어서 여기 있는 거지”
“아닙니다. 억울하게 퇴학 맞은 학생들입니다”
12 그들은 우리들을 종로 경찰서로 강제 연행하여 유치장에 감금시키려 했다. 그러자 우리는 “유치장에 들어갈 이유가 없다”라고 항의를 했다. 그래도 경찰들은 벼룩과 빈대가 우글거리는 취조실로 우리를 끌고 들어가서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좋다. 우리의 마음을 세상에선 아무도 모른다 할지라도 아버지만은 아실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그렇지 않습니까” 찬 기운이 감도는 취조실 안에서 언니들과 나는 기도를 하며 마음을 다졌다. 그리고 그 이튿날에야 풀려나왔다.
13 우리는 다시 학교로 갔다. 채플 시간을 이용해서 지하실의 학생관 게시판에 혈서를 써서 붙였다. 지생련 언니와 이계순 그리고 나까지 세 사람이 부활절에 입었던 하얀 치마 위에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쓴 것이다. “2천 년 전에 대제사장이나 교법사들이 예수님께서 메시아인 것을 모르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때처럼 새 역사가 시작되는 이때에 잘못하여 2천 년 전과 같이 다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제사장이나 바리새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많은 글자 속에는 붉은 피의 외침이 담겨 있었다.
14 붉게 피로 쓰인 글씨가 게시판에 붙자 학생들이 우루루 몰려와서 무엇인가 읽어보고 소란을 피웠다. 그때 한 조교수가 뛰어오더니 그 혈서를 뜯어가려고 했다. 우리들은 그것을 뜯어가지 못하도록 그 조교수를 붙들고 놓아주질 않았다. 그러나 남자의 힘에는 당할 수가 없었다. 우리들은 시멘트 바닥에 힘없이 쓰러져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낙망하지 않고 또 교회로 달려와서 선생님께 보고하였다.
15 그로부터 형사들이 우리들의 뒤를 쫓아다녔다. 경찰에서도 우리의 진실을 묵살하고 우리에게 혐의를 씌우려고 온갖 수단을 다했다. 그러나 경찰이 미행하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뒤에 알게 되었다.
16 우리들은 아픈 마음을 신앙적으로 달래고 또 간절한 기도를 위해 금식 기도를 할 것을 결심하고 삼각산 영도원 기도원에 올라갔다. 우리가 발붙일 곳은 집도, 사회도, 학교도, 경찰도…… 그 어느 곳도 없었기에 자연과 더불어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길밖에 없었다. 열심히 찬송과 기도를 하고 있는데 방언이 터져 나왔다.
“이제는 새 시대가 온다. 너희는 새 시대의 주인공이다. 힘내어 끝까지 싸워라”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17 그런데 선생님께서 우리의 뒤를 따라오셨다. “퇴학 맞은 것도 억울하고 분한 일인데 금식까지 할 것 없다 때를 기다리자”라고 하시며 먹을 것을 사다 주셨다. 양심에 가책 받을 일이 아니면 그 어떠한 욕을 먹어도 불명예가 되거나 죄인이 될 수 없음을 알았기에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복학할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18 그러나 이러한 울분을 가라앉히기도 전에 또 하나의 억울한 일이 닥쳐왔다. 바로 7월 4일 선생님께서 중부 경찰서에 연행되어 3개월 투옥되시는 사건이었다. 그 사건의 발단은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연세대학교 학생 문영일군이 원리 강의를 3일간 들었는데 그를 불법으로 감금했다고 고발한 때문이었다. 강의 들은 것을 미끼로 고발하다니……, 입건 이유는 불법 감금, 간음 등이었으나 전혀 사실 무근한 일이었다.
19 7월 7일, 나는 치안국에 불려 갔다. 아침 9시부터 밤 8시까지 취조를 받았다. “나와 선생님과 이상한 관계가 있지 않느냐”라는 죄목을 만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썼다. 협박과 회유 등 여러 면으로 취조했지만 진실을 알게 된 그들은 뒤늦게서야 나를 풀어주었다. 그때 일심교 지도자들이 계시를 받고 찾아와 수난 당하는 우리를 위로해 주었다.
“당신들 지쳐 쓰러지지 마시오, 용기를 가지시오. 얼마 있다가 무죄임이 드러날 것이오”라고.
20 갓을 쓴 도인들이 찾아와 위로해 주고 가는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우리의 억울함을 지켜보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3개월의 옥고를 견디시고 선생님께서는 1955년 10월 4일 무죄로 풀려나오셨다. 지금 그때의 일들이 망막에 볼록렌즈를 끼운 듯 커다랗게 부각된다. 세월이 갈수록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은 너무도 분하고 슬픈 일이었기 때문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아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