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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나는 하나님의 직장이다>의 줄거리:
지금 내가 실직상태입니까? 아니면 현재의 직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직을 고려하는 중입니까? 이 모두 급한 일이 아닙니다. 실직상태라면 그대로, 직장이 마음에 안 들면 역시 그대로, 먼저 하나님을 내가 취직시켜드려야 합니다. 내 직장을 잡으려 말고 내가 하나님의 직장이 되어드려야 합니다. 하나님 취직이 훨씬 더 시급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직장이다
(누가복음 2:40~52)
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41.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48.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나는 하나님의 직장이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직장이다’
오늘 말씀의 중심이 되는 구절은 49~50절입니다. 50절을 보면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는 대답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마리아와 요셉이 깨닫지 못한 내용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살아가는 동안 직장은 항상 문제가 됩니다. 현재 직장에 다니는 분들에게도 문제는 있을 수 있고, 이미 은퇴를 하신 분들에게도 직장은 문제가 됩니다. 지금의 직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직을 준비하는 분들에게 직장 선택은 최대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직장 문제에 대한 관심은 일단 중단되어만 합니다. 지금 실업 상태에 있든지 이직을 준비중이든지 은퇴를 하셨든지 일단 멈춰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먼저 그 문제를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정말로 급한 일이 무엇입니까? 직장에서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실직상태에서 벗어나는 것, 은퇴자금을 이용해서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은 급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급한 일은 나의 삶에 하나님을 취직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직장 문제는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취직하신 후에 이루어나가실 일들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일자리에 관심을 두고 노력하는 것은 나의 본분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직장이 되어야만 합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하나님을 내게 취직시켜 드려야만 합니다. 인생의 우선적 문제는 하나님이 내게 취직을 못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내게 취직시켜 드릴 수 있을까요?
어제 말씀을 나누며 “세 살 적 버릇 여든 간다.”라는 속담을 예수님께 적용해보았습니다. 요한복음 5장 30절을 보면 30살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기셨습니다. 그것이 본문 40절의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는 구절을 통하여 드러남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염두에 둘 때에 하나님을 취직시켜 드리는 길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시시한 일이든 대단한 일이든 어떤 일이든 나 혼자서는 결정하거나 추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가짐으로써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마음가짐을 유지시켜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에 나는 하나님의 직장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취직하시면 내 인생은 털끝만큼도 내가 사는 인생이 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일을 하고 살아갑니다. 직장을 구하고 일을 하고 승진을 하고 또 가정을 돌보는 것도 일입니다. 다만 이 모든 일들은 내게 취직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직장삼아서 하실 일들이지 내가 나서서 할 일이 아닙니다. 49절에 나타난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마리아와 요셉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의아해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본문을 보면 시기가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이 되면 이스라엘의 모든 성인남녀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예전에 바르 미츠바, 바트 미츠바라 불리는 유대교의 성인식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율법의 아이들이라는 뜻으로써 남자는 13살 여자는 12살에 성인식을 하게 되는데 성인식을 앞둔 1~2년 전에는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관습을 염두에 두면 생애 최초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을 때의 예수님이 12살 정도였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본문의 사건이 일어난 시기는 유월절에서 무교절로 이어지는 일주일이 지나고 전국 각지에서 예루살렘에 올라왔던 사람들이 집으로 되돌아가게 된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시간을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으신 채 무리를 빠져나와 예루살렘에 남으십니다. 그리고 성전에 모여 있던 유명한 랍비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성전에는 힐렐, 샴마이, 가말리엘, 시므온 등으로 대표되는 랍비들이 모여 있었을 것이고 이들을 따르는 많은 서기관이나 율법사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토론을 하고 있는데 이 자리에 12살 예수님이 참여하고 계셨습니다.
당시에 예루살렘을 방문할 때에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마을이나 친족을 중심으로 무리를 지어서 이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 또한 당연히 친족과 나사렛 사람들과 무리지어 같이 동행하고 있었고 예수님 또한 무리들 틈에 섞여 잘 따라오고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그렇게 하룻길을 가고서야 어디서도 예수님을 찾을 수 없게 되자 놀라게 됩니다. 결국 아이를 찾기 위해 다시 하루를 걸어서 예루살렘에 돌아가게 되었고 마리아와 요셉은 더욱 놀라게 됩니다. 어린 예수님이 이스라엘에서 가장 저명한 랍비들과 서기관과 율법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대등하게 묻기도 하고 대답하기도 하며 토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47절을 보면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마다 랍비와 서기관과 율법사들을 놀라게 한 것입니다. ‘놀라다’라는 헬라어 원문을 보면 엑스시탄토(ἐξίσταντο)로써 ‘눈이 튀어 나올 정도로 놀라다, 거의 기절할 정도로 놀라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엑시스탄토(ἐξίσταντο)는 문법적으로 기본형인 엑스시테미(ἐξίστημι)의 미완료시제입니다. 미완료시제란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12살 어린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저명한 랍비들과 서기관과 율법사들이 놀라 자빠지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저 “애가 참 영리하다, 크게 될 싹이 보인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아이가 어떻게 저런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해 놀라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48절을 보면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라고 하였습니다. 또 놀랐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놀랐다는 말은 헬라어 에크세플라게산(εξεπλαγησαν)으로써 몽둥이에 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마리아와 요셉의 입장이었다면 조심스레 다가가서 “얘, 예수야! 어떻게 엄마 아빠 마음을 걱정하게 만드느냐!”라고 속삭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또 특별합니다. 49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당연한 일을 하고 있는데 왜 걱정하는지 모르겠다는 대답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마리아와 요셉은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는 예수님의 대답에 담겨진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번역의 문제를 잠시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읽은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다만 헬라어 원문을 직역해보면 집이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집에 해당 되는 원문을 보면 엔 토이스(ἐν τοῖς)입니다. 엔(ἐν)은 영어의 전치사 in이고 토이스(τοῖς)는 정관사 the에 해당됩니다. 문법적으로는 중성의 복수 형태를 띠면서 ‘일들, 그것들’이라는 뜻이 됩니다. 문장 전체를 직역해보면 ‘내가 내 아버지 일들 안에 있어야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는 뜻이 됩니다. 이것이 집으로 의역된 이유는 예수님이 토론을 하는 장소가 성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성전에 계셨음을 염두에 두고 집으로 의역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원문 그대로의 의미를 살리며 본문을 이해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랍비와 서기관과 율법사를 마주하여 토론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놀라 자빠질 정도로 율법과 진리에 대해 지혜로운 말씀을 하고 계셨습니다. 이 일들이 바로 하나님의 일들 안에 있는 중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12살 된 예수님의 입을 스피커 삼아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49절 말씀을 단순히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만 이해한다면 예수님이 하신 일들에 대한 이해의 폭은 현저히 줄어들게 됩니다.
예수님은 출생으로부터 가브리엘 천사가 등장하고 목자들이 찾아왔으며 세례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의 반응과 시므온과 안나의 예언 등을 경험한 마리아가 ‘아버지의 집’이라는 말씀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성전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다만 본문의 의미를 직역해보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직장 삼으셔서 일을 하시는 것을 마리아가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여기셨습니다. 공생애 동안 이러한 자아의식을 가지고 사셨고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계속되어왔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생각이 충만하게 임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로 삼으셨던 것은 40절의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는 말씀이 뜻하는 대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만을 구하고 찾으며 마음에 채우는 일이었습니다. 삼위일체 되심에 총력을 기울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외에는 이 세상에서 스스로 하신 일이 아무것도 없으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 일들 안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는 말씀을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목수 일을 하든지 어머니 마리아 아버지 요셉을 대하든 형제들을 대하든 전부 하나님의 지혜가 흘러들어오고 하나님의 생각대로 말하고 행동하신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이 성전에 머무르며 토론하였던 것을 예수님의 자의적인 일로 생각하였기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과 행동의 이유가 예수님 자신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든 말과 행동의 이유가 하나님께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성전에서 토론하시는 것 또한 예수님의 자의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사신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하나님의 일들 안에 있는 것이 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생애는 예수님의 사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의 일들 안에 계셨던 시간이며, 공생애는 예수님의 공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의 일들 안에 계셨던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하신 일은 예수님이라는 한 사람에게 취직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당신이라는 직장에 취직시켜 드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아의식을 가짐으로써 하나님의 직장이 되어드릴 수 있었습니다.
성전에서의 토론 사건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에서 요셉의 맏아들로서 사실 때에도 하나님의 일들 속에 계셨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평범한 목수의 일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한 일은 다른 사람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일들조차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기시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심지어 먹고 마시는 일들에 대해서조차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기셨습니다. 우리 또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직장 삼으셔서 취직하십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어떤 분들은 너무하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밥 먹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니 답답하게 여기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께서 식도에 암이 생겨서 밥은 고사하고 물을 마시기도 어렵고 폐암이 걸려서 숨쉬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고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식사하는 것조차도 실은 내 마음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계시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실은 나의 일이 아닙니다. 통풍이나 관절염이라도 생기면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스스로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뼈저리게 체험하고서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고백을 하게 된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모습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일들을 계획하며 살아가지만 이룬 것도 없습니다. 내가 계획하고 꿈꾸고 생각하고 추진하느라고 하나님은 실직상태에 계신데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이렇게 이룰 수도 없고 이룬 적도 없으면서 여전히 이루겠다고 하고 이룰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을까요? 인생을 40년 50년 60년쯤 살았으면 이제는 촐랑거리면서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계획하고 추진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철없는 일이 바로 유전 죄로부터 비롯된 저주받은 자의 속성이며 죄에 찌든 자의 특징입니다.
아담이 판단의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하기 이전에는 어떤 일도 스스로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타락하고 나서 야심을 갖게 되었고 꿈을 꾸고 비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판단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며 자문을 구하고 많은 공부를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삶을 중단하시고 하나님을 취직시켜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밥을 먹어도 하나님의 일하심 안에 있어야 하고, 숨을 쉬어도 하나님의 일하심 안에 있어야 하고 무엇을 해도 하나님의 일하심 안에 있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태승철이라는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갑니다. 아기가 스스로 몸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몸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직장이었습니다. 머리털을 자라게도 하셨고 빠지게도 하셨으며, 나이가 먹으며 주름이 늘어가고 여기저기 아프게도 하셨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죽을 날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죽기 전에 하나님 사랑에 매진해야 되겠다는 결심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몸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직장입니다.
부모도 자녀도 모든 관계도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일들입니다. 그런데 마치 생애를 내가 주인인 것처럼 생각해서 일을 해나가고 있으니 철이 없다고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촐랑대는 것이고 까부는 것이고 저주에 찌든 티를 내는 것이고 죄악의 장아찌가 되었음을 자랑하고 다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밥을 먹든지 일을 하든지 말과 행동이 나타날 때에 아버지의 일 속에 있는 것이 되게 하시려고 공생애를 지나며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못 박히셨고 창에 찔리셨고 채찍에 맞아 살갗이 찢어지셨으며 가시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움직일 틈이 없습니다.
손발에 못이 박히셨다는 것은 움직이실 수 없음을 의미하고,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셨다는 것은 생각하실 수도 없음을 의미합니다. 배에 창을 찔리셨다는 것은 소원을 가지실 수도 없음을 의미하고, 채찍에 맞아 살갗이 찢어지셨다는 것은 누구를 접촉하고 만날 수도 없음을 의미합니다. 완전히 꽉 틀어 막혀서 꼼짝 할 수 없는 상황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상태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못 박힌 상태의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예수님의 사생애 때로부터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취직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직장삼아 취직하시게 됩니다. 그래서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하나님의 일들 안에 존재하게 됩니다.
‘내가 내 아버지 일들 안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의적으로 성전의 토론에 참여하셨음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자의적으로 그런 일을 했다고 생각했기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지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직장이 되어계셨기 때문입니다. 어디에 가있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일 안에 계셨습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기셨기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직장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자발성을 가진 살아있는 인격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하나님의 직장으로만 있으라는 말씀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조차 하나님이 하셔야 될 일이라면 대체 무엇을 하면 좋다는 것일까요?
나의 직장은 따로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나의 직장입니다. 내가 추구해야 될 나의 과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장 1~2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살리심을 받기 이전에는 내가 설쳐대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한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하고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자 이제 남은 삶은 하나님이 취직하셔서 직장으로 삼으시게 됩니다. 그럴 때에 해야 하는 일은 바로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의 직업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많이 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많이 갖고 하나님을 많이 모셔 들여서 하나님으로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혔으므로 이 세상에서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게 취직하셔서 다 행해 나가실 것입니다. 그 대신 내가 할 일은 아버지를 갖는 것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내게 취직시켜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직장 문제가 급한 것이 아닙니다. 나의 모든 문제는 아버지의 일입니다. 나는 아버지의 직장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유지할 수 있으면 아버지께서 내게 취직하실 것이고 내 삶의 모든 것을 해나가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자로써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자아의식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내 생애 전체를 아버지가 하시는 일 가운데 있게 하시며 그러는 동안에 나는 하나님 갖기를 직업으로 삼고 추구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