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가
陽山歌
신라의 태종이 김흠운으로 하여금 양산에 주둔하게 하자 백제의 군사가 밤을 틈타 침입하여 습격하였다 흠운이 말에 비스듬히 앉아 창을 잡고 기다리니 종자가 말고삐를 잡고서 피하기를 권하며 말하였다 '도적들이 어둠 속에서 일어나거늘 지척을 분별할 수 없으니 비록 죽더라도 아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더우기 공은 왕께서 총애하시는 사위이니 나라에서 골품이 귀한 분입니다 도적에게 죽임을 당하심과 같은 일은 제가 부끄러워할 바입니다' 흠운이 말하기를 '대장부가 몸을 나라에 바치고서 어찌 남이 알고 알지 않음을 헤아려 마음을 바꾸겠느냐?'라 하고 검을 휘두르며 적진으로 돌격하다가 죽었다 흠운을 따라서 죽은 이가 세 사람으로 추도와 적득, 보용이었는데 모두 말하기를 '저 골품 귀한 분도 오히려 죽음을 가볍게 여기거늘 하물며 우리와 같은 사람은 어찌 해야 하겠는가?'라고 하며 싸우다 죽었다 당시 사람들이 양산가를 지어 슬퍼하였다
-태종:태종무열왕, 신라 제29대왕으로 654~661년까지 재위하였다 성은 김 이름은 춘추 진지왕의 손자로 이손 용춘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천명부인으로 진평왕의 딸이다 비는 문명부인으로 각간 김서현의 딸이자 김유신의 누이동생인 문희이다 외교에 능하고 웅변을 잘하여 진덕여왕이 후사없이 죽자 군신의 추대에 의하여 최초로 진골 출신으로 즉위하였다 율령을 제정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김유신으로 하여금 백제를 공격하게 하여 멸망시켰으며 고구려 정벌을 위하여 군사를 일으키던 도중에 죽었다
-김흠운: 신라의 부장으로 내물마립간의 8대손이다 아버지는 잡손 달복이며 태종무열왕의 사위이자 신문왕의 장인이다 655년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에 변방 33성을 빼앗기자 랑당대감으로 출전하여 백제 땅인 양산 밑에 진을 치고 조천성을 공략하려다가 기습을 받아 패배하자 대사 전지가 후퇴하여 후일을 기약하자 권유하는 것을 뿌리치고 싸우던 중에 죽었고 사후에 일길손에 추증되었다 사람들이 양산가를 지어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고 한다
-양산가: 양산은 충남 공주시 양산면의 신라때 이름으로 현재는 옥천 영동지역을 말하는 것 같다 신라시대 작자미상의 노래로 김흠운이 백제를 치다 전사한 것을 사람들이 슬퍼하여 지었다고 한다
羅太宗使金歆運屯陽山。百濟乘夜來襲。歆運橫馬握槊待之。從者控馬勸避曰。賊起暗中。咫尺不辨。雖死無知者。况公王之寵婿。國之骨貴。若死賊。我之所恥。歆運曰。大丈夫以身許國。何計人之知不知而易心乎。揮劒突陣而死。從死者三人。曰驟徒,曰狄得,曰寶用。皆曰。彼骨貴。猶且輕死。况如予者乎。時人作陽山歌以哀之。
진루의 달(춘추시대 진나라 목공이 퉁소로 봉황의 소리를 잘 낸 소사에게 딸 농옥을 시집보내고 지어 준 누각으로 봉루라고도 하는데 진루월은 이를 노래한 사패명이다)을 그리워하지 말라고 하셨기에
다만 싸움터에서 돌아가셨음을 알았을 뿐이네
금병작(사위로 선발됨을 비유하던 말로 북주의 두의가 병풍에 두 마리의 공작을 그려 두고서 새의 눈에 화살을 맞춘 사람에게 혼인을 허락한 고사에서 유래됨)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였거니와
예로부터 금병에는 향골(미녀의 유골)이 없었네
당시에 싸움터에는 고귀한 골품이 있었는데
네 귀웅(귀신 중 영웅으로 나라를 위해 죽은 이를 가리킴)은 죽은 뒤에도 외롭지 않았으니
얼굴은 산 모습과 똑같고 분노한 머릿카락은 서 있었다네
양산의 구름기운은 평온하지 않았는데
늘 천둥소리를 내며 날렵하게 말을 몰았네
莫相思秦樓月。但知戰塲沒。不知金屛沒。金屛從古無香骨。戰塲于今有貴骨。四鬼雄兮死不孤。同一生面竪怒髮。陽山雲不平氣。驅駕雷霆常勃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