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하루였다
큰아들 일본여행을 위해 새벽 3시에 차운전을 해야했고 그로인해 잠을 거의 설쳤다
그래도 천안에서 인천공항으로 그 시간에 그 거리를 운전 안 하게 된 것은 다행이다
그 뒤 둘째숙부의 구순 축하연이 양평 서종리에서 있어 양평에 다녀와야 했으니 참으로 바쁜 날이었다
그 와중에 시간을 짬내어 퇴촌 천진암 성지를 찾았다
세번만이다 삼고초려 끝에 오늘 드디어 탐방할 수 있었다
동해안엔 폭설이 내리고 이곳엔 비가 내리다 짓눈깨비가 내리다 날씨는 흐렸다 그래도 기온이 전혀 겨울 날씨가 아닌 봄 기온이다
천진암은 1779년 남인 계열 유학자 정약용, 이벽, 이승훈, 권일신 등이 모여 천주교 서적을 읽던 장소로,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로 꼽히는 곳이다.
1779년(정조 3) 남인계 소장학자들인 권철신(權哲身)·일신(日身) 형제와, 정약전(丁若銓)·약종(若鍾)·약용(若鏞) 3형제, 이승훈(李承薰), 김원성(金源星) 등은 독특한 학풍을 형성하며 천진암과 여주군 금사면(金沙面) 하품리(下品里)에 있던 주어사(走魚寺)에서 학문을 연구하며 강학회(講學會)를 가졌다.
강학의 내용은 유교경전을 위주로 했는데 그들이 천진암에서 강학회를 계속하던 중, 조선천주교회의 창설단원 중의 한 사람인 이벽(李檗)이 참여해 베이징[北京]에서 가져온 과학서적과 〈천주실의 天主實義〉·〈성리진전〉 등을 소개함으로써, 그들 모두가 천주교에 눈을 뜨고 천주교에 대한 관심이 학문적 지식에서 종교적 신앙으로 전환되었다.
이 강학회에서 이벽은 〈천주공경가 天主恭敬歌〉를, 정약종은 〈십계명가〉를 지었다고 하며 그들은 가르침에 따라 아침 및 저녁에 기도를 드리고 매월 7, 14, 21, 28일에는 일을 쉬고 묵상에 잠겼다.
그뒤 폐허가 된 천진암은 1962년 남상철(南相喆)에 의해 사지(寺址)가 확인되었고 1979~81년에는 이벽·정약종·권철신·권일신·이승훈 등 한국천주교회 초기인물들의 묘소가 이곳으로 이장되었으며, 1984년 한국천주교회 창시 200주년을 맞아 유적지들에 대한 대대적인 성역화사업이 추진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비, 순례대성당, 강학당, 갈멜 수도원, 가톨릭 신학연구소 등이 세워져 있다.
1978년 천주교 수원교구 변기영 베드로 몬시뇰이 이곳에 100년에 걸쳐 세계 10대 성당에 들어가는 대성당을 짓겠다며 부지 35만 평을 매입하고 1985년부터 공사에 들어갔다.
정초식은 1996년 6월 24일 거행되었다. 가로·세로 150 m, 높이 85 m의 초대형 건물로서 총 3만 3천 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지을 예정이며, 건립지는 1,500억 원으로 예상하는데, 철저히 일반 신자들의 성금으로 충당된단다.
현재는 이렇게 터만 닦여 있고 가끔 이곳에서 통합 미사를 여는 듯 하다
이곳에 세워질 천진암 대성당은 한국 카톨릭 전래 300주년인 2079년 완공을 목표로 진행 중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천주교 신자 수가 급감 중인 상황이고 현재 미사 참석율도 10%도 안되는 절망적인 상황이라 과연 2079년까지 얼마나 많은 신자가 존재하고 있을지 의문이라는 비관스러운 지적이 많이 나온다.
사실 현행 건축법상으로는 이렇게 공기를 길게 잡는 것은 불법이라고, 당국에서는 허가를 내주지 않으려고 했다 한다.
더우기 불교 사찰이었던 천진암, 주어사를 천주교에서 성지화하려고 하는 데다가 심지어 일부 불교 유물들이 절두산 성지 성당에 들어가 있는 등의 이유로 불교 쪽도 이쪽에 대해서 말이 많다.
엄연히 천진암도 주어사도 모두 불교 사찰이고 불교의 성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에서는 가톨릭 성지로서의 위치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불교계에서는 이 점에 대해서 가톨릭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숨어든 곳이 왜 불교 사찰이냐는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숭유억불 기조를 유지한 조선시대에는 지방 양반들이 절에 가서 약탈하거나 물건 혹은 이런저런 편의를 강요해도 사찰에서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찰에 대해 조금만 정중한 대우를 취하면, 승려들의 도움으로 외부에서는 쉬쉬하는 행동을 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양명학이나 서학에 관심있던 자들은 모두 절로 숨어들었다. 그래서 신유박해 때 이 절들도 폐허가 된다.
사실 이곳의 가장 큰 문제는, 천진암이 천주교 성지라는 역사적 근거가 불분명하다는 것. 상당수의 역사학자들은 '천진암 천주교 성지설'에 비판적이다.
한국 천주교 발상지로 계속 언급되는 곳은 경기도 여주시에 있던 사찰인 주어사이다.
주체가 된 인물은 권철신(암브로시오)이며, 묘비명을 남긴 정약용은 이 시기에는 세례성사를 받는 등 천주교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를 다룬 정약용의 글은 충분히 신뢰할 만한 자료인데, 여기서 정약용 등이 천주교를 소개 받았다고 알 수 있는 명백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 반박하는 입장의 논리이다.
그나마 천진암이나 주어사에서 한국 천주교가 태동했다고 알 수 있는 자료는 천주교 측 샤를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와 다블뤼 주교의 《조선에 복음이 들어온 것에 관한 회상록》이라는 책인데 여기서 정약용의 '조선복음전래사'를 인용했다고 밝히면서 천진암에서 이벽, 정약용, 이승훈 등이 천주교 서적을 읽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복음전래사' 자체가 현존하지 않는 등 몇몇 문제가 얽혀있어서 신뢰성 면에서 여전히 설왕설래하는 중이다.
바로 신유박해를 비롯해 그 뒤 100여 년이 넘도록 천주교인들이 대다수 박해를 받았던 역사적 사실로 볼때 겉으로 드러내놓고 조선복음전래사와 관계된 책자 대다수를 보존할 수 없었으니 이런 문제들이 생긴 것이다
초기의 천주교가 후일 경직된 주자학으로 변질된 서인학파의 유학에 근본적으로 반기를 갖다 보니 조선후기 천주교의 발자취는 증거 사료가 희미한 구전의 사료로 만나야 하니 계속하여 이런 문제들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서학에서 시작된 천주교의 사상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까지 연결되며 동학의 근본이 바로 천주실의이다 라고 보는 견해가 있기에 조선의 봉건적 사회가 근대사회로 변하게 만든 동학농민운동의 출발점도 또한 천주교 발상의 역사와 같이 한다고 한다면 이는 현재의 민주주의 근대사회의 뿌리이기에 민감하면서도 꼼꼼하게 접근해야 한다
어쨌든 한국 천주교는 조선후기 남인학파와 연결되어 있기에 천진암이란 공간이 갖는 이 시대의 역활은 무척 소중하다 할 것이다
천진암지로 오르는 길은 맑은 계곡을 끼고 있다 바로 이곳에 창립선조 5위의 묘역도 있다
계곡에서 최초로 맞는 것은 광암 이벽의 비이다
이벽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덕조(德操), 호는 광암(曠菴). 세례명은 세자요한. 무반으로 이름 높은 가문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이부만(李溥萬)이다. 정약현(丁若鉉)의 처남이다. 그러기에 이 이벽의 설교로 정약전,정약종, 정약용 형제 그리고 정약용 매부 이승훈으로 퍼지게 된다
성호 이익을 스승으로 하는 남인학자 중 하나였던 이벽은 이가환(李家煥)·정약용·이승훈(李承薰)·권철신(權哲身)·권일신(權日身) 등과 일찍이 교류가 깊었으며, 천주실의 등 천주교 서적을 접하고 천진암에서 천주학을 연구하다가 천주학을 학문이 아닌 종교로 받아들였다. 이후 그들은 이승훈에게 북경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게 하고 가성직을 부여받아 교세를 넓힌다.
이러한 교단 조직은 자발적으로 수용된 한국 천주교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벽은 이 교단 조직의 지도자로서 집에서 포교(布敎)·강학(講學)·독서·사법(師法) 등의 천주교 전례의식(典禮儀式)을 주도했으며, 새로 입교한 남인 학자들은 모두 이벽의 제자로 칭하였다.
1785년에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일어났을 때, 중인인 김범우를 제외한 양반 신자들은 일단 풀려났으나 이벽은 아버지인 이부만(李溥萬)에게 '네가 배교하지 않으면 내가 자살하겠다'는 협박을 받자 배교하겠다고 한 뒤 집에서 칩거하다가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사실상 그의 배교는 아버지에게 한 말로만의 배교였고 그 소신이나 사상은 절대 배교할 수 없었던게 아닐까?
그런 공로가 있기에 이곳에 유일하게 이벽의 비를 세우게 된 것 아닌가 생각한다
『성교요지(聖敎要旨)』가 유일한 이벽의 저작으로 전한다. 전반부의 내용은 신구약성서를 중심으로 한 한시로, 기독교성서의 이해와 복음정신의 사회화인 구세관(救世觀)을 표현하였다. 후반부는 로마서를 중심으로 사회정의론(社會正義論)이라 할 수 있는 정도관(正道觀)을 서술한 것으로서, 저자의 성서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드러내는 동시에, 당시 우리나라의 자발적인 천주교 수용이 성서를 기반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이벽은 기독교사상과 동양유학사상이 결합된 윤리와 규범을 제시했으며, 그것은 후일 한국 천주교가 유례없는 대박해를 이겨낼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그외 이곳에는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
절대로 천주교를 배교할 수 없다 공언한 정약용의 형 그리고 조선 카톨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정하상을 아들로 둔 평신도 초대회장 정약종
그리고 사실상 성호 이익의 학파에서 신서학파를 이끌며 한국 천주교의 교세를 학문으로 키우게 한 권철신, 권일신 형제의 묘가 있다
영조대에 탕평(蕩平)의 명분 속에서도 노론의 전제정치가 이어지는 가운데 사도세자가 희생되자,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놓고 노론이 시파·벽파로 나뉘어 대립했다.
그뒤 정조가 즉위하여 남인 채제공(蔡濟恭)을 영의정으로 기용하자 노론이 채제공을 공격했고, 이에 대한 남인측의 대응태도에 따라 1790년(정조 14) 무렵 남인도 시파와 벽파로 갈리며, 천주교와 관련해서는 각각 신서(信西)와 공서(攻西)로 나뉘어 대립했다.
1791년 신해사옥(辛亥邪獄),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등의 사건을 통해 집권 노론은 당시 사교로 규정되었던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빌미로 남인 시파를 정계에서 몰아냈다.
이중 신서파로 몰려 희생당한 인물들은 권철신(權哲身)·이가환(李家煥)·이기양(李基讓)·오석충(吳錫忠)·이승훈(李昇薰)·정약종(丁若鍾)·정약전(丁若銓)·정약용(丁若鏞) 등이다.
이들은 대부분 당시 주자학 일변도의 학문 풍토 속에서 주희(朱熹)와는 다른 경전 해석을 제기하고, 서양의 선진적인 과학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고자 한 성호좌파(星湖左派) 계열의 학자들이었다.
그들이 소원했던 이상사회 기득권 없이 모두가 더불어 존중하고 사는 그 이상사회, 빈부의 격차가 적어 배 곯고 소외됨이 없는 끝없는 이상사회 왜 그런 사회가 되는 것이 이토록 어렵기만 한가? 그들의 소원하는 사회가 이 땅에 하루빨리 오기를 고대하며 천진암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