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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진리로 오신 예수
<요1:14~18>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구약 이스라엘을 선민, 또는 언약 백성이라고 한다. ㅎ님이 택하신 민족이며 ㅎ님의 언약에 의해 존재하는 족속이라는 말이다. 언약백성이라는 말은 창15장의 횃불언약에서 유래하는 말이다. ㅎ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하시는데, ‘장차 네 후손이 이방의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다가 400년 후에 다시 이 땅에 돌아오게 할 거야’라고 약속하신다. 그러면서 이 언약에 대한 확증의 표식으로 짐승의 쪼갠 고기 사이로 횃불이 자나가는 이상을 보여 주신다.
횃불은 ㅎ님 자신을 상징한다. 쪼갠 짐승의 고기 사이로 횃불이 지나갔다는 의미는 ㅎ님의 피 흘리심으로 이 언약을 반드시 성취시킨다는 암시이다. 그 언약대로 야곱의 가족70명이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가서 430년 만에 약 250만 명의 민족을 이루어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된다. 물론 출애굽의 배경에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에 있다. 횃불언약의 성취이다. 이게 구약 이스라엘의 탄생 배경이다. 자신들은 알지도 못하지만 조상 아브라함에게 ㅎ님이 언약하신대로 이 세상에 존재케 된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일컬어 ㅎ님의 선민이요 언약백성이라는 칭호를 갖고 사는 자들이다. 이스라엘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ㅎ님의 언약에 의해 존재하는 자들이다.
구약 이스라엘은 ㅎ님이 택하신 자기백성 전체에 대한 모형이고 그림자였다. 엡1장을 보면 ㅎ님의 구속사에 대한 큰 그림을 잘 보여준다. 즉 창세전에 IX안에서 자기백성을 택하사 그들을 흠과 점이 없도록 구원키 위해서 IX의 피로 죄사함의 구속을 통해 ㅎ님의 아들을 삼는다는 것이다. 이들이 영적인 선민이고 영적인 언약 백성이다. 그래서 롬2.28정에서 바울은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이 참 유대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롬9장에서도 ‘육신의 자녀가 ㅎ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ㅎ님의 씨로 여기심을 받는다’고 못박고 있다. 약속의 자녀가 바로 언약 백성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중차대한 창세전 ㅎ님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그리고 창15장에서 쪼갠 고기사이로 지나간 횃불언약을 이루시기 위해서 ㅎ님 자신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으니 이게 성육신이다. 말씀이신 창조주 ㅎ님이, 영이신 초월자 ㅎ님이 택하신 자기백성을 구원키 위해 이 땅에 피조물의 모습을 입고 오셨으니 이런 망극한 은혜가 어디 있겠는가? 성육신하여 오신 목적과 이유 2가지(죄사함의 대속과 IX의 의를 전가시키기 위함). 여기까지를 지난주에 공부했다.
오늘은 독생자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은 완전한 ㅎ님이시며,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셨다. 그래서 바다 위를 걸으시고, 풍랑을 명하사 잠잠케 하시며,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셨고, 변화산에서는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처럼 희어지게도 변모하셨다. 반면에 육신의 몸을 입으셨기에 춥고 배고프고 졸립고 병에 걸려 고생하기도 하셨다. 사53장을 보면 주님의 성장과정이 약간 언급되는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한다. 고난과 역경의 회오리 속에서 고생했다는 말이고, 질병을 달고 살았다는 말이다. 아마도 공생에 전까지는 신적인 초능력을 행사하지 않고 사셨던 것 같다.
<히2:17~18>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4:15~16>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대제사장은 중보자이다. 같은 처지에 있어보지 못한 자는 그 형편에 대해 공감이 안되기 때문에 중보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주님이 진정한 중보를 하시기 위해 인생을 체휼하셔야 인생의 어떠하심을 알아 긍휼히 여기실 수 있을 테니까, 우리 사람의 아픔을 고스란히, 아니 그 누구보다도 더 신랄하게 맛보신 것이다. 알고보면 예수께서 인생의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밑바닥을 체험하시며 간고와 질고를 겪으신 것은 우리와 동질감을 얻고자 하시는 긍휼과 사랑의 발로였다. (방금 읽은 대로~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아주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는 ㅎ님께 기도 하는 게 맞다. 물질 문제든, 건강 문제든, 자녀 문제든..무엇이든지 정해진 게 없다. 지금 죽게 생긴 처지인데도, ‘나는 영적인 사람인데 그런 육적인 기도를 어떻게 하나? 체면이 있지~’라는 생각에서 ㅎ님께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게 교만이고 악이다. 오히려 성도에게 홀로 감당하기 어려운 큰 문제가 발생했다면 ㅎ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라는 ㅎ님의 뜻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기복주의 성공주의에 동화되어 이 세상 성공출세와 형통함을 추구하는 기도를 해서는 안될 말이다. ㅎ님 사업 잘되게 해주세요, 직장에서 승진하게 해 주세요, 이 병 고쳐주세요 저병 고쳐 주세요, 우리 아이 공부 잘하게 도와주세요.~ 이런 기도는 결단코 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성도는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탐심을 가지고 ㅎ님을 섬긴다면 우상 숭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어려운 처지에 놓여서 지금 죽게 생겼는데도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는 무신론자이지 성도가 아니다. 기도 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반증이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마음이고 자세이다. 기도해서 문제가 해결 되어도 응답이고 해결 안 되어도 응답이다. 진심어린 기도 후에는 반드시 심령에 ㅎ님의 평강과 안식으로 역사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다시 본문으로)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한다. 독생자란 유일한 아들이라는 말이다. 과연 예수님에게서 ㅎ님 아버지의 유일하신 아들의 영광이 보였을까? 예수님 초상화를 보면 머리 뒤로 후광이 나타난 그림을 보게 된다. 그러나 실제는 어떠했을까? 사53장을 보면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모습은커녕, 오히려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퇴박을 맞았기에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고 한다.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는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능력을 소유한 자로서 로마를 몰아내고 다시 유다를 일으켜 세울 다윗 왕과 같은 비범한 자였다. 그런데 학문도 없고 가문도 모르는 나사렛 달동네에서 자란 촌뜨기 예수가 ㅎ님의 아들 메시야라고 누가 알아주고 따르겠는가? 게다가 육신의 겉모습은 한마디로 정말 볼품없어 사람들이 피하여 갈 정도 였다고 한다. 그래서 빌립이 친구 나다나엘에게 ‘우리가 선지자가 기록한 그리스도를 만났는데, 나사렛 예수다’ 그러니까 나다나엘이 하는 말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조롱한다.
이처럼 육체로 오신 예수의 어떠함으로는 도저히 ㅎ님의 아들이라는 영광된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육체로 사람을 판단하는 인간들을 속이시는 ㅎ님의 지혜이다. 그 육신 안에 ㅎ님의 신성이 고스란히 감추어진 것을 누가 알겠는가? 성령의 계시로만 예수를 메시야로 알아볼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마16장,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베드로가 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메시야)요, 살아계신 ㅎ님의 아들이니이다’ 하자,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그걸 알게 하신 이는 네 실력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신다.
예수를 ㅎ님의 아들이요 메시야로 알아보는 것이 복인데, 이 복은 바로 ㅎ님의 계시로만 되는 것이다. 그렇다. 무엇이 복인가? IX를 ㅎ님의 아들 메시야로 알아보고 믿게 되는 이것이 최상최대의 복이다. 영원한 생명의 복은 IX를 믿어 ㅎ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 백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내가 원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창세전 ㅎ님의 택하심에 의해 되는 것이니, 이게 복이고 은혜이다. 당시에 제사장 율법사 바리새인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몰라봤고, 심지어 빌라도 역시 예수를 심문까지 했지만 몰라봤다. 다 멸망으로 들어간 것이다.
초림으로 성육신하여 오신 예수를 ㅎ님의 아들 메시야로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리는 것은 ㅎ님의 간섭으로만 되는 일이다. 그래서 마13장에서 주님은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 너희 듣는 것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였느니라’ 하신다. 구약은 아직 때가 안 되어서 감추어져 있었고, 때가 된 초림 때에는 오직 택한 자들에게만 예수가 메시야로 알아보고 따르게 된다는 말이다.
IX는 ㅎ님의 형상이시다. 18절을 보자.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아버지 ㅎ님을) 나타내셨느니라. ( )..누락
아들 예수는 ㅎ님의 형상이다. ㅎ님의 속성인 선, 사랑, 의, 거룩, 지혜지식, 긍휼, 자비 등의 ㅎ님의 성품과 인격을 고스란히 나타내 주는 분이시다. 그래서 요14장에서 빌립이 주님 아버지를 보여주세요 하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책망하신다. 죄인이 ㅎ님을 보면 즉사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른다. 그래서 비밀한 ㅎ님이 이런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해 아들 예수가 오셨다(이게 성육신의 3번째 이유라면 이유 임)
모세도 출33장에서 ㅎ님께 같은 질문을 하였다. ㅎ님의 영광을 보여 주세요. 그러자 내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기 때문에 반석 틈에 너를 가리우고 내 등만 보여 준다고 하신다.
<출33:17~23> 읽으면서 설명
17절~은총 입은 모세(택하심을 입은 성도의 대표-이름도 아신다?=>당연, 존재 자체를 아심)
18절~영광을 보여 주세요(ㅎ님을 보여주세요..같은 말)
19절~ㅎ님의 모든 선한 형상(ㅎ님의 신적인 권세와 능력과 신성한 성품을 말함: ㅎ님의 선, 사랑, 의, 거룩, 지혜지식, 긍휼, 자비 등등). 여호와의 이름(선한 형상과 같은 말임: ㅎ님의 신성한 인격과 성품적 속성을 함축한 용어가 이름이다)
누구에게?(은혜 줄 자에게, 긍휼 베풀 자에게=>ㅎ님의 자녀로 택하신 자기 백성들)
20~23절~죄인된 인간이 ㅎ님 얼굴보고 살 자가 없다. 그래서 반석 틈에 두고 지나가실 때에 등만 보여 주신다고 함(비유: 반석은 IX를 통해 ㅎ님의 어떠하심을 간접적으로 알아먹으라는 말씀)
(그렇다면 여러분이 인식하고 있는) ㅎ님은 어떤 분이신가? 항상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살펴보시다가 행여나 잘못하면 가차 없이 쫓아와서 매질하시고 심판하시는 무서운 분인가? 아니면 한 없이 자애롭고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ㅎ님 인가? (전자냐? 후자냐?)
정답이 출34장에~
1절~(첫번째 돌판이 이스라엘의 범죄로 깨뜨려짐: 이것도 ㅎ님의 경륜의 한 장면임. 첫 번째 돌판은 출19장에서 쌍무계약에 의해 체결된 율법임, 근데, 금송아지 사건 발발, 쪼갠 고기처럼 죽어야 될 운명~ 돌판은 깨뜨려지고 백성들은 저주를 받아 3천명이 죽어가고 있었음. 그때 모세의 중보(이들을 용서치 아니하시려면 차라리 나를 죽이세요)로 ㅎ님의 심판은 중단되고 대신 두 번째 돌판이 주어지게 되는 장면이다(모세: IX예표) =>4절(새 돌판은 새언약을 상징한다. 우리의 저주를 IX가 대신 받으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십자가 복음이 새언약이다)
그리고 그러한 ㅎ님 당신 스스로에 대한 성품과 인격에 대해 선포하시는 내용이 5~9절이다.
5,6절~여호와의 이름의 내용(속성): 자비, 은혜, 인내, 인자, 진실(진리)가 풍성하신 ㅎ님
7절~인자(자궁: 모성애적 사랑을 천대까지? ->심령에서부터 솟구치는 원초적 사랑을 영원토록 하신다는 말임) /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공동: 그렇다고 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잘못은 벌 하신다함: 자녀가 못된 짓을 해도 방치하는 부모가 없듯이, 징계를 통해 바로 잡는다는 말씀이지 아예 버린다는 말이 아님). 천대의 사랑과 삼사대의 보응의 차이(비교)
8절~ 경배할 수밖에 없는 모세의 입장(ㅎ님의 망극하신 사랑을 깨닫게 됨)
9절~모세의 자백(목이 곧은 백성: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종자들이니 언제나 동행하여 보호해 주시고 악과 죄를 사하시고 주의 기업으로 삼아달라는 자세가 중요: 우리는 주제파악을 해야 한다. ㅎ님의 은혜와 용서는 한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지속적이고 계속적인 돌보심이 필요)
다시 출33장19절~은혜 줄 자에게 은혜 주고, 긍휼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풀 자의 대상은 누구 이겠나? => ㅎ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고 반듯한 삶을 살아온 자칭 의인들이 아니라, 자신에게는 죄 밖에 나올 게 없다는 좌절 속에서 ‘주여 이 죄인을 용서해 주세요, 긍휼히 여겨주세요’라고 상한심령으로 통회하는 마음의 소유자들, 자기부인이 일어난 자들에게 ㅎ님의 은혜와 긍휼이 입혀지게 되는 것이다(예/ 눅18장, 바리새인의 기도, 세리와 창기의 기도)
IX는 율법으로 고정화된 유대인의 세계에 ㅎ님의 은혜와 용서와 사랑을 몰고 오신 분이시다.
그래서 율법 행함의 대표격인 바리새인들과 사사건건 부딪혔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요8장의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에 대한 용서였다. 여기에 앞장선 자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인데 예수를 고소한 빌미를 얻고자 시험하기 위해 꾸민 짓이다(만일, 예수가 돌로 치라 한다면: 예수도 특별하지 않고 자기들과 다를 바 없는 모세의 제자임을 군중에게 인식시킴/만일 용서하라: 모세의 율법을 폐하는 이단으로 몰아서 유대 땅에서 쫓아내거나 죽이려고 시험코자 함)
그 때 주님이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다라고 함(무엇을 쓰셨나?) 두 번인데 (첫 번째는 아마도 십계명 중 6~10째 계명을 쓰셨을 것임(살인마라, 간음, 도적질, 거짓, 탐내지 마라, 특히 10째를 부각하여 상세히 쓰셨을 것임, 10째 계명 아시나? 이웃의 집을 탐내지마라. 이웃의 아내나 남종, 여종, 소나 나귀, 기타 소유 무엇이든지..탐내는 그 자체가 죄라고 상세히 기록하신 듯)
유대인들은 여태컷 행동으로 저질러야 죄인줄 알아왔는데, 자세히 보니 모세의 십계명도 이미 마음의 탐심 자체를 죄로 규정했음을 새삼 깨닫고 놀라게 됨(여기까지가 첫 번째 쓰신 결과)
그 때 주님이 일어나서 말씀(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하심: 그리고 다시 몸을 굽혀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고 다 물러가게 된다. 그럼 두 번째 쓰신 내용은 무엇일까? 아마도 (제 생각), 좀 전에 살펴본 출33장~34장의 말씀일 듯하다. => 즉, 너희가 다시 받은 율법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충만하신 ㅎ님이 다시 주신 거야, 모세의 중보로 주신, 용서가 담긴 율법이야. 그리고 너희도 다 탐심의 죄를 지었지만 오늘날 너희가 사는 것도 ㅎ님의 무한한 긍휼하심으로 용서받고 사는 거야.(이런 취지의 말씀을 땅에 쓰신 것을 보고 다 양심의 가책을 받아 물러갔다는 것이다.)
이처럼 율법으로 화석화된 유대인의 종교 세계에 주님은 은혜와 진리를 몰고 오셨다. IX는 은혜의 아이콘이다(은혜 뭉텅어리). IX의 피로 자기백성들의 죄를 대속하신다는 아버지와 아들 간의 창세전 언약 자체도 은혜였고, ㅎ님과 본체시나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어 사람의 형체를 가지고 성육신하신 것도 은혜이다(취하다: 고집하다, 나 같으면 백번 거부할 듯, 초월자가 육신의 감옥을? 스스로 제한하심-언약을 위해서), 또, 십자가 위에서 모진 고통을 감내하시며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루신 것도 은혜이고, 부활하신 후 X의 영을 우리 안에 보내시사 우리와 동행하며 사시는 것도 은혜이다.
성도에게 있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ㅎ님의 사랑과 IX의 은혜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은혜로 덕지덕지 감싸져 있다는 말이다. 가정에서 아기의 모습을 연상하면 딱이다. 부모의 사랑으로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챙기고 보호받기에 아기가 살아있듯이 ㅎ님 앞에서의 성도가 ㅎ님의 사랑과 IX의 은혜로 존재했고, 지금도 살아가는 것이다(알파~오메가)
이같은 ㅎ님 사랑과 IX의 은혜의 정점은 죄인을 용서하신 은혜다. 롬5:8절에서 잘 말해 준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실로 사람의 이성과 상식을 깨뜨리는 개념이다. ㅎ님이 언제 어떻게 우리를 사랑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무가치 할 때, ㅎ님의 원수 되었을 때, 지옥 자식이었을 때에~ ..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조건 없이 아들 예수를 화목제물로 삼으사 우리를 용서하시고 자녀 삼으신 것이 바로 ㅎ님 사랑의 확증의 표시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행여나 다시 죄를 짓는다면 어찌될까? 구원이 취소될까? 죄인을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하신 ㅎ님 이신데, 죄짓는다고 버리시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온전하고 영원한 것이다.
(민23장 19절) 말씀이 보증한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헛소리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즉 한번 결정 했으면 번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결정을 후회하시지 않는다고 한다. 왜, 번복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항상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걸 ㅎ님의 은혜라고 한다. 후회가 없으시다란 변개치 않으심을 말한다.
(히6장 18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식언? 변개?)
그렇기에 성도의 구원은 성도의 조건에 따라서 빼앗길 수 없다. 왜냐하면, 성도의 구원은 성도의 조건을 보고 한 것이 아니라 ㅎ님의 일방적인 은혜와 사랑으로 되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경 목사들이 당신 그따위로 예수 믿어서 천국에 가겠어? 라고 협박하고 공갈을 치면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이 그냥 나와야 한다. 복음을 모르는 거짓 교회, 거짓 선생이기 때문이다.
이제 진리에 대해 보자, 아들의 영광을 보니 “진리”(헬, 알레데이아)가 충만하더라라고 말함. 성경이 말하는 진리와 세상이 말하는 진리의 의미는 같지 않다. 세상이 이해하는 진리란 ‘변하지 않는 이치나 도리’를 말한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보편적 법칙이나 사실’을 의미한다. 대부분 과학이나 윤리, 수학의 논리법칙 등을 말한다. 예, 지구는 둥굴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 1+1=2.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 사필귀정 등.
불교의 윤회, 업보라는 교리 역시 불교에선 진리로 통용 된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에서 통용되는 진리가 복음의 세계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아니 그 반대 개념을 가진다. 롬4:5절을 보면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고 말한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이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란 ㅎ님의 구원의 비밀이며 구원의 수단이며 구원의 길이신 IX를 뜻한다. 세상에는 감추어진 비밀이기에 성령의 계시를 받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 주님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다. 밭에 감추인 보배처럼 공개 되어 있지만 아무에게나 보이질 않는다. 보고도 깨닫지 못하도록 ㅎ님이 감추어 놓으셨다. 즉 진리란 예수 자신이며, 십자가의 도를 말한다.
(골1:26-27)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마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것-/ 요17장~영생이란 참 ㅎ님과 아들을 아는 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란? 세상의 지혜를 갖고 있는 자들을 말한다. 고전1:21절을 보면 세상 지혜(세상의 상식)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세상 상식? 상선벌악, 사필귀정, 의인이 천국 가고 죄인이 지옥 가는 것. 뿌린 대로 거두는 것. 인과응보. 이러한 종교적 상식으로 무장되어 있는 자들이 바리새인들이었다. 오늘날 경건주의를 앞세우고 있는 목사들이 바로 이런 부류들이다. 세상 사람은 이렇게 경건한 자들을 존경하게 되어 있다.
세상 종교 상식은 의인을 찾아와 보상해주는 하나님을 말한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이 생각했던 구원관이었다. 그러나 마9:11-13절을 보면 건강한 자와 병든 자 비유를 말씀하신다. 누가 의사를 필요로 하는 자일까?(병든 자), 누가 죄에서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를 필요로 할까? (죄인들뿐이다.) 누가 생명을 주러 오신 예수를 필요로 할까요? 죽은 자들뿐이다.(자신이 죄와 허물로 죽은 무능하고 무가치한 자임을 아는 자가 예수를 찾는다)
주님은 자기 의를 내세우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말씀하신다. 제사 의식은 자신들의 의를 쌓는 수단이 아니라 희생 제물의 대속의 죽음으로 자신들이 죄사함을 얻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음을 가르쳐주는 수단이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드러난 ‘진리’란 이러한 세상 지혜를 뒤집어 놓는 진리였다.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이 드러난 것이다. 오늘날 예수도 믿고 자신의 행함과 열심을 통해 천국 상급을 기대하고 있는 현대 교회가 말하는 가르침은 포도주에 물을 탄 진노의 포도주요 음행의 포도주요, 다른 복음이다.
다시 본문 보자,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6절의 은혜 위의 은혜러라. 위에(헬/안티: 대신에) => 번역(은혜 대신 은혜다)
17절로 이어짐~ 모세의 율법도 은혜였는데, 더 큰 은혜가 IX가 몰고온 은혜와 진리라는 말씀.
왜 율법도 은혜인가?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통해 구원자 IX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니까. 만일 율법이 없어서 죄를 모르면 아무도 예수께 나아가지 않게 되니, 율법도 은혜라는 말임. 그래서 롬3.1절에서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뇨?(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ㅎ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또한 롬7.12절에서도 율법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칭송). 왜냐하면 율법에서 탐내는 게 죄라는 것을 지적하지 않았다면 죄를 알지도 못한 채 멸망당했을 텐데, 율법으로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함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 죄사함 받아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정리) ㅎ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무엇하나도 버릴 게 없다. 선악과든, 뱀이든, 죄이든, 율법이든, 모든 것이 합력하여 구원이라는 선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감사한 것은 우리 인간의 행함에 따라 구원을 주시는 게 아니라 독생자 아들 IX를 믿음으로 구원을 주시는 ㅎ님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도 귀하고 감사한 일이다.
그 십자가의 도를 이루시기 위해 은혜와 진리로 오신 IX께 감사와 찬송을 보냅니다(할렐루야!)
(*참고: IX...예수 그리스도/이에소수 크라이스트-헬라어 약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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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과 복음교회(김기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