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신(김용익)을 읽고
나무처럼
시장에서 신집사람을 만났다.
전쟁을 피해 부산의 시장으로 꽃신을 매고 온 신집사람 - 그의 딸에 대한 나의 청혼을 거절하고 저희 세업을 자랑하며 "내 딸을 백정네 집 자식에겐 안주어!" "백정녀석이 중매쟁이 있다는걸 알리있나" "혀끝으로 한 좋은 말이 백정녀석 마음을 크게했다"며 백정인 우리를 모욕했었다. 원한에 찬 마음에 가슴이 쓰라렸다.
신집사람은 나를 좋아했다. 내가 울타리 높이만큼 클까 말까 했을 때 그는 공방에 흩어진 줄, 끌, 바늘 따위를 치우고 나와 그의 딸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는 언젠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네가 커서 장가들 때는 너하고 너의 신부, 중매쟁이를 위해 제일 예쁜 꽃신을 만들어 줄께" 다시 어느 날 그는 내 얼굴을 한참 보고 있다가 자기 딸을 힐끗 쳐다보며, "상도야, 너는 얼굴이 깨끗하고 잘생겨서 장차 중매쟁이 신발이 닳아지지 않겠다. 그러나 신부집 부모는 중매쟁이가 나서길 바란단다. 그 은방울 같은 구수한 이야기가 부모들 마음을 흐뭇하게 해 주거든." 그의 눈은 꽃신 쪽으로 내려갔으나, 미소를 머금은 입은 나를 항하고 있었다.
신집 딸이 기와집 부엌아이로 가고 내가 그 집을 기웃거리게 되고 해가 저물면 집들에 등잔이 켜지듯 소문은 퍼져서 사람들은 나를 보고 빙긋이 웃었다. 열을 띠운 신집산람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상도야, 나는 결코 꽃신값을 내리지 안할끼다. 나는 내딸에게 부엌에서도 꽃신을 신기겠다. 그리고 딸이 시집갈 때 꽃신을 다 주어 보낼끼다."
딸자식에게 자신이 가진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내어 주겠다는 아비의 마음이다. 형식과 절차가 중한 꼬장꼬장한 신집 사람에게 어느날 불쑥 혼자 와서는 딸에게 장가 들겠다 딸어미에게 말하고 가버렸으면 전해 들은 딸애비는 욱하고 치밀어서 상대가 우리를 홀애비 부엌뚜기 해먹듯 쉬이 여기는 것같아 서운하고 화난 마음에 되갚아 주듯 내뱉은 말이었으리라.
나는 겉치레 형식을 줄이고 실리 위주의 혼인을 생각했겠지만 신집사람은 딸을 도둑시집 보내듯 하고싶지는 않았을것이다.
결혼은 나혼자 내 생각대로 하는게 아니다. 상대의 생각도 듣고 조율해야한다. 그래서 그시절엔 중매쟁이가 있어야 했나보다.
비록 백정집안이지만 신분의 벽이 허물어진 세상에 중매쟁이를 내세워 신집사람의 귀를 간지럽혀 주었으면 좋았을것을.
인륜지대사 혼인을 청하는 자세에 당신의 딸을 귀히 여기고 아끼며 살겠다고 중매쟁이를 넣어 청했더라면. 중매쟁이가 동네방네 다니며 혼인에 대한 소문도 내주고 양쪽 집안의 의견도 조율해 주고 그랬으면 좋았을것을.
인생은 타이밍인데 그순간 한번 더 생각 해보고 의논을 구했으면 좋았을것을.
안따까운 마음에 뒷북을 쳐본다.
어쨌든 둘은 인연이 아니었나보다.
작가 김용익은 통영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영문학을 미국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했다.
1956년 미국 매거진<하퍼스 바자>에 단편 "The wedding shoes"(꽃신)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영어로 쓴 소설을 발표하며 직접 한국어로 번역, 개작하여 한국의 문학지에도 발표하고 단행본 <푸른씨앗>과 <꽃신>을 출간했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영문학과 소설창작을 강의하다 고려대 초빙교수로 한국에 돌아와 머물던중 1995년지병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숱한 문학작품의 배경이 된 고향 통영 선영에 묻혔다.
함께 길을 걷는 사람들과 태평동 김용익 김용식 형제 기념관에 들린 적있다. 자그마한 기념관 이지만 그들 작품의 향기를 되짚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았다.
걸음을 옮겨 용남면 해안가 길 위에 있는 그의 묘소로 향한다. 차 한잔을 올린다. 묵념한다. 그의 문장들을 낭송하고 우리들도 차한잔씩을 나눈다. 묘소에서 내려다 보이는 잔잔한 바다가 아름다웠다.
202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