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 책갈피
백란주
구름이 구름을 먹었다. 바람이 바람을 삼켰고 길이 길을 지웠다.
흐르는 구름 사이로 작은 언쟁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사라져 버린 것인지 모를 흰 구름의 단서를 찾느라 먹구름을 따른다. 구름이 먹힌, 구름을 먹은 연유를 알 길 없는 시선은 그저 따르기만 할 뿐이다. 하늘에 초점이 머문다.
바람이 찰나에 바람을 삼켰다. 바람이 이끄는 길을 작은 잎이 뒤따른다. 물이 향할 길을 안내한다. 바람 소리라는 말이 무색하게 왔다 간 흔적에 생각을 없애고 들켜버린 마음을 얹는다.
길이 사라졌다, 나타났다. 새로운 모퉁이를 돌아가면 뒤가 보이지 않는 길. 마음이 숨은 듯, 잊히듯 길은 갈래로 나뉘지 않고 마음을 숨긴다. 두려워할 것 없는 직선으로 내달렸던 길과 달리 예측 불가의 곡진 길은 혹여 모를 경우를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다가온다. 기대와 함께 조여 오는 조바심을 잠시 잊게 한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책을 읽다가 주춤거린다. 눈이 피로해서라는 핑계를 대지만 책 읽어내는 근육도 손실되고 있는 중인지 모른다. 읽었던 페이지를 또 읽게 된다. 분명 익숙한 문장이어야 하는데 처음인 듯 느껴지는 이 낯섦을 어찌해야 할까. 책 사이 책갈피를 끼워둔다. 쉼이 잦아진다.
책갈피 모임 속에도 책갈피를 넣었다. 함께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는 일, 글을 쓰고 공감하는 일, 사소한 이야기를 풀어놓고 웃는 일이 한 권의 책이 될 만큼 귀한 시간으로 흘렀고 또 흘렀나보다. 그림책이 주는 따뜻함으로 묶여있던 유년이 방목되는 느낌. 필사가 주는 되새김의 기억은 추억으로 전환되는 귀한 경험. 주제에 어울리는 글쓰기는 시각화되어 나타나는 현실. 책을 읽으며 다름을 느끼는 시간. 열린 결말을 상상하는 것처럼 두근거렸다.
잠시 쉬어간다. ‘책갈피’란 책을 잠시 덮어두는 시간, 나를 만나러 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생의 끝자락에서 울어대던 매미가 울음을 그치는 날, 가을을 상상할 수 없는 매미는 여름만 추억한다. 겪어보지 못한 가을을 귀뚜라미가 되어보는 것. 마침표의 문장이 아니라 쉼표로 넣어둔 책갈피의 시간이기도 하다.
먹구름이 흰 구름을 먹을 때 그 구름은 먹힌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중이었다. 스치듯 서로를 지나며 먹구름은 먹구름대로 흰 구름은 흰 구름대로 길을 나아갔다. 바람이 바람을 삼킨 것이 아니라 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연이 있고 큰 소리로 위엄을 알리는 바람이 있을 뿐이다. 바람은 소리로만 앉는 것이 아님을 흔적으로 가르쳐 주었다. 길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어지는 것임을 잠시 잊었다.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로 오는 것.
생각이 생각을 이끈다. 책갈피 속에 끼워둔 책갈피가 다시 ‘책갈피’로 이끌게 될 시간을 기다리며.
첫댓글 하얀난초 님의 글을 받았습니다. 일단 여기에 넣어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