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짐을 이고 서 있는 자야
-이순신 공원 길에서-
향기 이영란
지난 일요일에 엄마와 함께 이순신 공원을 산책했다. 주차장 위쪽으로 유아숲체험교육원이 단장되어 더 아기자기한 곳이 되었는데, 초등학생처럼 짚라인을 타기도 하면서 목련 봉오리와 조금씩 시들어가는 매화꽃을 구경하며 구불구불한 길을 걸어올라가는 재미가 있다. 바닷가 쪽이 아닌 중턱 산책로를 걸었다. 비늘이 얼룩덜룩한 모과나무, 꽃이 없을 때엔 금목서인지, 은목서인 분간이 되지 않는 나무, 아직은 꽁꽁 입을 다물고 있는 벚꽃눈, 도시락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벤치 등 나에게 그 곳은 눈 감고도 훤한 곳이지만, 거제에 사는 엄마는 처음 내딛은 낯선 곳이다. 모처럼 산책 겸 운동으로 더 다정한 길이었다.
무슨 말 끝에 나온 이야기였다.
“남편도 잠을 잘 못자서 힘들어 하고, 요샌 잠 때문에 어려운 사람들이 많더라 엄마!”
“아이고 무신! 그게 다 편해 빠져서 안 그렇나. 낮에 몸을 움직이고 힘들게 일로 해 봐라. 밤에 잠이 안 오는지. 그게 다 엄살 아이가!”
우리 엄마다운 말이었다. 나 역시 그 의견에 8,90퍼센트 동의한다. 그럼 꼰대가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만은. 엄마는 끊임없는 부지런함과 노동하며 살아온 사람으로서 꼰대의 자격이 있다. 내친 김에 선촌 마을로 나오는 산길을 걸어가기로 했다. 아름다운 산길을 걷는데 곳곳마다 소나무의 낙엽, 갈비가 쌓여있었다. 어린 시절 나도 갈비를 긁으러 다녔었다. 제법 다닌 듯 싶으나 그게 얼마나 우리집 살림에 도움이 되었을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엄마, 갈비가 진짜 많이 쌓여있네. 어릴 때 산에 가면 이렇게 많지는 않았지. 다 긁어가고, 겨우겨우 모아서 집에 갔는데. 요샌 아무도 가져가는 사람이 없으니.....”
“나도 동네 친구들이랑 나무하러 가서 해를 지았다. 점두록(하루종일) 놀다가 나무 짐 만들어서 다저녁에 집에 갔다. 많이 해 간 날에는 대문 앞에 짐을 이고 서서, 옴마하고 아부지가 ‘아이고 자야가 이리 마이 해왔나’ 그 소리 날 때까지 버타고 서 안 있었나. 반대로 조금만 했을 때는 집 뒤에가서 털썩 하고 던져놓고 아무 소리도 안 하고 들어갔다아이가.”
꼰대의 딸이 나이를 먹어서일까, 꼰대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귀하게 들렸다.
“겨울에는 방에도 고매를 그득히 담아놓고, 정지에도 부뚜막 반대쪽에 응덕을 파서, 짚단으로 덮어놓고 불 땔 때 서너개씩 꾸서 무면 얼마나 맛이 있던지.”
“울옴마가 부자집은 아니라도 살림 따시고 사랑을 엄청 받은 처녀였는데, 아무것도 없는 아부지한테 시집오는 바람에 살림을 살면서 놀랬겄다.”
그랬다. 엄마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자랐다. 지금도 엄마 목소리의 온도는 60도 쯤 된다. 생활력 없는 아버지를 대신에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습관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나는 갈비짐을 이고 서 있는 어린 둘자를 상상해 보았다. 부모의 사랑을 확신하는, 그 사랑을 어서 말로 내놓으라고 버티고 있는 둘자를. 사랑이 가득했던 엄마의 어린 시절을. 그 전에도 틀림없이 존재했을 사랑이 전하고 전해져 지금도 흘러 넘치고 넘치고 있다.
산길 오른쪽에는 유래 없는 썰물로 너른 갯벌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선촌 입구로 나오자 사람들은 톳나물, 미역 등을 따서 서너 묶음씩 들고 가고 있었다.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