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몇 해 전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라는 제목의 산문집을 선물받았다. 여행을 좋아하는 내가 좋아할 거 같아 생일 선물로 골랐다며 직원 애가 내미는 책을 보며 적잖히 당황했다. 물론 난 여행도 좋아하고 책도 좋아한다. 액면을 보면 직원의 말도 맞고 선물로는 그만한 걸 고를 수 없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다.
어렵지 않고 신변잡기적으로 쓰여지는 글이라 자기개발서보다 내용이 쉽고 기승전결 내용을 파악하며 읽어야 하는 소설보다는 접근이 용이하긴 하지만 수필에는 아주 치명적인 맹점이 있다. 그 글을 쓴 작가와 내가 생각이 맞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공명하지 못하는 수필을 읽는 건 고역에 가깝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내겐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책을 받아 놓고도 꽤 오랫동안 펼쳐보지 못했었다.
천만다행인 것은 작가와 내 생각이 그리 틀리지 않았던 듯 글은 아주 쉽게 술술 읽혔다. 그의 글을 읽으며 그동안 내가 여행을 하면서도 생각은 해보지 않았었는데 저런 마음이 나도 기저에 깔려 있었던 것이었구나 하는 깨달음까지 얻을 수 있었다.
‘호모 비아토르’ 여행하는 인간이라는 정의까지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만큼 인간은 여행을 좋아한다. 그 작가처럼 뭔가 원대한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뜻을 가지고 여행을 가는 것은 아니지만 난 그저 내가 생활하는 곳과 다른 곳을 가보는 것,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역사적인 곳을 가면 역사적인 사실들을 떠올 릴 수 있어서 좋고 자연이 좋은 곳을 가면 눈에 담고 올 수 있어 좋았다. 다람쥐 챗바퀴 돌 듯 맨날 같은 일상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제일 좋은 이유인 것은 불문가지.
자유로운 배낭 여행을 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건 시간과 돈이 있는 사람들에게나 해당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처럼 낼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은 사람에게는 패키지 여행이 가장 저렴하고 또 안전하다. 단체가 움직일 경우 최소한의 안전망은 구축하고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행날짜를 정하고 그 다음 장소를 정한다. 왜냐면 시간을 정하기가 어렵지 세계는 넓고 갈 곳은 많기 때문이다. 날짜가 정해지면 열심히 패키지 상품들을 뒤지고 뒤져 내가 편하게 패캐지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상품을 검색한다. 처음엔 잘 모르고 실패도 할 때 있었지만 한해 한해 시간이 지나면서 찾아내는 노하우가 늘었다.
여행을 함께하는 멤버도 굉장히 중요하다. 가족여행도 자주하지만 내 여행메이트는 좀 특별하다. 시누이와 시누이의 딸 그리고 손아래 동서, 나까지 이렇게 네 명이 진짜 여행메이트다. 전에 누군가 듣고는 이상한 조합이라고 친해질 수 없는 사람들이 하는 어색한 여행을 떠올렸다고 하더라. 하지만 우린 이렇게 거의 15년이 넘게 매년 여행을 다니고 있다.
마음 맞는 여자들끼리의 여행은 꽤나 재미가 있다. 1년에 한번은 기본, 많으면 2번에서 3번까지도 해외 패키지 여행을 떠난다. 따지고 보면 꽤나 잦은 해외여행이다. 그래서 저렴한 패캐지 여행이 구미에 딱 맞는 것이다.
이렇게 자주 여행을 가는데도 남편은 차마 뭐라 못한다. 남도 아닌 자기네 식구들과 가는 여행을 뭐라 말리겠는가. 친정식구랑 가는 것도 친구들과 가는 것도 아니니. 그저 그렇게 자주 다니면 뭐가 좋은지 모르겠다고 가끔 가야 재미있지 않겠냐는 이상한 논리를 궁시렁 거릴뿐이었다.
그런 남편의 모습에서 돌아가신 시아버님의 모습이 떠오른 적이 있었다. 20년전 돌아가신 시아버님은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그 흔한 제주도도 한번 다녀오시지 못한 분이었다. 여행을 가실 만큼의 여유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자식들이 보내드린다고 해도 당신이 싫다 거절하셨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짐작된다. 동네 근처에서 관광 엑스포가 열려 모시고 갔을 때도 많은 볼거리가 있는데도 돌아다니시며 둘러 보시는 것 대신 아는 분을 만났다며 포장아래서 드시던 한 잔 약주에 그저 행복해 하시곤 하셨었다. 그래서 시아버님은 그 흔한 환갑여행도 못해보고 돌아가셨다.
남편에게 좋아하는 친구들과 여행이라도 가라 하니 망설이듯 거절하는 모습에서 시아버님의 모습이 떠오른 것은 이상할 일이 아니었던 거다. 남편도 새로운 곳에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국내도 아닌 땅 설고 말 설은 곳에 선뜻 갈 엄두를 못내는 것처럼 보였다. 본인은 극구 부인하겠지만 적어도 내눈에는 그렇게 비쳐졌다.
올 해 남편의 좀 특별한 생일이 있었다. 이제는 수명이 길어져 환갑은 환갑으로도 안여긴다고 하지만 그냥 넘어가기엔 뭔가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썩 마음에 드는 여행메이트는 아니지만 여행을 데리고 가주기로 했다. 여행비와 거기서 쓸 경비는 딸들이 선물해주었고 여행의 일체 모든 것을 내게 맡기고 절대 궁시렁거리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고 여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둘이서만 가는 것이 못내 찜찜해 시누이에게 같이가자 부탁하고 남편의 친한 대학 후배 두명도 같이 가자 청했다.
그 두명을 일행에 넣은 이유는 전부터 그 둘이 여행을 가자고 남편에게 말을 했었단다. 하지만 남편이 보기에도 남자 셋 여행이 별로 재미있을 거 같지 않고 워낙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어디를 가도 그냥저냥 같을 거 같아 대답을 하지 않고 있었다고 하길래 과감하게 끼워넣었다. 그렇게 정말 이상한 조합의 여자 둘, 남자 셋의 환갑여행이 준비되었다.
꽃 피는 3월 베트남의 “달랏”이라는 곳으로 출발하는 비행기는 새벽2시 보딩이었다. 새벽 출발이라 공항은 한산했고 비행기안도 널널해 누워 갈 수 있을 정도였다. 오랜만의 여행이라 그런지 남편은 약간 상기된 얼굴이었고 남편의 후배들은 생전 처음 듣는 장소라 낯설다며 괜찮을까 하는 우려의 표정이었다. 난 그저 나만 따르라 했다. 믿고 맡기라고. 사실 나도 처음 가는 곳이라 모르기는 매한가지였지만 호기롭게 그렇게 말했다.
동남아인데도 새벽에 도착을 해서 인지 덥지 않았다. 동남아는 공항에 내려서면 훅하니 감겨오는 더운 바람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웬걸 달랏이라는 곳은 약간은 서늘 할 정도였다. 달랏은 해발고도 1500미터에 있는 고산도시라 사계절 봄만 있는 곳이란다. 동남아에서 소나무를 그렇게 많이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긴 했다.
베트남에 왔으니 쌀국수는 먹어야 제맛이지 싶어 조식으로 쌀국수와 분보후에라는 것을 먹었다. 노변에 있는 식당에서 국수가 나오길 기다리며 밖을 보니 역시 동남아의 명물 오토바이 부대가 지나간다. 저렇게 많은 오토바이들이 시끄러운 경적소리와 함께 신호도 없이 뒤엉켜 다니는데 사고가 없다는 것이 마냥 신기하다.
남편은 그 모습을 보더니 사람 사는 것 같다고 했다. 한국은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다들 차에 타고 이동을 하니 사람을 볼 수 없는데 여기는 오토바이를 타고 움직이니 사람들이 보이고, 그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고 표정이 보이니 사람 사는 거 같다고. 한 오토바이에 부모 사이에 앉은 어린 아이가 우리를 보자 웃으며 손을 흔들고 지나갔다. 우리도 같이 웃으며 손을 흔들어 줬다. 확실히 생동감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한국은 점점 고령화가 되어가며 단절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면 동남아는 아직 젊은 세대가 발전을 이뤄가며 성장하는 사회처럼 보였다. 같이 덩달아 우리도 젊어지는 기분이 들었을 정도랄까.
달랏에선 3박 4일을 보냈다. 패키지 여행이니 낮에 일정에 맞춰 여행지를 다니고 저녁엔 우리끼리 호텔에서 나와 많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물건도 사고 흥정도 해보는 야시장도 다녔다. 길거리 음식을 먹어보는 건 당연했다. 우린 반팔에 반바지. 거기 사람들은 털옷을 입은 사람들도 있을만큼 천양지차의 옷차림, 흔하지 않은 먹거리. 익숙하지 않은 냄새. 뭔가를 굽는지앞을 가로막는 자욱한 연기.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어눌한 한국말, “싸고 맛있어요”. 남편의 후배들은 베트남의 많은 도시들 중 들어보지 못한 곳이라 걱정했다지만 여기도 한국말만해도 살 수 있을 거 같다고 말하여 웃었다. 그만큼 한국인들이 여행을 많이 다닌다는 반증이겠지.
물가도 싸고 화폐단위가 우리나라랑 달라 적은 돈을 쓰면서도 돈 쓰는 재미가 있다고. 그 재미에 빠져 남편은 매일 야시장을 나갔다. 그 덕택에 평소 운동화에 욕심이 있던 남편은 운동화를 다섯 켤레나 샀다. 돌아오는 캐리어 안은 남편의 운동화와 옷으로 가득찼다. 자신의 환갑기념 여행이니 수긍해 줘야지. 이렇게 여행이 재미있는 줄 몰랐다고 입에 침튀기며 말하는 남편의 얼굴을 보며 그냥 웃었다. 남편도 나처럼 여행을 다닌다고 해도 상관없지만 적어도 새로운 경험이 나쁘지 않고 생활의 자극이 될 수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싶었다.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 남편이 재미있는 여행을 시켜줘서 고맙다 인사를 했다. 다음에도 또 가고 싶다고. 좋은 곳에 가서 좋은 경험을 하고 나니 같이 못 온 딸들이 생각나는지 여름휴가 때는 다 같이 여행을 하자고 제안을 했다. 내 남편은 옛날 시아버지처럼 가족과 동떨어져 혼자만의 세계에 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한 여행이 적어도 내 의도대로 되어가는 느낌이라 마음이 흡족했다.
남들이 내 여행의 이유를 이해 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오늘도 남편의 제안대로 가족과 함께 떠 날 여행지를 검색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