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벌의 음보 외 3편
파도소리가 밭고랑처럼 누워 있다
음보를 오르내리는 기억의 게들
황금빛 붓이 숨겨진 구멍을 스치면
바람의 리듬이 숨결을 만든다
만추의 하차
살아서 외로운 날들
죽음이 모여서야 온기가 된다
사각사각 울음소리가 쌓인다
도시 하마
민초들의 흥정하는 소리 사그라지고
피곤한 하루가 누웠다
땅거미가 칭칭 감은 고단함은
어둠의 발소리에도 꿈적하지 않는다
아무도 몰라
밭 갈던 손 눈을 뜨니
온 세상 나를 위해 있는 듯
이러다가
시바타 도요처럼 시도 쓸지도
수상소감
뷰파인더 너머 마음의 숲을 걷다
카메라를 들고 10여 년, 렌즈로 세상을 읽어왔습니다. 어느 날 예고 없이 찾아온 한쪽 시력 상실은 큰 절망이었으나 그 끝에서 운명적으로 디카시를 만났습니다. 하지만 이미지가 언어의 옷을 입고 새롭게 태어나기까지, 그 정교한 문장의 숲을 헤쳐 나가는 일은 늘 제게 높은 벽과 같았습니다. 뷰파인더 너머로 수많은 피사체를 담아왔다고 자부했으나, 정작 원고지 위에서는 단 한 줄의 진실도 새기지 못해 밤을 지새우곤 했습니다. 디카시를 쓴다는 것은 결국 제 안의 오만을 덜어내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카메라 렌즈가 미처 닿지 않는 마음의 가장 낮은 곳까지 시선을 맞추는 겸허한 작업이었습니다. 사물의 겉모습에만 머물렀던 육안肉眼의 시선이 사물의 의미를 읽어내는 심안으로, 다시 존재의 깊은 본질을 향하는 영혼의 떨림으로 나아가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 정진하겠습니다. 오랜 세월 카메라와 함께하며 배운 기다림을 이제는 시의 언어를 기다리는 인내로 바꾸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제 몫을 다하는 사물들처럼 낮은 자세로 쓰겠습니다. 처음의 순수한 마음을 잊지 않고 부지런히 걷겠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서 막막한 길목마다 길잡이가 되어주시고, 미숙한 제 문장을 인내로 다듬어주신 교수님께 머리 숙여 깊은 감사를 올립니다. 또한, 문학이라는 외롭고도 치열한 길을 함께 걸으며 서로의 빈틈을 채워준 문우님들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치열하게 쓰고 읽으며 나눈 그 온기가 제게는 가장 큰 위로이자 채찍이었습니다. 문우님들의 열정적인 뒷모습을 보며 저 역시 한 걸음 더 내디딜 용기를 얻었습니다.
부족한 제게 당선에 올려 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시와 경계》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당선은 완성의 정점이 아니라, 이제 겨우 문턱을 넘는 첫걸음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찰나의 진실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는 정직한 디카시인이 되겠습니다.
심사평
제35회 <<시와경계>> 신인우수작품
당선작 없음
제11회 디카시 신인우수작품
이유상 「갯벌의 음보」 외 3편
일상성의 순간, 깃든 삶의 무늬
문학이 인간의 경험을 언어로 형상화하여 미적 의미를 창출하는 행위라면, 시인은 반복되는 일상에서 감각이 각성되는 특별한 순간을 포착할 때 비로소 창작의 주체가 된다. 일상의 자동화를 단절하고 그 안의 미묘한 변화를 리듬화하는 순간, 예술은 시작된다. 디카시는 바로 그 일상성 속의 순간을 포착하는 문학적 형식이다. 한 편의 디카시를 통해 무명의 공간은 기억의 장소로 전환되고 삶의 공간으로 재구성된다. 이번 응모작들 가운데서는, 자신이 머문 자리를 단순한 관찰에 그치지 않고 존재의 고단함과 생의 의지를 잇는 깊은 사유의 공간으로 확장해 내는 한 신인을 만나게 되었다.
제11회 디카시 신인우수작품으로 이유상의 「갯벌의 음보」, 「만추의 하차」, 「도시 하마」, 「아무도 몰라」 4편을 선정한다. 이유상의 시선은 낮고 소외된 곳, 혹은 이미 익숙해져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일상의 사소한 것들에 머물러 있다. 자연과 일상, 기억과 존재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언어의 밀도를 유지하며, 디카시가 지닌 미학적 특성을 안정적으로 구현하고 있다는 점이 돋보인다.
등단작으로 선정된 「갯벌의 음보」는 사진 기호와 문자 기호의 융합이 빚어내는 언어의 조탁과 리듬감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파도 소리를 “밭고랑처럼” 눕히는 발상은 시각과 청각을 교차시키며, 갯벌이라는 시각적 공간을 ‘읽히는 장(場)’으로 전환한다. 거기다 “음보를 오르내리는 기억의 게들”이라는 자연의 움직임을 언어의 리듬으로 치환함으로써 파도―밭고랑―게의 움직임을 하나의 구조로 결속시킨다. 이때 리듬은 곧 갯벌이 되고, 갯벌은 다시 리듬으로 환원되는 상호 전이의 구조를 형성한다. 특히 “황금빛 붓”이 “숨겨진 구멍”을 스치는 순간은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창작의 근원적 장면을 환기한다. 마지막 “숨결”에 이르러 이미지와 언어는 하나의 호흡으로 수렴된다.
「만추의 하차」는 자동차 전면 유리를 덮은 낙엽 더미의 이미지를 통해 죽음과 고독을 ‘온기’라는 감각으로 전환한다. “죽음이 모여서야 온기가 된다”라는 공동체적 존재론을 환기하며, 흩어진 생들이 마지막에 이르러 비로소 서로를 덥힌다는 역설적 진실을 통해 깊이 있는 사유로 확장한다.
「도시 하마」는 도시 노동의 고단함을 비유의 힘으로 묵직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천막에 싸인 짐차를 “피곤한 하루가 누웠다”고 표현하거나 “땅거미가 칭칭 감은 고단함”으로 묘사함으로써 존재를 옥죄는 환경을 감각적으로 드러낸다. 현대인의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성이 인상적이다.
「아무도 몰라」는 뒤늦게 한글을 배우는 노년의 기쁨을 “눈을 뜨니 온 세상이 나를 위해 있는 듯”하다는 직설적 표현을 통해 이미지 속 화자의 표현을 받아 적는 수사를 썼다.
이유상의 디카시는 전반적으로 감각을 사유로 끌어 올리는 힘을 지니고 있다. 네 편의 작품은 각기 다른 소재를 다루고 있으나, 공통적으로 쓰러지고 묻혀 있는 것들로부터 삶의 리듬을 복원해내려는 따뜻한 인본주의적 시선을 공유한다. 신선한 비유와 절제된 언어로 우리 삶의 무늬를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가능성이 기대된다. 다만 일부 작품에서 보이는 설명적 진술을 더욱 절제하고, 이미지와 언어 사이의 긴장을 끝까지 견인해 나간다면 작품의 세계는 한층 깊어질 것이다. 등단을 축하하며, 앞으로의 성장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편집위원 일동 · 최광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