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3월 9일 주일낮 예배 설교
설교 제목:
다윗과 웃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의 지도자이니
너희와 너희 형제는 몸을 성결하게 하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올리라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니
역대상 15:12~13
읽을 본문 – 역대기상 13장~15장
설교 목적: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기고자 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은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를 일깨워준다. 다윗은 이 귀한 일을 할 때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신의 열정으로 처리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불상사가 생겼고 그 일로 다윗은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일을 진행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는다. 14장은 변화된 다윗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 후에 다윗은 비로소 하나님의 궤를 규례에 따라 자기의 성으로 옮길 수 있었다.
이 설교 본문에서 다룰 주제는 먼저 잠언 3장 5~6절이 밝히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범사에 그의 지도를 받기 위하여 인정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다윗이 왜 수레에 법궤를 싣고 옮기려고 했는가 하는 반성을 해 보자. 그것은 과거에 그런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블레셋에서 법궤가 돌아올 때 그처럼 수레에 실려 왔다. 그러나 본래 하나님의 법궤를 운반할 때는 제사장들이 메야 한다. 다윗은 그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다시 옮긴다. 그 결과 온 이스라엘은 새롭게 되었다. 그들은 비로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었다.
하지만 엘리의 두 아들은 제사장으로서 법궤를 메고 전쟁에 나갔다가 참패를 당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그 본질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진실과 자비, 그리고 신앙 이 삼요소가 중요하다. 우리 시대는 그것을 SDG라고 부르며 우리 시대의 과제로 설정했다: 지속가능한 개발 목표, 지속가능한 발전 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그것은 크게 세 영역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환경이며, 사회적 약자 포용, 그리고 민주적 의사결정이다. 그것을 ESG경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구적 목표(Global Goals)라고 부르는 이 목표는 17개의 영역으로 더욱 세분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또는 지도자를 세울 때, 그리고 우리가 삶을 살아갈 때 기준점으로 삼아야 하며 늘 기억해야 할 항목이 이런 것들이다. 그런 과제와 목표를 바라보고 공감하며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연합과 연대를 이룰 수 있으며 진영의 논리를 넘어설 수 있다. 우리가 지역주의와 학벌주의, 그리고 인종차별을 극복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뜻을 향하여 나아가는데 그것들이 장애물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으로 현 시국의 문제를 바라보면 해결의 가능성이 보일 것이다.
설교 개요
1. 하나님의 궤를 자기 성으로 옮기려는 다윗
2. 실패를 성찰하는 다윗
3. 왜 엘리의 두 아들은 법궤를 메고도 실패했는가?
4. SDG와 ESG – 지구적 목표
***
1. 하나님의 궤를 자기 성으로 옮기려는 다윗
지난 주에는 북 이스라엘의 예언자 오뎃이 동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무장한 군대의 길을 가로막은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그것은 역대기하 28장의 이야기입니다. 역대기서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정리한 책입니다. 그 시작은 아담에서부터 족보가 다윗까지 어떻게 이어져왔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다윗 왕의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게 된 것은 전임 왕이었던 사울이 죽은 다음입니다. 다윗은 오랫동안 정치적인 망명자로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에서는 유명한 야인으로 살다가 사울 왕이 죽고 나자 민심은 자연스럽게 다윗에게 향했습니다.
그렇게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추대를 받아서 왕으로 등극합니다. 다윗의 주변에는 그 나라의 장수들과 참모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전체 지파 중에서 모여든 인재들이며 용사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다윗의 나라에는 숨어 지내던 의인들과 일꾼들이 다윗의 주위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의 명단을 우리는 역대기상 11장과 12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제 나라의 왕이 되어 다윗이 가장 먼저 시도한 일은 하나님의 법궤를 자기의 성으로 옮기는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모든 장수들과 참모들을 불러 모으고 회의를 열어 자신의 뜻을 밝혔습니다. 사울 왕의 때에는 하나님의 법궤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그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았는데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나라를 운영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취지로 다윗은 장수들과 참도들에게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나무로 만든 상자 모양의 네모진 통입니다. 그 속에는 십계명 돌판과 아론의 지팡이, 그리고 만나 항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 덮개는 날개달린 천사를 뜻하는 금으로 된 그룹 둘이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기에 그곳을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곳, 시은소라고 불렀습니다. 법궤는 언약궤라는 이름도 가졌고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법궤를 모신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모셔들인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이 법궤를 자신이 살고 있던 헤브론으로 옮기겠다고 말했을 때 참모들은 물론 온 백성도 그것이 좋겠다고 찬성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스라엘 전역에서 백성들을 불러 모아 이 중요한 행사를 참관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날이 되었고 다윗은 새롭게 만든 수레에 하나님의 궤를 싣고 소가 그 수레를 끌게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소가 끄는 수레에 실려서 다윗이 사는 헤브론으로 옮겨가는 하나님의 법궤를 보았습니다. 그 출발지는 기럇여아림입니다. 그런데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역대기상에는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7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웃사와 아히오는 수레를 몰며
8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하니라
9 기돈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10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그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11 여호와께서 웃사의 몸을 찢으셨으므로 다윗이 노하여
그 곳을 베레스 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역대기상 13:7~11
사고의 내용은 타작마당 근처를 지날 때 소들이 무엇인가에 놀라서 날뛰기 시작한 것입니다. 수레를 끄는 소가 날뛰면 수레에 실린 법궤가 흔들려 수레에서 넘어져 땅에 떨어질 수도 있는 긴박한 상황입니다. 그때 웃사가 넘어지려는 하나님의 법궤를 붙잡았습니다. 아마 웃사는 현장의 지휘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법궤와 가장 가까이 있어서 법궤가 넘어지려는 사고를 바로잡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웃사는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성경에는 그 사고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호와께서 웃사의 몸을 찢으셨으므로…’ 웃사의 몸이 찢어지는 사고가 발생한 것입니다.
모든 백성을 불러 모아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를 하면서 그 앞에서 다윗과 온 백성은 힘을 다하여 뛰놀면서 노래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사고가 발생하여 피가 낭자합니다. 일순간 모든 음악이 멈추고 찬양은 비명으로 바뀝니다. 뛰면서 기뻐하던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고개를 숙입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셨나 보다! 다윗은 그런 황당한 상황에 놀라기도 하고 속이 상했을 것입니다. 모든 백성 앞에서 기쁨의 축제를 만들고자 했지만 지금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다윗은 이런 상태로 하나님의 법궤를 자기 성으로 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하들에게 그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으로 가져가라고 명령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슬픈 마음을 안고 자기 집으로 흩어졌습니다.
2. 실패를 성찰하는 다윗
다윗의 계획은 실패했습니다. 그것은 모든 참모들과 장수들, 그리고 신하들이 찬성한 계획입니다. 백성들도 다 좋게 여기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어그러졌습니다. 사고가 발생했고 하나님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그 이유를 성찰했을 것입니다. 역대기상 15장을 보면 다윗이 두번째로 법궤를 옮기는 일을 시도합니다. 그때는 첫번째 시도와는 전혀 다른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성공했습니다. 아마 다윗은 여러가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왜 그런 사고가 생겼는지, 왜 하나님은 웃사를 치셨는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다윗은 왜 수레에 법궤를 실어서 옮겼을까요? 소가 놀라지 않았으면 법궤가 넘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웃사가 법궤를 붙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웃사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의 발단은 법궤를 수레에 실은 것입니다. 사실 법궤를 옮길 때는 제사장들이 가마를 메고 가듯이 법궤를 메는 것이 원칙입니다. 광야에서도 그랬고 요단강을 건널 때도 언제든지 법궤가 옮겨질 때는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왜 법궤를 수레에 실어서 옮겼을까요? 우리는 성경에서 그 이야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법궤를 옮기다가 사고를 당한 일이 있던 시절로부터 약 100년 전, 그 법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긴 적이 있습니다. 그때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아간 후로부터 그들의 동네에 재앙이 임하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여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냅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 퍼진 질병과 법궤와 정말 관련이 있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블레셋 사람들은 새끼를 낳아 젖을 먹이고 있는 암소에게 수레를 끌게 하고 새끼 송아지는 마을에 묶어 두었습니다. 만약에 암소가 송아지를 떠나지 않으려고 수레를 끌고 이스라엘 진영으로 가지 않는다면 그 동네에 퍼진 질병은 우연히 일어난 일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암소는 수레를 끌면서 이스라엘 진영으로 가기를 시작했습니다. 뒤에서는 송아지가 어미를 보고 울고 어미는 새끼 송아지가 안타까워 울부짖으면서 벧세메스로 올라갑니다.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사무엘상 6:12
그렇게 하나님의 궤가 이스라엘로 돌아올 때 수레에 실려서 왔던 것입니다. 그것은 약 100년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본래 하나님의 법궤는 제사장들이 메야 했습니다. 그것이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규례였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 모든 백성들을 모아놓고 큰 행사를 열었는데 그 방식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100년 전에 있었던 전통을 따랐습니다. 그 전통은 하나님의 율법에 기록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인 블레셋 사람들이 고안한 방식이었습니다. 다윗과 그 주변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웃사가 찢겨 죽는 대 참사가 발생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 참혹한 일을 당한 후로 변하여 새 사람이 됩니다. 그는 인간의 계획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모든 참모들과 회의를 한 일일지라도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심지어 모든 백성들이 찬성하며 응원해도 잘못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가장 먼저 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바로 뒷장인 역대기상 14장에서 소개됩니다.
다윗은 블레셋 군대의 침공을 받았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께 여쭙니다. 자신이 블레셋 군대를 맞아 싸우러 올라갈지 말지를 여쭙는 것입니다. 사실 외적의 침공을 받으면 으레 방어를 위해서 전장에 나가는 것이 지도자가 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지금 하나님께 여쭙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다윗은 나가서 크게 승리합니다. ‘다윗이 거기서 그들을 치고 다윗이 이르되 하나님이 물을 쪼갬 같이 내 손으로 내 대적을 흩으셨다 하므로 그 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 부르니라’(역대기상 14:12).
다윗은 두 번째로 블레셋 군대의 침공을 받습니다. 이번에도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로 여쭙니다. 역대기상은 그 대목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다윗이 또 하나님께 묻자온대 하나님이 이르시되
마주 올라가지 말고 그들 뒤로 돌아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그들을 기습하되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나가서 싸우라 너보다 하나님이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리라 하신지라
역대기상 14:14~15
이번에는 정면승부를 하지 말고 후방으로 돌아가서 기습하라는 작전입니다. 그런데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면 전투를 개시하라고 구체적인 지시가 내립니다.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난다면 그것은 공중에서 누군가가 걷는다는 말인데, 그들은 아마 하늘의 군대일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싸우시는 전투에서 다윗은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처럼 블레셋 군대가 연달아 두 번의 침공에서 철저하게 패배하고 나자 주변의 나라들은 모두 다윗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다윗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범사에 인정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3. 왜 엘리의 두 아들은 법궤를 메고도 실패했는가?
다윗은 재임 초에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는 사업을 하다가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을 바르게 신뢰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법궤를 옮길 때는 제사장들에게 법궤를 메게 하고 자신과 모든 찬양대도 거룩하게 단장하고 세마포를 입고서 하나님 앞에 일꾼으로 서 있음을 고백하는 자세로 법궤를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은 그 모습을 보고서 이스라엘의 통치자는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을 다윗과 그 지도자들이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섬기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처럼 지도자의 회개는 온 백성을 새롭게 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제사장이 법궤를 메고 옮기면 문제가 없는 것일까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왜냐하면 엘리의 두 아들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승리를 위하여 제사장으로서 자신들이 법궤를 메고 전쟁에 나갔다가 크게 패하고 법궤도 블레셋 군대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옮길 때 수레를 사용한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그러면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가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방식에 매이시는 분이 아니라 그 중심을 보시는 분임을 깨닫습니다.
분명히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법궤를 자기 성으로 옮기려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수레도 새롭게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태도를 보면,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는 자기의 생각이 앞섰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여쭈어 보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지 않은 열정이나 회의는 때때로 일을 그르친다는 점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제사장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중심이 잘못되어 있다면 법궤를 메고 간다 하더라도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한다는 것도 명확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장 먼저 기억할 점은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이나 전통에 갇히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공식에 매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공식에 매어 두려는 태도는 마치 우상숭배와 같습니다. 우리는 윤석열 씨가 대통령 후보로 나서서 대선토론을 할 때 손바닥에 왕자를 한자로 써서 출연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아무렇지 않은 사소한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무속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무속이나 점치는 행동은 하나님을 우롱하는 행동입니다.
특별히 다윗 같은 사람도 100년 전에 블레셋 사람들이 수레에 법궤를 싣고 왔던 일을 그대로 따라서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전통은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있었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통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우리 개신교회는 전통에 매인 신앙의 관습을 성경말씀으로 반성하고 새롭게 하자는 열정과 결단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1517년으로 대표되는 종교개혁의 선언이 그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성경에 근거하여 기존의 전통에서 하나님의 뜻과 양심에 어긋나는 것을 바로잡고자 95개 조항을 적어 게시하고 인쇄하여 유포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이 정신이 그토록 소중하기에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라는 표어를 내걸고 늘 기억했습니다. 이 말은 종교개혁은 1517년 어간에 시작되어 유럽을 휩쓸었습니다만, 그 이후로도 모든 세대는 자기 시대에서 전통이 된 것을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성경에 비추어서 바로잡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이런 교훈을 망각할 때 교회는 세상을 바로잡기보다는 세상에 뒤쳐져서 세상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나라 교회는 성경에서 떠난 전통을 붙들고 있는지 아니면 성경의 정신에 근거하여 시대적 상황에 바르게 적용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악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수천년 전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사상과 이념을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바르게 경배하는 사람들은 사상과 이념, 인종과 지역, 성별과 신분을 초월하여 하나 될 수 있고 연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백년 전에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수레에 싣고서 이스라엘로 보냈던 것을 그대로 답습한 다윗에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그는 자신의 충실한 부하인 웃사를 잃었습니다. 웃사는 넘어지려는 법궤를 바로 세우려다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웃사의 몸은 찢겼습니다. 하나님의 규례를 따르지 않은 사업이나 프로젝트는 반드시 베레스 웃사로 끝나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을 동원한다고 해도 어떤 지혜로운 참모가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을 외면한 프로젝트는 충실한 사람들을 찢어지게 하는 참사를 발생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했을 때 그 행동은 이미 수많은 군인들을 죄인으로 몰아세우고 그들의 평생 경력을 찢어버릴 것으로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들의 가정도 찢어지게 했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군인으로서 자부심도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다 찢어지게 했습니다. 작년 12월 3일에 내린 비상계엄령은 하나님의 법궤를 수레에 싣고 옮기려 한 다윗의 프로젝트와 같은 일입니다.
그런데 비상계엄령 선포보다 더 무서운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보다 이념을 앞세우는 일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이념을 앞세우면 어떤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서 학살하고도 그것으로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우기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여순사건과 제주 4.3사건을 통해서 극단적인 이념 추종자들이 무고한 사람을 얼마나 많이 죽일 수 있는지 보았습니다.
어떤 이념이 하나님의 교회를 찢어버리게 한다면 그것은 베레스 웃사를 낳게 한 수레와 같습니다. 웃사의 몸이 찢어지게 된 것은 그릇된 방법으로 나라의 프로젝트를 실행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극단적인 이념 추종자들의 극단적인 행동으로 무엇이 찢어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찢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지금 광화문과 여의도로 찢어졌고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면서 폭력적인 언행을 표출하는 사람들과 건전한 교회로 찢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이념이 하나님보다 높을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하나님보다 높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떤 이념이나 사람을 위해서 지지하고 앞세우면서 교회를 찢어버린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일을 하기 위하여 전국에서 백성들을 소집한 다윗의 과오를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전역에서 모인 그 자리에서 백성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기 위해서 춤추며 뛰놀고 노래하면서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웃사의 몸이 찢어졌습니다. 바로 이와 동일한 일이 지금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여의도 광장과 광화문 광장을 베레스 웃사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4. SDG와 ESG – 지구적 목표
우리는 역대기상 15장에서 다윗이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는 프로젝트를 실행하는 장면을 봅니다. 다윗은 전에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달았으며 그 잘못을 바로잡고 다시 하나님의 법궤를 옮겼습니다. 우선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수레에 싣고 옮기는 것이 잘못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이 이르되 레위 사람 외에는 하나님의 궤를 멜 수 없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택하사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영원히 그를 섬기게 하셨음이라 하고(2절)
12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의 지도자이니 너희와 너희 형제는 몸을 성결하게 하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올리라
13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니
14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올라가려 하여 몸을 성결하게 하고
15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명령한 대로 레위 자손이 채에 하나님의 궤를 꿰어 어깨에 메니라
역대기상 15:12~15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과거의 전통을 단호하게 바로잡았습니다. 사람들이 다윗에게 말했을 것입니다. “이 법궤는 본래 100년 전에 수레에 실려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바로 그런 행동 때문에 웃사가 죽었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아마 다윗은 성경을 읽었을 것이고, 제사장들에게 자문을 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법궤를 제사장이 메게 하고, 그들이 이 일을 맡기 위해서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해야 한다고 주문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뜻이 다윗과 온 백성 위에 높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베레스 웃사라는 비극과 참사는 교정되고 바로잡힐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국론분열은 어떻게 해결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을 기독교인으로 만든다면 해결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광화문과 여의도에 모인 두 기독교인들의 무리를 보십시요. 그들은 서로를 저주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진영이나 이념이나 사람에게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킨다는 말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가장 높이 여기고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진영에 서서 이 문제를 바라보면 끝없는 다툼과 저주, 그리고 보복이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모든 생명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는 말씀으로 복을 선언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과 생태계가 건강하고 충만하게 살아가라는 축복입니다. 그것을 오늘날의 언어로 말하면 지속가능한 발전을 하는 것입니다. 경제는 발전했지만 환경이 망가지면 인류는 지속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민주화는 되었지만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고 약자들이 외면당한다면 인류는 지속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터넷은 고도로 발전하지만 몇몇 사람들의 뜻에 의해서 국정이나 여론이 조작된다면 인류는 파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계의 지도자들은 이미 2016년부터 2030년까지 지속가능한 발전 목표를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지난 주에 말씀드린 세 가지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입니다. 그것을 저는 ESG경영이라는 말로 소개해 드렸습니다. ESG는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의 약자로서 환경을 보존하고 사회적 약자를 포용하며, 민주적 의사결정 방식을 강조하는 경영 방식입니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지도자는 바로 이런 목표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그 구체적인 방법과 정책을 제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국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도자나 국민이 우리 시대에 인류가 지향해야 할 지구적 목표(Global Goals)인 지속가능한 발전 목표에 뜻을 모으는 대신에 어떤 이념이나 사람이나 진영을 절대화한다면 우리는 앞으로 나가는 대신에 서로를 찢어지게 하는 위험하고 더러운 집회로 모인 이스라엘 백성과 다윗처럼 계속적으로 웃사의 비극을 목격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정치인들이 민생을 먼저 챙기겠다는 입에 발린 구호를 더 이상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이념과 진영을 초월하여 우리 공동체가 함께 잘 살고 우리 후손에게 살기 좋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서 무엇이 선한 목표인지를 생각하고 그것을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다른 이념이나 진영에 속한 사람을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지속가능한 세상을 이루려면 민주당이나 국민의힘당 한편으로만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주요한 두 정당을 포함하여 더 많은 군소정당이 필요하며, 더 다양한 생각을 가진 전 국민의 연대와 협력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다윗이 회개하여 나라를 바르게 세웠고 온 이스라엘이 하나가 되게 했다면, 오늘 우리가 하나로 연합하고 아름다운 대한민국을 세우는 비결은 이념과 진영논리에 사로잡힌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서로 연대하고 축복하는 일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지구적 목표를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진영의 사람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붙들려 있습니까? 세계의 지도자들은 지속가능한 발전 목표를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나누었고 더욱 세분화하여 17개의 과제를 제시합니다. 우리는 이 과제들을 먼저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연대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비로소 베레스 웃사의 비극을 막고 번영하는 나라를 향한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17개의 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과제들을 더 깊이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겠습니다:
UN-SDGs(지속가능발전목표)
1. 빈곤퇴치 - 모든 곳에서 모든 형태의 빈곤 종식
2. 기아종식 - 기아 종식, 식량 안보와 개선된 영양상태의 달성, 지속 가능한 농업 강화
3. 건강과 웰빙 - 모든 연령층을 위한 건강한 삶 보장과 복지 증진
4. 양질의 교육 - 모두를 위한 포용적이고 공평한 양질의 교육 보장 및 평생학습 기회 증진
5. 성평등 - 성평등 달성과 모든 여성 및 여아의 권익신장
6. 물과 위생 - 모두를 위한 물과 위생의 이용가능성과 지속가능한 관리 보장
7. 깨끗한 에너지 - 적정한 가격에 신뢰할 수 있고 지속가능한 현대적인 에너지에 대한 접근 보장
8. 양질의 일자리와 경제성장 - 포용적이고 지속가능한 경제성장, 완전하고 생산적인 고용과 모두를 위한 양질의 일자리 증진
9. 산업, 혁신과 사회기반시설 - 회복력 있는 사회기반시설 구축, 포용적이고 지속가능한 산업화 증진과 혁신 도모
10. 불평등 완화 - 국내 및 국가 간 불평등 감소
11. 지속가능한 도시와 공동체 - 포용적이고 안전하며 회복력 있고 지속가능한 도시와 주거지 조성
12. 책임감있는 소비와 생산 - 지속가능한 소비와 생산 양식의 보장
13. 기후변화 대응 - 기후변화와 그로 인한 영향에 맞서기 위한 긴급 대응
14. 해양 생태계 -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대양, 바다, 해양자원의 보전과 지속가능한 이용
15. 육상 생태계 - 육상생태계의 지속가능한 보호ㆍ복원ㆍ증진, 숲의 지속가능한 관리, 사막화 방지, 토지황폐화의 중지와 회복, 생물다양성 손실 중단
16. 평화, 정의와 제도 -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평화롭고 포용적인 사회 증진, 모두에게 정의를 보장, 모든 수준에서 효과적이며 책임감 있고 포용적인 제도 구축
17. SDGs를 위한 파트너십 - 이행수단 강화와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글로벌 파트너십의 활성화
교우 여러분, 저는 지난 주에 ‘좋은 것을 생각하고 좋게 만들어가자!’고 설교했습니다. 그 좋은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과제들입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정쟁이나 진영갈등에 휩쓸리지 말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좋은 목표를 위해 기도하고 노력하며 협력합시다. 우리가 이 일을 진심으로 해 나간다면 우리는 이 시대를 밝히는 작은 등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