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장사는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에 있는 삼국시대에 창건된 사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당시에는 죽장사(竹長寺)라고 하였으며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폐사된 채 있던 것을 1954년 민가형의 법당으로 중창하여 이름을 법륜사라고 하였다. 이후 각황사로 잠시 바뀐 뒤 신라 때 사찰 명인 죽장사로 변경되었다.
죽장사에는 국보급인 죽장리 5층 석탑이 있다
높이 10m. 석탑은 원래의 위치에 원래의 모습으로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5층석탑으로 알려져 있다.
기단부(基壇部) 위에 탑신부(塔身部)와 상륜부(相輪部)를 올린 신라 석탑의 모습을 따르고 있는데, 바닥돌에서 상륜부까지 100여 개가 넘는 많은 돌로 결구(結構)한 것이 특이하다.
받침 부분인 기단부는 18장의 큰 돌로 바닥돌을 놓고, 그 위에 2층의 받침돌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받침돌의 면석은 14장의 널돌로 구성하였고, 그 위의 덮개돌은 18장의 돌로 올렸는데, 덮개돌 윗면의 네 귀퉁이에 있는 합각(合閣)은 지붕돌 윗면의 합각처럼 뚜렷하게 표현되었다.
탑신부는 각 층이 같은 방법으로 구성되었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돌의 수는 줄어들고 있다. 1층 몸돌은 6장의 돌로 조립되었는데, 남쪽면에는 감실(龕室)이 있다. 현재 그 안은 비었지만, 원래 불상을 봉안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감실 입구에는 각지고 둥근 장식을 테두리에 둘렀으며, 안쪽의 위아래와 좌우에는 문을 달았던 작고 둥근 구멍이 남아 있다.
이 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인 2층 받침돌을 갖추고 있지만, 각층의 몸돌 양쪽에는 모서리 기둥이 없어 이형(異型)적인 모습도 보인다. 또한 지붕돌의 낙수면이 층단을 이루는 모습은 일반적인 석탑이 아닌 전탑(塼塔)에서 흔히 볼 수 있으므로, 이 석탑은 모전석탑(模塼石塔)의 유형에 속한다고 하겠다.
죽장사는 1991년부터 1994년까지 명효(明曉)가 대웅전과 삼성각·요사채를 새로 짓고 크게 중창하였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삼성각·요사채 3동이 있다. 유물로는 통일신라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1968년 국보로 지정된 구미 죽장리 오층석탑이 있다.
죽장사에서 가까운 곳에 단계 하위지 묘가 있다
단종을 위해 사절(死節)한 사육신 중 한 명이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천장(天章)·중장(仲章), 호는 단계(丹溪)·적촌(赤村). 선산 출신. 하윤(河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문하평리(門下評理)하지백(河之伯)이고, 아버지는 군수 하담(河澹)이며, 어머니는 유면(兪勉)의 딸이다.
계유정란 후 세조에 의해 사육신의 한사람으로 처형된 후 그 사체는 찾지 못하고 이곳에 의관들을 대신 묻고 단계 하위지묘로 지켜지고 있다
하위지(河緯地)는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성삼문(成三問) 등과 더불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실패하여 반역죄로 처단되었는데, 숙종 때 민진후(閔鎭厚)가 하위지의 내력을 알려서 복관(復官)되었고, 영조 때는 이조판서로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그후 그의 충의를 추모하기 위해 조정에서 그의 고향인 선산에 유허비를 세우고 이곳에 있는 그의 묘를 찾아내 그후 고향 유생들이 모시고 있는 것 같다.
남효온(南孝溫)은 『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 六臣傳>에서 하위지의 인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그는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했으며, 말이 적어 하는 말은 버릴 것이 없었다. 그리고 공손하고 예절이 밝아 대궐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비가 와서 길바닥에 비록 물이 고였더라도 그 질펀한 길을 피하기 위해 금지된 길로 다니지 않았다. 또한, 세종이 양성한 인재가 문종 때에 이르러 한창 성했는데, 그 당시의 인물을 논할 때는 그를 높여 우두머리로 삼게 된다.”고 평하였다.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선산의 월암서원(月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