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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원본(原理原本) - 제1권
[10] 하나와 영(零)은 경계(境界)를 정하지 못함
숫자상으로는 영(零)과 하나① 와는 다른 위치를 갖고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동일점(同一点)을 이탈하지 못하는 공통(共通) 노선상(路線上)의 존재다. 그러므로 실재상으로는 1=영이라고 할 수 있는 정점(程点)의 존재들이다.
1 = 영
1 = 절대치(絶大値) 수(數)로 기본수(基本數)며 유(有)의 기본존재다.
영 = 무한무(無限無)의 절대치수(絶大値數)이면서 유(有)의 무한 소수(小數)의 중간존재(中間存在)다.
그러므로 문제 되는 바는 나 한 자체가 중대 문제인데 나는 지금 어디서부터 시작하여 잡은 존재라고 하고 싶은가? 그것은 각자의 자유에 맡기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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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①에서 시작하였으면 그 하나가 갖고 있는 존재의 실제 가치 값을 전부 인식해야만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선결문제(先決問題)다.
즉 무한대(無限大)와 무한소(無限小)의 문제보다도 그 중간 자체인 하나의 존재 규정에 큰 난관봉착(難關逢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하나가 되는 자아(自我)를 알려면 무한대(無限大)에 대한 위치부터 무한소(無限小)의 위치가 갖고 있는 중간존재(中間存在)에 대한 전부를 알아야만 자기에 대한 확실한 규정을 할 수 있겠는데, 그렇다면 그 존재 전부를 알 수 있어야만 그보다 더 큰 존재에 대한 근거를 해결할 자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기 있다고 하여 놓고 무(無)한 사실(事実)이니 무(無)하다느니 하는 것은 즉 숫자 세계에 있어서 영(零)이라 하여 절대무(絶大無)의 존재를 결정한 듯이 하고 있는 바와 동일한 생각으로 되어 있는 바와 한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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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 할진대는 무한소(無限小)에까지 도달한 후에 그 세계가 자기의 인정 범위 내에 들어서게 될 때는 무(無)에 대한 결론은 가(可)할 것인데 그곳조차 생각도 못하고 그저 무(無)라고 하면 자기가 무(無)라고 하는 바가 그냥 무(無)로서 만사(萬事)를 해결하여 주는 중심 존재로 되는가? 그것은 지극한 어리석은 행동이다.
유(有)라 할진대 그 유(有)의 존재 가치는 절대유(絶対有)까지 계속 존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유(有)라고 하는 자기와 무(無)의 중심 입장에 있는 자기(自己)에 대하여서 알려고 할 때 제일 큰 문제는 중심점(中心点)이다. 곧 유(有)도 내가 있어야 하며 무(無)도 내가 있어야 한다.
이 문제의 결정적 존재는 바로 자기(自己)이다. 이 자기가 지금 해결의 수수께끼가 되는 근본문제다. 그러므로 먼저 천주(天宙)의 기본단위라고도 할 수 있는 자기를 해득(解得)하여라. 그렇게 다른 존재가 문제로 되는 것이다.
자기를 명백하게 해결하면 그 이상(以上)에 대한 연관적 사실에 대하여서는 자연히 인식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자기 하나 알고 보면 하나님도 그 존재에 대하여 유무(有無)에 대한 문제는 크게 논(論)할 문제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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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알아야 한다는 하나님에 대한 근거의 여하(如何)는 먼저 피조체(被造体) 자기의 근본에 대한 실감성(實感性)을 알고 나아가면서 탐구(探求)하면 제1존재(第一存在)의 확실성(確實性)은 자연적 의식존재(意識存在)로 계시는 것이다. 그것의 명백한 체험은 실행하여 찾아보면 그 자체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절대유(絶大有)에서 절대무(絶大無)의 기본존재(基本存在)이므로 어느 면에서도 단위적(單位的) 노선(路線)에서만 서서 좌우(左右)를 찾으면 그 존재는 자연적으로 체감(体感)된다. 그 체감으로써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확실한 근본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한대(無限大)에서 무한소(無限小)로 통한 공통노정(共通路征)으로 흐르는 무한대이면서 무한소의 힘을 보아 이 힘이 공식(公式)과 같은 법리(法理)를 통하여 연결되고 있으므로 그 어떤 중간 입장에서라도 자기만이 그 힘과 감응(感應)될 수 있는 단위체(單位体)로 평형선상(平衡線上)에 서게 되면 무한대에서 무한소로 흐르는 그 감지(感智)를 통하여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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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하나님은 무한대(無限大)에서부터 무한소(無限小)에까지 연관(連關)하는 중심동력체(中心動力体)이다. 그러면서 영원(永遠)을 표준 삼고 시작하여 나간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중간 존재다. 이 중심존재(中心存在)가 완성하여야만 천주적(天宙的) 공리법칙(公理法則)은 원만화(円滿化)를 가져오게 된다.
즉 하나님은 무형으로 계셔서 유형으로 작용하고 사람은 유형에서 무형으로 수수작용(授受作用) 원활화(円滑化)를 취해야만 원만한 존재가 되는 것이 천리(天理)이며 창조원리(創造原理)다.
이 그림을 보면 사람은 단위적(單位的) 위치에 거주한다. 사람을 통해서만 우주(宇宙)와 천주이상(天宙理想)이 완성하게끔 지으셨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몸으로 지은 특유(特有)의 존재로 지었기 때문이다. 유(有)㊉ 무(無)㊀라고 표시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㊉ ㊀의 중화체(中和体)로 되어 있다. ㊀는 영(靈)으로 ㊉는 육체(肉体)로서 합체(合体)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灵)과 육신(肉身)이 합하여서만 완전(完全)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靈)을 성장시켜서 영인체(灵人体)를 완전히 조성하면 무(無)의 세계까지 통(通)할 수 있는 중간(中間) 존재체(存在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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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본래 사람은 영인체(灵人体)를 완성하여야 한다. 그러면 영인체라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가 하면 영체(灵体), 생명체(生命体), 생령체(生灵体)로 되어 있다.
그러면 육신(肉身)에는 육체(肉体)와 육심(肉心)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인체(靈人体)에는 생심(生心)을 중심하고 영체(灵体)를 더불어 번식할 수 있는 기본 터를 이루며 장성(長成)하여서 생명체(生命体)로 나아가 그 생명체가 돼야만 하늘에 한 장성체(長成体)를 가진 자체(自体)로서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생명체(生命体)에다 생령체(生灵体)를 이루어야 본창조이상(本創造理想) 영인체(靈人体)로 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타락(墮落)되고 보니 인간들은 영체(灵体)의 근본(根本)이 되는 생심(生心)까지 보유하는 존재가 적을 만큼 타락되었다.
이 인간의 영체(灵体)를 구성시켜서 장성(長成)하여 생명체(生命体)까지를 목적하고 역사(役事)하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고자 하는 것이 믿음과 신앙생활을 배양(培養)하는 목적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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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예수 오셔서 생령체(生灵体)까지 완성하고자 하였으나 전 인간은 주인공부터 시작하여 모두가 불신하고 보니 미완성(未完成)하게 되어 생명체급生(命体級)까지 전 인간을 장성시켜야 할 책임적 사명이 부여된 환경이다.
그 후 생령체는 완성체(完成体)인데 재림시(再臨時)부터 시작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으로 남아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타락하지 아니하였으면 육신의 완성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하고 생심(生心)은 그 본노정(本路程)으로 영인체 구성을 동일시(同一時)에 병합(倂合)하여 완성으로 나아갈 인간들이 타락으로 인하여 전인간(全人間)에게(하늘의 사람도)는 구분하여 장성시켜서 완성의 모양으로 되었다.
제1차 예수는 장성 생명체(生命体)까지 제2차 재림하여서 완성체(完成体) 생령체(生灵体)를 주입(注入)시켜서 이상적 영인체를 조성하고자 함이 근본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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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시작을 할 터를 닦고자 하니 구약역사(旧約役事)가 있고 신약(新約)은 그 터 위에 장성하여 전세계에 터를 지어 그 위에다 다시금 완성의 이상(理想) 생령체(生灵体)를 땅과 함께 하늘까지 연식(聯殖)시켜 이상천주(理想天宙) 완성을 목적으로 되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구약시기(旧約時期)부터 절대로 뜻을 중심하고 인간들이 시봉(侍奉)하였으면 직접 뜻을 중심하고 터를 세우면서 이상적으로 전개하고자 함이었으나 불신(不信)으로 인하여 그 목적이 달성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요구와 구원(救援) 요구가 남아지는 뜻으로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摂理)는 사람을 찾아서 이상적 영인체(靈人体)를 회귀하여 본래의 창조이상을 성사하고자 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절대유(絶大有)의 존재며 절대무(絶大無)의 존재의 주인공이 즉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느 방향으로든지 극(極)을 찾아 가면 갈수록 하나님에 대한 필요성을 절절하게 감각되게 지은 것이 현재 천주의 만상(萬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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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사람의 전부가 천주의 공로(公路)를 정당하게 설 수 있는 자아(自我)를 찾으면 전체에 대한 중심문제까지 해결을 가져오는 사실은 창조하신 만상을 공동한 중심에 속하여 있기에 어느 곳으로 통하든지 그 중심은 결국의 종점을 찾으면 동일한 한 근본원리를 통하여서 작용이 시작되어 있기에 자아 자신의 근본원리로 설 수 있는 기본을 찾으면 전부(全部)의 중심인 하나님에 대한 문제는 자연적으로 알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근본존재 하심은 실감을 자각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가 없다고 하면 자기자체로써 자기를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체에 대하여 유(有)라하면 자연적 유(有)하신 그 근본존재의 유(有)를 예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자기가 유(有)하면 자기가 유하기 전에 부모의 유를 찾아지며 부모가 유하면 선조의 수십, 수백 대(數百代)에 계속하여서 지금 자아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이렇듯이 유(有)에서만 유(有)가 시작한다.
무(無)에서 무(無)이지 유(有)할 수 없는 것이 천리(天理)다. 현대의 과학도 이 천리를 떠나서는 시작과 발전을 못 한다. 그리고 자아(自我) 이후에는 유(有)할 수 있는 후손(後孫)에 대한 유(有)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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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지금 보이지 않는 후손을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말한다면 그 자체는 원리에 합격체로 완성격의 존재가 못됨을 말하는 것이지 그 근본 원리적으로 보면 후손도 있게끔 유(有)에서부터 모든 만상(萬相)이 지어졌기 때문에 후손도 필요적 한 공리노정(公理路程)으로 유(有)함을 알 것이다.
보지 못하였다고 그 있어야 할 그 존재들을 부정하면 그 자체의 부정(否定)함이 근본원리적 해결을 주는 부정이 되는가? 그렇지 않은 것은 누구나 다 잘 안다.
그런데 무(無)라고 부정(否定)한다면 그 존재는 천리근본(天理根本)을 반역하는 행동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천주만물(天宙萬物)은 전부가 원리적(原理的) 유(有)에서 시작함으로 유(有)라고 하는 기본점(基本点)에서만 만원리(萬原理)와 이치(理致)의 부합(符合)을 볼 수 있으나 무(無)라고 하고 나면 그 근본(根本)을 유(有)로 전개하기 곤란한 원리적 결론으로 된다.
그러므로 지금 자아(自我)라는 자체는 유무(有無)의 한 중심의 존재면서 그의 작용적(作用的) 목적으로 유(有)를 전적으로 상대물(相対物)로 하기 위한 행동으로 생활하는 것은 잘 체득(体得)하는 바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유(有)라는 원리적 존재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시정(是正)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무(無)라고 하는 존재는 사실체(事実体) 유(有)의 세계에서는 자아(自我)로부터 표시(表示)가 되어 있다. 그 자아가 즉 유무(有無)의 근거점(根據点)으로 하고야 유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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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나는 유(有)에 속하는 동시에 무(無)에도 찾아가는 중간존재(中間存在)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중간존재로써 되어 있는 나에게 유무(有無)의 근본(根本)되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의심하는 것은 즉 자기에 대하여 의심하는 것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자기가 유무(有無)의 근본의 위치이니 즉 창조적 원리로 보아 하나님과 직접 동일점선(同一点線)에 유(有)하는 존재임을 체득(体得)하여야 한다.
자아(自我)는 유무(有無)의 중화체(中和体)다. 그러므로 사람을 중심하고 계실 신성(神性)은 나와 중화성(中和性)적 관계로써 유(有)에서 무(無)의 세계의 전개(展開) 노정(路程)을 통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무(無)하다고 하는 곳에 처(處)하여 있어서 인식(認識)한다면 나에게 유(有)에 대한 인식은 물론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식할 수 있는 환경과 그 위치를 가지고 있다는 그곳 스스로가 벌써 인식시켜 주는 유(有)에서부터만 시작되는 것은 지금, 누구나 잘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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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지금 과학세계에 있어서 모든 원리와 공식을 이용하여 응용(應用) 유(有)에로 전개하게 하는 것도 즉 근본 유가 있는 원리(原理) 외(外) 존재함이 있다는 원칙 위에서만 시작하여 그 목적달성(目的達成)으로 진급(進級)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과학이 발달할 수 있는 것도 전(前) 유적(有的) 그 원리적 존재 유(有)가 기본되어 그 기본상(基本上)에서만 그 목적 표시적 발달된 존재를 볼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무(無)에서 유(有)라는 원리(原理)는 본래부터 우리가 세울 수 없다. 무(無)면 무(無)지 유(有)가 되겠는가? 그러니 유물론적(唯物論的) 원리(原理)도 자연(自然) 그 말로(末路)는 미해결(未解決)로 되는 것이 원리다. 무(無)가 되는 까닭이다.
즉 시작이 무(無)니 끝도 무(無)로 결과한다. 될 수 없는 사실이다. 무(無)라고 하는 존재를 세우기 위하여 전유(前有) 존재를 세워 놓고부터인데 이 선유존재(先有存在)는 즉 주관적(主觀的)으로 보면 자기(自己), 혹(或) 객관적(客觀的)으로 본다면 다른 사물이든지, 이것이 벌써 선유(先有)한 사실을 결정지어 놓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의 근본은 유(有)에서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근본유(根本有)라는 존재로부터며 만물의 유(有)도 역시 동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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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용의 시작은 유(有)의 작용으로부터만 시작된다. 인식(認識)할 수 있는 모든 관계(關係) 감각성(感覺性)이라고 존재하여 나에게 미치고 있는 그 작용은 근본적 유(有)의 작용이 연장화(延長化)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그런고로 무(無)라는 점유위치(占有位置)는 시각(視覺) 또는 감각성(感覺性) 외의 존재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아인 유(有)가 감각하는 그 감각적 작용은 즉 유(有)에서부터 파급이 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가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권외(圈外)에 유(有)에 존재하는 그 자체와 즉, 하나님과 우리는 연관적(聯關的) 한 위(位)에 속하여 있는 양심의 기존유(旣存有)의 존재로부터 우리에게 작용되는 감각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 하나는 유무(有無)의 중화물(中和物)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즉 무아(無我)라는 위치를 찾아 들어가면 중화체(中和体)에서 음양분립(陰陽分立)과 같은 작용을 일으키는 것과 한가지로 무인식(無認識)으로 내려가면 상대적(相対的) 절대무(絶大無)에 비례되는 절대유(絶対有)의 힘과 작용의 상봉(相逢)을 본다고 하는 것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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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무아(無我)에서 찾아 들어가면(즉 감각무·感覺無와 인식무·認識無에로) 서로 떨어진 상거적(相距的) 무(無)의 위치에 대비(対比)되는 유(有)의 감각과 인식의 경지(境地)는 나타난다. 이것은 마음을 갈고 닦는 수양탐(修養探)중에서도 많이 체험(體驗)하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고요하다는 그곳을 찾으면 본심(本心)의 작용무대(作用舞臺)를 딴 무경(無境)으로 존재하는 절대유(絶大有)의 감각을 체험하여 새로운 신기(神奇)한 인식권(認識權)을 찾는 것이 자연적으로 표시되는 듯이 되나 그 원리(原理)는 나 자신의 이상각성(理想覺性)을 취할 수 있으며 그 만족감(滿足感)을 취할 수 있는 근본이상(根本理想)이 유(有)할 수 있는 근본(根本)에 속(属)하여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새로운 쾌감(快感)이 나와 기쁨의 표시로 전개시킨 것밖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을 볼 때 우리는 유(有)에 처하여 있으니 유(有)에 대한 감성(感性)이 각면(各面)에 기록되고 동화되어 있는 것과 같은 이유(理由)로 되어 있기에 그 유(有)로부터 전하여 주는 감력(感力)에 대하여 진동감(振動感)을 느낄 수 없고, 또 외력감력(外力感力)에 대하여 소모적(消耗的) 반작용(反作用)을 함으로써 외력(外力) 유(有)의 감력(感力)에 대하여 예민하게 작용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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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 수양(修養)이나 기도(祈禱)가 이곳에 미치게 되는 외력감력(外力感力)에 대비하여 진동할 수 있는 대응(対應)의 존재(存在)의 위치를 취하고자 하는 바가 원리로 되어 있다.
그러기에 무(無)의 경지인 고요한 곳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누구나 하나님이 계신다면 무아(無我)의 경지에 찾아 들어가면 초자연감력(超自然感力) 절대유(絶大有)의 경지가 있다는 것을 체증(体証)한다.
그것은 즉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아는 동시에 그 근본 유(有)의 작용과 합치(合致)한 점(点)에 내가 서게 되면 내 자체에는 초자연작용(超自然作用)의 감력(感力)과 실감(實感)이 내 현 자아(自我)와 연결(聯結)됨을 알 수 있다.
그런고로 불교(佛敎)의 무아경(無我境)이라고 하여 찾은 일리(一理)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세계(科學世界)의 공리(公理)나 공식(公式) 같은 것도 간접적(間接的)으로 그 자체(自体)를 접(接)하게 하는 것과 같은 바로 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된 것은 타락성(墮落性) 받은 인간이므로 이것이 요구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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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양심(良心)과 생심(生心)의 기본은 하나님이니 하나님이 만물(萬物)의 절대단위(絶大單位)의 근본(根本)이면서, 원리(原理)의 중심(中心)이며, 근본(根本)이며 모든 만상(萬相)의 단위체(單位体) 중심(中心)이다.
이 중심점(中心点)인 하나님과 직접 통(通)하게 되면 만물이 절대단위(絶大單位) 내에서 지배받고 존재함으로 생심(生心)의 장성체(長成体)인 영체(灵体)를 가지면 그 단위를 직접 소유한 것과 같은 것의 그 단위는 절대단위(絶大單位) 하나님의 단위의 한 부분적(部分的) 기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만물의 모든 근본을 알 수 있는 곳으로 전개시킬 수 있는 존재니 즉 사람이다. 그러므로 도통(道通)한다고 하는 것이 이러한 근본 사람의 창조본경(創造本境)을 체득할 때 느끼는 체험(体驗)이다.
이상이나 이치도 꿈속에 사람이 미래의 일을 미리 알 수 있게 되는 것도 외부의 힘을 느끼면 내부의 느낌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어서 수면 중에 나타나 외부의 힘을 느낄 수 없는 꿈속에서 외부 자극이 없는 본성을 통하여 작성(作成)되어 미래의 사실을 미리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실체(実体) 유(有)의 세계에서 무형의 세계로 연결(連結)을 가져야만 되게 지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유(有)의 끝은 무(無)요 무(無)의 끝은 유(有)다. 그리하여 자체들은 하나의 같은 통로를 갖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 혈관(血管)을 보면 동맥(動脈)만을 찾아보겠고 심장(心臟)에서부터 점점 작아져 모세혈관까지 속한다. 끝은 없어지는 정도(程度)를 향하여 세분(細分)된다. 그러면 모세혈관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끝은 딴 통로인 반대작용(反対作用)의 노정(路程)을 통하여 근본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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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한 작용체(作用体)를 구성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도 역시, 이 표시와 같은 것이다. 혈관(血管)이 작아진다고 하여서 없어진다고 결론짓는 것과 같은 행동의 사람들이 유무(有無)의 결론을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끝부분 그 자체는 중화(中和)의 점(点)이다. 혈관도 모세혈관에서 돌아오는 정맥부분(靜脈部分)이 있어서만 원만하게 돌지 않는가! 그와 마찬가지로 동맥(動脈)을 유(有)라 하는 것과 정맥(靜脈)을 무(無)라 하는 결론적 사실을 체득할 수 있다. 그런고로 유무(有無)는 하나 유(有)에서 시작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유무(有無)의 근본체(根本体)이다. 영(灵)은 유(有)에서 무(無)로 통할 수 있는 자체다. 그러므로 영(灵)은 유(有)라고 하는 감각범위(感覺範位) 내 존재에 속하지 않고 감각 외 범위에 속하여 유(有)에 권위(權位)까지 자유로이 통할 수 있는 특유한 존재다.
이 성품(性品)이 즉, 하나님이 부여하여 준 특이한 성품이다. 즉 하나님의 성품이다. 그러니 우리 이상세계(理想世界)는 참 자유세계(自由世界)이다.
즉 거리지배(距離支配)를 받지 않는 세계며, 공간의 지배도 받지 않으며 시간의 지배도 없는 세계다. 그저 생각과 동시에 결과가 현실로 나타나는 자유이상세계(自由理想世界)다. 이 세계가 하나님을 중심한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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