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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장소 : 영산기맥 9차(대곡마을~감돈재) 전남 무안군.
산행일시 : 2023. 03. 11.(토)
산행코스 : 대곡마을(구 1번 국도) ~ 169봉 ~ 초당대 후문 ~ 남산갈림길 ~ 남산(왕복) ~ 남산갈림길 ~ 195봉 ~ 남산밑오거리 ~ 연징산갈림길(사색의숲삼거리) ~ 연징산(302.1m)왕복 ~ 연징산갈림길 ~ 전망의숲 ~ 대치령(192.4m) ~ 236.7봉 ~ 288봉(마협봉상봉) ~ 태봉작전도로 ~ 264봉 ~ 태봉재 ~ 구리재 ~ 구리봉 ~ 깃봉 ~ 사자바위산 ~ 하루재 ~ 노승봉 ~ 승달산 ~ 부성농원갈림길 ~ 노간주봉 ~ 둔덕봉 ~ 월선동갈림길 ~ 월명동갈림길 ~ 꽃장마을갈림길 ~ 꽃장고개 ~ 126.8봉 ~ 감돈재 (18.4km, 9시간 소요)
산행참석 : 19 백두.
<산행지도>
이제 영산기맥의 종착지인 목포의 다순금마을까지는 45km로 약간 빡센 두 번의 산행이면 영산기맥 종주를 마칠 수 있다. 그래서 목포시내와 유달산을 걷는 마지막 구간의 여유로운 산행을 위해 이번 산행을 대곡마을~추자재 26km로 예정했으나, 다수의 회원들이 남은 영산기맥을 세 구간으로 나누어서 꽃피는 목포시내를 두루두루 둘러보자고 요청하여 이번 산행을 감돈재까지만 진행하기로 했다.
올해 들어 1월에 급작스레 찾아온 짧은 강추위를 끝으로 계속 건조하고 포근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어서 산행 날씨에 대한 염려는 거의 않았고, 이번에도 맑고 포근한 날씨가 예보되어 있었기에 산행 코스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연징산에 올라 영산강 너머 땅끝기맥의 월출산 위로 떠오르는 멋진 일출을 맞이하고, 산행 내내 좌 영산강, 우 서해바다 조망을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산행일 하루 전에 예보된 '전국적 미세먼지 매우나쁨'으로 그 모든 기대를 접고, 오직 지금까지 걸었던 그 어떤 영산기맥 구간보다 양호하다는 등로를 걷는다는 것에 만족하며 얼마 남지 않은 영산기맥을 이어 걷기로 한다.
'대기질 매우나쁨'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베테랑 기사님이 모는 버스는 양재를 출발하여 한달음에 산행 출발지인 전남 무안의 대곡마을에 도착하여, 일출 예정시각인 7시쯤 연장산 도착에 맞춘 출발시각까지 버스에서의 깊은 잠을 청해 보는데...ㅉㅉ
새벽 3시도 안 되어 대곡마을에 도착한 버스를 내리니 하늘에 뜬 반달이 휘영청 밝고 드물게 별도 보여 혹여 미세먼지가 날아오다가 지쳐서 모두 서해바다에 빠진 게 아닌가 하는 일말의 기대를 가지게 한다. "날씨도 맑고 기온도 산행에 적당하니 미세먼지만 없으면 모든 게 완벽한데.."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 버스로 돌아가 깊은 잠을 더 청한다.
<대곡마을>
전남 무안군 무안읍 성남리(城南里) 대곡 마을의 원래 이름은 대동(大洞)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남산의 능선을 따라 연징산 골짜기를 홀러내리는 골이 크다 하여 대곡(大谷)이란 이름을 붙였다. 또 연징산 주변에 동삼이 있는 골짜기가 있다 하여 삼밭실이라 부르기도 한다.
깊은 잠은커녕 가끔씩 지나는 자동차 소리에 정밀한 통행량 조사까지 하다가 일어나 배낭을 꾸려 버스 문을 나서니 두 시간 전보다 주변이 흐려진 듯하고,
구 1번 국도를 따라 무안 방향 50여 미터 지점의 "무안실버요양원"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우측 길로 들어서서,
실버요양원을 지나 뒤편에서 우측 뚜렷한 수레길 수준의 숲길로 들어서서 오르면,
뚜렷한 수레길은 쌍분 묘지까지만 이어져 있고 묘지 좌상단에서 희미한 등로를 찾아 들어서면,
제법 가파르고 거친 잡목 숲길이 이어지다가,
정상부에서 사방으로 얽힌 길흔적으로 잠시 혼란을 겪다가 표지기가 걸린 나무가 자리한 172봉(169.1m)에 도착한다.
옛 산행기에는 이 봉우리에 서산산꾼 서래야님의 '큰골봉(169.1m)' 코팅지가 걸려 있었다는데, 큰골봉이란 이름은 아래의 대곡(大谷, 큰골)마을에서 그 이름을 따 왔는 듯하다.
언젠가 큰골봉이란 이름이 널리 쓰이기를 바라며 인증!
큰골봉을 지나자 좌측 훤히 불을 밝히고 있는 초당대 뒤로 팔각정 가로등 불빛을 이고 있는 남산쯤이 가늠되고,
기맥 능선에 자리한 문패 없는 묘지를 두어 차례 지나,
제법 너른 묘지길을 따라 줄지어 있는 공동묘지를 지나 내려서면,
좌측 초당대 후문과 우측 물맞이공원을 잇는 2차선 포장도로에 내려서서 맞은편 초당대 기숙사 진입로로 들어선다.
<초당대후문>
좌측 전남 무안군 무안읍 성남리 초당대학교와 우측 물맞이골 산림욕장 사이의 고개 지점이다.
도로를 건너 초당대 기숙사 진입로로 들어서는 백두들.
<초당대학교>
초당대학교는 전라남도 무안에 위치한 사립대학으로 초당약품, 백제에치칼, 백제약품 등 3개 제약회사가 재단으로 있으며, 1979년에 학교법인 초당학원이 설립되었다. 1993년 초당산업대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이듬해인 1994년 7개 학과 700명의 학생으로 초당산업대학교로 개교하였으며, 1998년 5월 초당대학교로 개칭하였다. 설립자는 김기운이며, 교훈은 기술인·문화인·세계인이다.
초당대 기숙사 진입로를 10여 미터 따르다가 우측의 '남산, 연증산' 표지판이 있는 숲길로 들어서면,
수레길 수준의 널찍하고 호젓한 숲길이 이어지다가,
좌측 초당대기숙사 방향 갈림길 이정표에서 직진의 남산밑삼거리 방향으로 오르면,
'T'자 능선 삼거리(남산밑삼거리)에 올라서게 되는데,
이곳 삼거리에서 영산기맥은 우측 남산밑오거리로 이어지지만, 좌측 충혼탑 방향 500여 미터 지점에 있는 무안 남산을 다녀오기로 하고, 그냥 쉬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배낭을 맡겨놓고 좌측 무안 남산을 다녀오기로 한다.
삼거리에서 충혼탑 방향 바위 능선길을 잠시 오르면 충혼탑은 우측 널찍한 등로를 따라야 한다는 이정표가 나오는데,
이정표 좌측의 전망바위에 오르면 남쪽 초당대 건너편의 가야 할 영산기맥 능선이 가늠되고,
전망바위를 내려서서 충혼탑 방향의 널찍한 등로를 따르면 이내 남산 정상부의 팔각정자(남산정)에 도착한다.
<무안 남산(南山, 191.7m)>
전남 무안군 무안읍 성남리와 성동리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예부터 무안고을 남쪽에 있는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남산성이 있었다고 한다. 영산기맥길에서 약 500m 떨어져 있으며, 연징산 줄기가 북쪽으로 뻗어 형성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남산성은 현에서 남쪽으로 2리 떨어져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300척, 높이가 11척이고, 안에는 샘 3곳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동지지』에 "남산고성은 남쪽으로 2리에 있으며, 둘레는 2천3백 척인데 우물이 3곳이 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해동지도』에도 남산이 표기되어 있는데 성의 흔적은 없다. 『대동여지도』에는 무안읍성 바로 남쪽에 산성으로 수록되어 있다. 『1872년 지방지도』에 읍성 남쪽에 지명이 기록되어 있으며 산 남쪽에 미륵사가 있다.
정상에는 남산정과 남산정건립기념비 그리고 무인산불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으며, 이곳에서는 무안읍내와 무안 앞바다가 한눈에 조망된다.
사비 3천만 원을 들여 산자수려한 이곳에 군민의 화합을 위해 남산정을 건립했다는 기념비. (1984.12. 1.)
<전남 무안군(務安郡)>
무안군은 대한민국 전라남도 서부 무안반도에 있는 군이자, 전라남도청 소재지이다. 면적은 448.95㎢이며 인구는 약 8만 명으로 전라남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군이다. 서쪽은 신안군, 남서쪽에는 목포시, 북쪽은 함평군, 동쪽으로 영산강을 건너 영암군, 나주시와 접한다. 삼면이 물로 둘러싸여 있는 무안(務安)은 톱니바퀴 같은 리아스식 해안이 220km나 되며, 세발낙지와 양파가 특히나 유명한 곳이다.
무안의 지형은 좌우로 약간 퉁퉁한 직사각형으로, 가운데에 ‘작지만 큰 산’ 승달산(333m)이 땅과 바다와 강을 품고 있다. 어미 개가 구물구물한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모습이어서, 스님 500명이 단번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곳이다. 3000년 동안 천하인재가 나온다는 명당이라고 하여 요즘도 전국의 내로라하는 풍수 대가들이 현장 실습하러 온다. 승달산 어딘가에 ‘호남의 제1혈처’가 있다는데 과연 그곳이 어디냐는 것이다. 승달산 자락에는 옛 절터가 수두룩하다. 기왓장 부스러기나 절집 축대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요즘엔 무덤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거의 하나같이 양지바른 곳에 밥사발 엎어 놓은 듯이 누워 있다. 저마다 ‘여기가 명당자리’라고 뽐내는 듯하다. (동아일보)
북동쪽 무안읍 야경.
서쪽 무안CC와 무안공항 방향.
<서울 연극무대에서 큰 인기를 모은 민중 1인극 '품바'>
'무안'하면 가장 떠오르는 게 품바타령이다. 1980년대 군사독재 시절 서울 무대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1인극 품바는 민초들의 억눌린 가슴을 걸쭉한 입담과 통쾌한 정치풍자로 풀어줘 폭발적 반응을 얻었다. 품바는 각설이의 다른 이름이다. 각설이타령이 곧 품바타령인 것이다. 1981년 무안 출신 극작가 김시라씨(1945∼2001)가 무안 일로읍 공회당에서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민중 1인극 ‘품바’를 무대에 올린 게 그 시초다.
연극 품바는 무안에 실제 있었던 걸인마을 ‘천사촌’이 배경이다.
전국을 떠돌던 100여 명의 거지가 이 고장 사람들의 따뜻한 환대에 그대로 눌러앉아 ‘천사마을’을 이뤘던 것이다.
'품바'는 각설이타령의 시작과 끝에 반드시 나오는 ‘입방귀’ 후렴이다.
“품∼바 품∼바 잘한다”가 그렇다. ‘입으로 뀌는 방귀’이다.
조선시대엔 ‘입으로 치는 장구’라 해서 ‘입 장고’라고 불렸다.
신재효(1812∼1884)가 정리한 변강쇠 타령에 나온다.
흥을 돋우는 일종의 추임새 역할을 한다.
판소리에서 고수나 관객들이 “얼씨구!” “좋다!” 하는 것과 같다.
‘입 풀무질 장단’인 셈이다.
마을이나 장마당에서 “품바∼” 소리가 들리면 각설이패들이 나타난 것을 뜻한다.
품바는 걸인패들의 아이콘이다.
품바의 ‘품’은 ‘품앗이, 품삯’할 때의 ‘품(일하는 데 드는 수고)’과 한자의 ‘稟(품·주다, 받다)’을 뜻한다거나,
겸허함의 ‘빈 것(虛, 空)’을 말한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심오한 의미보다는 단순한 의성어로써 추임새로 쓰였으리라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차라리 각설이가 한자 ‘覺說理(각설리)’ 즉, ‘깨달음의 이치를 알려준다’는 뜻에서 유래됐다는 게 그럴듯하다.
옛 성현들이 저잣거리 사람들에게 쉽게 이치를 알려주기 위해 만들어낸 노래라는 것이다.
민초들은 그 가르침의 대가로 걸인 바가지에 ‘공양’을 올렸다고 한다.(펌)
남산정을 다녀온 분들.
남산정을 뒤로하고 갈림길 삼거리로 되돌아오는 도중에 다시 들른 전망바위에서 본 가야 할 영산기맥의 전망의숲 방향.
잠시 전에 지나온 큰골봉(169봉)과 출발지인 대곡마을 방향.
배낭을 두었던 삼거리로 되돌아오니 기다리던 분들이 보이지 않아 서둘러 남산밑오거리 방향 등로로 진행하니,
영산기맥의 봉우리인 195.4봉으로 이어진 좌측 직진의 희미한 등로와 우측 195.4봉을 우회하는 넓은 정규 등로가 갈라지는 'Y'자 갈림길이 나오는데, 캄캄한 밤에 195.4봉을 올라도 별달리 볼것도 없고 이내 다시 내려오게 되므로 우측의 넓은 정규 등로를 따르면,
<195.4봉>
전남 무안군 무안읍 성동리, 성암리, 성남리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영산기맥 남산밑삼거리와 남산밑오거리 사이의 봉우리다. 많은 기맥 산꾼들이 우회하여 지나는 연징산 정규 등산로를 따라 진행하여 등로가 상당히 거칠다.
이내 195.4봉을 넘어온 기맥 능선이 따르는 정규 등로에 합류하고,
좌측 195.4봉 방향.
널찍한 등로를 따라 잠시 내려서니 이정표와 벤치가 설치된 남산밑오거리를 지나게 되는데,
남산밑오거리 이정표.
남산밑오거리인 안부를 지나 영상기맥 능선인 직진의 능선으로 들어서면, 등로는 다시 우측 능선으로 이어진 사색의숲삼거리 방향 등로와 좌측 연징산삼거리 방향 사면 등로가 갈라지는데, 양쪽 등로는 등로가 없는 영산기맥 능선을 두고 좌.우측 골짜기를 따라 연징산 능선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연징산을 들르지 않으려는 산꾼들은 우측의 능선으로 이어진 등로를 따르게 되고, 연징산을 들르려는 산꾼들은 좌측 사면으로 이어진 등로를 따라야 하므로,
우리는 좌측 사면으로 이어진 연징산 방향 등로로 진행한다.
연징산삼거리로 이어진 오름길 등로를 따라 넓은 암반길을 지나니,
남산삼거리에서 기다리지 않고 떠난 분들이 앞서 오르고 있고,
사각 정자가 설치된 우측 사색의숲 방향 갈림길을 지나면,
등로는 영산기맥 능선을 우측에 두고 사면과 골짜기로 길게 이어지다가,
연징산삼거리 이정표가 있는 능선 갈림길에 도착하여, 좌측 700m 지점의 연징산을 다녀와서 우측 승달산 방향으로 영산기맥을 이어가기로 한다.
연징산삼거리 이정표.
가드로프가 설치된 완만한 암릉길을 오르는데,
우측 몽탄면 대치리 방향으로 가야 할 기맥 능선이 새벽 반달 아래에 줄지어 있고,
좌측 용샘 방향 갈림길을 지나서 완만한 능선 오름길을 따르면,
널찍한 공터에 사각정자와 특이한 형태의 정상석이 있는 연징산 정상에 도착한다.
<연징산(淵澄山, 300.5m)>
무안군 무안읍과 몽탄면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못 연(淵), 맑은 징(澄)’ 자를 쓰는 연징산은 주변에 용샘을 비롯한 맑은 연못과 샘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산 위에 징연(澄淵)이라는 못이 있다 해서 연징산이라 부른다고도 한다. 『여지도서』에 "연징산은 감방산에서 뻗어 나온다. 관아의 남쪽 5리에 있다. 위에는 징연(澄淵)이 있고 아래에는 폭포가 있기 때문에 '연징산'이라 불린다. 민간에서 전하는 말에 따르면, 옛날에는 용추(龍湫)가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흙으로 매워졌다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면성지』에 "읍의 남쪽 10리쯤 외읍과 석진의 경계에 있다. 공수산(控壽山)으로부터 남으로 내려와 울퉁불퉁하여 여러 산 중에서 뛰어났다. 산 위에 원천이 있어 세상에 전하기를 옛적에 용추라 하고, 지금은 소백두(小白頭)라 한다."라고 수록되어 있다.
연징산 정상에 서면 동쪽으로 영산강(몽탄강)이 도도히 흐르고 있다. 무안과 나주의 젖줄인 몽탄강(夢灘江)은 태조 왕건과 견훤의 격전지로도 유명하다. 후백제의 인해전술을 감당하지 못해 포위당한 왕건이 꿈속에 나타난 백발노인의 도움을 받아 영산강을 건너 화공법으로 대승을 거두었고, 견훤은 목숨만 겨우 유지한 채 도망간 이후부터는 현몽으로 여울을 건넜다는 의미로 몽탄강이라 부른다. 지금도 하류의 전승지를 파천군, 나주시 동강면 옥정리 몽숭은 하몽탄, 무안군 몽탄면 몽강리는 상몽탄으로 부른다.
지난 구간의 곤봉산과 감방산에서 본 정상석과 같은 모양의 연징산 정상석.
연징산 정상 파노라마.
희멀건 모습을 드러내며 도도히 흐르는 몽탄강 너머 붉은 일출이 준비되는 우측 아래로 월출산이 희미한데..ㅉㅉ
<도도히 흐르는 몽탄강(영산강) 모습>
전남 무안군 몽탄면을 지나는 영산강을 몽탄강(夢灘江)이라 부르는데, 몽탄강은 무안과 나주의 젖줄로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 견훤의 격전지로도 유명하다. 몽탄강이라 이름한 것은 후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 가는데, 고려태조 왕건이 아직 후삼국을 통일하기 이전에 후백제 견훤과 한판의 승부를 겨루게 되었다.
903년부터 왕건과 견훤은 영암 덕진포와 몽탄강, 극락천 일대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910년 견훤은 왕건이 지키고 있는 나주 성을 되찾기 위해 기병 3천 명을 이끌고 나주를 쳐들어왔다. 왕건이 힘을 다해 싸웠으나 견훤 군사들의 맹공을 버텨낼 수가 없었다. 왕건은 나주 동강의 몽송이라는 곳까지 밀려와 결국은 견훤 군사들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도주를 하려 해도 앞에는 깊은 강물이었고 사방은 모두 견훤의 군사들이었다.
이때 전투를 치르느라 지친 왕건이 밤중에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지금 영산강 물이 빠졌으니 빨리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라. 무안 청용리 두대산으로 향하다 파군천 하류에 군사를 매복하고 있으면 견훤 군사가 쫓아올 것이니 이를 공격하면 이길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한 꿈인지라 왕건이 밖에 나가보니, 꿈속의 도인이 말한 대로 넘실대던 영산강의 물이 줄어있었다. 왕건은 급히 군사들을 이끌고 강을 건너 무안 청용리 두대산을 향해 철수했다. 그리고 청용리에 도착한 왕건은 병사들을 민가로 보내 밀가루와 겨를 모아오도록 했다. 그리고 두대산에 볏짚을 쌓아 군량미를 쌓아놓은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런 다음 군사를 매복시켰다. 날이 밝자 왕건은 밀가루를 영산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천(川)에 풀기 시작했다. 왕건의 군사가 밥을 해먹기 위해 씻은 쌀의 뜨물이 흘러간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 밀가루를 강에 풀자 금방 영산강물이 하얗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한편 견훤은 날이 밝자마자 왕건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왕건은 말 그대로 독 안에 든 쥐였다. 도망갈 곳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아침에 왕건의 진영을 살펴보니 아무도 없었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강을 건너간 것이다. 견훤은 급히 군사를 이끌고 왕건의 뒤를 쫓았다. 그런데 가다보니 영산강 상류 쪽에서 쌀뜨물 같은 것이 흘러오고 있었다. 견훤과 견훤군사들은 깜짝 놀랐다. “얼마나 왕건의 군사들이 많으면 저렇게 강을 하얗게 물들일 정도로 쌀을 씻었을까?” 생각하니 위축이 됐다. 왕건의 심리전에 걸리고 만 것이다. 견훤의 군사들이 겁을 먹은 그때, 두대산 양쪽에 숨어있던 왕건의 군사들이 기습공격을 가해왔다. 왕건의 매복에 걸리고 만 것이다. 두대산 좌우 양쪽에서 왕건의 군사들이 활을 쏘고 바위를 굴려대는 바람에 전투의 기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결국 이 전투에서 견훤은 참패당하고 말았다. 왕건은 꿈속에 나타난 도인 덕분에 목숨을 건지고 전투에서 승리하게 됐다. 그래서 그 이후로 현재의 몽탄교가 있는 영산강 유역을 '꿈 몽(夢)', '여울 탄(灘)을' 써서 몽탄강(夢灘江)이라 했다 전해진다. 쌀뜨물처럼 보인 밀가루를 흘려보낸 하천은 ‘견훤의 군사들을 속여 깨뜨렸다’는 의미로 파군천(破軍川)이라 했다. 또 군량을 쌓은 것처럼 보이게 한 산은 두타산(혹은 두대산)이라 부르게 됐다. 왕건군이 배수진을 쳤던 현재의 나주시 동강면 옥정리 몽송부락 일대는 하몽탄, 영산강을 건너 무안지역으로 건너간 곳은 상몽탄이라 칭한다. 이후 왕건은 도움을 받은 나주 호족의 나주오씨 처녀와 결혼을 하였고, 정화왕후의 아들이 바로 고려의 현종왕이다.
연징산 정상 전경.
동쪽 나주혁신도시 방향.
남동쪽 하몽탄 몽송부락과 두대산 방향.
남서쪽 몽탄면 대치리와 승달산 방향.
일출 직전의 연징산 정상 인증.
미세먼지로 일출 보기는 글렀다며 인증을 마친 백두들이 서둘러 떠나는데 들려오는 "일출이다!"
연징산 정상에서 본 해(日)와 달(月)!
그리고 강(江)과 산(山) 그림!
연징산에서 맞이한 일출(日出)!
그 일출을 뒤로하고 반달이 손짓하는 승달산 방향의 영산기맥을 찾아,
왔던 길을 되짚어 연징산삼거리로 되돌아 나와 승달산 방향으로 영산기맥 잇기에 나서면,
남산밑오거리에서 이어온 영산기맥의 연징산 방향 능선 분기점쯤을 지나게 되고,
돌아본 연징산 방향.
이내 한 시간쯤 전 남산밑오거리에서 좌측이 아닌 우측의 능선길을 따랐다면 바로 도착했을 사색의숲삼거리를 지나게 된다.
사색의숲삼거리 이정표.
짧은 오름길을 올라,
돌아본 연징산 방향.
편평한 숲으로 이어진 기맥길을 따르면,
전망 좋은 육각정자가 있는 전망대숲 삼거리인 292.8봉에 도착한다.
전망의숲 삼거리 이정표.
전망의숲 육각정자에서 조망을 즐기며 아침식사를 하고있는 백두들.
가야 할 승달산 방향으로 이어진 영산기맥 조망.
살짝 당겨본 산행 출발지인 대곡마을 방향.
전망 좋은 정자에서의 아침식사임에도 평소의 절반인 15분 만에 후딱 마치고는 정자 우측 데크 계단길로 들어서서,
길게 이어진 급경사 데크 계단길을 내려서며 90여 미터나 고도를 낮추면,
'대치령 분기점'이라 적힌 이정표가 있는 안부 고개를 지나게 되고,
<대치령(大峙嶺, 208m)>
전남 무안군 몽탄면 대치리 한재마을에서 무안군 청계면 청천리를 넘는 고개다. 지금과 같은 큰길이 나기 전 몽탄면 대치리에서 무안을 가려면 마을 뒷산을 넘어야 했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한재」또는 「대치」라 부른다.
대치리 마을은 함평노씨(咸平魯氏)가 함평에서 살다가 1420년경 이곳에 이거한 것이 처음이라 하나 자세하지 않고, 다음으로 이천서씨(利川徐氏) 서숭노(徐崇老)가 조선 세조대(世組代)에 장성군 북일면 용전(龍甸)에서 살았는데, 정해(丁亥, 1467)년에 일어난 이시애난(李施愛亂)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뒤 세거지(世居地) 장성에서 남하하여 지금의 대치(大峙)에 입향하였다는 기록이 <務安世蹟誌(무안세적지)> 徐崇老條(서종노조)에 전한다.
대치령 이정표.
대치령에서 짧은 오르막을 오르면,
우측 새벽에 지나온 남산 방향.
이정표에 '중봉 분기점'이라 표시된 'Y'자 갈림길인 246봉 직전의 헬기장에 도착하는데, 우측 중봉 방향 등로는 정면 봉우리를 넘어 이어지고, 영산기맥은 좌측 사면으로 이어진 봉우리 좌회 등로를 따르게 되는데,
이곳 중봉과 시루봉 방향 능선분기봉(246m)은 삼면봉으로, 능선 좌측은 함평군 몽탄면이 계속 이어지지만 우측은 함평읍에서 청계면으로 바뀌는 삼면봉으로,
이정표에서 우측의 대곡마을 방향은 중봉과 시루봉으로 이어지고 기맥길은 승달산 방향이다.
중봉분기점 봉우리를 좌회하여 완만한 능선 등로를 따르는데,
아침 해는 어느새 좌측으로 보이는 연징산 위 하늘로 성큼 올라서 있고,
따르던 등로가 평온하게 이어지던 능선을 두고 우측 사면으로 휘어져 내려서면,
안부 좌측에 묘지가 있고 나뭇가지에 '한재' 코팅지가 걸린 한재를 지나게 된다.
<한재>
전남 무안군 청계면 청천리와 무안군 몽탄면 대치리 사이의 고개 지점이다. 일부 산행기에는 이곳에서 20여분 더 가면 나오는 청천리임도 종점을 한재로 기록하기도 하는데, 정확한 것은 지역민들이나 알 듯하다.
한재를 뒤로하고 잠시 올라,
204봉쯤을 지나자 다시 완만하고 호젓한 능선길이 이어지더니,
작은 봉우리를 지나는데 좌측 대치리 방향으로 아침 일출을 맞이했던 연징산이 막힘없이 조망되고,
완만한 능선길을 따라 236.7봉쯤을 지나서 잠시 고도를 낮추어,
우측 청계면 청천리마을에서 이어온 넓은 임도의 종점인 '청천리임도종점(200m)'에 도착하니 앞서간 분들이 기다리고 있다.
청천리임도 종점에서 쉼을 하는 백두들.
이곳은 산행 출발지인 대곡마을에서 8km 지점인데, 심한 목감기를 앓고 계신 회장님이 더 이상의 산행은 어렵다며 이곳에서 탈출하겠다고 하니 여러 여성회원들이 너도나도 탈출에 동반하겠다고 나선다. 석여사님 핸드폰 지도에 청천리마을회관을 검색하여 표시하게 하고는, 택시 승차정원으로 인원을 제한하여 임도를 따라 탈출하기로 한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동반탈출 티켓을 거머쥐고는 탈출에 나서는 백두들.
탈출팀을 떠나보내고 임도 끝의 '청천리임도종점' 이정표가 있는 들머리에서 승달산 방향으로 들어서서,
지금까지의 유순하기만 했던 등로와는 달리 가파른 까풀막을 오르면,
널찍한 공터 참나무 둥치에 288.3봉 산패가 걸려있는 일명 서래야님이 '마협봉상봉'으로 명명한 봉우리를 지나게 되고,
<288.3봉>
봉우리 정상에는 '준.희'님의 288.3봉 산패가 걸린 나무둥치 앞에 벤치를 만들어 놓았고, 우측으로는 마협봉으로 가는 등로이나 선답자들이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 봉우리다.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300여 미터 떨어져 있는 마협봉(馬俠峰, 288.6m)은 청계면 청천리와 태봉리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산의 모양이 말처럼 생겼다 해서 마봉이라고도 한다.
좌측이 깎아지른 절벽이라 조망이 시원하게 트인 벼랑길을 지나게 된다.
좌후방 연징산 방향.
좌측 몽탄면의 건지봉 방향.
완만하게 이어지던 등로가 봉분이 낮아진 묘지에서 우측으로 휘어지며 완만하게 내려서다가,
능선 구분이 어려운 평탄한 안부 숲길을 지나며 완만게 오르면,
바위암봉을 지나게 되는데,
우측 청계면 방향 조망이 시원하게 트이고,
우전방으로는 무안클린밸리CC가 내려다 보인다.
포장도로 같은 느낌의 바위암봉 사면을 내려서면,
다시 평탄한 능선길이 이어지며,
우측 나뭇가지 사이로는 무안클린밸리CC가 함께 하고,
좌후방 나뭇가지 사이로는 지나온 연징산도 함께 하더니,
작은 언덕 수준의 213봉쯤을 지나면,
좌전방으로 가야 할 영산기맥 능선과 연봉들이 조망되는 전망바위를 지나게 되고,
침목이 듬성듬성 계단을 이룬 내림길을 내려서면,
다시 등로는 완만해지며 등로 한가운데에 박힌 지적경계점을 지나게 되고,
이내 우측으로 무안클린밸리CC 5번 홀로 연결된 태봉작전도로에 들어서서, 좌측 대치리 방향으로 진행한다.
우측 무안클린밸리 CC 5번 홀 방향.
좌측 대치리 방향 임도를 따르다가 우측 영산기맥 능선 방향 묘지길을 지나고,
임도가 좌측 아래로 내려가는 지점에 세워진 이정표를 따라 우틀하여 승달산등산로 방향 수레길로 들어서면,
등로 우측편으로는 무안클린밸리 CC 4번 홀 그린에서 젊은 골퍼들이 골프를 즐기고 있고,
등산이나 즐기는 늙은 우리는 'ㅓ자' 갈림길에서 좌측 숲길로 들어선다.
(직진의 넓은 수레길을 따라도 나중에 헬기장 직전에서 영산기맥 등로와 만나게 되지만, 한참을 우회하게 된다.)
갈림길에서 수레길 수준의 등로를 두고 한두개 걸린 표지기에 이끌려 희미한 기맥길로 들어서서,
잡목들이 진행을 방해하지만 지나기에 크게 어렵지는 않고,
작은 봉우리를 넘어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는데,
'준.희' 님의 '~~힘힘힘내세요' 표지가 산속을 걷는 산꾼들을 외롭지 않게 하고,
점점 희미해지는 등로를 더듬어 올라 20여 분 전에 헤어졌던 정규 등로에 접속하여 좌측 오름길로 진행하니,
이내 앞서간 분들이 쉼을 하고 있는 헬기장에 올라서게 되는데,
헬기장 번호는 '96-3해-10'으로 표시되어 있다.
좌측 몽탄면 사천리 멍망골 방향.
살짝 당겨본 몽탄강(영산강) 조망.
헬기장에서의 달콤한 쉼을 뒤로하고 완만한 능선길을 오르면 266.2봉(개념도 264.6봉) 산패가 걸려있는데,
이곳 266.2봉은 서래야님의 '구리골봉' 코팅지가 걸려 있었다는데 지금은 보이지를 않고,
266.2봉을 지나 좌측 전망바위에 서면 좌전방으로 가야 할 구리봉과 깃봉이 조망되며,
전망바위를 뒤로하고 급경사로 바뀐 내림길을 내려서면,
2차선의 포장도로를 건너는 생태통로가 설치된 태봉재를 지나게 된다.
<태봉재(182m)>
,전남 무안군 청계면 태봉리 승달산골과 몽탄면 사천리 먹망골 사이의 고개이다. 청계면 태봉리에서 몽탄면 대치리로 이어지는 2차선의 포장도로가 개설되어 있고, 도로를 건너는 생태통로도 설치되어 있다. 영진지도에는 '각어릿대재'라고도 표기되어 있는데 유래는 찾을 길이 없다.
태봉재 이정표.
태봉재 전경.
생태통로를 건너며 바라본 우전방 가야 할 구리봉 방향.
좌후방 연징산 방향.
생태통로를 건너 좌측 사면 방향 임도로 진행하여 능선으로 올라도 되지만, 직진의 능선으로 바로 올라,
좌측 사면 등로 입구에 있는 '김홍식묘 입구 700m' 비석.
돌아본 태봉재와 266.2봉 방향.
이내 정규 등로가 이어진 능선길에 접속하여 우측 능선 오름길을 따르면,
작은 능선 봉우리를 지나게 되고,
완만한 안부를 지나 제법 가팔라진 오름길을 오르면,
좌측으로 망모분맥이 분기하는 '양강봉' 표지판이 걸린 봉우리에 올라서는데, 기맥길은 우측 능선 내림길로 이어진다.
<망모분맥(望母分脈)>
망모분맥은 영산기맥 태봉재와 구리재 사이 갈림봉에서 동남쪽으로 분기하여 중골고개를 거쳐 망모산(望母山, 142.5m)을 지나 무안군 일로읍 망월리 영산강 대죽방조제에서 그 맥을 다하는 24.2km의 맥길을 말한다.
망모분맥 분기봉 전경.
이 봉우리가 '양강봉'이라 우기는 옷걸이로 만든 표지판.
돌아본 태봉재 방향.
작은 바위를 내려서서 우측의 구리봉으로 이어진 능선을 향하면,
사거리 안부 좌.우로 등로의 흔적이 뚜렷하고 당산목과 돌무더기가 있는 구리재를 지나게 되고,
<구리재(206m)>
전남 무안군 청계면 태봉리와 몽탄면 달산리 사이의 고개이다. 옛 무안현 지도(1872년)에는 무안반도에서 남.북을 연결하는 고개는 이곳이 유일하였다고 하며, 구한말까지 그만큼 교통의 요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옛날 가마나 말을 타거나 걸어 다니던 시절에는 무안반도 남쪽에서 무안읍으로 갈 때에는 반드시 넘어야 하는 교통의 요충이었으며 지름길이었다고 한다. 정상에는 당산목과 돌무더기가 있으며 이곳에서 남창천이 발원하여 몽탄과 일로를 거쳐 영산강으로 흘러든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고개의 길이가 옛날 명주를 짜는 실꾸리를 모두 풀어놓을 만큼 긴 고개여서 「꾸릿재」라고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인근 주민들은 「꾸릿재」로 부른다고 한다. 무안의 고지도나 읍지 등 옛 문헌에는 한문의 음차를 빌려 구리치(九里峙), 구리치(鳩里峙)로 적은데도 있고, ‘구리’의 뜻을 가진 '구리 동(銅)' 자를 써서 동치(銅峙)로 적은데도 있다고 한다.
미끈하니 잘 빠진 거목들의 환영을 받으며 능선 오름길을 오르면,
잠시 전 태봉재 들머리에서 보았던 수목장을 한 듯 보이는 김홍식 묘비를 지나게 되고,
가팔라진 오름길을 따라 ‘T자’ 능선안부에 올라 우측 능선 오름길을 따르면,
키 낮은 산죽밭으로 잘 정비된 능선 등로가 이어지다가,
우측 나뭇가지 사이로 잠시 전에 지나온 태봉재 뒤편 멀리로 연징산 능선도 가늠되더니,
더욱 가팔라진 깔딱 오름길을 오르면,
돌아본 태봉재 방향.
봉우리 정상에 함평이공과 정부인 파평윤씨 합장묘가 있는 구리봉에 도착한다.
<구리봉(309m)>
전남 무안군 청계면 태봉리와 몽탄면 달산리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구리봉 아래의 구리재에서 그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구리봉 정상에는 후손들이 돌보지 않는 함평이공과 정부인 파평윤씨 묘지가 있다.
'구리봉'이란 손글씨가 적힌 이정표.
목을 축이며 잠시 다리쉼을 하는 백두들.
잠깐의 다리쉼으로 기운을 얻어 건너편 기맥 능선의 깃봉과 사자바위산을 향해 구리봉을 급하게 내려서면,
좌측에 묘지가 있는 지점에서 작은 능선 봉우리를 우회하여 지나게 되고,
이내 '태봉능선'이라 표시된 이정표가 있는 밋밋한 안부를 지나게 되는데,
이곳 태봉능선 안부 좌측은 목우암으로, 우측은 태봉제(청계면 태봉리의 저수지)로 이어진다고 되어 있다.
<무안 법천사 목우암(牧牛庵)>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이다. 553년(백제 성왕 30)에 덕이(德異) 또는 덕예(德隸)라고 하는 승려가 창건했다고 전하며, 혹은 725년(성덕왕 24)에 서역 금지국(金地國)에서 온 정명(淨明)이 창건했다고도 한다. 고려 후기 원나라 임천사(臨川寺)의 승려 원명(圓明) 국사 징엄(澄嚴)이 중건하였다. 원명은 꿈에 백운산에 있는 총지사(摠持寺)에서 소가 한 마리 나와 이 암자에 이르는 것을 보고 그곳에 가보았더니, 계곡 바위에 소 발자국 흔적이 있었으므로 풀을 엮어서 암자를 만든 뒤 목우암이라 하고, 그곳에 머무르면서 수도하였다고 한다.
현재 목우암 내에는 법당, 요사채, 축성각이 있다. 법당 내부에는 목조아미타불삼존불이 있고, 그 앞에 숙종 7년(1681)에 만든 석등이 있으며, 목우암 입구에는 조선 후기에 만든 부도 5기가 있다.
어느 능선이 '태봉능선'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삭이며 깃봉으로 이어진 완만한 능선길을 오르다가,
작은 봉우리를 좌회하여 지나면,
밋밋한 능선 안부 나무둥치에 '청수재' 표지판이 걸려있고,
<청수재(255m)>
전남 무안군 청계면 청수리 청수동골과 몽탄면 달산리 노성재안골 사이의 고개지점이다.
청수재를 지나 제법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서면,
벤치와 이정표, 승달산 등산안내도가 있는 깃봉 안부에 도착하는데, 영산기맥은 좌측 능선으로 이어지고,
<깃봉(298m)>
깃봉에 올라서면 서해바다가 한눈에 보이고 능선 바로 아래에는 목포대학교 캠프스가 시야에 들어온다. 등산 안내도와 벤치가 있고, 깃봉 정상은 이곳에서 매봉 방향 우측 20m 지점에 있는데, 주변이 나무로 둘러싸여 별다른 조망이 없고 흔한 정상석이나 표식도 없다.
바로 우측 20여 미터의 깃봉 정상으로 오르면 '깃봉' 코팅지가 걸려있다는데, 별다른 조망도 없다 하여 남서쪽 아래로 목포대학교 교정이 내려다 보이는 벤치에서 조망을 즐기며 다림쉼을 한다.
깃봉 이정표.
현위치 '깃봉'이 표시된 승달산 등산 안내도.
남서쪽 발아래로 보이는 목포대학교와 청계면 소재지 방향.
<목포대학교>
전라남도 무안군과 목포시, 영암군에 있는 국립 종합대학이다. 목포대학교의 전신은 1946년 세워진 6년제 목포사범학교다. 목포사범학교는 1949년 3년제 사범학교와 병설 중학교로 분리됐다. 1957년 부속 초등학교를 세웠다. 1961년 사범학교를 폐지한다는 방침이 확정되면서 학교가 목포실업고등학교로 바뀌었다. 목포실업고등학교는 1978년 목포초급대학이 됐다가 이듬해인 1979년 4년제 목포대학으로 승격했다.
창조·덕의·봉사의 이념을 바탕으로 창의적 사고력과 전문성을 갖추고 덕성과 신의로 인화를 추구하며 나눔과 섬김의 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성실한 인재를 양성하여 국가와 인류발전에 공헌함을 교육목표로 한다.
희뿌연 황사먼지로 아쉬움이 더하는 서쪽 매봉 너머로 보이는 서해 조망.
벤치에서의 전망이 좋은 깃봉을 뒤로하고,
우측이 잘린듯한 절벽인 암릉봉은 좌회하여 오르면,
사자바위봉 직전의 사방으로 조망이 트이는 전망바위를 지나게 되고,
우측 목포대학교와 청계면 도림리 너머의 서해바다 조망.
살짝 당겨본 전남 무안군 운남면과 신안군 압해읍을 잇는 김대중대교 방향.
북서쪽 방금 지나온 깃봉 방향.
북쪽의 무안 클린밸리 CC 방향.
북동쪽 지나온 영산기맥과 연징산 방향.
이내 묘지와 노승정(老僧亭)이란 사각정자가 있는 사자바위산을 지나게 된다.
<사자바위산(317m)>
전남 무안군 청계면 도림리와 몽탄면 달산리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산 정상에는 노승정(老僧亭)이라는 사각정자가 있고 독립유공자인 풍천노씨 부부 묘가 있다. 능선 바로 아래에는 목포대학교 캠프스가 한눈에 들어오고, 저 멀리 서해바다에 있는 압해도를 연결하는 김대중대교와 압해대교가 보이며, 바로 맞은편에는 승달산이, 그리고 지나온 연징산과 동남쪽으로는 땅끝기맥의 월출산 능선이 시원스레 보이는 곳이다.
사자바위산 이정표.
사자바위?가 보이지 않는 사자바위산 정상 전경.
남쪽 하루재를 지나서 가야 할 노승봉과 승달산 방향.
남서쪽 청계면 도림리의 목포대학교 방향.
서쪽 매봉 방향.
북서쪽 지나온 깃봉 방향.
사자바위산 정상의 정자를 내려서면 또 다른 묘지가 있는데 풍천노공과 배밀양박씨의 묘지로, 위쪽 정상 가까이의 묘지와 동일한 풍천노공 묘지인데 본처와 후처의 자손들이 각각 따로 묘지를 썼다고 하며,
뒤따라 내려서는 무안의 산악회 회장님께 사자바위산의 '사자바위'는 어디에 있냐고 여쭤봤더니 이곳이 사자바위라고 답하실 뿐 구체적인 산이름의 내력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고,
이내 등로 우측 벼랑 위에 설치된 벤치를 지나는데,
벤치에서 바라다 보이는 서쪽 압해도 방향 조망이 발길을 부여잡고,
남쪽 하루재 건너편으로는 가야할 승달산이 무척이나 아득해 보인다.
급하지 않은 능선 내림길을 내려서다가,
호젓한 능선길과 어울리는 벤치를 지나고,
별다른 조망이 없는 암릉봉(251m)을 지나서 급경사를 내려서면,
좌측에 간이 주막이 있고 고개 안부에 커다란 묘지가 자리한 하루재에 도착하여, 청천리 임도에서 어리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탈출자 명단에서 제외되었던 김여사님이 우측 도림리 목포대 방향으로 탈출키로 하는데, 뭇 사내들도 우르르 탈출 대열에 합류한다.
<하루재(231m)>
전남 무안군 몽탄면 달산리 노성재만골의 법천사와 무안군 청계면 도림리 목포대학교 도림캠퍼스 사이의 고개이다. 고개 정상에는 무명묘지 한 기가 있고, 간이매점도 있다. 이 부근의 봉우리나 재의 정상에는 묘지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 승달산 능선이 풍수지리상 노령산맥 4대 명혈 중의 하나라는 명당 중에 명당이라 그런지 묘지가 유난히 많다.
하루재 이정표.
하루재 전경.
하루재 주막의 주모가 아직 출근 전이라 션한 막걸리를 놓친 서운함에 탈출을 결심한 권샘과, 남편도 웬만해선 들어주지 않는 등산 배낭을 대신 매고 탈출길 안내까지 도맡겠다는 무안의 의인 무안산악회 회장님께 많은 백두들의 안전한 탈출을 부탁드리고,
목포의 사우나에서 다시 뵐 것을 기약하며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는,
더 이상의 탈출은 없다며 승달산을 향한 기맥 능선길로 들어서면,
가드로프까지 설치된 제법 가파른 능선 오름길이 이어지는데,
좌측 아래 골짜기에 자리한 법천사가 내려다 보이고,
<노승봉 가는 길에서 내려다 보이는 법천사>
법천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대흥사의 말사로, 725년(성덕왕 24년)에 서역 금지국(金地國)의 승려 정명(淨明)이 창건하였다. 1030년에 불에 탄 뒤 약 100년 동안 폐사로 남아 있던 것을 1131년(인종 9년)에서 1162년(의종 16년) 사이에 원나라 임천사의 승려 원명(圓明)이 중창하였다. 원명은 처음에는 초암을 짓고 수행하였으나, 500명의 제자가 몰려들자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 절의 승려들이 모두 도를 얻어 절이 있는 산 이름을 승달산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에 타자 불상 등을 산내 암자인 목우암(牧牛庵)으로 옮겼다. 1662년 중창하였으나, 1896년 다시 폐허가 된 것을 1913년 나주에 살던 효자 정병우(丁丙愚)가 조그마한 암자를 짓고, 1964년 활연(活然)이 법당을 짓는 등 불사를 진행하여 오늘에 이른다.(펌)
작은 능선 봉우리를 좌회하여 지나면,
우측 목포대학교 방향 갈림길 이정표를 지나게 된다.
제법 가파른 능선 오름길을 무심히 땅만 보며 선명한 등로를 따르다가, 그만 노승봉으로 오르는 희미한 능선 등로를 놓치고 사면 좌회길로 진행하여,
<노승봉(老僧峰, 300m)>
전남 무안군 몽탄면 달산리, 청계면 도림리, 월선리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다. 지형도에는 표기되지 않은 지명으로 산행 개념도에만 기록되어 있는 봉우리이다. 승달산과 관련이 있는 지명으로 추정되는 노승봉도 잠시 뒤 지날 승달산과 함께 목포대학교의 뒷산으로, 풍수상으로 보면 고승(노승)이 제자들을 모아놓고 불공을 드리는 이른바 노승예불(老僧禮佛) 혹은 호승예불 형국의 명당이라 한다.
정상에는 「함평모공과 배청주한씨 합조(咸平牟公 配淸州韓氏 合兆)」묘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지역의 명당에 대한 집착은 대단한 것 같다.
노승봉 말고 자기를 보려 오라는 작은 꽃(노루귀)
노승봉을 거쳐온 기맥길에 합류하여 목대박물관 방향(노승봉 방향) 갈림길을 지나고,
돌아본 노승봉 방향.
이내 다시 우측 수월동 방향 갈림길 이정표를 지나 오르면,
봉분이 허물어져 가는 묘지를 지나게 되고,
완만한 능선 오름길을 잠시 더 오르면,
넓은 헬기장에 삼각점이 있는 승달산(僧達山) 정상에 도착한다.
<승달산(僧達山, 319.2m)>
전라남도 무안군의 중앙부에 위치하며 청계면과 몽탄면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무안군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북쪽으로 감방산에서 중봉ㆍ마협봉을 거쳐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국사봉ㆍ대봉산ㆍ오룡산으로 연결된다. 승달산의 지세는 예로부터 고승(高乘)이 제자들을 모아놓고 불공을 드리는 노승예불(老僧禮佛)의 지세로 호남의 8대 명당 중에 하나이다. 그 덕분에 승달산은 목동(牧童)과 황소가 터를 잡았다는 목우암(牧牛庵), 불법이 솟는다는 법천사(法泉寺), 옛날 건물이 90여 동이나 있었다는 총지사(摠持寺), 호남의 8대 명당 중에 제1명당이라는 유명세 때문에 이곳엔 유난히 무덤이 많으며, 법천사, 목우암, 총지사지 등 불교사적이 많이 있다고 한다.
고려 인종 때 원나라의 원명의 500명 제자들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설화를 가진 승달산은 목포 유달산과 쌍벽을 이루며 북쪽의 무안 남산~연징산~마협봉, 남쪽의 국사봉~유달산으로 이어지는 영산기맥의 끝자락 중 산줄기가 가장 높고 계곡이 깊으며 숲이 울창하다. 토양이나 기후 조건이 야생난이 자라기에 최적의 조건을 지니고 있어 ‘난(蘭)’ 자생지로 유명하다. 또한 승달산의 낙조(落照)는 일품이라고 하며, 정상에서 바라보면 무안의 운암반도, 압해도 섬들이 둘러싸인 서해바다가 마치 호수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여지도서』에 "승달산은 연징산에서 뻗어 나오며 법천사(法泉寺)의 으뜸이 되는 산줄기를 이룬다. 관아의 남쪽 20리에 있다. 세간에 전하는 말에 따르면, '송나라 때 임천사의 승려 원명이 바다를 건너와 이 산을 택해 풀을 엮어 암자를 만들었는데, 임천에 있던 제자 5백 명 정도가 그를 찾아와서 함께 깨달음을 이루었으므로 그대로 승달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면성지』에 "읍치의 진산이다. (중략) 동으로 쳐다보면 노승과 방불(彷佛)함으로써 그 형상으로 인해 이름하였다 한다."라고 수록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에 승달산 남쪽에 법천사, 서쪽에 총지사(摠持寺)를 표기하고 있다. 『여지도서』에 "법천사는 관아 남쪽 20리 승달산 아래에 있다. 당나라 개원 13년(775)에 서역 금지국의 승려 정명이 처음 세웠으며, 남송 고종 소흥 연간에 임천부의 승려 원명이 새로 지었다. 총지사는 관아의 남쪽 10리 승달산 오른쪽 기슭에 있다. 처음 세운 연대는 법천사와 같다."는 기록이 있다. 『해동지도』(무안)에는 총지사는 연징산 북쪽에 있는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승달산 이정표에서 영산기맥은 독골 방향으로 이어지고, 승달산의 최고봉인 깃대봉(332.5m)은 이곳에서 동쪽으로 300m 떨어져 있고 높이도 이곳 승달산보다 10여 미터 높아 많은 기맥 산꾼들이 다녀오는 봉우리이지만, 오늘은 탈출한 분들이 많고 일찍 탈출을 하여 오래 기다리는 상황이라 깃대봉 왕복은 포기하고 다리쉼을 하기로 한다.
<승달산 깃대봉(332.5m)>
승달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주봉 역할을 하는 깃대봉 정상에는 무안의 어엿한 정상석이 자리하고 있고, 무인산불감시카메라탑과 등산 안내도가 있으며 동쪽 달산리와 남쪽 감돈리 방향 조망이 시원하다고 한다. 또한 부근의 여느 봉우리와 마찬가지로 깃대봉 정상에도 어김없이 묘지가 점령하고 있는데, 숙부인능성주씨 묘지로 남편 통정대부 묘는 전북 변산에 있다고 적혀 있다.
승달산 정상에서 배낭털이를 하는 백두들.
승달산을 뒤로하고 감돈재를 향한 기맥길로 들어서면 평이한 능선 내림길에 가드로프와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완만한 능선 내림길을 따르다가 부성농장 갈림길에서 직진의 부성농장 방향 등로를 두고 좌측 아래로 휘어져 내려가는 감돈저수지 방향으로 진행하면,
부성농잘 갈림길 이정표.(길주의, 이정표 확인)
우측 능선 봉우리를 좌회하여 내려서는 원목 계단길을 내려가서 이내 봉우리를 지나온 기맥 능선에 접속하게 되고,
잠시 호젓한 소나무숲 능선길이 이어지다가,
그다지 필요치 않는 가드로프가 설치된 내림길을 내려서면,
최근에 개설된 듯, 어느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은 임도를 지나게 되는데,
임도는 우측 월선마을과 좌측 달산마을을 연결하는 길로 보인다.
좌측 달산마을 방향.
우측 월선마을 임도 방향.
다시 완만한 능선길이 이어지다가,
우측 월선리 방향의 뚜렷한 갈림길을 지나 오르면,
'노간주봉(209m)'이란 산패가 걸린 봉우리를 지나는데 주변에 노간주나무는 거의 보이지 않고,
가드로프가 설치된 급경사 내리막을 내려서면,
잠시 전에 지나온 임도가 좌측으로 이어지는 사거리 갈림길 이정표가 있는 안부를 지나게 되는데,
좌측은 연춘동, 우측은 화천마을 방향이고 영산기맥은 직진의 감돈저수지(2.6km) 방향이다.
완만한 능선길을 따라 관리되지 않는 묘지가 있는 둔덕봉을 지나는데,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둔덕봉(194m)이란 산패가 소나무 둥치에 메여 있고,
고만고만한 언덕 수준의 봉우리가 이어진 완만한 능선길이 이어지다가,
가드로프에 나무계단까지 설치되어 약간 긴장하여 오름길을 오르니,
이내 다시 평탄한 능선길이 이어지고,
직진의 월선동 방향 능선 분기봉에서 기맥길은 좌측 월명동 방향으로 이어진다.
<월선동>
무안군 청계면 월선동은 월선리에서는 가장 먼저 생긴 마을로 「토끼산」 「비친암골」 「월구정」 「소잔등」 「토끼바위」 「은락골」 등으로도 불렀으며, 도선국사(옥룡자)가 '무안 4명당의 하나인 운중수월(雲中秀月)이 있다' 하여 「수월동(水月洞)」 「수정동(水晶洞)」으로 고쳐 불렀다고 전해진다. 그 뒤 언제부터인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이 마을의 최초 입향성씨는 김해김씨(金海金氏) 김봉헌(金鳳獻)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년) 때 피난을 와서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현재도 김해김씨(金海金氏)가 대부분인 동족 (同族)을 이루고 있으며, 타성(他姓)으로는 전주이씨(全州李氏), 이천서씨(李川徐氏), 나주문씨(羅州文氏) 등이 거주하고 있다. 월선리의 범상골은 도선국사전설(도선이 명당운중수월 (雲中秀月)을 가르쳐주게 된 연유를 전하는 전설)이 있는데, 도선이 승달산 노승 진념(眞念)을 만나 북재를 넘어 이 마을에서 밭 가는 농부에게 밥을 한 끼 얻어먹고 명당을 일러주었다 한다. (청계면 마을유래 인용)
월선동 갈림길 이정표.
잠시 완만한 능선 내림길이 이어지다가
묘지를 지나며 우측으로 휘어져 내려가면,
좌측 월명동 방향 갈림길에서 기맥길은 직진의 시제마을 방향으로 이어지다가,
<월명동>
무안군 청계면 달산리 화정마을 북쪽에 있는 곳으로 里(리)의 서편에 자리하며, 밤에 달이 먼저 보이는 마을로 달맞이를 하는 정자나무가 있다 해서 「월영정(月迎亭)」이라 불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근방에서는 그나마 가파르고 긴(2분) 오름길을 오르면,
묘지 2기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어 산꾼들이 묘지봉(188m)이라 부르는 봉우리를 지나게 된다.
다시 평지 수준의 걷기 좋은 등로가 이어지다가,
좌측 시제마을 방향 갈림길 이정표가 있는 수레길로 내려서서 우측 꽃장마을 방향으로 진행하고,
완만하게 봉우리 좌측으로 오르는 수레길을 따라,
밀양박씨 가족묘를 가로질러 진행하면,
표지기 몇 개가 걸린 143봉쯤에서 좌틀하여 내려서다가,
이내 우측으로 휘어지는 수레길을 따르면,
설치 이유를 알 수 없는 가드로프와 나무계단이 설치된 내림길로 내려서고,
잡목들이 자라난 묘지를 지나면,
사거리 안부 갈림길 이정표가 있는 꽃장고개를 지나게 되는데,
<꽃장고개/화정고개(85m)>
전남 무안군 청계면 월선리 솥골과 무안군 몽탄면 달산리 쑤시밭골 사이의 고개이다. 백일홍나무가 많아 화정(花亭)이라 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 도로정비 명목으로 모두 베어서 지금은 볼 수 없고, 불을 질러서 농사를 지었다고 해서 화정(火停)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꽃장고개 표지기.
꽃장고개 이정표에서 직진의 감돈저수지 방향이 기맥길로,
진행방향 좌측이 꽃장마을이고 우측이 신촌마을인데, 꽃장마을과 신촌마을 방향 표시가 서로 바뀌어 있다.
꽃장고개를 뒤로하고 그다지 가파르지는 않지만 산행 막바지라 힘든 오름길을 올라,
다시 완만한 수레길을 따르면,
봉우리 같지않은 등로에 삼각점이 박혀있는 개념도의 126.8봉(129.1m)을 지나게 되고,
126.8봉을 내려서다가 묘지 2기를 지나,
완만한 안부를 지나 다시 오르면,
감돈재 직전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인 130봉에서 우측으로 휘어지며 진행하게 되고,
걸어도 지치지 않을 듯이 보이는 낙엽이 푹신한 숲길이 이어지다가,
세금 낭비의 흔적이 역력한 내림길을 내려서고,
아무리 지쳐 있어도 계속 되었으면 좋을 숲길이 이어지더니,
따르던 등로가 좌측으로 휘어지며 남양홍씨 묘원으로 내려서는데 앞쪽으로 감돈저수지가 내려다 보이고,
묘지길을 따라 포장도로에 내려서서 우측으로 보이는 삼거리 갈림길인 감돈재에 도착하는데,
<감돈재/넘어골고개(甘豚峙, 60m)>
전남 무안군 몽탄면 달산리 넘어골과 청계면 월선리 독골마을 사이의 고개이다. 815번 지방도가 지나며 고개 아래에는 꽤나 큰 감돈저수지가 있고, 이곳에서 북쪽으로 가면 목포대학교가 나온다. 지명의 유래는 감돈마을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데, 마을 뒷산의 산세가 험하여 은신하여 살기가 좋아 “돈(豚)”자를 써 마을 이름을 감돈이라 하였다고 하며, 일로읍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감돈리는 북동쪽으로는 몽탄면, 북서쪽으로는 청계면 월선리와 그리고 서남쪽으로는 삼향읍에 접하고 있다.
돌아본 감돈재 날머리 방향 도로는 달산수원지와 목우암, 법천사로 가는 포장도로이고,
다음번 대봉산 방향 감돈재 들머리는 삼거리 도로 건너편 전봇대 옆으로 이어진다.
감돈재 좌측에는 버스를 주차할 만한 장소가 없어서 우측 청계면 방향으로 고개를 넘으면,
목포장애인요양원 앞 도로 건너편에서 기다리는 애마에 오르며 영산기맥 아홉 번째 산행을 마무리한다.
도로 우측 목포장애인요양원 전경.
일찌감치 탈출하여 목포시내를 둘러보던 분들과 함께 목포시내의 사우나에서 몸을 녹이고,
이집저집 기웃거리다가 찾아든 '옛날초가집'이란 백반집에서,
모처럼 맛깔난 전라도 음식을 먹으며 흥겨운 뒤풀이 시간을 갖는다.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식당의 번창을 위해 일찌감치 자리를 파하고 일어나,
귀경길의 서해안고속도로 부여백제휴게소에서,
일찌감치 탈출하신 분들이 목포의 동부시장을 싹쓸이하여 사 온 먹거리로 2차 뒤풀이 시간을 가진다.
산에는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세상엔 좋은일이 있으면 나쁜일도 있다.
영산기맥에 가시밭길 끝났다고 좋아했더니,
오르내림이 왜이리도 많으냐고 투덜거린다.
이것도 저것도 다 그게 그거다.
오로지 그게다 지 생각 대로다.
첫댓글 연징산 좌우갈림길에서 우측길로 가는 바람에 연징산을 왕복 3km 넘게 했네요..승달산까지 중간중간 멋진 바위봉들이 조망만 있었어도..다음에 다시 걸어보라네요.
산행의 즐거움보다 먹는 모습이 더 좋아 보이는 산행이였던 같습니다.이 것이 세월의 무게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산행기를 보며 기억을 새로이 다듬어 봅니다.즐감했습니다.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