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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장소 : 진양기맥 09차(쇠목재~막고개) 경남 의령군, 진주시.
산행일시 : 2024. 04. 27.(토)
산행코스 : 쇠목재 ~ 둠베기먼당(720.6m) ~ 자굴산(897m) ~ 바람덤(787m) ~ 좌골티재(1013번도로) ~ 464봉(좌틀) ~ 496.3봉 ~ 387봉 ~ 412봉 ~ 대의고개(머리재) ~ 망룡산(441.6m) ~ 385.1봉 ~ 361.1봉 ~ 316.3봉 ~ 천황산(345.0m) ~ 362.3봉 ~ 340.7봉 ~ 용당재 ~ 267.5봉 ~ 210.4봉 ~ 231.4봉 ~ 212봉 ~ 193봉 ~ 막고개(1007번도로) (총 18.3km, 9시간 소요)
산행참석 : 17 백두.
▶ 본디 금번 산행은 쇠목재에서 내리실고개까지 23km를 예정하였으나, 4월 기온으로는 이례적으로 30도를 넘어서며 거의 한여름을 방불케 하며 바람도 불지 않아 예정했던 내리실고개까지 가지 못하고 막고개에서 산행을 종료함.
<참고사항>
금번 구간은 경남 의령군의 자굴산을 오르는 것으로 시작하여 계속 의령군 내의 능선길을 따라 진행하는데, 망룡산에서 우측이 의령군 칠곡면에서 진주시 미천면으로 바뀌어 의령과 진주의 경계를 잠시 따르다가, 천왕산에서 좌측도 진주시로 바뀌며 온전히 진주시로 들어서게 된다.
소목재~자굴티 구간의 자굴산 등로는 잘 정비되어 있고 조망도 좋으나, 이후 대부분의 구간은 잡목이 심하고 등로가 불분명한 곳이 많으며, 특히 밤나무밭 부근의 기맥길에는 간벌하여 방치된 나무와 울타리 등으로 등로가 매우 거칠어 시간이 많이 걸린다.
<산행지도>
지난해 진양기맥을 이어오다가 사방으로 막힘없는 조망을 지닌 자굴산을 청명한 날에 오르려고 일정을 미루었는데, 내친김에 호미기맥을 완주하고 오는 바람에 많이 지체되어 황사와 꽃가루가 흩날리는 시기에 다시 진양기맥 마루금 잇기에 나서게 되었다. 아침에는 맑지만 차츰 구름이 낀다는 예보는 조망이 멋진 자굴산 정상에서 일출을 보고 그 이후는 별다른 조망이 없는 진양기맥길을 걸으면 되므로, 금번 진양기맥 자굴산 구간 산행에 나쁠 게 없을 것으로 보여 다소 느긋한 마음으로 산행일을 기다리다가 양재에서 산행 버스에 오른다.
쉬지 않고 달려 쇠목재에 도착한 버스에서 내리니 하늘에는 별이 총총이 박혀 있어 오늘 산행에 대한 기대를 부풀게 하지만,
<쇠목재(620m) >
쇠목재는 한우산과 자굴산 사이의 안부 고개지점으로, 경남 의령군 대의면 신전리 신전마을과 의령군 가례면 갑을리 갑을 마을을 잇는 1013번 지방도가 지난다. 도로 위로는 동물생태통로가 조성되어 있다.
『자굴산은 의령의 명산이요 진산으로, 궁류의 한우산과 가례의 응봉산, 용덕의 신덕산과 이어져 하나의 산맥을 이루고 있는데, 의령을 감싸고 있는 이 거대한 산맥 전체의 형상이 마치 황소를 닮았다고 한다. 자굴산의 우람한 덩치가 황소의 머리, 동남으로 길게 뻗은 한우산과 응봉산의 산줄기가 몸통이며 신덕산이 엉덩이 부분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자굴산과 한우산 사이에는 '쇠목재'라는 고갯길이 있는데, 이 고개의 잘록한 모양새가 마치 소의 목처럼 생겼다 하여 '쇠목재'로 불리고 있다. 쇠목재 아래 갑을마을의 옛 촌명은 '쇠목', '쇠목촌'이었으며, 쇠목재는 갑을마을에서 대의면 모의마을을 이어주는 옛날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고갯길이었다.』 (의령 군청)
사방으로 조망이 트인 자굴산 정상에서 일출을 맞이하기로 계획하였기에 다시 버스에 올라 새벽잠을 더 청해 본다.
자굴산은 고도가 897.0m로 꽤 높지만 쇠목재의 고도가 약 600m 정도이기 때문에 고도차는 그리 크지 않고, 자굴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데크목 계단과 흙길이 반복되면서 중간중간 편평한 곳이 있어서 쉬어 갈 수도 있고, 대체로 40여분 정도면 정상에 도착하게 되므로, 오늘 일출 시각인 05:40에 맞추려면 넉넉잡아 04:50분쯤에 출발하면 된다.
한번 깨어나서 다시 잠들기가 그리 녹녹한 일이 아닌지라 불꺼진 버스에서 잠시 뒤척이다 일어나, 산행 준비를 하여 버스문을 나서니 '남명숨길' 안내비석이 세워져 있고,
<남명숨길>
경남의 중심 의령의 진산으로 유명한 자굴산(해발 897m) 둘레길에 남명 조식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그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역사·문화적 테마를 제공하는 스토리텔링 숲길을 조성해 놓았다.
자굴산 둘레길은 자굴산 정상을 중심에 두고 해발 700m 선상에 조성돼 있으며 쇠목재에서 출발, 둠배기먼당-갑을전망대-백련사 사거리-내조전망대-절터샘-자굴티재 사거리-둠배기먼당을 수평으로 연결하는 연장 7.3㎞의 등산로다. 특히 골골마다 산재한 전설을 체험할 수 있는데, 이 가운데 둘레길 절터샘 인근에 있는 명경대(바위)는 남명 조식 선생이 공부를 하며 수행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남명 조식 선생은 스물여덟에 고향 합천 삼가에서 아버지 3년 상을 치른 뒤 경남 의령 자굴산에서 한문에 정진했다고 한다. 자굴산의 아름다운 풍광에 반한 남명 선생은 2년 가까이 자굴산에서 생활하며 공부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불태웠다. -안내문-
쇠목재 자굴산 방향 임도로 좌측 데크목 계단길로 들어서며 진양기맥 아홉번째 산행을 시작한다.
자굴산 방향 임도길 입구 좌측의 데크목 계단길을 잠시 오르면,
악귀의 출현을 감시라도 하듯 아름드리 소나무가 지키는 완만해진 데크길을 따라 오르게 되고,
급경사를 우회하여 오는 임도에 다시 접속하지만 이내 다시 좌측 숲길로 들어서서 오르면,
'쇠목정'이라는 현판을 단 팔각 정자가 있는 720.6봉쯤을 지나게 된다.
자굴산 꼭대기에 뜬 휘영청 밝은 달을 즐기고 싶지만, 새벽잠에 취해 있을 자굴산을 깨우려 정상을 향해, 잠시 전에 헤어졌던 임도에 합류하여 완만해진 능선으로 이어진 도로를 따르다가,
좌측 자굴산둘레길 방향 갈림길을 지나면,
자동차가 갈 수 있는 시멘트포장도로가 끝나며 커다란 쉼터 건물이 있는 공터인 둠배기먼당에 도착하는데,
직진의 자굴산 방향으로 데크목계단길이 이어지고 좌.우로 자굴산둘레길이 이어지는 사거리 갈림길 지점이다.
<둠배기먼당>
자굴산에 위치한 명승지로 '둠배기먼당'이란 이름은 '둠배기’라는 식물과 '먼당’이라는 지명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둠배기는 자굴산의 대표적인 식물이라 하며, 먼당은 고개나 산의 높은 곳을 뜻한다. 자굴산의 둠배기먼당은 정상부에 위치하며, 자연경관과 함께 역사적인 유적지로도 유명하다.
또한 둠배기만당은 도굴산에서 나오는 물이 바위를 가르면서 만들어지는 둠배기(물줄기)가 물결치듯 흐르는 모습이 담배 연기를 닮았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둠배기먼당에 대한 정확한 유래는 알기가 어려운데, '돔배기("간을 친 토막 낸 상어고기(Shark Meat)"라는 뜻의 경상도 말로 구이와 산적을 만들어 제사상에 올리던 음식 재료)'란 말과 '만당(산이나 고개의 꼭대기를 뜻하는 경상도 표현인 '만댕이' 또는 '만디'의 다른 표현)'이 합쳐진 이름이 아닐까 추측하는 경우도 있다.
둠배기먼당을 지나 자굴산으로 향하는 백두들.
의령군에서 남명 조식 선생을 소개(起)하고 정신세계(承)와 일화(轉), 집대성(結)을 통해 남명학을 이해할 수 있는 테마 둘레길을 조성해 놓았다. 2018년부터 3년에 걸쳐 조성한 이 둘레길은 자굴산 해발 600∼700m 사이의 7∼8부 능선을 돌아간다. 지리산 둘레길이 산의 아래 기슭을 걷는 것이라면, 자굴산둘레길은 상부를 돌아가는 환 트레일 코스다. 쇠목재에서 출발해 둠배기먼당~갑을전망대~백련사 사거리~절터샘~내조전망대~달분재~둠배기먼당을 수평으로 연결하는 총 7.4㎞로 4시간이 걸린다.
천년 다지송과 희귀목인 노각나무, 사람주나무, 비목나무 등의 다양한 수목 군락지를 만날 수 있어 상큼한 나무냄새를 맡을 수 있고, 인근의 절터 샘은 가뭄이 심해도 마르지 않고 흐르는 물이라 등산객의 몸과 마음을 적셔주는 희망의 샘이다.
좌.우로 자굴산둘레길이 이어지는 둠배기먼당을 뒤로하고 가파른 데크목계단을 오르면,
지난 구간의 한우산과 풍력발전기가 늘어선 우봉지맥 능선이 돌아다 보이고,
잠시 완만해진 암릉길이 나오더니 다시 가파른 데크목 계단길을 오르면,
지나온 한우산에서 동쪽으로 이어진 우봉지맥이 온전히 드러나 보이며,
가례면의 세 마을을 감싸며 동으로 뻗은 우봉지맥 능선이 붉은 새벽기운을 배경으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능선길을 막아선 커다란 바위를 좌회하여 올라,
4형제바위로 불러도 좋을 암봉 위로 올라서는 다시 가파른 데크목 계단길을 오르고,
잠시 진달래가 피어난 숲길로 나섰다가는 다시 데크목 계단길을 올라서는,
병풍을 펼친 듯 막아서는 암릉을 만나서는 우측으로 우회하여 오르는데,
뒤쪽으로 지난 구간에 지났던 한우산 뒤로 산성산이 수즙은 듯 머리를 살짝 내밀며 지켜보고 있고,
우측 아래로는 운해에 잠겨있는 대의면 신전리와 행정저수지가 내려다 보인다.
<자굴산 오름길에 바라본 대의면 신전리>
신전리는 밭이 많다 하여 '섶밭'이라 하였다가 차차 변하여 신전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하며, 서북으로는 합천과 경계를 이루는 한우산에서 서쪽으로 뻗은 지능선이고, 마을 앞에는 몇 해 전에 막은 행정 저수지가 있다. 마을 뒤 남쪽이 「재골티」(자굴티의 변음) 잿길로 의령 칠곡면으로 통하며 동북쪽으로는 가래면 갑을 마을로 연결되는「쇠목재」다. 특히 이 마을에는 옛날 방식 그대로의 「삼베길쌈」을 많이 하고 있으며, 여름철 모기 없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나뭇골이라 힘센 장골이 많았고 「깨돌」이라는 힘을 겨루는 민속놀이가 있었다.
넓은 평상이 마련된 쉼터를 지나 다시 데크목 계단길을 올라서면,
돌아본 한우산과 우봉지맥 능선 조망.
이내 다시 여러개의 넓은 평상이 마련된 쉼터를 지나게 되고,
다시한번 데크목 계단길을 올라서면,
이제 그 빛을 잃어가는 서쪽 하늘의 둥그런 달이 지켜보고 있는 오늘의 최고봉인 자굴산 정상에 도착한다.
<자굴산(闍堀山, 897m)>
경상남도 의령군 가례면·대의면·칠곡면 일대에 걸쳐 있는 산이다. 의령군의 진산이며, 좌굴산이라고도 한다. 북서쪽 비탈은 경사가 심하여 합천 쪽에서 보면 마치 병풍을 두른 것처럼 보이지만, 의령 쪽에서 보면 산세가 완만하다.
지명은 '성문 위에 높게 설치된 망루 모양으로 우뚝 선 산'이란 뜻에서 유래한다. 한글로 자굴산으로 쓰면서 한자는 도굴산(闍堀山)으로 표기한다. 원래 도굴산(闍堀山)으로 불렸으나 첫 글자를 '사'로도 읽으며, 사굴산에서 자굴산으로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향토학자들에 의하면 '闍'는 '성문의 망대' 또는 '성대'를 뜻할 때는 '자'로도 읽는다고도 한다. 자굴산이란 지명은 「세종실록지리지」(의령)에 "현 북쪽에 있다."라는 기사로 처음 등장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령)에는 "현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라는 기록으로, 「여지도서」(의령)에는 "관아의 북쪽 15리에 있다. 황매산에서 뻗어 나와 골짜기가 그윽하며, 그 사이에 기이한 형상이 많이 있다."라는 기사가 있다. 「대동지지」에(의령) "자굴산은(闍堀山)은 서북 35리, 삼가의 경계에 있다"라는 기사가 있다. 「조선지지자료」(의령) 모의면(현재 대의면), 「조선지형도」에는 도굴산(堵堀山)으로 각각 표기되어 있다.
산 중턱에는 옛날 신선이 놀고 갔다는 강선암과 갑을사지(甲乙寺址) · 보리사지 · 양천사지 등의 사찰 터가 남아 있다. 그리고 동쪽 산기슭에는 약 3m 깊이의 동굴과 금지샘이라는 천연 동굴 샘이 있다. 금지샘에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가 이곳에 침입하여 말에게 물을 먹이려고 하자 물이 갑자기 말라버렸다는 전설이 전한다. 조선시대에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이 그 경관에 홀려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노닐었다는 명경대도 있다. 조선시대에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뤘던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이 60세에 지리산 자락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후학을 양성했지만, 28세에는 이곳 자굴산 명경대에서 글을 읽고 뜻을 세웠다고 한다. 의령을 의병의 고장이라고 부르게 한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도 15세에 이곳 자굴산 보리사에서 수학했다는 기록이 망우당 전집에 남아있다고 한다. 보리사(菩提寺)는 합천 해인사를 창건한 지 100년 후에 세워진 사찰로서 8선방 9암자가 있었다고 하니 당시에는 굉장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던 모양이다. 1948년 5월에 이곳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시대 후기 것으로 보이는 보리사지 금동여래입상은 보물 제731호로 지정되어 현재 부산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자굴산(闍堀山) 설명문 >
의령의 자굴산은 고을의 주산이요 진산이어서 정기 맑은 명산이자 이름난 명산입니다. 해발 897m의 홑 산이지만 부드러운 산세와 기암괴석이 많은, 그야말로 산자수명(山紫水明)의 아름다운 산입니다. 30만 내외 군민의 올곧은 기질과 늠름한 기상에 넉넉한 심성 등은 모두 이 산에서 비롯되었다 할 것입니다.
어머니의 품같이 느껴지는 산이라서 인심좋고 살기좋은 고장일 뿐 아니라 역사에 큰 자취를 남긴 인물이 많이 배출된 전통 반향(班鄕)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산이름 한자의 "자(闍)"는 성문의 망대[성대(城臺)]의 뜻이고, '굴(堀)'은 우뚝 솟아 높다는 뜻입니다.
동쪽 방향 안내도.
<자굴산에서 내려다본 의령(宜寧)>
이 지방은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두 강과 그 지류의 유역에는 지석묘·입석 등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각지에 분포되어 있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은 아직 발견된 바 없으나 청동기시대에는 이미 상당한 인구가 이 지방 전역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시대에는 함안의 아라가야(阿羅伽倻)나 창녕의 비사벌(比斯伐) 영역으로 의령과 신반(新反) 지방이 정치 중심지 가운데 한 곳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신라가 아라가야와 비사벌을 차례로 병합해 지금의 창녕에 하주(下州)를 설치한 555년(진흥왕 16)까지는 이 지방도 신라의 세력권에 들어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 때 이 지방은 장함현(獐含縣)이라고 했는데, 757년(경덕왕 16) 의령현으로 개칭해 함안군의 영현이 되었다. 신반 지방은 본래 신이현(辛?縣) 또는 주오촌(朱烏村)·천천현(泉川縣)이라고도 했는데, 이때 의상현(宜桑縣)으로 개칭해 강양군(江陽郡:지금의 陜川郡)의 영현이 되었다.
1018년(현종 9) 의령현이 진주목(晋州牧)의 영현이 되었으며 1390년(공양왕 2)에 감무를 두었다.
의상현은 고려초 신번현(新繁縣)으로 개칭했으며 1018년 합주(陜州)에 소속되었다가 1390년 의령현의 영현이 되었다. 1413년(태종 13) 감무제도를 폐지하고 현감을 두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세종 때 의령현의 호구는 504호 1,629인이었고 신번현은 555호 982인이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는 4월 22일 고향인 유곡면 세간리에서 구국의 기치를 들고일어나니 이것이 의병의 효시이며, 이곳이 의병의 발상지였다. 그는 홍의(紅衣)를 입고 의병을 지휘해 의령·창녕지방에서 왜군을 물리치는 전공을 세워 홍의장군이라고 불렸다. 정유재란 때에도 그의 휘하에 모여든 군민을 이끌고 유격전으로 이 지방을 끝까지 지켰다. 지금 의령·창녕·현풍 지방에 있는 산성들은 대개 이때 곽재우가 수축한 고전장(古戰場)이다. 『의령현읍지』에 의하면, 1771년(영조 47) 당시 호구는 6,844호 2만 9,565인이었다.
대한민국에 가장 군세(郡勢)가 약한 의령군이지만 그래도 이곳 출신들은 자부심이 대단하고 인재들이 참으로 많이 배출한 곳이다. 특히 남강을 끼고있는 이곳이 우리나라 재벌을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 이곳 아닌가.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인 삼성(의령군 정곡)과 LG와 GS(진양 지수) 그리고 효성, 벽산(함안)이 이 지역이 배출한 재벌이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중국집인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하림각’의 소유자인 남상해 회장도 이곳(의령 유곡) 출신이다. 그 외에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알부자들이 수두룩하다.
남쪽 의령군 칠곡면 내조리, 외조리 방향 조망도.
기맥 길이 이어지는 서쪽 방향의 조망도.
북쪽 방향 조망도.
자굴산 정상에서 일출을 기다리는 백두들.
반 년을 기다려서 자굴산 정상에서 맞이한 일출(日出)!
지난 산행 호미기맥의 끝자락 호미곶에서 떠오른 아침해를 맞이한 백두들의 자굴산 정상 인증!
자굴산 정상에서의 벅찬 해맞이를 뒤로하고 자굴티재를 향해 이정표의 내조마을 3.2km 방향으로 들어서니,
좌측으로 담벼락인 듯 보이는 돌무더기를 지나게 되는데,
돌무더기 너머로 보이는 백화산 방향으로 뻗은 지능선 기슭에 퇴계 이황 선생이 명명한 가례마을이 있을 터이고,
<가례동천(嘉禮洞天)>
자굴산의 한 줄기가 남쪽으로 힘차게 뻗어 내리다가 문득 멈춘 곳의 넓은 골짜기 사이로 가례면 가례마을이 있다. 가례는 퇴계 이황 선생이 지은 마을이름이다. 퇴계 선생은 경북 안동에서 이곳 의령의 허씨 집안(허원보의 손서이며 둘째 아들 찬의 사위)으로 장가를 들어 처가에 왕래를 하였고, 처고모부인 수성제공의 집을 여러차례 드나들면서 집 앞의 돌 벼랑에 예절을 소중히 여기는 아름다운 고장이라는 가례동천(嘉禮洞天)이라는 네 글자를 지어서 남겼다.
밀양 박씨 졸당파보의 수성제공에 관한 기록에 “名其里曰 修誠 其洞曰 嘉禮洞天 載 宜寧郡誌“라 하고 “退溪題堂前石面曰 嘉禮洞天 至今 有四字刻”이라 하였다. 가례동천은 우곡동산(牛谷東山)의 서암(西巖)과 덕곡서당(德谷書堂)의 퇴계 암각문(巖刻文)과 함께 퇴계의 유묵선서(遺墨選書)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내 좌측에 금지샘과 절터샘이 있다는 이정표가 있는 능선삼거리에서 직진의 자굴티재 방향으로 진행하면,
<금지샘과 내조리 방면의 갈림길>
자굴산은 칠곡면 내조리에서 자굴티재를 거쳐 오를 수 있고, 금지샘을 거쳐 오를 수도 있으며, 달분재를 거쳐 오를 수도 있다. 물론 제일 짧은 코스는 쇠목재까지 자동차를 이용하여 오른 후, 정상까지 30~40분이면 오를 수 있는 최단코스도 있다. 일반적으로 가례면 개승리에서 백련암을 거쳐 오르는 코스가 좋다고 한다.
<자굴산의 금지샘에 관한 설화>
자굴산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에 3m 깊이의 동굴이 있으니, 그 동굴 속에는 천연적으로 생긴 샘이 있어 이 샘을 사람들은 금지 샘이라 부른다. 보기에도 한 바가지 퍼내면 없어질 물 같은데 아무리 물을 퍼내어도 줄지 않는다. 어떤 한발에도 물이 줄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폭우에도 물이 불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명주실 끝에 돌을 매달아 실 꾸러미를 풀어 넣어서 깊이를 재어 보았더니 실 꾸러미 3개가 풀리고 나서야 겨우 샘 바닥에 닿았는데 그 끝이 수십 리 밖인 정암진에서 나왔더라는 말이 있다. 또 어떤 사람은 굴속에서 연기를 피웠더니 그 연기가 남강의 솥바위가 있는 곳에서 나오더라는 전설도 전해진다.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이 샘이 그만큼 깊다는 뜻으로 꾸며낸 이야기들일 것이다. 그런데, 병자호란 때 청나라군이 침입하여 산세를 보고 요새를 만들기 위해 자굴산으로 올랐다. 청나라 군사가 말에게 물을 먹이려고 하자 어떻게 된 셈인지 아무리 퍼내어도 마르지를 않던 금지 샘의 물이 금세 한 방울도 남지 않고 모두 말라 버렸으니, 이는 필시 샘물도 적군의 말에게는 물을 줄 수 없다고 하며 무언의 항쟁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청나라군이 자굴산에 진을 치지 못하고 갔다고 한다. 이 뒤부터 이 지방 사람들은 자굴산의 금지 샘을 더욱 신령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잠시 완만한 능선길이 이어지다가,
철계단 내림길이 이어지는 암릉 전망대가 나오는데,
앞쪽으로 가야 할 진양기맥의 망룡산과 집현산을 물론 그 우측 멀리로 지리산 웅석봉과 황매산이 구름 바다와 하늘 바다 사이로 아스라이 조망된다.
<자굴산 내림길에서 바라본 대의면 신전마을>
서북으로는 합천과 경계를 이루는 산맥인데 마을 앞에 와서 갈모 모양으로 빼쪽 솟아「갈모봉」인데, 부르기로는「갈미봉」「갈비봉」이라 한다. 마을 앞발치에는 몇 해 전에 막은 큰 저수지가 있다.
마을 뒤 동남쪽에「재골티」(자굴티의 변음으로 보임) 잿길인데 칠곡, 의령으로 통하며 동북방에는 갑을로 연결되는「쇠목재」다. 특히 이 마을에는 옛날 방식 그대로의「삼베길쌈」을 많이 하고 있으며, 여름철 모기 없는 곳으로 유명하다. 나뭇골이라 힘센 장골이 많았고 「깨돌」이라는 힘을 겨루는 민속놀이가 있었다.
「갈모봉」에는 큰덤과 자연동굴이 있는데 임란 때 의병들이 숨어서 활을 쏘고 석전(石戰)을 했다는 「성덤」은 전란 때 애들과 노약자들의 피난처이기도 했다. 「학여봉」은 산의 형상이 학모양이기도 하지만 비가 오려고 안개가 짙게 덮이면 학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한다는 전설이 전한다. 또 마을 뒤로 한참 오르면 빈대 때문에 절이 망했다는 「빈대절터」, 돌너드렁 밑으로 물이 흐르는데 그 소리가 아주 음악적이라는 「땅골너드렁」, 한여름에도 5분 이상 견딜 수 없어 찬기운이 솟는「바람굴」,「정지새미」라는 자연샘이 있으며, 이 샘물은 신통한 약효가 있어서 온갖 부시름(부스럼, 종기)이 씻은 듯이 낫는다는 소문이 나있다.
꿈에라도 보고싶을 자굴산 내림길의 지리산 방향 운해 조망.
철계단을 따라 멋진 조망을 선사받은 전망바위를 내려서서,
가파른 암릉길을 잠시 더 내려가면,
커다란 바위가 수문장인 듯 지키고 선 '바람덤'을 지나게 되는데,
<바람덤>
자굴산에서 자굴티로 내려가는 능선 등로에 자리한 바람덤은 바람이 지나가는 길인 바람골을 이룬 거대한 바위로, 바위가 양쪽으로 갈라져 옴폭하게 생겼다. 자굴산이 소의 머리라면 바람덤은 소의 뿔쯤에 해당된다.
진양기맥으로 접어들면서 다른 지역의 지명에서는 쉬이 접할 수 없는 단어가 ‘덤’이다. 바위를 경상도 방언으로 ‘덤’ 또는 ‘덤바꾸’라고 부르는데 특히 서부 경남지역에 많이 등장하는 단어다.
좌측 내조마을 방향 갈림길을 두고 우측의 자굴티재 방향으로 진행한다.
능선 좌측 사면으로 이어진 호젓한 등로를 따라,
써래봉을 좌회하여 지나게 되는데,
좌측 의령 벽화산 방향으로 뻗은 지능선의 끝자락에는 이황 선생의 처가인 가례마을이 있을 터이고,
다시 능선 접속 지점에 '써래봉'이라 적힌 위치표시목(써래봉, 의령군 1-다)이 있는 커다란 바위를 우회하여 내려서서,
초록의 동굴속으로 이어진 낙엽 깔린 능선길을 따라 내려서면,
이정표와 남명 조식 선생의 일화 안내판이 있는 자굴산둘레길 갈림길을 지난다.
퇴계 '불사무의(不仕無義)', 조식 '도천지물(盜天之物)'
1548년(명종 3년) 조식 선생이 임금의 명으로 두 번이나 전생서 주부로 제수되었으나 거절했다고 한다. 그때 조정에 있던 퇴계 이황이 나오기를 권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때 주고받은 글로,
"불사무의(不仕無義) 벼슬하지 않는 것은 의(義)가 아니며 어찌 군신 사이의 큰 윤리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퇴계 언행록)"
"도천지물(盜天之物)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도 도둑이라고 하는데 하물며 하늘의 물건인 관직을 훔치는 게 도둑이 아니겠습니까(남명집)"라고 했던 남명 조식선생 말씀이다.
초록의 싱그러운 능선 숲길이지만,
제법 가팔라서 가끔씩 땅을 사 두는 분들도 계시고,
옛날 나무를 지고 가던 나무꾼이 지게를 내리고 쉬어가던 바위쯤으로 보이는 커다란 바위를 지나고,
야자메트까지 깔린 가파른 능선 등로를 내려서면,
달성서공과 합천이씨 쌍분묘가 나타나며 앞쪽으로 자굴티재 건너편의 가야 할 기맥 능선의 봉우리가 높다랗게 보이더니,
이내 팔각정자와 자굴산 등산 안내도 그리고 자굴산 입구 표지석이 있는 '자굴티재'에 내려선다.
<좌골티재/자굴티재>
경남 의령군 대의면 신전리에서 칠곡면 내조리를 잇는 1013번 지방도가 지나는 고개로, 개념도 상에는 '좌골티재'로 표기하고 있다. 자굴산을 의령군 칠곡면 내조리 일대에서 보면 산세가 완만하게 보여서 '좌굴산'이라고 하기도 한다고 하므로, 이 '좌굴'에서 '좌골'로 변이된 듯하다. 팔각정자과 자굴산 입구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고, 도로 건너편 대의 방향 낙석 방지 펜스가 끝나는 지점 전봇대 우측이 들머리다.
자굴티재까지의 자굴산 등로 상태가 너무 양호했기에 앞으로의 등로도 좋을 것이라 낙관하며,
도로 건너편 대의면 방향의 낙석방지 펜스가 끝나는 지점의 배수탱크 울타리와 전봇대 사이 들머리로 들어서면,
희미하고 거친 급오름길을 오르게 되는데,
이곳 좌골티재부터 산행을 종료한 막고개까지는 등로가 희미하고 거칠며 뚜렷하지 않은 곳도 많아 힘겹게 진행하는데, 날씨까지 한여름 날씨를 방불케 하며 시간도 많이 걸려서 예정하였던 내리실재를 4km 남짓 남기고 막고개에서 산행을 종료하게 된다
우측 아래로는 좌골티재에서 머리재까지 기맥 능선 우측으로 이어지는 임도가 내려다 보이고,
높지않은 봉우리와 안부를 지나 다시 거칠고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면,
가시나무와 잡목이 뒤엉킨 464봉에 올라서는 좌측으로 휘어지며 진행하다가,
앞으로 거친 등로가 이어져 여러 사람이 함께 앉을 장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496봉 직전의 안부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닥쳐올 난관은 꿈에서 조차 예상치 못한 채 느긋한 아침식사를 즐기고는 다시금 거칠고 가파른 오름길을 올라,
잡목이 빼곡한 정상에 삼각점이 있는 496.3봉에서 우틀하여 진행하게 되고,
계속해서 잡목들의 태클이 심한 거친 능선길을 따르다가,
연속하여 작은 봉우리를 넘고,
빼곡한 잡목터널도 지나니,
우측 의령군 대의면 중촌리 마전마을이 자리한 골짜기 방향으로 잠깐 시야가 트이고,
또다시 완만한 봉우리 하나를 더 넘으니,
우측 대의면 중촌리 마천마을과 좌측 칠곡군 산북리 죽공마을 방향으로 길흔적이 희미한 옛고개를 지나게 된다.
짧은 오름길을 올라,
완만한 능선으로 보이는 377봉쯤을 지나고,
그렇게 작은 봉우리가 연이어지는 거친 능선길을 따르다가,
기맥길이 좌틀하여 이어지는 392봉에 올라서 잠시 목을 축이며 다리쉼을 한다.
낯익은 선답자들의 표지기에 이끌려 392봉에서 좌틀하여 내림길로 들어서서,
잡목의 방해를 뿌리치며 내려서다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묵묘를 지나고,
우측 편의 커다란 물탱크로 연결된 파이프가 이어진 통로에 접속하여 좌측으로 내려서다가,
자굴티재에서 이어오는 임도에 내려서서 좌측으로 진행하다가,
등로 우측 아래로 보이는 모텔 건물 앞을 지나 대의매점 앞으로 나가면,
고갯마루 양쪽으로 폐쇄된 주유소와 휴게소가 위치하고 있는 대의고개에 도착하는데,
칠곡면 산북리 사람들은 이 고개를 '머리재', 고개 우측의 대의면 사람들은 '한티재'라 부른다고 한다.
<머리재(頭峴)/대의고개/한티재>
머리재는 경남 의령군 대의면 다사리와 칠곡면 산북리 사이에 위치한 고개로, 20번 국도가 지나며 휴게소와 주유소가 있다. 머리재는 두현(頭峴)을 우리말로 표시한 것이라고 하는데, 여암 신경준 선생이 쓴 “山經表”에는 豆峴(두현)으로 표기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지명을 새로 지정할 때 아마도 같은 발음이라고 고개이름을 '콩 두(豆)'에서 '머리 두(頭)'로 잘못 표기하여 순수한 우리말로 고쳐 쓸 때 '머리 頭(두)'를 그대로 머리재로 표기하게 된 듯하다. 머리재란 지명이 '머리' · '마루(산마루)' · '높다'라는 뜻으로, 험하고 가파르면서도 외진 고갯길이라 이 재를 넘다가 돈도 털리고 죽임을 당하는 일이 생기다 보니 머리가 잘리기 쉬운 고갯길이라고 한 것에서 유래하였다는 속설도 있다. '한티'는 '큰재', '높은 고개'란 의미의 고유어이며, 한자로 대현(大峴)이라고 한다. 이 일대에 역참인 대현원(大峴院)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의 어느 지역인지 확인할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대현(大峴)은 현 서쪽 30리에 있다."라는 기록으로 처음 등장한다. 「여지도서」(의령)에 "사굴산에서 뻗어 나온다."라는 내용이 있으며, 「대동지지」(의령)에는 "대현(大峴)은 서북 30리, 삼가 경계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지지」에는 "대현(大峴) 한틔재 "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조선 지형도」에도 지명이 기재되어 있다. –한국지명유래집 경상편-
많은 선답자들은 고개 좌측의 폐쇄된 S-OIL 주유소 왼쪽의 쪽문으로 들어서 절개지로 올랐지만, 최근에는 대의고개 쉼터 맞은편 옹벽이 끝나는 지점 표지기가 한두 개 걸린 곳을 들머리로 하여 산행을 이어가게 된다.
대의고개 쉼터 맞은편 옹벽 끝지점 들머리로 들어서서,
거칠고 가파른 족적을 더듬어 올라,
능선 등로에 접속하여 제법 뚜렷해진 등로를 따라 오르면,
이내 KBS 진주방송국 중계소(314.9m) 바로 직전의 임도에 접속하게 되고,
KBS 진주방송국 중계소 좌측 아래로 이어진 수레길로 들어서 잠시 진행하여서는,
KBS 진주방송국 중계소를 좌회한 지점의 능선에서 임도 수준의 널찍한 능선등로를 잠시 따르다가,
너른 능선 등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폐 원형철조망을 넘어서 거친 숲길로 들어서,
거칠고 희미한 등로를 따라 오르면,
KBS 망룡산기지국과 KT 이동통신 중계탑이 자리한 망룡산 정상에 도착하여,
<망룡산(望龍山, 441.6m)>
경남 의령군 대의면 천곡리와 칠곡면 산북리, 진주시 미천면의 경계에 있는 삼면봉으로, 좌측은 의령군 칠곡면이 이어지나 우측이 의령군 대의면에서 진주시 미천면으로 바뀌어 마침내 진주 시계로 들어서게 된다. 이 일대 골짜기의 분수계 역할을 한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망월산(望月山)이 병기되어 있다. 산 정상은 KBS 망룡산기지국과 KT 이동통신 중계탑이 차지하고 있다. 「조선지지자료」(의령)에 지명이 기재되어 있다. 지명은 망룡산 아래쪽에 '미리섶'이라는 천연 샘이 있는데 그 샘에서 큰 용이 나와 망룡산 위로 치솟아 올랐다가 승천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KBS 망룡산기지국 철망 울타리에 걸린 망룡산 산패에서 인증을 남기고는,
망룡산 내림길 우측의 컨테이너 박스를 지난 사각 정자 쉼터에서 배낭을 내리고,
오늘 새벽 자굴산 정상에서 내려다보았던 의령의 벽화산 방향을 조망하며 잠시 쉼을 한다.
10여분의 쉼으로 다소간 열기를 식히고는 원형 저수조 직전에서 우측으로 접어들어,
과수원 주인으로 보이는 의령여씨(宜寧余氏) 가족묘원을 지나 좌틀하여 내려서면,
복숭아 과수원 가장자리로 이어진 편백나무 울타리를 따르게 되고,
과수원 남동쪽 가장자리 방향으로 진행하여,
나뭇가지에 한두 개 걸린 표지기에 이끌려 다시 거친 숲길로 들어서서,
산꾼이 아닌 멧돼지들이 좋아하는 길이 이어지다가,
그저 밋밋해 보이는 봉우리 나무둥치에 산패가 걸린 385.1봉에 올라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어 내려선다.
허리조차 펴지 못하는 빼곡한 잡목숲 터널로 이어지는 등로를 따라,
아무런 표식이 없는 361.1봉을 넘고,
쉴틈없이 이어지는 장애물의 방해를 뚫고 희미한 등로를 더듬어 진행하는데,
오늘 산행의 길잡이로 진행하고 있는 나의 정면에서 후미 분들이 불쑥 나타나는지라,
보는 나도 놀랐지만 앞에서 나타난 분들도 어이가 없어하며 무척이나 당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지도를 확인하는데,
후미로 오다가 길을 잘못들어 양촌리로 내려섰다가 신남리를 거쳐 기맥능선에 다시 접속하여서는 방향을 착각하여 거꾸로 진행 중임을 확인하고,
반대로 진행하던 분들을 돌려세워 잠시 더 거친 등로를 따르니,
알바 다녀온 분들이 좌측 신남리에서 기맥으로 진입한 지점인 우담사갈림길 안부를 지나게 되는데, 이곳이 왜 '우담사갈림길'이라 불리는지는 알 수 없고, 우측은 미천면 대곡마을로, 좌측은 칠곡면 수부마을로 이어지는 고개지점이다.
안부를 지나 용도 폐기된 송전탑 관리용 수레길을 따라 올라,
꾀나 널찍한 공터의 흔적이 남아있는 316.3봉에서 좌측으로 휘어져 내려서는데,
울창한 소나무 숲길이 싱그럽고,
좌.우로 길흔적이 있는 완만한 안부를 지나 수레길을 따라 오르다가,
송전탑이 있는 우측 사면으로 이어지는 수레길을 두고 좌측 거친 숲길로 들어서 오르면,
널찍한 공터의 흔적이 있는 봉우리(327m)를 지나게 되고,
완만한 내림길을 잠시 내려서다가 다시 꾀나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면,
양철판 이정표 기둥에 '천황산(341m)' 표지판이 걸린 천황산에 도착하는데,
이곳에서 기맥길은 급우틀하는 이정표의 '덕촌마을' 방향이고, 지나온 망룡산이 '망왕산'으로 오기되어 있다.
<천황산(341m)>
경남 진주시 미천면과 대곡면 그리고 의령군 칠곡면의 경계에 있는 삼면봉으로, '천황봉'이란 거창한 이름의 유래는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다. 숲으로 둘러싸인 정상에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데, 기맥 우측은 진주시 미천면이 이어지지만, 좌측은 의령군 칠곡면에서 진주시 대곡면으로 바뀌어 기맥길이 온전히 진주시의 영역으로 들어서게 되는 지점이다.
작은 봉우리가 연이어지는 잡목 능선길이 이어지며 산행이 예상보다 더디게 진행되는 듯하여 걸음을 서둘러 보지만,
봉우리를 넘자마자 바로 안부를 지나서 오르는 빨래판 구간이 이어지며,
좌측 사면 방향의 우회로쯤을 못 본 듯 능선 오름길을 올라,
자그마한 묘비가 묘지임을 알려주는 묘지봉(336m)에 올라서는 좌측으로 진행하고,
완만해진 능선길을 따라 작은 봉우리를 넘어서 진행하면 '준.희'님의 산패가 걸린 362.3봉을 지나게 된다.
완만한 능선 등로를 잠시 내려서면,
#9 송전탑을 지나게 되고,
완만하지만 거친 능선길을 따라 지능선 분기봉인 334봉쯤에서 우측 능선으로 들어서면,
현재의 위치를 짐작할수 조차 없는 거친 숲길이 이어지다가,
작은 언덕 수준의 묘지봉(275m)에 올라서는 우측으로 휘어지며 내려서면,
좌.우로 길흔적이 있고 성황당 흔적으로 보이는 작은 돌무더기가 있는 용당재를 지나게 되는데,
고개 좌측 용암저수지가 있는 용당동과 우측 상미저수지가 있는 상미리 대곡마을을 잇는 고개다.
이어지는 능선숲길을 따라 작은 봉우리 2개를 연이어 넘어,
거의 봉분이 사라진 묵묘가 있는 280봉쯤을 지나고,
다시 작은 봉우리를 지나 잠시 오르면,
삼각점이 있는 267.4봉을 지나게 되는데,
잡목들이 빼곡하여 표지기가 없으면 봉우리인지 조차 모를 정도이고,
267.4봉을 내려서다가 우측의 지능선을 두고 좌측으로 휘어져 내려서면,
커다란 파란 물통 4개가 늘어선 지점에서 능선 우측 벌목지 상단으로 이어진 임도에 내려서서,
과거에는 밤나무단지였다는 우측 벌목지 상단의 능선으로 이어지는 임도를 따르게 된다.
거칠지만 숲속을 걷다가 햇살이 내리쬐는 벌목지대로 들어서니 갑자기 사우나에 들어온 느낌이 든다. 새벽에 걸은 자굴산 구간의 등로 상태가 양호했고 새벽이라 기온도 선선했기에 자굴티재를 지나 아침식사를 하면서 오늘 산행에 대한 우려도 까마득이 잊어버렸는데, 이는 오늘 산행 중 최고봉인 자굴산을 지나면 이후는 고도차가 그리 크지 않은 구릉성 산지라 등로가 다소 거칠다 하여도 그리 문제 될 게 없다는 인식도 한몫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긴장을 끈을 놓아버린 게 오늘 산행을 더욱 힘들게 했다. 4월 기온으로는 이례적으로 30도를 넘어서고, 특히나 이곳 의령과 전남 목포는 4월 기온으로는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하며, 바람한점 불지 않는 상태라 산행을 하기에는 무척이나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등로 또한 예상과 달리 작은 봉우리가 연이어지는 빨래판 구간으로 거친 잡목숲은 송아가루를 그득 머금고 있다가 지나는 산객들에게 뿌려대는 상황이라 산행을 더욱 어렵게 한다. 게다가 아직은 봄산행이라 물도 넉넉히 가져오지 않은 상태여서 백두산우회에서는 좀체 없었던 중탈을 결행해야 하는 사태까지 초래하게 된다.
앞쪽으로 다음 산행에서 오를 집현산쯤을 가늠하며 뜨겁게 느껴지는 햇살에 노출된 능선길을 따르다가,
돌아본 망룡산 우측 멀리로 새벽에 올랐던 자굴산도 가늠되고,
벌목지대가 끝나는 지점에서 다시 거친 능선 숲길로 들면,
우측 사면이 버려진 밤나무 단지인 능선을 따라 희미한 등로가 이어지다가,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따라 210.4봉에 올라서는 직좌틀하여 진행하게 되는데,
무더운 날씨에 거친 빨래판 능선을 따르느라 얼마 남지 않은 물을 아껴 마시며 잠시 뜨거워진 열기를 식힌다.
210.4봉에서 직좌틀하여 내려서다가 묘지가 나타나며 이어지는 묘지길을 따르다가,
좌.우로 길흔적이 뚜렷한 안부를 지나며 다시 밤나무 단지로 이어지는 수레길 수준의 등로를 따르게 되고,
밤나무단지 내의 안부를 지나 231.4봉쯤을 오르는데,
지나온 천황산과 자굴산이 뒤돌아 보이고,
231.4봉쯤에 올라서는 다시 수통의 물을 소비하며 잠시 열기를 식히고는,
거친 잡목숲길을 따라 안부와 작은 봉우리를 연이어 넘다가,
신촌재 직전의 축대를 쌓아 조성된 진주정씨 가족묘를 지나는데 후미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는데, 산행이 많이 지체되고 물도 떨어져 탈출이 불가피하다고 한다. 이쪽도 마찬가지 상황이라 탈출로를 찾아서 연락하겠다며 잠시 더 내려서니,
우측 신촌마을 방향 갈림길 안부인 신촌재에 도착하는데, 앞서간 분들이 후미팀과 통화를 하며 쉼을 하고 있다.
<신촌재/어옥고개>
경남 진주시 미천면 미곡리 신촌마을과 어옥리 어옥저수지를 잇는 고개로, 좌.우로 이어지는 길이 수레길 수준으로 넓고 뚜렷하다. 이 지역 어옥리 사람들은 어옥고개라 부르고, 미곡리 신촌마을 사람들은 신촌재라 부르는 모양이다. 산꾼들은 어옥고개라 많이 부른다. 성황당의 흔적인듯한 돌멩이들과 꽤나 큰 나무 한그루가 있다.
진주시 미천면(美川面)의 지명유래와 관련하여 전해오는 예기에 따르면, 세 고을(동향, 오방, 상미) 개울(川)로 흐르는 맑디맑은 거울 같은 세천(細川)이 뱀처럼 너울거리며 흐르고 있어 지나가던 어느 스님이 사천(蛇川)이라 이름지어 부르다가, 지역에서 연도는 알 수 없으나(융희 2년경으로 추정) 뜻있는 선비들이 혐오감을 주는 '사(蛇)'라 하여 '아름다울 미(美)'자를 붙여 미천이라 칭하였다고 전하여 온다.
무더위에 거친 빨래판 능선을 헤쳐오느라 많이 지친 상태에서 준비해 온 물도 거의 바닥난 상태라 목적지인 내리실고개까지 진행하는 것은 무리하다고 판단하여, 후미분들의 목적지인 막고개에서 버스가 기다리고 있으므로 3km 정도 남은 막고개까지만 진행하기로 하고, 후미에게는 이곳 신촌재에서 우측으로 내려가 신촌마을로 탈출하라고 연락하고는,
막고개를 향해 다시 거친 능선숲길을 올라,
잡목숲에 노간주나무 서너 그루가 보이는 213봉을 지나고,
작은 오르내림을 극복하며 좌측 어옥저수지 방향으로 지능선이 분기하는 212봉에서 직우틀하여 진행하다가,
작은 봉우리를 지나 우측으로 길흔적이 이어진 안부를 지나 오르면,
봉분이 낮아진 묘지가 있는 봉우리에서 우측으로 휘어져 진행하게 되고,
거친 잡목숲길을 헤치며 작은 봉우리를 넘자 다시 우측이 밤나무 단지인 능선을 따르게 된다.
밤나무 단지 관리용 뚜렷한 수레길을 따라 좌측이 밭으로 개간된 능선으로 들어서서,
좌측이 밭인 187봉에 올라서는 좌측으로 휘어지며 내려서다가,
좌측으로 이어지는 임도를 지나 오르면,
산불감시초소에서 감시인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오는 196봉에 오르게 되는데,
거의 모든 전파중계소와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봉우리가 그러하듯, 이곳 196봉도 사방으로 조망이 시원하게 트인다.
봄철이라 여분의 물이 없어서 미안하다는 산불감시인의 안쓰러워하는 인사를 뒤로하고 수레길을 따라 내려서다가,
능선 우측의 묘지 뒤로 진행하여 우측 산길로 들어서면,
다시 거친 숲길이 이어지다가,
시멘트 포장도로가 지나는 안부를 건너편 과수원을 가로질러 능선 숲으로 오르게 되는데,
포장도가 지나는 고개지점임에도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최근에 경작을 위해 개설된 도로인 듯하다.
길흔적조차 희미한 숲으로 들어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힘겹게 올라,
표지기가 두어 개 걸린 193봉에서 우틀하여 내려서고,
안부를 지나 다시 작은 봉우리를 지나서는,
우측 감나무밭 울타리 좌측으로 진행하다가 벌채되어 방치된 나무들로 진행이 불가하므로,
우측 울타리를 넘어 감나무밭 안으로 진행하다가,
기맥 능선이 좌측으로 휘어져 내려가는 봉우리에서 다시 좌측 울타리를 넘어 무성한 잡목지대를 뚫고 나가서,
선답자의 족적이 사방으로 흩어진 사면을 대충의 방향만 가늠하며 내려가면,
좌측 아래로 대형 저수조가 있는 안간 배수지가 내려다 보이는 절개지에서 우측 절개지를 따라 내려가다가,
안간 배수지 저수조 진입도로에 내려서서는,
아래로 이어진 도로를 따라 옛 주유소와 휴게소 건물이 자리한 막고개로 내려서면,
진주시 미천면 안간리와 오방리를 연결하는 2차선의 1007번 지방도가 지나는 막고개에 도착하여 산행을 종료한다.
<막고개>
경남 진주시 미천면 안간리와 오방리를 연결하는 1007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곳으로, 폐업한 휴게소와 주유소가 있고 그 옆에는 부속건물이 있다. 우측 100m 거리에 미곡리 상미마을과 신촌마을로 들어가는 길 표시판과 포장도로가 있는데, 이 길이 망월산과 363봉 사이의 상미 저수지로 가는 길이다.
막고개 도로 건너편 절개지 우측 끝지점의 다음구간 들머리를 확인해 두고,
기다리던 버스에 올라,
진주시 미천면 신촌마을회관으로 이동하여,
<진주시 미천면 미곡리 신촌(新村) 마을>
어느 때에 어느 성씨가 들어와서 새 마을을 이루며 살아 신촌이란 촌명이 생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옛 문헌에 성태동의 속방에 신촌이란 촌명이 있는 것을 보면 오래된 마을이다. 밀양손씨가 제일 먼저 들어오고, 다음으로 능성구씨가 들어왔다 하며, 김녕김씨와 진양강씨들도 살고 있다. 본 마을이 도로변을 따라 기다랗게 형성되어 있고, 이외에 여러 땀이 주위에 산재해 있으니, 동쪽에 있는 작은 메조골에 4, 5호의 농가가 살고 있고, 다리 건너 주걸정에도 네댓 집 살고 있다. 동리 남쪽에 있는 마을을 정자마을 또는 담장모티라 하니 예전에 정자가 있었다 하며 7,8호 농가가 도로변에 연이어 있고, 건너편 금동골에도 대여섯 집이 살고 있다. 마을 앞에 기다란 들이 펼쳐져 있으니 북쪽을 진웅등들이라 하고, 정면에 있는 들을 묘종견래(猫從犬來)들이라 하니, 들 서편에 고양이가 쥐를 쫓고 개가 쫓아오는 형국의 산이 있어 개에 쫓기어 고양이가 쥐를 놓쳤다는 뜻에서 이런 들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남쪽의 정자마을 앞들을 학들이라 하니 들 전체가 경리정리와 관개시설이 잘 되어 농사짓기가 편한 곳이다.
션한 수돗물을 들이키며 후미의 도착을 기다리는데,
그리 오래지 않아 마을 앞 기맥능선 방향에서 반가운 모습들이 점점이 보이더니,
무더위와 맞서 싸웠음에도 늠름한 자태를 흐트러뜨리지 않은 백두들이 고마울 뿐이고,
모두가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놓고 기다리는 애마에 올라,
진주시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는 웰가사우나에서 꽃가루와 땀을 닦아내고,
진주여고 인근의 대박생선정식이라는 생선구이집에서,
모처럼 맛깔난 음식으로 푸짐한 뒤풀이 시간을 가진다.
후일 대박생선구이 집을 오기 위해 진주에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식당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는,
느닷없이 들이닥친 무더위와 싸우며 힘겹게 걸었던 진양기맥의 기억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귀갓길에 오른다.
매우 좋았던 기억과 나빴던 기억이 오래도록 남게 되는데,
떠올리기조차 싫은 기억은 간혹 트라우마로 남을 수도 있다.
"사월에 더워봤자지 뭐!"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4월임에도 30도를 넘는 무더위에 바람한점 없는 거친 빨래판 능선길을 힘겹게 걸어야 했고,
배낭에 넣어온 과일과 모든 간식은 물론 물병까지 송두리째 비워버리고도 목적지가 한참이나 남아서,
하는 수 없이 중탈을 결행해야 했던 진양기맥 아홉 번째 산행은,
지난 산행에서 밟았던 호미곶 앞바다에서 떠오른 해를 자굴산에서 맞이한 순간과 함께,
분명 행복했던 추억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첫댓글 다시 올라본 자굴산 한우산 즐감했습니다.감사 감사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