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다음 자료를 읽고 <작성 방법>에 따라 서술하시오. [4점]
(가) 영의정 유성룡이 아뢰었다. “군정(軍政)을 정비함에는 대강령과 대절목이 있으니 신이 미루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종(祖宗)의 제도에는 8도의 각 고을에 모두 진관(鎭管)을 두어 병마절제사라고 하였으니 법을 세운 본래의 뜻은 진실로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 (중략) … 조종의 원대한 계획이 이와 같이 자세함에도 중세 이후로 좋은 법과 아름다운 제도가 일체 폐지되었고, 또 가벼운 생각과 얕은 꾀를 가진 사람이 스스로 자기의 뜻대로 새로운 규정을 만들어 내어 ( ㉠ )(이)라 명명하였습니다. 당초 을묘년 왜변(倭變)을 당하자 일시의 구급책으로 마련한 것이니, 이것이 겨우 소소한 적을 상대할 수는 있어도 대적을 제압할 방략은 못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 (중략) … 나라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른 이유는 비록 다른 잘못도 많지만, 대개는 ( ㉠ )이/가 그르친 것입니다. … (중략) … ㉡임진년 여름에 적병이 승승장구하여 곧바로 경성(京城)에 당도하게 된 것도 대체로 이 때문입니다.” - 선조실록 -
(나) 각도(各道)의 ( ㉢ )(이)란 곧 역(役)의 유무와 공사천(公私賤)을 막론하고 조련을 감당할 만한 자로만 단결하여 대오를 편성한 것입니다. 그 본뜻은 단지 위급한 전수(戰守)의 일에 쓰려는 것이지, 병조에서 교대로 상번(上番)시키며 부역군으로 쓰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 선조실록 -
(다) 훈련도감의 군량은 원래 국가의 경비로 책정되지 않았습니다. … (중략) … 그러다가 을미년 무렵부터 금군(禁軍)과 한량(閑良)으로 나누어 한량은 훈련도감에서 양료(糧料)를 지급하고 금군 이상은 호조에서 지급하였습니다. 당시 금군의 수는 수백여 명에 불과하였는데, 지금은 매년 달마다 시재(試才)로 입격해 금군에 제수된 숫자가 삼수(三手)만 해도 이미 1,217명에 이릅니다. ㉣매달 쌀 12두씩 마련해 준다면 일년 동안 지급해야 할 양료(糧料)가 2만여 석을 밑돌지 않을 것이니, 현재의 세납(稅納)으로는 충당하기 어렵습니다. - 선조실록 - |
<작성 방법> ◦괄호 안의 ㉠에 공통으로 들어갈 명칭을 쓰고, ㉠이 가진 취약점을 밑줄 친 ㉡의 상황을 참고하여 1가지 서술할 것. ◦괄호 안의 ㉢에 들어갈 명칭을 쓸 것. ◦밑줄 친 ㉣을 해결하기 위해 시행한 과세 정책을 세목(稅目)을 포함하여 서술할 것. |
<해설>
∙ ㉠제승방략체제
∙ ㉠제승방략체제 취약점 : 후방지역에 군사가 없어 일차방어선이 무너지면 그 뒤를 막을 방도가 없다.
∙ ㉢속오군
∙ ㉣삼수미 : 삼수미가 전란 후에 정규세목으로 변하여 1결당 2두 부과
[신뿌샘 4권 조선전기 468쪽]
진관체제는 15세기 이후 대립제, 방군수포제 등 군역제의 문란으로 인해 무너져갔고, 명종 10년 을묘왜변 이후에는 이에 대신하여 제승방략 체제가 등장하게 된다. 제승방략이란 유사시에 각 읍의 수령들이 소속 군사를 이끌고 본진을 떠나 지정된 방위 지역으로 가서 서울에서 보낸 경장이나 그 도의 병・수사를 기다려 지휘를 받는 전술이다. 그러나 이것은 후방 지역에는 군사가 없어 일차 방어선이 무너지면 그 뒤를 막을 방도가 없었으므로 임진왜란 초기 패전의 한 원인이 되었다.
[신뿌샘 5권 조선후기 51, 52쪽]
속오군은 거주지 중심의 훈련 방식을 채택한 ‘병농일체’의 군사 제도였고 하급 군관인 초관, 기총, 대총을 지역사람으로 선발하기도 하였다. …
…
속오군에는 양인과 천인 모두가 편성되었다. 정부는 사천(私賤)까지 속오군에 편입시켜 천인에 대한 국가의 직접 지배력을 강화하였고, 동시에 향촌의 재지 사대부 세력을 약화시켜 나갔다. 이 과정은 정부와 양반 지배층의 천인에 대한 인식에 변화를 가져왔고, 천인들의 신분 변동을 촉진하기도 하였다. 한편 설립 초기의 다양한 신분 구성과 달리, 이후 속오군은 점차 천인으로만 채워지는 양상이 강화되었고, 마침내 ‘속대전’에는 천예군으로 규정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중앙과 지방 군영에서 속오군에 편제된 사람들을 군액 확보 차원에서 다시 군보로 편성하는 경우가 늘어남으로써 이들 속오군의 이중 부담 문제가 커져갔고, 이 과정에서 속오군은 결국 군대의 기능을 상실하고 점차 수포군으로 변질되어갔다
[신뿌샘 5권 조선후기 48쪽]
훈련도감은 조총을 다루는 포수, 창검을 사용하는 살수, 활을 쏘는 사수로 구성된 삼수병 체제로 구성되었다. 상비군이자 급료병인 도감군들은 조총・화약 등의 군수품을 나라로부터 제공받았다. 한편 훈련도감은 각종 무기장을 자체 운영하여 군수품을 충당하였고, 둔전을 설치하여 군량을 비축하였다. 이처럼 훈련도감은 자체에서 무기 제조와 기술 개발에 주력함으로써, 조선 후기의 군수광공업 성장에 이바지하기도 하였다. 조선 정부는 이 훈련도감의 운영에 필요한 군비 확보를 위해 양계를 제외한 전국에서 특별세로 삼수미를 징수하고 있었다.
[한국사통론 327쪽]
왜란 중 훈련도감의 경비충당을 위해서 남부 5도에서 부가로 징수되었던 삼수미(三手米)가 전란 후에 정규세목으로 변하여 1결당 2두를 부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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