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휘는 석백(錫百)이고, 자는 붕지(朋之)로 성은 정씨(鄭氏)이다. 원조(遠祖)는 고려 시대에 동래 호장(東萊戶長)이 되어 공손하고 검소하며 베풀기를 좋아하여 장자(長者)로 일컬어졌다. 그 뒤로 드디어 크게 창성해져 우리나라의 명문대족이 되었으니, 사람들이 선행을 쌓은 보답이라고 여겼다.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익혜공(翼惠公) 난종(蘭宗) 같은 분이 성종을 보좌하여 공신에 이름이 올랐고, 문익공(文翼公) 광필(光弼) 같은 분은 중종을 보좌하여 사화(士禍)를 바로잡아 이름과 덕행이 역사서에 실렸다. 임당공(林塘公) 유길(惟吉)과 수죽공(水竹公) 창연(昌衍)은 부자가 연달아 재상이 되었으며 문장과 명망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그의 아들 사구공(司寇公) 광성(廣成)은 원씨(袁氏)와 양씨(楊氏) 같은 명문가의 자제로서 영리(榮利)를 헌신짝처럼 버리니, 군자들이 그 큰 용기를 칭송하였다. 이분이 익헌공(翼憲公) 태화(太和)를 낳았다. 익헌공은 세 조정에 재상이 되어 국정을 담당하여 국가에 큰 공훈을 세웠으니, 실로 공의 증조부이다.
조부의 휘는 재대(載岱)이니 공조 참의를 지냈다. 부친의 휘는 혁선(赫先)이니 통정대부에 오르고 목사를 지냈으며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된 연안 이씨(延安李氏)이니, 현령을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된 이영(李泳)의 딸이고, 영의정 이시백(李時白)의 현손이다. 아들 셋을 두니, 맏아들은 석삼(錫三)으로 도승지를 지냈고, 둘째는 석오(錫五)로 좌의정에 올랐으며, 공은 막내이다.
공은 숙종 기묘년(1699, 숙종25) 정월 21일에 태어났다.
영조 병진년(1736, 영조12)에 음직으로 영릉 참봉(寧陵參奉)에 보임되었다. 이듬해 광흥창 봉사(廣興倉奉事)로 승진하였다.
무오년(1738)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상의원 직장, 예빈시 직장으로 옮겼다가 사재감 주부, 형조 좌랑, 형조 정랑으로 옮겼다.
임술년(1742)에 평강 현감(平康縣監)에 제수되었다.
갑자년(1744)에 재령 군수(載寧郡守)로 승진하였다가 3년 만에 해임되어 돌아왔다. 이후로 해마다 제수되어 내직으로는 사옹원 주부, 한성부 서윤, 북부 도사, 장례원 사의, 종친부 전부, 장원서 별제, 의빈시 도사, 사옹원 첨정이 되었고, 외직으로는 대흥 군수(大興郡守), 함흥 판관(咸興判官), 은율 현감(殷栗縣監)이 되었다. 이것이 내외직을 역임한 이력이다.
무자년(1768, 영조44)에 공의 연세가 만70이 되자, 아들 만순(晩淳)이 시종신이 되었다고 하여 은혜를 미루어 통정대부에 오르고 첨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그사이 오위장(五衛將)이 되었다.
계사년(1773)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 하계)에 발탁되고 특지(特旨)로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갑오년(1774)에 가의대부(嘉義大夫 종2품 상계)에 올랐다.
신축년(1781, 정조5) 9월 17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83세이다. 이해 11월 6일에 서원(西原 청주) 지곡리(池谷里) 부곤(負坤)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전주 유씨(全州柳氏)로 승지 유태명(柳泰明)의 딸이다. 공보다 2년 늦게 태어나 공보다 4년 일찍 졸하였다. 처음 용인(龍仁)에 임시로 장사 지냈다가 을사년(1785) 4월 모일에 공의 묘소에 합장하였다.
4남 2녀를 두니, 맏아들은 만순(晩淳)으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다음은 의순(宜淳)으로 음직으로 참봉을 지냈다. 다음은 화순(華淳)으로 생원이 되었고 지금 부사(府使)이다. 다음은 문순(文淳)으로 일찍 죽었다. 딸은 현감 홍면호(洪冕浩), 군수 홍재연(洪載淵)에게 각각 출가하였으나, 모두 아들이 없다. 서자(庶子) 셋을 두니, 속(涑)은 감목관을 지냈고, 흡(潝)과 집(潗)이다. 서녀(庶女) 셋을 두니, 각각 이영규(李英圭), 조철(趙喆), 이유관(李儒觀)의 처가 되었다.
만순(晩淳)은 나의 선군이신 이조 판서에 추증된 홍진보(洪鎭輔)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아들 하나를 두니, 동간(東簡)이다. 두 사위는 박헌원(朴獻源)과 이철(李澈)이다. 의순(宜淳)은 현감 이보운(李普運)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두 아들은 동예(東藝)와 동채(東采)이다. 두 사위는 이재안(李在安)과 안석량(安錫良)이다. 서녀(庶女)는 둘인데, 각각 홍병철(洪秉喆)과 한광연(韓光淵)의 처가 되었다. 화순(華淳)은 좌의정 이사관(李思觀)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자식이 없어 족자(族子)인 동만(東萬)을 후사로 삼았다. 문순(文淳)은 대사헌 이이장(李彝章)의 딸을 아내로 맞았는데, 또한 자식이 없어 동채(東采)를 자식으로 삼았다. 속(涑)의 아들은 상유(相裕)이다. 집(潗)의 아들은 후유(後裕)이다.
나는 통혼한 집안의 자제로서 공을 향려(鄕閭)에서 섬기며 가만히 살펴본 적이 있었다. 공은 성품이 관후하고 도량이 통창하여 남을 대할 때에는 안팎이 평탄하여 온화한 기운이 말씀과 낯빛에 넘쳤으며, 친소나 귀천을 막론하고 한결같이 성심으로 대하였고, 입으로 남의 장단점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남의 곤궁함을 급히 여겨 구제하기를 기갈 든 듯이 하여 집안에 재물이 있건 없건 따지지 않았으므로 여러 차례 고을의 수령이 되었으면서도 집안은 항상 궁핍하였으나 끝내 신경을 쓰지 않았다. 평소 임원(林園)을 즐거워하여 관직이 없으면 곧 필마를 타고 교외로 나가 나무를 심고 밭을 갈았으며 지팡이를 끌고 소요하여 자취가 산골 노인이나 들판의 늙은이와 섞이니, 사람들은 공이 벼슬하는 사람인지를 알지 못했다.
효성과 우애에 대해서 더욱 독실하였다. 돌아가신 부모의 기일을 만나면 이미 늘그막임에도 반드시 몸을 재계하고 소식(素食)을 하였다. 중씨(仲氏) 의정공(議政公)과는 다른 마을에 살았는데, 공직에 있는 경우가 아니면 날마다 찾아가 즐거워하며 밤을 지샜다. 자매 중에 가난한 자와는 의복과 음식을 나누었고, 여러 생질을 보기를 자식처럼 하니, 친척들이 모두 의지하여 귀의처로 삼았다.
부인 또한 아름다운 행실이 있어 시부모를 잘 섬겼다. 시아버지 찬성공(贊成公)이 일찍이 시골집에 거처할 때에 부인이 정성을 다하여 봉양을 하였다. 심지어는 직접 물을 긷고 절구질을 하고 손수 채마밭의 푸성귀를 따서 올리기까지 하였다. 찬성공이 매번 아내 이 부인(李夫人)에게 말하기를 “우리 며느리의 효성과 공경이 이와 같으니, 내가 푸성귀를 먹어도 고기보다 더 달다오.”라고 하였다.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어서 시첩들도 불평하는 말이 없었는데, 마침내는 공이 오랜 장수를 누림에 이르러 영예로운 고명(誥命)을 받았다. 혼인한 해가 재차 돌아오자 회혼례를 열었는데, 관복에 홀을 들고 술잔을 올리는 자식과 손자들이 앞에 가득하니, 온 세상에 부러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것이 어찌 까닭이 없이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내가 일찍이 논해보건대, 정씨의 선조는 독실함과 후덕함으로 마음을 세우고, 부지런함과 검소함으로써 집안을 이루고, 겸양과 소탈함으로 처세하였으므로 관직은 존귀해져도 명성은 무너지지 않았고 문호가 성대해져도 사람들이 비방하지 않았다. 이것으로 능히 종족을 보존하고 집안을 화목하게 하여 자손들이 대대로 영화를 누리게 되었으니, 공과 같은 분은 능히 가문의 명성을 이어 그 두터운 보답을 누린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분은 명을 지어서 후손에게 알려줌이 마땅하다. 명은 다음과 같다.
질박하여 꾸미지 않으니 / 質而不矯
잘난 체하는 자들이 부끄러워하고 / 沾沾者之愧也
돈후하여 능히 베푸니 / 敦而能施
소견 좁은 자들이 경외하도다 / 齪齪者之畏也
이미 장수하고 이미 복을 받았으니 / 旣壽旣福
그 후손들 창성하리라 / 以昌其後嗣
[주-D001] 동지중추부사 정공 묘지명 : 정석백(鄭錫百, 1699~1781)에 대한 묘지명으로 이계가 61세 때인 1784년(정조8)에서 이듬해 사이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정석백의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붕지(朋之)이다. 1738년(영조14)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고 1768년에 아들 정만순(鄭晩淳)이 시종신이 되어 통정대부에 오르고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1773년에 75세로 가선대부에 오르고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주-D002] 익혜공(翼惠公) …… 올랐고 : 정난종(鄭蘭宗)은 1469년(예종1)에 예종이 훙서하자 정희대비(貞熹大妃)의 뜻에 따라 성종을 왕위에 올려 1471년(성종2)에 순성명량 경제홍화 좌리 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었다. 《國朝功臣錄》[주-D003] 문익공(文翼公) …… 실렸다 : 정광필(鄭光弼, 1462~1538)은 정난종의 아들로 1519년(중종14) 기묘사화 때 영의정으로 조광조(趙光祖)를 구원하다가 영중추부사로 좌천되었고 1527년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주-D004] 원씨(袁氏)와 양씨(楊氏) : 후한 시대에 많은 재상을 배출한 원안(袁安)과 양진(楊震) 두 가문을 말하는데, 나중에는 유서 깊은 명가(名家)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주-D005] 아들 …… 하여 : 정만순은 1764년(영조40) 2월 23일에 승지(承旨)에 임명되었고, 동년 5월 5일에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었다가 5월 9일에 파출되었으며, 1767년 8월 9일에 다시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承政院日記》[주-D006] 화순(華淳)으로 …… 부사(府使)이다 : 정화순(1740~?)은 자가 경중(景中)으로, 1762년(영조38)에 식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784년(정조8) 6월 29일에 남원 부사(南原府使)에 임명되었다.[주-D007] 의정공(議政公) : 정석오(鄭錫五, 1691~1748)로, 자는 유호(攸好),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1715년(숙종41) 문과에 급제, 내직을 오래 역임하여 벼슬이 좌의정에까지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