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일기]
“사랑은 영감을 주고, 지식은 인도한다”:
버트런드 러셀이 말하는 ‘좋은 삶’을 묵상하며
버트런드 러셀은 그의 에세이 《The Good Life (좋은 삶)》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삶에 영감을 불어넣고, 지식은 그것을 인도한다. 둘 중 어느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무엇이 좋은 삶을 만드는가에 대해 각기 다른 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러셀이 던지는 이 명쾌한 정의는, 인간의 감정과 이성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아주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 1. 마음의 충동(사랑)과 길잡이(지식)의 만남과 조화
얼마 전 산책을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우리 안에는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마음’과 ‘충동’이 생겨야 비로소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이다. 그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러셀의 언어로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우리에게 앞으로 나아갈 뜨거운 에너지와 영감을 준다. 하지만 눈먼 사랑은 위험하다. 그렇기에 ‘지식’이 필요하다. 지식은 그 사랑이 어디로 향해야 할지 방향을 일러주는 눈이자 길잡이다. 물론 지식 그 자체로는 앞으로 나아갈 힘이 없지만, 에너지를 품은 사랑과 만나 비로소 올바른 길을 찾아갈 수 있다.
📜 2. 충동, 책임, 그리고 어거스틴과 전도서의 시선
결국 인간은 “내 마음이 원하는 바”를 따라 살아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성경의 전도서는 청년에게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행하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고 권면한다.
이것은 마음의 충동과 사랑을 따라 살아가되, 그 충동이 이끄는 결과와 책임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고대 교부 어거스틴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하라”고 말했다. 이 말 역시 사랑이라는 거대한 동력 앞에, 제한된 지식과 진리에 대한 분별(책임)이 늘 함께 가야 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교회가 과거 성(sex)이나 인간의 본능을 무조건 더러운 것으로 치부하며 억압하려 했던 것과 달리, 러셀은 우리의 야성적 충동과 본능을 삶을 흥미롭게 만드는 소중한 동력으로 인정한다.
🌐 3. 외부의 억압을 넘어, 더 많은 이들의 욕구가 충족되는 공존으로
러셀이 정의하는 ‘좋은 삶’은 제멋대로의 방종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으로부터 강압당하는 삶을 거부하고, 지식의 인도를 받아 “더 많은 사람들의 욕구가 상호 충족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적극적인 의지의 공존이다.
외부의 율법이나 억압의 굴레를 떨쳐버리고, 진정한 사랑과 지식의 인도 안에서 타인과 함께 풍성한 삶을 가꾸어가는 것—이것이 바로 러셀이 꿈꾼 ‘좋은 삶’의 정점이다.
결국 좋은 삶이란, 내 안의 뜨거운 마음(사랑)과 세상을 바르게 분별하는 지혜(지식)를 손잡게 하고, 혼자가 아니라 서로의 욕구와 행복을 북돋아 주며 함께 살아가는 여정이 아닐까.
📎 [부록] 버트런드 러셀의 원문 및 번역문
💡 Original Text: The Good Life
Peoples differ as to what constitutes the good life. Some such issues are indemonstrable. Russell takes his view of the good life to be one such. In Russell’s view, love inspires and knowledge guides the good life. Either alone is insufficient. Love is more fundamental, since love leads one to seek knowledge by which to benefit the one loved. Love is an emotion of delight in and well-wishing toward another. Civilization should tame our animality, not replace it. Our drives keep life interesting. We can delight in only a relatively small number of persons.
But one should never surrender delight wholly to more generalized benevolence. That is where knowledge helps.
Knowledge is knowledge of facts and probable consequences of courses of action; no strictly “ethical knowledge” exists. We must experimentally test our morality to learn whether its strictures lead us to the goals we desire. “Oughtness” is not our desire; it is some else’s desire imposed upon us, often with rewards and punishments attached. The power of such thoughts lies in the approval and disapproval they bear with them. Approval and disapproval should be meted out to achieve purposes we desire. One cannot coerce others effectively; it is im-possible. But one can alter the calculations they make by imposing rewards and punishments and approval and disapproval. Human desire is the moral compass. Ethics is merely science plus desire. To live in love guided by knowledge is to say: I desire to live as and among others whose actions cause more, rather than fewer, desires to be satisfied.
🇰🇷 한국어 번역문: 좋은 삶
무엇이 좋은 삶을 구성하는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다. 그러한 문제들 중 일부는 증명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러셀은 자신의 ‘좋은 삶’에 대한 관점 역시 그러한 것들 중 하나로 여긴다. 러셀의 견해에 따르면, 사랑은 좋은 삶에 영감을 불어넣고 지식은 그것을 인도한다. 둘 중 어느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랑이 더 근본적인데, 왜냐하면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익이 될 지식을 찾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사랑은 타인에 대한 기쁨과 선의의 감정이다. 문명은 우리의 야성(동물적 본성)을 억눌러 길들여야 하지, 완전히 대체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본능적 충동은 삶을 흥미롭게 유지해 준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소수의 사람에게만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기쁨을 전반적인 박애에 완전히 양보해 버려서는 안 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지식이 도움을 준다.
지식이란 사실에 대한 지식이자 행동 과정이 가져올 결과에 대한 확률적 지식을 뜻하며, 엄격한 의미에서의 “윤리적 지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도덕적 제약들이 우리가 원하는 목표로 우리를 이끄는지 알기 위해 우리의 도덕성을 실험적으로 검증해야 한다. “~해야 한다(Oughtness)”는 우리의 욕구가 아니라, 대개 상벌이 수반된 채 우리에게 강요된 타인의 욕구다. 그러한 관념들의 힘은 그것이 수반하는 승인과 거부(찬사와 비난)에 있다. 승인과 거부는 우리가 바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부여되어야 한다. 타인을 강압하는 것은 효과적이지도 않으며 불가능하다. 그러나 상벌과 승인·거부를 부과함으로써 타인이 행하는 계산을 바꿀 수는 있다. 인간의 욕구는 도덕의 나침반이다. 윤리는 그저 과학에 욕구가 더해진 것일 뿐이다. 지식의 인도를 받는 사랑 속에서 산다는 것은 곧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과 같다. “나는 더 적은 욕구가 아니라 더 많은 욕구가 충족되도록 행동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 함께 살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