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수용소 꽃양귀비
김재호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는 6월이면 꽃양귀비가 붉게 핀다.
6.25 존에서 포로교육 존으로 이어지는 계곡에 놓인 다리를 지나면 산기슭 길가에 꽃양귀비의 붉은 꽃잎이 바람에 하늘거린다.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린 탓인지 가녀린 줄기와 긴 꽃자루가 애잔함을 느끼게 한다.
유럽과 북미의 여러 나라에서는 꽃양귀비를 전장에서 산화한 군인의 영혼을 상징하며 그들의 희생을 잊지 않겠다는 기억의 꽃이다.
‘플랑드르 들판에 꽃양귀비 피었네
줄줄이 서 있는 십자가들 사이에
그 십자가는 우리가 누운 곳 알려주기 위함이네’
1차 세계대전 당시 벨기에의 플랑드르 전선은 캐나다 국군의 무덤이 되었다. 비가 내리면 늪으로 변하는 그곳에서 독일군의 포격으로 수많은 군인이 죽었다. 그들의 주검을 거둘 여유도 여력도 없었다. 죽은 자리가 무덤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캐나다 군의관으로 참전했던 존 맥크리는 플랑드르에서 숨진 절친한 친구 알렉시스 헬머(Alexis Helmer)의 무덤을 찾아 나섰다. 줄줄이 서 있는 들판 십자가 무덤 사이로 꽃양귀비가 온통 새빨갛게 피어있는 것을 보고 읊은 시의 첫 소절이다. 이후 유럽과 북미에서는 꽃 양귀비가 현충일을 상징하는 꽃이 되었다. 영연방 국에서는 1차대전 종전일인 11월 11일을 우리나라 현충일과 같은 리멤버런스 데이(Remembrance Day)라 하여 무명용사의 무덤에 붉은 꽃양귀비(Poppy)을 바치고 전쟁에서 죽어간 군인을 기억하고 이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고 있다. 꽃양귀비는 전장에서 산화한 군인의 피를 상징하며 그들을 기억하는 꽃이다.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 피어있는 꽃양귀비는 그 가냘픈 모습과 선홍색 빛깔에서 6.25 전쟁 포로의 비애와 누님의 순애보를 기억하게 하여 애틋한 슬픔을 느끼게 한다.
‘전쟁포로는 언제나 인도적으로 대우해야 하며, 그 신체 및 명예를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라고 전쟁 포로 관리 규정에 명시되어있다,
그러나 한국 전쟁 당시 북한 및 중공군 포로를 수용하였던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전쟁포로 대우에 관한 규정’이 지켜지지 않는 또 다른 전쟁터였다. 친공 포로와 반공 포로 간의 대립으로 수많은 꽃다운 생명이 수용소 안에서 죽어갔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죽음의 공포가 짙게 깔린 총소리 없는 질곡의 전쟁터였다. 친공과 반공 포로의 진영 대립은 개인의 양심이나 의지와는 관계없이 집단의 이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블랙홀이었다.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은 6.25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누님에게는 남편을 회상하는 기억의 장소였다.
누님은 오랜 세월을 기다림과 그리움 속에서 살았다. 결혼 당시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던 남편은 6.25전쟁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행방불명이 되었다. 신혼의 정을 나눌 시간도 주지 않고 전쟁은 두 사람을 기약 없이 갈라놓았다.
전쟁이 끝난 뒤 누님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포로로 잡혀 있다가 석방된 지인을 통하여 남편이 그곳에서 함께 있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마도 고향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납치되어 북한군으로 편입되었다가 포로가 되어 거제도에 수용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었습니다. 그 뒤 누님은 자형이 살아있으니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기약 없는 기다림과 그리움의 삶을 살았다.
한복을 곱게 지으시는 바느질 솜씨가 누님의 생계 수단이 되었다.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밤을 꼬박 지새우는 날도 허다하였습니다.
긴 겨울밤 고요한 방안에 울리는 그 소리는 그리움을 녹이는 가락이었고 한 땀 한 땀 이어지는 고운 바느질은 금방이라도 들어설 듯한 남편의 두루마기를 짓고 있는 새댁의 설렘이었으리라.
지난달 우리 부부는 익산 원불교 요양원에 계시는 누님을 찾아갔다. 봉사활동을 하시다가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고 뇌 기능이 손상되어 기억 대부분을 상실한 체 요양원에서 여생을 보내고 계신다. 그래도 고등학교 뒷바라지를 했던 동생의 모습은 기억 속에서 지우지 않았는지 엷은 미소로 반겨주었다. 지난번보다는 감정 표현이 더 풍부한 것 같았다. 여전히 희고 고운 피부에 늘 미소 지으시는 옛날의 모습은 잃지 않으셨다.
그날 우리 부부는 누님이 출가 의식을 했던 원불교 총부 대법당에 갔다. 휠체어를 밀고 30분 정도 걸어서 도착하였다. 누님이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만날 수 있다는 소망의 끈을 놓고 원불교에 출가한 때는 쉰을 갓 넘어선 나이였다. 대법당 정면에 있는 황금빛 일원상 앞에 이르자 출가 당시의 감회를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 찾아내는 듯하였다. 비록 출가는 했지만, 누님의 투명한 눈빛은 지금도 부부간의 만남을 간절하게 소망하는 세속의 인연으로 젖어있었다. 누님의 사진첩에는 찢어지고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늘 첫 장을 차지하고 있다. 남편이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요양원으로 돌아오는 길가에는 연두색의 돌나물 꽃과 보라색 제비꽃이 소담스럽게 피어있었다. 제비꽃 꽃반지를 만들어 손가락에 끼워드리고 돌나물 꽃도 꺾어드렸다. 소녀같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꽃반지 낀 손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모습에 가슴이 아렸다. 누님의 의식이 결혼 당시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 것 같았다. 새신랑과 손잡고 제비꽃 피어있는 고향의 후미진 밭 언덕에서 돌나물 뜯어 바구니에 담고 꽃반지 만들어 끼워주면서 행복을 약속하던 꿈결 같은 신혼생활 속으로 빠져들었는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 남편을 기다리면서 만남의 끈을 놓지 않았던 누님의 삶이 사그라지는 기억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누님이 삶을 이어온 끈은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며 기억이었다. 기억에서 멀어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거제도 포로수용소기년공원에 붉게 핀 꽃양귀비에는 피어 보지도 못하고 사라진 젊은 영혼을 기억해 달라는 바람이 담겨있다.
누군가의 기억에 남아 있다면 그의 가슴에 살아있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