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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알이랑 코리아 선교회 - 알이랑민족회복운동 원문보기 글쓴이: 오소운
▶ 노아속회 참고자료 (2011. 6. 24.◀
한국교회의 "부림절"
1. 독립문 정초식에 부른 찬송
"교수님, 지난 시간 언더우드 선교사의 [찬양가, 1894] 강의를 마치시고, 그 시대에 [찬양가]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알아와 발표하라고 하셨는데….“
“제가 먼저 발표하겠습니다. 때는 1896년 11월 21일, 먼저 독립문 정초식 때 부른 애국찬송에 대해 간략히 말하면; 독립문 정초식에는 5,000 여명의 인파가 몰려 대성황을 이루었답니다. 당시 서울의 인구가 20만 내외였다 하니 대단한 인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찬양 순서는 벙커 선교사가 지휘하는 배재학당 남성찬양대가 맡았습니다. 당시에는 내외법이 심하여 혼성 찬양대는 꿈도 못 꾸었답니다. 그 날짜 「독립신문」 기사를 보겠습니다.
가. 건양 원년 12월 21일 독립문 주초를 놓는 예식이라.
○홀기(笏記, 주; 「차례」).
죠선노래는 배재학당 학원(學員)이 하고, 기도는 교사 아편설라 씨가 하고, 회장 연설은 회장 안경수 씨가 하고, ‘어찌 하면 독립을 영구히 보존할(까)’ 연설은 한성판윤 리채연 씨가 하고, 독립가는 배재학당 학원(學員)이 하고, ‘우리나라 전정(前程)이 어떠한(가)’ 연설은 외부대신 리완용 씨가 하고, 조선에 있는 외국 사람 영어와 조선말(통역)은 독립신문 사장 제손씨(서재필 씨)가 하고, 진보가는 배재학당 학원이 하고, 체조는 영어학교 학원이 하고, 그 끝에 차와 실과가 있다더라.
이 문장과 선교사가 남긴 영어문헌을 참조하여 그 때 순서를 만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죠션노래(KOREA) 배재학당 학생합창단
2. 정초(定礎) 위 원
3. 기도 아펜젤러 목사
4. 독립협회 회장 연설 안경수(安烱壽) 장군
5. 축사 「독립 보존의 길」 이채연 한성 부윤
6. 독립가(Independence) 배재학당 학생합창단
7. 연설 「아국의 미래」 이완용 외부대신(통역 서재필 사장)
8. 진보가(March) 배재학당 학생합창단
9. 훈련체조 영어학교 학생
- 다 과 -
《培材80年史》에 보면 그 날 일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독립문 정초식을 거행하던 당시, 그 식순 중에 唱歌 곧 愛國歌를 培材學堂이 맡아서 하게 되어, 갑자기 부를 노래를 만들게 되었다. 그때에 가사는 尹致昊 박사가 작사하였고, 곡조는 벙커 교사가 스코틀랜의 <놀래라이> 곡주1) 을 붙여서 연습시켜 정초식에 부른 것이다.
[주1] :
로렐라이(Die Lorelei)는 독일의 하인리히 하이네(Feinrich Heine, 1797~1856)가 1822년에 작사한 시에, 역시 독일의 작곡가 프리드리히 질헤르(Friedrich Silcher, 1789~1860)가 1837년에 작곡한 독일의 민요이다. 로렐라이란 「기다리는 바위」라는 뜻으로서, 독일 라인강 중류에 솟아있는 큰 바위인데, 그 바위 위에 금발의 미녀가 황금의 빗으로 머리를 빗으며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뱃사람들이 넋을 잃고 보다가, 바위에 충돌하여 죽어버린다는 라인강의 전설을 하이네가 시로 쓴 것이다.《신정 찬송가》121장에는 이 곡조에 찬송시를 붙인 「저 먼바다 파도 위에 배 젓는 선부는」이라는 레이몬드(R. W. Raymond)의 찬송이 있다.
이 식전에서 배재학당 찬양대는 모두 세 곡을 불렀는데, 「죠션노래」, 「독립가」, 「진보가」 등입니다. 먼저 「죠선노래」(KOREA)란 어떤 노래인가? 1908년 판 윤치호의《찬미가》1장에 있는 애국찬송(Patriotic Hymn)입니다. 우리말 제목은 「죠션노래」(KOREA요), TUNE NAME은 AMERICA인 것입니다. ‘피난처 있으니’곡조D인데 함께 부르겠습니다.
두번째 부른 「독립가」(Independence)도, 윤치호 작사임이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됐습니다. 培材80年史 204쪽에는 윤치호가 작사하여 「스코틀랜드의 놀래라이 곡을 붙여」 불렀다고 하였으나, 윤치호 저【찬미가】10장의 애국 찬송은 스코틀랜드의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곡조에 맞춰 부르는 「애국찬송」입니다. 다 아시는 대로 「로렐라이」는 독일 민요입니다.
[주] : '승자신손' ; '성자'(聖子)의 서울 발음으로서 임금님은 천손사상(天孫思相)에 의하면 거룩하신(聖) 하나님의 아들(子) 곧 성자요 신손(神孫) 하나님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후렴입니다. 현재 애국가의 후렴과 똑같습니다. 윤치호 장로는 찬필로 자기가 애국가를 작사했다고 적어 남겼습니다.
배재학당 학생들의 애국가가 끝났을 때 청중은 환호성을 지르며 열화 같은 박수갈채를 보냈다는 것이다. 이상입니다.“
2.
“이어서 제가 '한국인의 부림절'이란 제목으로 발표하겠습니다."
에스더서에 보면, 하만이 유대인들을 몰살하라는 아하수에로 왕의 어명을 받아 시행 직전에,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목숨을 건 충정으로 사태가 역전된 이야기가 있는데, 그 날을 유대인들은 지금도 [부림절, Purim]로 지키고 있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우리 나라에서도 일어났는데 그때 일을 발표하겠습니다.
때는 100여년 전인 1896년 9월2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종황제의 탄신일이 되자 언더우드 목사는 그가 담임한 새문안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당시 수용인원이 가장 큰 서대문 밖 모화관(慕華館)에서 황제 탄신축하 모임을 준비했습니다.언더우드 목사의 초청으로 정부의 고관들이 모여들었고, 기독교학교 학생들과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일반 시민 등 1,000 여명이 모였습니다.
예배는 기도로 시작됐고 강연과 찬송가 제창,주기도문 암송의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이 때 일을 언더우드 부인이 쓴 [한국에 온 첫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 of Korea), 이만열 역](172쪽)에서 발췌해보겠습니다.
"언더우드는 왕의 생신을 기념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기도 및 찬양 집회가 열릴 것이라고 널리 선전하였다. 단을 만들고 건물은 만국기로 장식되었다. 내각 중 몇 명과 뛰어난 한국인 연설가 두 세 명이 연설을 하도록 초청되었다. 단상에는 수많은 귀빈들을 위한 의자와 함께 오르간이 놓여졌다. 아무도 왕의 생신을 소홀히 한 사람으로 지목되고 싶진 않을 터이므로, 평민들뿐만 아니라 대신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한 모두 참석하였다. 물론 선교사들도 대부분 참석하였다. 건물 안에는 사람들로 꽉 찼고, 건물 밖에도 유리 창문마다 사람들로 빽빽하게 둘러 차 있었다. 이전의 어떤 모임도 이만큼 그리스도교를 선전해준 일은 없었다. 때문에 언더우드는 밤새 몇 가지 전도 소책자 수천 부를 인쇄하여, 젊은 그리스도인들과 (기독교학교) 학생들에게 자신이 준비한 찬송가와 함께 하루 종일 서울 전역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건물 둘레의 군중들은 서로 먼저 받으려고 아우성을 쳤다. 그 책자는 복음을 간략하고 명쾌하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찬송가는 [America](피난처 있으니 곡조)에 맞춘 황제 축복 애국가였다. (그 가사는 위 악보 참조.)
미션스쿨 학생들의 연합 남성찬양대가 이 노래를 부를 때, 글을 아는 사람들은 속으로 따라 부르고, 모르는 사람에게 가사를 읽어주기도 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음 날 [독립신문]은 논설에서 이 대회를 논평하였는데, 논설 전체가 한 문장으로 되어 있으나 편의상 적당히 끊고, 현대 맞춤법과 현대용어로 바꿔 그 요지를 인용합니다.
"어제 모화관에서 서울 예수교회 신자들이 대군주 탄신 경축회를 하였는데, 사람들이 거의 천명이나 모였다. 애국가를 부르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조선을 불쌍히 여기사 서양 나라와 같이 복을 받게 하여주소서' 라고 머리 숙여 기도하는 것을 보니, 하나님이 이 기도를 응답하실 것이라. 무엇보다 고마운 것은 예수교인들이 나라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런 대회를 열고, 만방에 이를 알리고, 애국가를 지어 교회학교 학생들이 불러 감동을 주었는데, 이 대회가 조선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은, 첫째 위국위민(爲國爲民)하자는 것이요, 둘째는 이런 마음을 온 국민에게 알리고 세계에 알리는 것이요, 셋째는 예수를 믿어 서로 사랑하며 도와주어 상하귀천 없이 평등하게 살자는 것이라. 하나님 앞에 가장 귀한 사람은 정의롭게 사는 사람으로서, 이런 사람은 금생과 내생에 복을 받을 것이라. 바라기는 예수 믿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행하여 이웃의 본이 되어 온 국민이 바른길을 가도록 힘써주길 바라는 바이라.
그런데 이 고종황제 탄신 축하모임에 [한국의 모르드개]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황해도 은율(殷栗) 고을에 사는 홍성서(洪性瑞)라는 부자였는데, 벼슬을 하나 사려고 큰돈을 가지고 서울에 왔다가 우연히 이 행사에 참여하여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것입니다. 그는 벼슬을 사려고 가지고 온 거금을 몽땅 털어서 언더우드가 만든 기독교서적과 [찬양가, 1894] 책, 그리고 이 많은 책을 싣고 갈 나귀를 사 가지고 고향에 돌아가 전도하여 [은율읍교회]를 세웠고 초대 영수(領袖)가 되었습니다.
4년이 지난 1900년. 홍영수는 이해 겨울에 일어난 이용익(李容翊)과 김영준(金永準)의 그리스도인 박멸 음모 사건 때, 이 엄청난 음모를 사돈에게서 미리 연락받아, 때마침 순회 전도여행으로 해주(海州)에 와 있는 언더우드에게 알려, 엄청난 비극을 막아낸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기묘하기도 합니다. 그 때 일을,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에 기록된 기사를 간추려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문장부호와 괄호 안의 글자는 제가 추가한 것입니다.
3. 한국판 하만들
"이 해(1900년) 겨울에 미국인이 경성 시내에 전차를 부설하니 승객이 많은지라. 경무사 김영준(金永準)과 내장원경 이용익(李容翊)이 (전하께) 건의하되 '전차를 그대로 두면 재원이 반드시 고갈하리라.' 하여 시민으로 하여금 차를 타지 못하게 하니, 미국인이 (이를) 탐지하고 황제 폐하에게 아뢰어 (전차 타는 것을 금지하지 말라는) 엄한 칙령을 내렸더니, 두 대신이 앙심을 품고 서양인과 기독교를 함께 멸할 계획으로, 이 교(기독교)의 폐해를 황제 폐하께 거짓으로 아뢰고, 칙교를 내려 같은 해 섣달 초하루에,
'국내에 거주하는 선교사와 예수교도인들을 일시에 도륙, 소탕하라!'
는 밀지(密旨)를 각 도에 비밀리에 포고하였으니, 당시 교회의 운명이 곧바로 위급에 처해 있었느니라.
은율군 향장(鄕長) 조 아무개(趙某)가 군의 사무를 겸임 처리하더니, 이 향장은 은율읍교회 영수 홍성서(洪性瑞)와 사돈간이라. 혼인한 집이 변을 당함을 긍휼히 여겨, 홍성서의 백부에게 비지(批旨)를 밀고하여 '화를 면할 방책을 생각하라'고 간절히 권하였더니, 홍성서가 이 말을 듣고 그 아들 명기(洪明基)를 해주에 파송하여 선교사 언더우드에게 급보를 전하니, 언더우드는 급보를 받고 경성 제중원 의사 에비슨(魚丕信)에게 라틴어로 전보를 치고, 에비슨은 미국 공사 알렌에게 이를 전하니, 미국 공사 알렌은 폐하를 알현하고 상주하여 엄준한 칙전(勅電)을 각 도에 급히 발하여 '외국인과 교도(敎徒)를 보호하라' 함으로 잔혹한 화를 면하였으니, 이는 옛날 페르시아 시대에 하만이 모르드개와 이스라엘 민족을 소멸하려던 흉악한 책모와 비슷하니라…."(161-162쪽)
그 때 급박했던 일을 언더우드 부인이 쓴 [Underwood of Korea](204쪽 이하)에서 인용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서울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소래에서 해주로 갔으나, 며칠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가 해주에 도착하자마자 은율로부터 한 사람이 급히 달려와, 한국 정부가 각 지방의 여러 수령들에게 보낸「비밀 서신」이 도착하였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하였다.
그 서신에는 '모든 유생들은 보름 후인 다음 달 초하루에 각 지방의 가장 가까운 사당에 모여, 거기서부터 집단적으로 서양인들과 서양 종교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죽이러 가고, 그들의 학교와 집과 교회를 파괴하라'는 명령이 적혀 있다고 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이 위급한 소식을 서울에 있는 선교부에 알려야 하는데, 영어나 일어 등 일반인이 아는 말로 하면 비밀이 누설될 염려가 있었으므로, 라틴어로 에비슨 박사에게 전보를 쳤습니다. 에비슨 박사는 고종황제의 주치의이며 당상관 벼슬에 있는 당시 주한 미국 공사 알렌 박사에게 알려, 먼저 보낸 칙령을 취소시킬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라는 칙령을 내림으로써, 초기 한국 그리스도교의 엄청난 대량학살을 미리 막았던 것입니다. 이것은「한국교회의 부림절」이라 할 만한 한국교회 역사에 아주 중요한 사건인데, 간접적으로 [찬양가, 1894]와 관련된 사건이라 생각하여 에피소드로 보고를 드립니다. 이상입니다.
"우와! 둘 다 대단하다!"
"두 사람 모두 아주 좋은 에피소드를 소개해 주었어요. 박수! "
“우와! 짝짝짝….”
"감사합니다. 그런데 교수님, 앞서 제가 인용한 책에 보면 고종황제 몰래 두 사람이 칙령을 내렸다고 언더우드 부인은 썼는데, 과연 그게 가능할까요?"
"암, 가능하고 말구. 1900년이라면 명성황후가 왜놈들에게 시해당한지 4년 후야. 고종황제는 언제 당신도 독살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궁중에서 만든 음식은 안 드시고, 언더우드 부인이 만들어 남편을 통해 보낸 음식만 드셨다는 거야. 밤이 되면 황제는 언더우드에게 '형제'라 부르며 '가지 말고 침전 옆방에서 짐을 지켜주오'라고 간청하여, 언더우드는 다른 선교사들과 교대로 권총을 차고, 매일 밤 황제를 지켰다는 거야. 불쌍한 황제시지."
"교수님, 그리스도인들을 몰살시키려 했던 [한국판 하만]에 대해서 아시는 대로 말씀해주십시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간단히 말하지. H. B. 헐버트가 쓴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란 책에서 그 두 사람에 대한 기사 일부를 읽어주고 강의를 마치지. 저자 헐버트 박사는 고종황제의 초청을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관립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수로 내한한 교육자로서, 한국을 위해 너무나도 큰일을 많이 한 분이다. 1949년 7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왔지만 기관지염으로 7일 만에 별세하여, 이 땅에 묻어 달라는 그의 유언을 따라, 한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양화진 묘지에 묻힌 분이야. 그 책에 보면 [한국판 하만] 두 사람에 대한 평은 이러해."
◇김영준
1900년은 김영준(金永準)이라고 하는 벼락부자의 전성시대였다. 그는 엄청나게 파렴치하다는 것 이외에 아무런 자산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엄청난 돈을 모을 수 있는 힘을 얻었다.…(209쪽)
◇이용익
이용익(李容翊)이라는 인물은 전에는 어느 고위관리의 집에서 청지기를 하던 사람이다. 그는 설사 파렴치한 일일지라도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그는 1880년대부터 수천 명에 이르는 송도의 인삼 재배인들을 등치는데, 탁월한 수완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무식한 시골뜨기였기 때문에, 돈을 많이 벌어 풍족한 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에도, 의관을 제대로 하는 법을 몰랐고, 범절도 말이 아니었다.…(210쪽)
그러나 노트북 PC로 백과사전에서 찾아보니 이용익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더군.
◇이용익
대한제국 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왕실재정을 확충하고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벌이는 등 왕실 위주의 근대화 정책을 추진한 중심인물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필(公弼), 호는 석현(石峴). 아버지는 고산현감을 지낸 병효(秉斅)이다. 선대는 무과출신으로 양반신분에 속했지만 중앙정계의 문신관료에 비하면 한미한 집안이었다. 5-14세에는 서당에서 공부했고 20세까지 주자학자인 초병덕(楚秉悳)에게 사사했다. 이후 고향을 떠나 보부상, 물장수로 전전하다 금광에 투자하여 부자가 되었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그는 민비(閔妃)를 업고 장호원으로 피신시키고 민영익(閔泳翊)과의 사이에 비밀연락을 담당하여 그 공로로 감역(監役)을 제수 받았다….
한편 김영준에 대해서는 백과사전에 독립된 항목이 없고 민영주(閔泳柱)의 항목에 그의 얘기가 나온다.
◇민영주(閔泳柱)
본관은 여흥. 아버지는 장호(璋鎬)이다. 1887년 정시문과에 급제한 뒤 참의내무부사를 거쳐 판서까지 지냈다. 1899년(광무 3) 전 비서원승 송정섭(宋廷燮), 궁내부수륜과장 강견희(姜見熙) 등과 함께 월미도 개척권을 인가받아 그 이권을 일본인 요시카와(吉川佐太郞)에게 팔았다. 이듬해 요시카와가 월미도 주민들을 쫓아냄으로써 이 사실이 발각되어 송정섭이 구금되었다. 그러자 아버지에게 화가 미칠 것을 막기 위해서 아들인 내부협판 경식(景植)이 평리원 재판장 김영준(金永準)에게 사건 해결방안을 상의했다. 이들은 왕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고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김영준이 경식과의 이해관계로 월미도사건의 전모를 고발함으로써 민영주가 투옥되었다. 이에 경식도 김영준과의 음모 사실을 고발해 김영준은 사형 당하고 경식․주석면(朱錫冕) 등은 유배되었다.
“오늘 좋은 에피소드를 발표한 두 사람에게 박수를….”
4. 선교사들의 활약 : 외교문서 모음
이 사건 당시 주한 미국 공사는 알렌(Allen)이었다. 그는 여러 선교사들로부터 이러한 보고를 받자 즉시 대한제국의 외부대신에게 공문을 보내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을 보해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1900년 9월 14일자로 주한 미국공사 알렌이 조선 외부대신 박재순에게 보낸 "선교사 및 교민(敎民) 보호 요청"이라는 제목의 공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회 제238호
각하;
저는 동봉한 정보의 개요에 각하의 주의를 요청하게 됨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가장 믿을만한 미국 선교사로부터 받았는데, 북부 변방에서 일어날 사건의 상황에 관한 것입니다. 특별히 소요가 10월달에 계획되고 있다는 보고에 주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감리 혹은 의주의 군수가 각하가 나에게 보내겠다고 약속했던 조선인 기독교인의 보호에 관한 지시를 받은 것을 부인하고 있다는 사실에 각하의 주의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조선 북부 변경의 시골 사람들은 분명히 아직 중국에서 일어난 소요에 대해서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소식을 듣기 전에 그들이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각하께서 이것의 신빙성을 확인하고 상황의 필요에 따라 그러한 소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실 것으로 확신하며 제 임의로 단지 그 정보만을 각하에게 전합니다.
각하에게 경의를 표하며
1900년 9월 14일
호레이스 알렌(Horace N. Allen)
조선 외부대신 박재순 각하에게"
여기에 첨부된 마펫(Moffet) 선교사의 보고 요지는 다음과 같다.
"부(附). 모페드 보고(기독 敎士 敎民의 구류 및 힐난 풍문)
1900년 9월 10일 마펫 목사의 보고
운산(雲山) 광산 지구의 서쪽에 인접한 지역인 구성(龜城)에서 두 지방 관리가 현지 기독교인들을 욕하고 체포하여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 관리들은 천마면(天馬面)과 사기면(沙機面)의 집강(執綱)인데 앞에 든 천마면의 집강은 두 명의 기독교인을 체포하여 많은 신문을 하고 심하게 때린 후에 석방하였다. 그러나 그는 추수 후에 외국인들과 현지 기독교인들을 모아들여 모두 죽이든지 내쫓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의주, 구성, 용천(龍川) 등 변방 지역에서 10월달에 부상(負商)들과 동학도들이 일어나 모든 기독교인들과 외국인들을 살해할 것이라는 보고가 일반적입니다. 동학도들이 북부 지방에서 늘어나고 있으며 그들은 기독교인으로 모여서 자신들의 교리 강론에 참여하기 위해서 기독교에 관심이 있는 척하고 있다고 합니다. 국경의 중국인 의화단(義化團) 주2)은 한국인들이 그들에게 가톨릭 신자나 개신교 신자들을 데려가면 15냥(10원)을 보상금으로 주었습니다.
주 2) :
의화단(義化團) : 1900년 초 외세에 대한 중국인들의 해묵은 감정이 반기독교운동으로 전개되면서 화북지방에서 일어난 난(亂)으로 북청사변(北淸事變)이라고도 한다. 원인(遠因)은 1898년 황하강의 범람으로 인한 산동지방의 기근이었다. 굶주린 농민들이 의화단 운동에 참가해 청조를 겨냥했지만, 중국 관리들의 노련한 공작으로 의화단의 분노는 청조에서 외국인들을 향하게 되어 많은 외국인과 그리스도인들이 살해되었다.
의주는 상당히 조용하지만 관리들은 기독교인들에게 적대적이며 서울로부터 기독교인들을 보호하라는 어떠한 지시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외무대신은 그러한 보호를 허락하는 지시를 보내겠다고 동의했습니다.
상당한 수의 상인들이 나중에 문제가 일어날까 봐 의주를 떠나고 있습니다.
영천에서 폭도가 공격하여 교회를 일부 파손하고 10명의 기독교인들을 잡아다가 그들을 심하게 때리고 나서 보내주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지방관에게 그들이 기독교를 박멸하면 안 되느냐는 청원서를 보냈습니다. 그 지방관은 '어찌 서학을 하는 오랑캐들을 박멸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대답했습니다."(“구한국외교문서”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