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그러나 긴 인연
- 피천득 「너」, 김철교 「사랑은 여백」 읽기
1. 삶은 인연들로 짠 비단
인간의 삶은 우연으로 점철된 인연들이 짜놓은 한 폭의 비단이다. 좋은 인연, 싫은 인연, 알아챈 인연, 나는 무심코 지나쳐버렸으나 상대방은 마음속 깊이 간직된 인연, 그런 인연들이 얽히고 설켜 한폭의 인간삶을 그려간다.
아름다운 인연으로만 엮여진 사랑을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은 행복한 인생이다. 그러나 피천득의 수필 「인연」에서, 아사코와의 마지막 만남 같은 인연은 차라리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고 금아(琴兒)도 쓰고 있다. 마치 아름다운 화폭에 때를 묻힌 것과 같은 인연이 되고 말았다.
2. 피천득 「너」 읽기
눈보라 헤치며
날아와
눈 쌓이는 가지에
나래를 털고
그저 얼마동안
앉아 있다가
깃털 하나
아니 떨구고
아득한 눈 속으로
사라져가는
너
- 피천득 「너」 『꽃씨와 도둑』(정정호 편, 피천득 문학 전집 1, 범우사, 2022) 전문.
‘깃털 하나/ 아니 떨구고’ 가는 뒷끝이 깨끗한 인연은 우리 삶의 보석같은 장식이 된다. 사람들은 이 시를 금아의 수필 「인연」과 연결시키지만, 필자는 모든 사람들의 모든 인연을 노래한 것이라고 읽는다.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보편적인 사건이라는 것이다. 만남과 헤어짐이 깔끔한 인연으로 남는 것이 행복한 인생의 요체가 아닐까 싶다. 뉴스에 혹은 주위에서 보면 얼마나 불쾌한 인연들이 많은가. 아무나 인연을 귀하게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이 시는 금아가 잠든 경기도 남양주 모란공원 무덤에 있는 시비에 새겨져 있다. 금아가 가장 아꼈다는 시다. 뒷면에는 필자를 비롯한 시비건립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있어, 금아와 아사코와 같은 인연보다 더 아름다운 인연을 기리고 있다.
3. 김철교 「사랑은 여백」 읽기
‘함께 나눈 시간들은 썰물처럼 멀어지고
비밀을 품은 당신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으리’
언젠가는 갈 수 있겠지
아쉬워했던 길
사랑은 그 길 모롱이 어디쯤에 살고 있는가
다음 세상에서 만나기 위해
남겨두어야 하는 여백은 아닌지
욕정이 소용돌이치던 장미도
계절의 끝물에는
한잎 두잎 시들어 가고
또 다른 계절이 오면 피어날
꿈으로나마 영글어 가는 것을
- 김철교, 「사랑은 여백」 『착각의 시학』(도서출판 현자, 2023.6)
이 시의 빌미가 된 것은 세계 음악계의 거장 그리스의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 Theodorakis)가 작곡한 ‘기차는 8시에 떠나네’이다. 당시 나찌에 저항한 그리스의 한 젊은 레지스탕스를 위해 만들어졌으며, 카타리나로 떠나 돌아올 줄 모르는 청년 레지스탕스를 기다리는 여심(女心)이 애처로운 여가수의 목소리에 실려 있다.
금아의 아사코와의 인연보다 슬프긴 하지만 더 아름답지 아니한가. 그 뒤에 다시 만나서 어쩌고 저쩌고 좋은 이야기든 나쁜 이야기든 덧붙여 있다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서사가 될까. 아무리 좋은 결말이라할지라도 그저 하나의 가십거리로 묻혀버렸을 것이다. 못이룬 사랑은 다음 생을 위해 여백처럼 남겨두면 더 아름답지 않겠는가. 한때의 격정적인 사랑은 만개한 장미꽃이겠지만, 결국 그 장미는 시들어 버리고 내년을 기약해야하는 것처럼, 인간의 사랑은 유한한 것이다. 다음 생을 기약하며 인연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것도 좋은 만남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