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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8. 04.
나의 문학 나의 詩
나의 그림자
相民 윤봉택
시 詩란 무엇인가?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시 詩는 『시경詩經』의 시를 말한다.
오경 가운데 으뜸이라 여기는 『시경 詩經』은,
본시 3천여 편의 시 詩로 편찬되어 있었으나, 공자에 의하여 詩를 305편으로 편집되었다고 하는바,
『논어』 「위정편」에서 공자는 시경에 있는 삼백 수의 시는 한마디로, ‘생각(詩)에 사악함이 없다(思無邪)’이다. 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
여기 ‘생각(思)에는 사악함이 없다(思無邪)’에서, 생각(思)은 시(詩)를 뜻하는 것으로, 즉 시 詩란 지고지순하여 티끌만한 사악함도 없는 것이기에, 사악함이 내재 되어 있는 시는, 시가 아니라는 것이다.『모시 毛詩』를 달리 『시경 詩經』이라고도 한다.
모시의 서문 「毛詩序」에 보면, 시 詩라는 것은 의지의 표현으로, 마음에 두면 뜻이 되고, 말로 하면 시 詩가 되는 것이다. 毛诗大序 詩者 志之所之也 在心爲志 發言爲詩。감정이 지극한 내면에서 솟아 나와 말로 표현하게 되고, 말이 부족하면 탄식하게 되고, 한숨이 부족하면 길게 노래하게 되나, 노래가 부족하면 손발이 춤을 추게 되나니, 이렇게 감정은 소리로 나타나고, 소리는 글월이 되어 이뤄지는데, 이를 음악이라고 한다. 情動于中而行于言 言之不足 故嗟歎之 嗟歎之不足 故永歌之 永歌之不足 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也。情發于聲 聲成文謂之音。
『毛詩正義』의 서문 「毛詩正義序」에 보면,시 詩는 공 功을 논하고 덕 德을 칭송하는 노래이고, 괴팍함을 그치게 하고 사악함을 막는 교훈이 되니, 비록 위하는 바 없이 스스로 하는 것이지만, 생명 生靈을 기르는 것이다. 夫詩者 論功頌德之歌 止僻防邪之訓 雖無爲而自發 乃有益於生靈
따라서 천지를 감동시키고 귀신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시 詩보다 나은 게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시의 작용이 크게 이로운 것이다. 故曰 感天地 動鬼神 莫近於詩 此乃詩之爲用 其利大矣
따라서 인문학을 문학·사학·철학 文史哲로 표현하는데, 가장 먼저 시작되는 게 문학이며, 이와 같이 문학의 꽃이 바로 시 詩라고 함에 있어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면 나의 문학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내 나이 칠순(2025년)에서, 기억할 수 있는 의식으로 살펴본다면,
나는 1956 병신년 음력 12월 1일 申時에, 서귀포시 강정동 4362-1번지 샛집(조부님이 둘째라서 택호를 샛집이라 하였다)에 사시던 아버님 파평 윤씨 제주 입도조(빈贇) 14대손 태흥太興(1901년생)·어머님 화순 오씨 제주 입도조(태고太古) 10대손 신생申生(1920년생) 사이에서 1녀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강정마을은 제주에서는 가장 논이 많고 물이 풍부하였기에 살기 좋은 마을이라 하여 일강정(一江汀)이라 불리던 마을이다. 그 마을에서도 가난한 농가에서 자랐다. 바로 집 앞으로는 ‘웃통물’에서 발원한 ‘골새’가 바닷가 정의논깍 까지 이어 흐르고, 여름에는 은어와 장어를 잡을 수 있었던 깨끗한 개울가에서 마음씨 맑은 선후배들과 어울지며 자랄 수 있었던 것은, 강정마을이 내게 안겨 준 최고의 선물이었으며, 이는 나의 문학의 영원한 자양분이 되고 있다.
내가 태어나던 해의 아버님 당시 연세는 55세, 어머님은 36세, 이렇게 내외분 나이 차이가 많았던 것은, 아버님께서 첫 부인(김월선)을 맞이하셨으나, 당시 할아버님(영지), 할머님(려을품) 내외와 같이 전염병에 감염되어 7일 간격으로 유명을 달리하셨기 때문이다. 이후 둘째 부인(강태현)을 맞이하셨으나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
1948.4·3 사건으로 남편을 여의신 어머님(오신생)을 세 번째 부인으로 맞아 우리 1녀 3남을 낳으시고는, 아버님은 1963년 지병으로 먼저 돌아가셨으니, 그 후 어머님이 겪으신 고초는 이루다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그런데 우리 어머님은 참으로 지혜로우신 분이셨다. 누구에게 글자를 배우지도 아니하셨다는데, 부엌 바닥에 부지깽이로 글자를 스스로 읽히셨고, 노래도 혼자 잘 부르셨다. 모르는 약초가 없어 겨울에는 약초를 캐어 달여 주문 판매를 하셨다. 자식들에게도 초등학교 입학 전에 ㄱ.ㄴ.ㄷ.ㄹ과 1.2.3.4.5 숫자와 덧샘 뺄샘을 가르쳐 주셨는데, 동생 용택이는 영리하여서 잘 따라했던 기억이 새롭다.
나 자신이 문학이 무엇인지도 전혀 모르면서 그냥 글월을 써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1969년 강정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문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당시에는 지금과는 달리 중학교 입학시험을 봐서 합격해야만 들어갈 수가 있었던 시절, 그때 나의 수험번호는 二 三一 번이었다. 한문에 무지했던 나로서는 교실 외벽에 세로로 쓰여 붙여진 합격자 벽보에 二三一이라는 표기는 132번인지, 222번인지, 231번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합격자 번호가 번호 차례로 쓰인다는 사실을 모른 나는 불합격이 되었구나하고 눈물 훔치고 있을 때, 학교의 마을 선배 홍석범 형이 나타나 “봉택이 너 무사 울멘”하면서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난 형에게 ‘나 번호 어서’, 형이 물었다. ‘너 번호 멫번’, ‘231번이라’, 그랬더니 선배가 ‘저디 너 번호 있네’라시며, 손가락으로 번호를 알려주고 나서야, ‘울던 장쿨레비 벹나듯’ 븽색이 웃을 수가 있었다.그땐 지금처럼 중학교 입학 전에 영어를 알고 간 게 아니라, 알파벳조차도 쓸 줄 모르는 상태로 입학하게 되었고, 1학년 B반이라는 반 편성에, 1~2반은 알아도 ABC의 차례를 몰랐던, 그래서 교실조차도 글자 형태 보고 찾아가야만 했던 나의 무지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교실 벽면에 붙여진 시간표를 보니, 반공일 토요일 마지막 시간에 H·R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겨우 찾아 읽기는 읽었는데, 도대체 저 문자가 의미하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린 건 아니었다.당시 담임 선생님은 이북에서 피난 오신, 이북 사투리가 유난스러우셨던 문윤종 선생님이셨는데, 칠판에다가 문예반, 서예반, 운동부 등등을 쭉 써놓으시고는 하고 싶은 것을 하나씩 고르라고 하셨다. 반마다 특징을 설명하시는 선생님 말씀에, 나는 얼릉 문예반을 선택하였다.
글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아마 그때부터 나의 내면에서는 글월에 관한 생각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글 한 편 써보질 못했지만, 얼굴 모르는 선배들 따라, 원고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면서, 일기장 한번 써본 바가 없는 내가 글 쓰는 흉내를 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70년 2학년 여름방학 때, 우리 집에 어머니 만나러 오셨던 해인사 보살님 따라, 경남 합천 해인사로 따라나섰던 게, 절에 머물게 된 인연이 되었다.
조계종 종정을 세 번이나 역임하신 큰스님 윤고암 대종사 문하로 입산한 나는 노스님의 각별하신 배려로 스님이라는 의미도 모르면서, 1971. 3. 15. 부산 범어사로 가서 석암 대율사에게 사미계(법명 正曉)와 보살계를 받고, 해인사로 돌아와 해인승가대학 사미과에 덜컥 입학을 하였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번역된 경전이 있는 게 아니라, 목판본 원전을 가지고 조사 어록이나 경전을 배웠던 시기라, 한문에 한글 토(?)를 달아 암기로만 하였기에, 배움에는 시간(?)이 넉넉하였다.그래서 당시 도서관이었던 경학원에 들어가 서양 고전 소설, 우리나라 단편·중편·장편소설, 수필집 등 문학·철학 서적을 보이는 대로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 시기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를 읽었고, 신문 연재되었던 『별들의 고향』, 『연개소문』 등을 빠짐없이 읽고 읽었던 기억이 새록하다.
그 당시 우리 은사 스님(선효 성학)께서는 1976년 《시조문학》 봄호(6호), 시조 「산난」 으로 1회 추천, 이듬해 1977년 조선일보 신춘 문예 시조 부문에 「임진강」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용하셨다. 그때 나는 은사 스님의 등단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부러웠었는지 모른다. 이때 나도 등단해야지 하는 결심이 섰었던 것 같다.
그러는 과정에 경북 상주 남장사 주지로 계셨던 수봉 성웅 사숙께서 잠시 남장사로 와 소임을 봐달라는 말씀이 있어서, 마침 해인사에서 제2 보충역 근무를 할 때라, 바로 상주에 있는 109연대 2대대로 근무지를 옮기니, 인사 부서에서 근무를 하라고 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지역 인사들과 교류를 갖게 되었는데, 상주에서 문학 활동을 하시는 ‘삼백동인’의 시인 박찬선 선생을 만나게 되면서부터이다. 이 시기에 박찬선 시인께서는 〈삼백동인〉에 작품 게재와 시화전에 작품을 출품하라시며, 작품 활동을 독려하여 주셨지만, 감히 작품을 게재하거나 출품하지는 못했었다.
이후 박찬선 시인은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골목 2층에 있던 당시 『현대시학』을 찾아 주간이셨던 전봉건 시인을 직접 만날 수 있도록 배려하여 주셨고, 상주를 찾은 박재삼 시조시인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만들어 주는 등, 나의 문학 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셨는데,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우리 은사이신 윤선효 스님을 비롯하여 석지현·조오현·김정휴·황청원 스님 등이 등단하여 문단 활동이 이뤄졌던 때라, 학승으로 남고 싶었던 나에게는 문학에 입문하는 동기부여가 되면서, 1975년부터 1995년 중반까지 20여 년 넘게 『현대시학』을 받아 보며 나름대로 시를 습작하게 되었다.
1980년 8월 출가 본사인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절친 도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간략하게 환계還戒 의식을 지내고, 발우와 가사, 장삼, 승복은 필요한 강원 후배들에게 모두 나눠주었다. 그동안 거창, 상주 등지에 분산되었던 행장을 모두 정리하면서, 10여 년 동안 나와 함께 했던 경전과 책만을 포장하니, 큰 사과 상자로 여덟 개나 되었다. 영선부에 부탁하여 천일 정기화물 편을 이용해 고향마을로 발송하고 나서, 가야산과 하직 인사를 하였다.
고향마을로 와서는 4-H, 새마을청년회, 새마을문고회 등에서 청소년 지도자와 청년 활동을 하면서, 1985년에는 농민후계자로 선정되어 『대만 과수』를 번역하여, 당시 인기 재배 품종이었던 파인애플 교재를 만들어, 직접 영농교육 현장에서 농민들과 함께 하기도 하였다.
1985. 11. 26. 서귀포시 새마을지회에서 《서귀포시 새마을회지》의 편집위원으로 오승철 시조 시인과 함께 위촉되면서, 오승철 시조시인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동안 습작한 작품을 오시인에게 보여 드리니, 작품 하나하나를 살펴 주었고, 자주 위미에 있는 오 시인의 자택을 찾아 밤새 문학에 대하여 열정을 나누면서, 위미에 거주하는 고권일·김창부·고명호·강영만 문우들과 좋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88. 8. 3~4에는 강원도 주문진에서 개최한 제10회 심상해변시인학교에 참가하여 당시 중앙 시단의 쟁쟁한 구상·조병화·황금찬 시인의 특강과 함께, 밤새 해변 백사장에서 불타오른 시인과의 만남에서 김여정·김정숙·유승우·신규호·이종석·김영만·윤강노·김송배 시인들과 교류를 갖게 되었다.이후 1988. 9. 16. 서귀포 출신 강정만·오승철·윤봉택·김창부·고권일·고명호·김성진·이광준 등과 함께 ‘문우회’를 창립하였는데, 지금의 <문섬> 동인의 전신이다. 그때 우리 동인들은 한 달이 멀다하고 자주 만남을 가지면서, 문학에 대한 열정을 확인하였다.
나의 문학 뿌리는, 섬이라는 특수성이 살아 있고, 어촌과 농촌 삶이 그대로 녹아 있는 고향 강정마을과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나는 강정마을에서 8대의 삶을 지켜오고 있는 토박이이다. 내가 어디에 가 있던 나는 늘 고향마을을 생각한다. 밤 하늘을 볼 때면, 고향 하늘 마당에 떠 있는 별을 찾아 내가 거기에 서 있음을 공감한다.1980년 8월 14일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환계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나는, 동네 선후배들과 힘을 모아, 불교 어린이회·학생회를 조직하여 포교 활동을 하면서 시문학을 하였다.
그러면서 1985년에는 농민후계자가 되어 농사를 지으며, 지역의 농민운동가 고문삼·한명조·김봉연·오형보·이윤화 등과 같이 1989. 6. 23. 한국 4-H연맹 서귀포시지부를 창립하면서부터였다.하우스 유기농사를 지으면서 마구리마다 볼펜을 꽂아 두고는 일하다가도 문득 생각이 스칠 때면, 일하던 손을 내려놓고, 마구리에 볼펜을 뽑아 생각 생각을 하우스 비닐에다가 그대로 옮겨 놓았고, 때로는 팔뚝이나 종아리에 적어 놓기도 하였다.
1989년 한라일보가 창간되면서 「신춘한라문예」 공모가 시작되었고, 나는 이듬해 시 「제주바람」 등 작품으로 응모하여 1991년에 당선되는 기쁨을 가졌다.그때 나는 심사위원 김광협 선생님으로부터 1990년 12월 18일 늦은 밤 전화로, ‘윤봉택 시인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을 축하드립니다’라는 말씀으로, 난생 처음 시인이란 호칭을 김광협 선생님으로부터 들었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전율을 느낀다.
당시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 신문에 발표되자, 시인 김용길·한기팔 선생께서 축하 전화를 주셨고, 서귀포문학회에서 함께 활동하시기를 권하셨다.한라일보 당선 후, 심사하여 주셨던 선생께 인사 드리기 위해, 서울 동아일보 사옥으로 김광협 선생님을 처음 찾아뵈면서, 문학으로의 사제의 연을 맺게 되었다. 집으로 초대한 선생께서는 당신의 저서를 하나하나 꺼내어 친필로 사인하시면서, 그동안 성장과 등단 과정, 서울의 삶과 문단 풍토 등을 밤새도록 말씀하시면서, 시인으로서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소상하게 가르쳐 주셨다. 술 담배를 못하는 나에게 ‘그러면서 무슨 시를 쓰겠나’라며 서운해하셨는데, 부애숙 사모님은 술 못하는 제자를 두었으니 너무나 든든하다시며 기뻐하셨다.
1980년대에 활동한 문학인들은 등단함에 있어, 중앙지에 두 번 추천받아야만 공식 문인으로 등단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당시 문학 풍토 또한 그러했다. 나 또한 그래서 1991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 후, 같은 해에 이종석 시인의 소개로 『문예사조』 4월호에 시 「바람부는 섬」 외 5편이 신인작품상에 당선되면서, 2회 추천 완료로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2회 추천받았다고 김광협 선생께 전화를 드렸더니, 《현대시학》 전봉건 시인께 미리 추천 말씀을 드려 놨었는데 그랬다시며 서운해하셨다.1993. 7. 4. 선생께서 별세하실 때, 건강 때문에 자주 토평동 2225-2 본가에 내려오시어 요양하셨는데, 오실 때마다 찾아뵈며 참으로 많은 문학의 가르침을 받았던 게, 지금으로 보면 참으로 큰 행운이었다.
서귀포문학상 제도는 본인이 서귀포문인협회 회장 재임하던 2011. 1. 22. 정기총회에서 제정이 되면서 관련 규정이 만들어졌다. 당시에는 나의 등단 연도 1991년을 기준으로 하여, 이후에 등단한 문인 가운데 11년 이상 작품 활동을 하면서 5년 이내에 발간한 작품집을 대상으로 수상자를 선정하여, 2011. 11. 15. 첫해에는 정군칠 시인을 바로 첫 수상자로 선정하였다. 이때 심사위원은 한기팔 김용길 윤봉택 고명호 문상금 등이었다.
이후 2020. 6. 7. 시상 규정이 개정되면서, 심사 대상이 작품집이 아닌, 『서귀포문학』에 발표된 그해 작품으로 한정하였고, 대상도 등단한 시인이면 다 해당하도록 하면서, 나 또한 이번에 15회 수상자로 선정 되었는데, 우리가 받는 문학상 가운데 가장 빛나는 향토 문학상이 바로 ‘서귀포문학상’이 아닌가 한다.
문학이 특정 계층만 향유하는 것이 아니지만, 2025년 요즘에는 예술지 등이 많고 많아서, 매월 많은 문학인이 등단하고 있다. 따라서 작품에 있어 질적 저하가 이뤄져, 등단 발표 작품이 마지막 작품이 되는 게 허다한 현실이 되어 버렸고, 발표되는 작품 또한 수준 이하의 작품들이 많아 매우 우려스럽기까지 하다.문학인으로 등단하였다는 것은, 프로라는 것을 의미한다. 프로는 자신의 창작물에 대하여 성의를 다해야 한다. 창작에 대하여 등한시하거나 나태하여서는 아니 된다. 작가에게 있어 글을 쓰는 창작 행위는 신성한 권리이자 의무인 것이다.
생명이 없는 문학은 그림자보다도 못하다.
김광협 선생께서는 생전에 시 한 편에는 시대상, 역사, 문화 자연이 들어 있어야 한다시며, 시인은 프로이기 때문에 5년마다 1권씩 시집을 발간해야할 의무를 가진다 하시면 5년마다 시집 발간할 것을 권하셨고, 가능하면 발표된 작품을 시집에 게재하되, 반드시 발표 지면을 밝히라고 주문하셨다.
이후 첫 시집은 오용수 시인이 운영하는 서울 소재 공감사에서 1996년 《농부에게도 그리움이 있다》가 상재되었고, 두 번째 시집 《이름 없는 풀 꽃이 어디 있으랴》는 부산 소재 빛남에서 상재하였다.
그러나 세 번째 시집《끝나지 않은 이야기》이 2021년도에 상재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2007년도부터 강저마을에 해군기지 관련하여 마을 전체가 찬반으로 두 동강이 났었고, 이 과정을 담은 시를 당시 공직자(1992~2014) 신분으로 시집에 게재하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3집 상재가 그만큼 늦어지게 되었다.
이후 2025년 네 번째 시집《삼소굴 일기》를 상재하였다.그동안 문학 활동 과정에서 1993년 송수권 시인의 추천으로 <한민족방언시학> 창립(초대 회장 김시라)에 제주지역 대표 시인으로 참여할 수가 있었다. 이후 1994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면서 시에 대한 나름이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많은 문학인들의 후의로 서귀포문인협회 회장을 2010~2014년까지 소임을 다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것은 공직에 있으면서도 문화재와 향토사 연구가 나의 주된 업무였기에 가능했었다. 2015~2023년도 까지는 사)한국예총 서귀포지회 회장을 맡아 지역의 예술문화인들과 함께할 수가 있었다.
2016년 무병장수의 별 남극노인성읠 자료를 찾아 시민들께 서귀포가 무병장수의 도시임을 알려 두릴 수가 있었던 것도 하나의 보람이다.
그리고 2001년부터 시작된 서귀포문학사 정리를, 이번 2025년 9월 20일 《서귀포문학 사적事績》이라는 제하로 일단 마무리를 하고, 이를 2025년에 발간하는 《서귀포문학》 제40호에 특집 부록으로 게재하게 되어 마음 한편이 자유롭다.
지난 2009년 대한불교원각회를 창립한 이후, 2014년 서귀포시 하원동 1860번지에 쌍계암 삼소굴이라는 토굴 하나를 꾸미고, 2018년 상민相民이라는 별호 하나를 달고, 삼소굴 아란야에서 불교 명상으로 간경 독서 창작할 수 있음이 더 없는 자유인 것은, 오롯이 나의 스승이신 석가세존의 무한 가르침의 공덕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2001. 5. 15. 소설가 오성찬 선생의 주도로 국제PEN한국본부 제주지역위원회에 창립 회원으로 참여한 이래, 2025. 7. 19. 제14대회장으로 문우들과 함께 일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https://youtu.be/lJSMRnqqBgk?si=xGQMeuLvSQHQspcd
2025. 06 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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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택 尹奉澤 Yoon Bong-Taek
호; 상민(相民)
법명; 정효(正曉)
장르; 시 詩 Poet
1956. 12. 1. 서귀포시 강정동 4362-1번지에서 1녀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남
1970. 7. 30. 경남 합천 해인사 방장 윤고암 대종사 문하로 입산
1974. 10. 1. 해인사 승가대학 대교과(15회) 졸업
1977. 봄, 경북 상주시에서 활동하는 박찬선 시인 만나면서 시 습작 활동
1979. 초가을, 박찬선 시인 소개로, 현대시학 주간 전봉건 시인, 박재삼 시조시인 만남
1980. 8. 14.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환계 還戒하고 고향으로 내려옴
1985. 2. 11. ‘85. 농민후계자 선정 (양봉, 벼·감귤·파인애플·알로에 재배)
1985. 11. 26. 《서귀포시 새마을회지》의 편집위원으로 한기팔·오승철 시인과 함께 위촉되면서, 한기팔·오승철 시조시인을 처음 만남.
1988. 8. 3. 제10회 심상해변시인학교 참가(주문진)하여, 구상·조병화·황금찬·김여정·김정숙·유승우·신규호·이종석·김영만·윤강노·김송배 시인들과 교류
1988. 9. 16. <문섬> 동인(강정만·오승철·윤봉택·김창부·고권일·고명호·김성진·이광준) 결성
1990. 5. 14. 일본 오사카 ‘국제꽃과 초록의 박람회’ 견학
1990. 7. 30. 제12회 심상해변시인학교 참가
1991. 1. 1.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제주바람) 당선 심사(김시태, 김광협)
1991. 2월 시인 김광협 선생 만남
1991. 3. 18. 제주문인협회 가입
1991. 4. 1. 『문예사조』 4월호 신인작품상 시「바람 부는 섬」외 4편 당선(심사 김창직, 진을주)으로 2회 추천 완료
1991. 한라일보 관탈섬 필진
1992. 10. 1. 서귀포시청 향토사료 전임연구원 근무(2014. 12. 31)
1993. 9. 1. 사)한국문인협회 서귀포지부 창립회원
1993. 9. 1. 한민족방언시학회 동인 결성
1994. 3. 5. 한국방송대 국문학과 제주지역 한섬문학 동인 활동
1994. 4. 22. 사)한국문인협회 가입
1994. 10. 6. 아마추어무선국 개설 (호출부호 HL4HGD)
1995. 6. 9. 사)서귀포문화원 창립 회원
1996. 2. 12. 주간 서귀포시민신문(서귀포신문 전신)에 ‘향토문화 순례’ 연재
1996. 2. 25. 첫 시집 『농부에게도 그리움이 있다』, 공감사(서울) 발행
1997. 2. 15. 서귀포문협 3대 부지부장 선임(회장 김용길)
1999. 4. 13~10. 30. 약천사 탐라다도회 창립 강의(동다송·다신전)
1999. 4. 17. 중국 산동성 용구시 우호 협력 제1회 서복 세미나 참관
1999. 4. 28. 『서귀포시지명유래집』 책임 조사 편집
2000. 4. 17. 중국 산동성 용구시 서복국제세미나 참석
2000. 12. 25. 제2 시집 『이름 없는 풀꽃이 어디 있으랴』 빛남(부산) 발간
2000. 12. 27. 서귀포문협 5대 임원(감사) 선출
2001. 6. 19. 국제PEN 한국본부 가입
2001. 5. 15. 국제PEN 한국본부 제주지역위원회 창립 회원(간사)
2002. 1. 21~2021 국사편찬위원회 지역사료조사위원
2003. 11. 18. 중국 문물국 초청 문화유산 방문(북경, 서안, 남경, 소주, 상해)
2004. 6. 1. 제주일보 “해연풍” 필진
2006. 6. 2. 중국 북경 서복국제학술 세미나 발표(북경 서복회 주관)
2007. 2. 22. 서귀포예총 부지회장 피선
2007. 2. 26. 전남대학교 대학원 문학석사(전공 서지학) 학위 취득
2007. 4. 11. 중국 선종 사찰 순례
2007. 7. 13.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문화축제 참관
2007. 8. 1. 문화재청 일반동산문화재 감정위원 위촉
2008. 4. 26. 사)한국예총 제주특별자치도지회 공로패
2008. 4. 28.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재전문위원
2008. 11. 2. 중국 사천성 아미산, 티벳 라샤 성지 순례
2009. 1. 1. 국제PEN한국본부 제주지역위원회 감사 선임
2010. 2. 26. 사)제주올레 자문위원
2010. 8. 23. 제9대 서귀포문인협회 회장 피선
2010. 9. 26. 중국 석굴 유산 답사(륭흥사, 용문·맥적산·병령사·유림석굴, 돈황, 막고굴 답사)
2011. 7. 7. 동유럽 문화유산 답사(오스트리아, 체코, 폴란드)
2012. 10. 14. 박물관·미술관 2급 정학예사 취득
2012. 12. 11. 제9회 대한민국문화유산상(대통령상) 수상
2012. 12. 28. 사)한국문협 서귀포지부 회장 연임(10대)
2013. 8. 17. 혜향문학회 창립회원
2014. 2. 15. 남유럽 발칸반도 문화유산 답사(불가리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2014. 4. 6. 미얀마 불교 성지 순례
2014. 7. 7. 쌍계암 삼소굴 입주
2014. 12. 11. 인도 성지 순례 (1차)
2014. 12. 31. 서귀포시청 문화재전임 연구원 사직
2015. 1. 10. 사)한국예총 서귀포지회 회장 당선(14대)
2015. 7. 4. 솔동산문학 동인 창립 회원(회원 시학 강좌)
2015. 7. 22. 백두산 순례
2015. 8. 29. 문예사조문인협회 제주도지회 창립(초대 회장)
2015. 11. 5. 일본 오끼나와 국제문학 교류(제주PEN) 참가
2015. 12. 18. 일본 교토 문화유산 답사
2016. 2. 17. 사)한국예총 제주특별자치도지회 부회장
2016. 2. 23. 사)서귀포불교문화원 부설 서귀포불교대학 6대 학장
2016. 4. 1. 『무병장수의 별 서귀포 노인성』 편찬
2016. 5. 19. 제주신보 <제주논단> 집필
2016. 6. 7. 사)서귀포불교문화원 부설 서귀포불교대학원 초대 원장
2016. 8. 25. 일본 큐슈 올레 참관
2016. 10. 24. 중국 하남성, 산서성 문화유산 답사
2016. 11. 29. 서귀포예술의전당 운영위원
2016. 11. 29. 서귀포시 건축포럼위원
2017. 1. 10. 제주특별자치도 축제육성위원회 위원
2017. 2. 10. 일본 시즈오카 가와즈 제27회 벚꽃축제 참관
2017. 8. 18. 사)탐라문화유산보존회 창립 대표 이사
2017. 9. 9. 러시아 바이칼 호수, 몽골 문화유산 답사
2017. 10. 29. 미국 캘리포니아 몬트레일 사라나스시 교류 방문(작가 존스타인벡 박물관 견학)
2018. 6. 15. 서귀포시 문화도시사업 추진협의체 위원장 선임(법정문화도시 예비 선정)
2018. 7. 11. 몽고 나담축제 참관
2018. 8. 19. 중국 남극노인성 유적 답사 촬영(제주 KCTV)
2018. 12. 13.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위원회 위원
2019. 1. 10. 사)한국예총 서귀포지회장 연임(15대)
2019. 1. 20. 재단법인 제주문화예술재단 비상임 이사
2019. 2. 22. 사)서귀포불교문화원장(5~6대)
2020. 2. 17. 사)서귀포문화사업회 창립 이사
2020. 12. 15. 제1회 남영호 참사 50주기 추모예술제(서귀포예총)
2021 3. 16. 서귀포문학관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2021. 5. 13. 서귀포시문화도시추진위원회 위원
2021. 6. 7. 제3 시집 『끝나지 않은 이야기』 다층(제주) 발간
2021. 8. 22. 제민일보 칼럼 (아침을 열며) 집필
2022. 1. 6. 제주의소리·서귀포신문에 제주올레 29코스 격주 동시 연재
2022. 2. 18. 서귀포시 사계예술제조직위원회 위원장
2022. 6. 21. 사)제주고령친화연구원 창립 감사
2022. 7. 14. 남영호기억과추모사업회 창립 대표이사
2022. 12. 12. 영국(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문화 유산 답사
2023. 11. 1. 제37회 시의 날 기념 행사(기획)
2023. 12. 5. 인도 성지 순례(2차)
2024. 3. 28. 주간 서귀포신문 칼럼 필진
2024. 4. 20. 석파시선암철쭉제운영위원회 위원
2024. 4. 1. 한국세계문학협회 회원
2024. 10. 18. 카자흐스탄 제3회 문학 아시아 2024 문학상(동상) 수상
2024. 12. 20. 인도에서 간행된 『The Raft Of Dreams 꿈의 뗏목』 작품 게재
2025. 3. 20. 불교문예작가회 회원
2025. 7. 19. 국제PEN한국본부 제주지역위원회 14대 회장 당선
2025. 7. 31. 제15회 서귀포문학상 수상자 선정(수상작; 노박덩굴의 緣)
☞ 지금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1100로 740-91번지 三笑窟에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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