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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기분 좋음, 항상 유지하는 생각법>의 줄거리 :
빌립보서 마지막으로 오면서 특별히 '생각'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헬라어 본문에서는 다양한 단어들이지만 생각이라는 기능의 작용이라는 점에서는 하나입니다. 하늘 기쁨을 유지함에 있어서 생각의 역할은 절대적입니다. 일단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믿어서 주 안에 마음이 거한다면 이제부터 주 안에서 주어지는 영적 사실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을 통해서 내 마음은 실제로 영적 사실들을 접촉하게 되니까요.
기분 좋음, 항상 유지하는 생각법
(빌립보서 4:1~9)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지난 시간에는 기도와 간구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8~9절을 포함해서 다른 관점에서 본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유쾌한 기분, 좋은 기분을 항상 유지하는 것은 생각하기에 달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4절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풀어보자면 ‘항상 유쾌한 기분을 유지하라, 다시 말하노니 유쾌한 기분을 유지하라. 그러기 위해 주 안에 있으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분은 마음이 어떤 대상과 접촉할 때의 느낌입니다. 접촉하는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마음은 기운을 받습니다. 대상이 주는 기운에 따라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기분이 나빠지기도 합니다. 마음이 어떤 대상과 실제로 접촉이 일어나는 과정은 생각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1~6절을 중심으로 기도와 간구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에 8~9절을 포함해 다시 보는 이유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를 매듭지으며 생각이 무엇인지에 대해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살펴볼 것입니다.
생각이란 마음이 무엇과 접촉하는가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예를 들어 얼음에 손을 대고 있다면 얼음의 찬 기운이 느껴집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접촉도 이와 같습니다. 마음이 어떤 대상에 접촉하면 그 기운이 생각을 통해 느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유쾌한 기분이 되려면 마음이 접촉하는 대상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분은 간단히 바뀔 수 있는 대수롭지 않은 일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베드로의 설교가 나옵니다. 여기서 19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도 기분이 유쾌하게 되는 상태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있습니다. 이는 곧 마음이 주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통해서 접촉하게 되는 대상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접촉하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운이 우리를 유쾌하게 만들어 주리라는 내용입니다.
본문 4절의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는 말씀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만나는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과 접촉함으로써 유쾌한 기분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생각입니다. 말씀드렸듯이 마음은 생각을 통해 접촉한 대상이 주는 느낌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어느 목사님 내외분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의 차를 타고 다른 목사님 댁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뒷좌석에 아기 시트가 있었기에 손주를 두셨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무심코 ‘자식보다 손주가 더 예쁘죠?’라고 여쭸더니 ‘기가 막히죠.’라고 하시며 웃으셨습니다. 웃음이 나온 이유는 그 순간에 손주를 생각하면서 마음이 기뻤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생각을 따라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손주의 모습에 가닿았습니다. 그러자 기쁨이 생기고 웃음이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생각과 마음과 기분은 삼위일체입니다.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마음이 접촉을 이루면 기운이 나옵니다. 접촉한 대상으로부터 오는 기운이 기분의 좋고, 나쁨을 결정합니다. 관광객들이 강릉에 와서 바다를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합니다. 보면 생각할 틈도 없이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다를 보는 행위에도 생각은 관여합니다. 여러 가지 문제들로 기분이 나빴지만 바다를 보자 낯선 풍경에 신선한 충격을 받으면서 기존 문제들에 대한 생각이 잠시나마 멈추게 됩니다. 마음에 나쁜 기운을 주는 일들에 대해 생각이 중단되고, 생각하는 힘이 바다에 쏠리자 상대적으로 좋음이 느껴지게 됩니다. 나쁜 기운을 주는 대상에 접촉되어 있던 마음이 끊어지자 순간적으로 기분이 회복된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마음과 기분은 이렇게 예민하고도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생각이라는 의미의 표현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프로네오(φρονέω), 노에오(νοέω), 로기조마이(λογίζομαι)라는 등의 표현이 나오는데 맥락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 어감을 가질 수 있지만 공통적으로 생각의 기능이 작용하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생각과 연관하여 2절을 보면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여인의 갈등이 언급됩니다. 그러면서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주 안에서 만나게 되는 대상을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주 안에서 만나게 되는 대상은 물론 하나님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아버지 보좌 우편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주 안에 있는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습니다. 그렇다면 받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마음이 실제로 접촉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과 이어주는 도구가 바로 생각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았어도 접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아버지로부터 오는 기운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아버지의 기운이 들어오는 접촉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우리는 아버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아버지를 생각할 수 없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주신 예수님의 은총을 받고서도 실질적인 접촉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은 이름뿐인 이론 속의 아버지가 되고 맙니다.
그렇기에 마음이 아버지에게 접촉되고 아버지의 기운을 느끼려면 아버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과 마음과 기분은 삼위일체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기 위해서는 주 안에서만 제공되는 하나님이라는 대상과 마음의 접촉이 이루어져야 하고, 이 접촉은 바로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이루어집니다.
이와 관련하여 6~7절을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였습니다. 마음과 생각이 붙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생각은 무척 중요한 요소입니다.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생각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 함은 마음이 주 안에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위의 것을 찾으라고 하였습니다. 주 안에서 만나는 대상은 하나님뿐입니다. 땅의 것 대신 위의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할 때 마음은 하나님과 접촉하게 되고 그로부터 하나님의 기운이 전해져오게 됩니다. 나의 기분이 하나님에 의해 좌우되는 것입니다. 반면 땅의 것을 생각하면 세상으로부터 기운을 받으며 내 기분도 세상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 빌립보서 3장 19절을 보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의 마음 상태와 그 마침에 대한 멸망이 언급됩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바로 땅의 일을 생각함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3을 보면 베드로가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고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만류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함과 사람의 일을 생각함을 비교하시며 생각의 결정적 역할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믿음이란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동일시함입니다. 다만 믿음은 이 동일시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 안으로 들어간 상태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로서 위의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위의 것을 생각함이 곧 믿음입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땅의 것을 생각한다면 믿음이 없는 것이고 십자가의 원수로 행함입니다. 십자가는 생각의 진로를 결정하는 자리입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곧 땅에 대한 생각이 죽었음을 가리킵니다. 부활은 땅에 대해서 죽었던 생각이 하늘에 대해서 다시 살아났음을 뜻하고, 승천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을 생각하기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이처럼 생각은 위의 것을 내 마음이 가지는 방법이자, 내 마음이 위의 것에 접촉하는 방법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이 마이동풍이 되고 항상 기쁠 수 없는 이유는 생각의 방향을 바꾸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은 사실입니다. 천국이 현실임도 사실입니다. 아버지가 최고로 좋음도 사실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심도 사실입니다. 이런 많은 사실이 주 안에서 제공됩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기분이 기쁠 수 없는 이유는 땅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생각한다는 것은 얼음에 손을 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손이 시리다 못해 아프다고 호소합니다. 그런데 정작 손을 떼라는 이야기를 해줘도 손을 떼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녀 문제에 대해 생각합니다. 돈 문제에 대해 생각합니다. 건강 문제에 대해 생각합니다. 모두 땅의 일입니다. 건강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중에 마음이 닿게 되면 그 기운으로 기분이 나빠집니다. 건강 때문에 기분이 나쁘고 염려가 되고 우울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건강에서 마음을 떼야 합니다. 그런데 건강이 좋아짐을 통해서 기분이 좋아지고자 합니다. 손이 시리면 얼음에서 손을 떼면 되는데, 얼음이 다 녹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과 똑같습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대상으로부터 마음을 떼는 자리입니다. 건강, 돈, 자녀, 배우자, 직장을 비롯한 모든 문제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마음이 이 세상일에 접촉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아예 생각하지 말고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일은 하늘의 것입니다. 주 안에서 제공되는 하늘의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다시 6절을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였습니다. 염려는 걱정과 근심이 담긴 생각입니다. 걱정과 근심이 담기게 되는 이유는 그것을 바라보고 생각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미 그것으로부터 기운을 받기 때문입니다. 생각에 생각을 이어가듯 계속해서 마음을 보내게 됩니다. 기분은 계속해서 나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몸이 아프고, 재정 문제가 생기고, 가족 문제가 생겨도, 주 안에 들어가면 땅의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땅의 모든 일과의 접촉을 끊으면 주 안에 들어가 아버지의 좋으심, 아버지의 살아계심, 아버지가 내려다보고 계심, 아버지의 주권자 되심을 곰곰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엄연한 사실입니다.
어떤 분이 강릉에 오셔서 차를 마시게 되었습니다. 찻집 2층으로 갔더니 바닷가 쪽으로 사람들이 앉아있는데 그 밑으로 주차장이 보입니다. 본래 그 주차장은 무료였는데 관광객이 몰리기 시작하며 유료가 되었고 무척 비쌉니다. 그래서 제가 무심코 ‘바다가 우리 아버지의 것인데, 아버지의 자녀들도 아닌 사람들이 담을 쌓고 울타리를 치고 돈을 받는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사실 강릉 경포대는 하나님 아버지의 것입니다. 경포대뿐만이 아닙니다. 세상에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 삼성, LG, 현대, SK 같은 대기업들도 사실은 재벌 회장님의 것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우리에게 어색한 이유는 평소에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좋음을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주님께서는 머리 둘 곳 없이 사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 것은 하나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버지의 좋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계셔야 할 이유는 사명 때문이었습니다. 기쁨을 위해서는 세상에 계실 필요가 없었기에 사명을 마치자마자 아버지께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우리에게 제시된 사실임을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아버지의 좋음이 사실이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은 아버지의 좋음에 실제로 가닿을 수 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되심에 내 마음이 가닿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닿으면 아버지의 기운이 내게 전해지게 됩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기운을 받으면 예수님처럼 됩니다. 머리 둘 곳 없이 살아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 유쾌한 기분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유쾌함과 좋은 기분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제까지 굳이 땅의 일을 생각하면서 살아왔습니다.
8절을 보면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에든지’가 반복되다가 마지막에 ‘이것들을 생각하라’는 말로 마무리됩니다. 참된 것, 경건한 것, 사랑받을 만한 것, 칭찬받을 만한 것, 덕스러운 것, 기림을 받을만한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주님 안에 들어간 상태에서 돈 문제, 건강 문제, 자녀 문제 등 무슨 일에서든지 참된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나의 생각이 세상에 대해서 끊어져야만 합니다. 어제 그랬듯 오늘도 땅의 일들에 대해 생각하는 상태에서는 참이 나올 수 없습니다. 참이 아니기에 전부 거짓입니다.
믿음이란 하늘에 있는 하나님과 관계된 일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똑같이 세상일만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에든지 참되라는 말대로 우리는 어떤 일에서든 참됨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참된 일을 생각하고자 한다면 기본적으로 참된 자리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세상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마귀에 유혹에 빠진 것이고 전부 거짓입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생각하고 계시기에 나는 세상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에 대한 생각을 끊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갖고 주 안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 무엇에든지 경건하라고 하였습니다. 경건이란 하나님의 있음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밥 먹을 때도 경건하고, 길을 걸을 때도 경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엄연히 계신다는 사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신다는 사실, 이러한 사실들을 생각하며 말하고 행동할 때 경건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써 마음이 하나님과의 접촉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기운이 느껴지고, 그 느낌이 나의 말과 행동에 배어 나오게 됩니다. 그럴 때 유쾌한 사람이 됩니다.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원문을 보면 즐겁고 유쾌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항상 즐겁고 유쾌한 사람을 보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것과 같습니다. 또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또한 원문을 보면 고상하고 우아하다는 뜻인데 이해하기 쉽게 풀어보자면 눈에 띄는 차별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땅을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생각함에 대해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의식으로 붙잡는다고 표현해왔습니다. 생각이라는 기능 속에 의식과 인지를 비롯한 정신작용이 다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붙잡고 생각할 때 이 세상에 대해 죽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에 대한 생각의 진로를 막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부활과 승천은 하늘을 향해 생각의 진로를 여는 역할을 합니다. 이처럼 생각은 중요합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하늘 기쁨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마지막에 생각함으로써 하늘 기쁨을 유지해야 함을 가르쳐주면서 강조합니다. 주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은 자는 세상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 것이 어떻게 되든지 그것으로부터 기운을 받지 않습니다. 하늘의 것을 생각하다 보면 세상 것에 대해서도 완전히 다른 느낌과 이해를 갖게 됩니다. 감사가 나올 수밖에 없는 일로 여겨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좋으심,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하나님의 사랑하심,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계심은 모두 사실입니다. 이 사실들을 생각하다 보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숨어있는 아버지의 뜻을 발견하게 되고, 아버지의 의도를 보게 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기분 좋은 하루, 기분 좋은 평생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위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유쾌한 기분, 최고조의 기분으로 오늘 하루를 살기 위해서 십자가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바라봄이란 곧 주님 안에서 주어지는 하늘의 사실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엇에든지 아버지께서 보고 계심을 생각하고, 아버지가 최고로 좋은 분이시니 내가 하는 일에서 좋음을 얻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위의 것을 생각함으로 마음이 하늘에 접촉하여 누가 봐도 즐겁고 유쾌한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되시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유쾌하고 즐겁고 기쁠 수 있는 방법이 먼 데 있지 않고 우리가 이미 모든 조건을 갖추었음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렇게 주 안에서 주어진 기쁨의 조건들을 끊임없이 생각만 할 수 있도록 권고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