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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의 회전은 상징적인 말이 아닙니다. 정말로 빛이 회전합니다. 물론 수행을 한 사람만 알 수 있는 현상입니다만..
금단(金丹)의 비밀 ...3. 빛의 회전 2/2 경전해설
이제 경문으로 들어가자.
몸속에 넋(魄 : anima)이 있다. 넋은 음(陰)이며 의식의 체이다.
각각의 존재 속에는 넋이 존재한다. 넋(anima)은 여성 원리, 수동의 원리, 음을 의미하며..... 의식의 체(體)라 하였는데, 그것은 의식의 체일 뿐 의식 그 자체는 아니다. 그것이 없이 의식은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물질이요 의식이 거하는 집이다. 그것이 없이 의식은 살아갈 수 없다. 그리고 여성..... 그러나 기억하라. 내가 말하는 여성은 여자가 아니라 여성 원리를 의미한다. 그대는 이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교에서 마치 여자를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잘못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자에 대해서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사실을 사실대로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남자나 여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 원리와 여성 원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들이 그들의 몸에 그다지도 애착을 갖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바로 그 여성 원리 때문이다. 남성은 그렇게 몸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정말 몸에 대해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주위에 여성이 없으면 남성은 더러워지고 땟물이 흐르게 된다. 방이 어질러져도 그는 그것을 의식하지도 않는다.
그대가 어떤 방에 들어가게 되면 그대는 거기에 남자만 사는지 아니면 여자도 있는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하다. 그 사람이 독신인지 아닌지를 그의 방만 봄으로써 알 수가 있다. 책에는 몇 달된 먼지가 쌓였고 몸이나 자신의 육체적인 부분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으면 틀림없는 독신이다. 그러나 여자는 정말이지 무지막지하게 신경을 쓴다. 그래서 거울 앞에 그렇게 오랫동안 서 있는 것이다.
어느 날 물라 나스루딘이 파리를 잡고 있었다. 그는 몇 마리를 잡은 뒤 아내에게 말했다. "암놈 두 마리와 수놈 두 마리를 잡았어."
아내가 말했다. "어머나, 어떻게 가려냈어요?"
그가 대답했다. "두 마리는 거울 위에 있었고 두 마리는 신문 위에 있었거든."
그것은 아주 간단하다. 여자는 끝도 없이 그녀의 몸, 그녀의 체, 그녀의 집에 대해 신경을 쓴다. 만약 남자 혼자 남겨진다면 기껏해야 텐트 하나 정도는 들어설지 몰라도 집은 들어서지 않을 것이다. 모든 문명을 창조한 것은 바로 여성이다. 집이 없이는 어떠한 문명도 있을 수 없고, 집이 없으면 거기에 도시가 있을 수 없고 도시 속에서 문명이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억하라. 문명(civilization)이란 단어는 바로 도시 사람을 의미하는 시민(citizen)이라는 단어에서 왔다.
여성이 바로 전문명을 창조하였다. 남성들은 방랑자나 떠돌이, 여행자, 사냥꾼 따위로 남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계속해서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유랑을 다녔을 것이다. 그대는 그런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거기에 대하여 많은 증거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서양은 보다 남성 지향적이다. 그래서 그대는 세계를 여행하는 서양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동양인 여행자들은 그리 많이 보이지 않는다.
동양은 매우 여성적이다. 여성은 소유물에 끌리게 된다. 집과 자동차와 땅과 장신구와 의복 등. 이것은 내면적인 원리에 기인한다. 그녀는 의식의 체이다. 그리고 기억하라. 여성이 없이 영혼은 높게 부상할 수 없다는 것을. 위대한 시가 남성에 의해 지어진다. 그러나 배후 동기는 언제나 여성이다. 그대는 위대한 여자 시인을 만나지 못한다. 나는 여성들이 쓴 시를 들여다 본 적이 있다. 그들은 애를 쓴다. 그러나 이렇다 할만한 것은 나오지 않는다.
마두리(Madhuri)는 훌륭한 시를 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그것은 시가 아니다. 여성은 시를 쓸 수 없다. 그녀는 시적인 영감을 불어 넣어줄 수는 있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어떠한 위대한 시도 배후에 여성이 없이는 쓰여지지 않는다.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것은 여성이다. 그녀의 존재, 그녀의 사랑, 그녀의 관심 같은 것이 그것을 창출시킨다. 그녀는 시를 쓸 필요가 없다. 남성이 쓸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영감이요, 동기요, 아주 미묘한 원인이다. 또한 어떤 여성도 위대한 화가이진 못한다. 그녀들이 그림을 그리지 않아서가 아니다. 특히 현대에 있어서는 남자들이 하는 모든 것을 여자들도 하고 있지만·.' 거기 대단한 경쟁이 있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해오던 모든 것을 그들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자들이 중요시되는 것은 그들이 하는 일 때문이라고 여자들은 생각한다. 그것은 잘못된 논리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한 그녀들은 언제나 남성들의 모조품에 불과하게 될 것이며 자신의 혼을 잃고 언제까지나 이차적인 존재로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남성의 세계에서 남자들과 경쟁하기 위해서 그들은 이차적인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들은 결코 우선하지 못할 것이다. 경쟁은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남자처럼 되기를 바란다 그대는 결코 남자와 똑같은 경쟁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될 수가 있겠는가? 그의 배후에는 남성의 원리가 있는데‥‥‥ 남자와 경쟁하는 한 그대는 추해지고 거칠어질 것이며 그대의 모든 부드러움을 상실할 것이다. 해방 운동이 여성들에게 일어난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들의 이상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그 전개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여성은 남성과 동등하다. 그러나 남성과 똑같지는 않다. 그리고 그럴 수도 없다. 여성은 자신의 본성을 따라야 하고 자신의 영혼에 귀기울여야 한다. 여성은 다른 길과 이 세상에서 수행해야 할 다른 기능과 운명을 가지고 있다. 만약 그녀가 남자를 따르고 모방한다면 그녀는 상실될 것이다. 그리고 여성이 상실될수록 그녀는 더욱더 존재로부터 뿌리 뽑혀질 것이다. 더욱더 위조되고 조작되고 더욱더 비참해질 것이다. 해방 운동을 하는 여성이 매우 화를 잘 내고 계속해서 분노 속에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의 분노는 좌절감에서 나온다. 자신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되어 있지 않다. 될 수가 없다. 그것은 자신을 배반하는 것이다.
몸속에 넋이 있다.
넋은 음(여성 원리)이며 의식의 체이다.
'의식의 체'(substance of consciousness)라는 구절에 대해 명상해 보라. 의식의 기반이라는 말, 그것은 의식 그 자체는 아니지만 의식이 거주하는 집인 것이다.
그러나 이 외에도 혼(魂 : animus)이 있으니
그 속에는 신(神)이 거한다.
혼(animus)은 남성 원리요, 양(陽)이다.
혼은 양 눈 속에 있다. 그것은 보고 꿈꾼다.
여성 원리는 몸 속에 있다. 그것은 매우 물질적이다. 그래서 여성들은 언제나 물질적이다. 그들의 생각은 대단히 실제적이며 매우 실용적이다. 물라 나스루딘이 어느 날 자기는 절대로 아내와 다투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거나 정말 어려운 일인데 말이오"
그는 말했다. "우리는 수년 동안 그것을 완벽하게 해내고 있어요. 첫날밤에 우리는 한 가지 원칙을 정했죠 그리고 그것을 지키고 있어요 그 원칙이란 것은 작은 일이라면 그녀가 결정을 하고 큰일은 내가 결정한다는 것이었소."
나는 물었다. "작은 일은 뭐고 큰일은 또 무엇이요?
그가 말했다. "이를테면 어떤 차를 살 것인가, 어떤 집에서 살 것인가, 애들을 어느 학교에다 보내야 될 것인가, 어떤 음식을 먹을 것인가, 어떤 옷을 사 입을 것인가 등등 이런 것들이 바로 그녀가 결정하는 작은 일들이오."
그래서 나는 물었다. "당신이 결정하는 일은 무엇이요?"
그가 대답했다. "하나님이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천국과 지옥이 있는가, 없는가? 이러한 모든 큰 문제들이 바로 제 몫이죠 그리고 우리의 원칙은 잘 지켜지고 있어요. 그녀는 결코 이런 큰 문제에 대해서는 간섭하려들지 않아요. 그리고 나 또한 그런 조그만 일에는 간섭하려 들지 않습니다. 나는 나의 세계에 대한 주인이고 그녀는 그녀의 세계에 대한 주인일 뿐이죠 우리는 절대로 엇갈리지 않습니다."
여성 원리는 물질에 뿌리박고 있고 육체에 뿌리를 드리우고 있다. 그러나 남성에게는 꿈이 있다. 남성은 꿈꾸는 자이다. 남성 원리는 꿈꾸는 원리이다. 남자들이 왜 그렇게 달나라에 가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갖는지 이해할만한 여자는 아무도 없다. 그것은 어리석어 보인다. 무엇을 위해서? 도대체 거기서 무엇을 얻으려는 것인지, 무슨 쇼핑이라도 하려는지. 달나라에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상가에 가는 편이 나을텐데, 거기서 무엇을 하려는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생명까지 내건단 말인가? 어떤 여자도 남자가 왜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고자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거기서 무엇을 얻겠다는 것인가? 좀 우스워 보인다. 그리고 모든 여자들은 그녀의 마음 속 깊이 모든 남자들이 어린애와 같다는 것을 알고 있다.
"놀게 내버려 두자. 가서 그네들의 일을 하게 놔두자."
그들이 어리석은 일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그녀들은 잘 안다. 야구 경기나 크리켓(Cricket) 시합 따위의 넌센스들,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볼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던지면 저쪽에서는 이쪽으로 던지고, 계속 그렇게 오락가락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여성은 매우 실제적이고 땅에 가깝다. 여자는 현실적이다. 남성 원리는 하늘과 같다. 여성 원리는 땅과 같다. 남자는 꿈을 갖고 계획을 세우며 미지의 것을 바라고 열망한다. 그러나 남성은 모험가라서 그를 사로잡는 꿈이라면 목숨을 내걸고라도 도전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남성은 눈 속에 살고 여성은 귀 속에 산다. 그래서 여자들에게는 그렇게 잡담이 많다. 잡담이 그렇게도 재미있는 것이 된다. 잡담하고 있는 두 여자를 볼라치면 마치 그들은 거기에 도취해 있는 듯이 보인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중국에서 누가 가장 위대한 거짓말 장이인가를 결정하기 위한 시합이 열렸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많은 거짓말들을 늘어 놓았다. 그러나 상은 "나는 공원 벤치에서 반시간 동안이나 말없이 앉아 있는 두 여자를 보았다."고 말한 사람에게 돌아갔다. 그것은 정말 불가능하다.
여자 때문에 타락, 즉 인류 최초의 범죄(犯罪)가 생겨났다. 뱀은 먼저 아담을 유혹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아담은 귀의 사람이 아니다. 그는 눈의 사람이다. 그는 틀림없이 뱀의 흉계를 눈치채고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다. "귀찮게 굴지 말고 네 갈 길이나 가라. 나에게는 나의 꿈이 있다."
그러나 뱀은 이브를 넘어뜨렸다. 그는 이브와 잡담을 했음이 틀림없다. 아마도 이런 잡담이었으리라. "무엇하고 있니? 여기 지식의 나무(Ou of knowledge )가 있어. 하나님이 너를 속인 거야. 네가 이 나무의 열매를 먹기만 하면 하나님이 아는 모든 것을 알게 될 거야. 너는 전지전능하게 되고 영원히 죽지 않게 될거야."
이와 같은 실질적인 일이라면 여자는 자연히 호기심이 발동한다. 뱀은 그녀를 설득시켰다. 그 뱀이 최초의 세일즈맨이었다. 세일즈맨은 남자에게 가지 않는다. 그들은 남편이 사무실에 가고 없을 때만 문을 두드린다. 여자라야 설득되어질 수 있다. 여자만이 듣는 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귀는 그대의 신체 중에서 수동적인 부분이다. 무언가가 귀를 통해서 들어온다. 눈은 공격적인 부분이다. 귀를 가지고는 공격적일 수 없다. 기억하라. 그러나 눈으로는 공격적일 수 있다. 그대는 칼 같은 눈으로 사람을 째려보면서 그런 눈으로 사람을 화나게 할 수도 있고 사랑할 수도 있다.
그대는 사람에게 가 닿을 수도 있고 지나쳐 버릴 수도 있다. 누군가가 빈 눈으로 그대를 쳐다볼 때 그대는 그를 접촉할 수 없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대를 아주 의미있는 눈으로 쳐다볼 때 그대는 그를 접촉할 수 있다. 또는 누군가가 그대를 삼킬 듯이 아주 정열적으로 요구하듯 어루만지듯 바라보면서 그대를 거의 애무하다시피 한다.
눈은 공격적인 부분이다. 그것은 실어 보낼 수도 있고 가 닿을 수도 있다. 인도에서는 여자를 삼킬 듯이 바라보는 사람을 루츠차(luchcha)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대는 놀랄 것이다. 루츠차라는 말은 눈을 의미하는 로찬(lochan)으로부터 왔다. 그는 눈으로 강탈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눈은 거의 성기가 될 수도 있다. 눈은 위험한 것이다. 그러나 귀는 매우 순진하다. 그것은 받아들이기만 한다.
혼은 눈 속에 있다. 그것은 보고 꿈꾼다. 그러나 어둡고
침울한 기분에 빠져 육체의 형상에 매어있는 사람은 누구나 넋에 속박되어 있다.
그러나 그대가 침울한 기분, 수동적인 기분에 빠져있을 때는 언제나 육체에 매이게 되고 음(陰)에 매이게 된다. 그것은 그대가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에 상관이 없다. 만약 여성이 그녀의 눈을 사용하여 듣는 대신 보려고 한다면 그녀는 양(陽)이 된다. 만약 남자가 들으려고 한다면 그는 음이 된다. 제자는 음이 되고 또 되어야 한다. 제2의, 어떤 것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스승은 전체가 눈이다. 그리고 제자는 전체가 귀이다. 스승은 그대를 보고 그대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는 그대 존재의 핵을 꿰뚫어야 한다. 그리고 제자는 들어야 하고 주의 깊어져야 한다. 수용적이 되어야 하고 스승이 자신의 깊은 중심에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받아들여야 한다.
제자는 여성이 된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여성이 가장 훌륭한 제자가 된다. 남성은 제자가 되기가 약간 어렵다. 비록 제자가 되더라도 마지못해 된다. 그는 저항하고 싸우며, 의심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회피하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쓴다. 그것도 할 수 없게 되면 그때는 의기 소침하여 나동그라진다. 거의 절망적이다. 그러나 여성은 기꺼이 뛰어든다.
가장 훌륭한 제자는 여성이여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섯 명의 제자가 있다면 그중 한 명이 남성이고 나머지 네 명은 여성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다. 마하비라가 그랬고 붓다도 그랬으며 나의 경우도 마찬 가지다. 항상 그랬던 것이다. 남자들은 여자들이 환상적이고 최면에 걸리기 쉬울 뿐만 아니라 잘 속아 넘어간다고 말한다. 그것은 남자들이 비난하는 말일 뿐이다. 남자들은 자신들은 최면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쉽게 최면에 걸리는 쪽이 여자라고 생각한다.
그 이야기는 어떤 점에서는 맞지만 다른 점에서는 틀리다. 만약 여자가 사기꾼을 만나면 그에게 걸려들 것이다. 만약 그녀가 붓다를 만나면 붓다에게 걸려들 것이다. 그렇다. 여자는 속아 넘어가기 쉽다. 모든 것은 그녀가 누구를 만나느냐에 달려 있다. 만약 남자가 사기꾼을 만난다면 그는 속아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는 구제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붓다를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 그는 붓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구원의 기회를 놓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빛의 회전에 의해 혼이 단련된다. 그리하여 혼은 보양(保養)되고
넋은 제압당한다.
빛은 눈에서 회전해야 한다. 눈은 그대의 가장 밝은 부분이다. 도교에서는 눈을 태양에 비유한다. 눈이 없다면 그대는 빛을 볼 수 없다. 유사한 것만이 유사한 것을 볼 수 있다. 눈은 바로 응축된 빛이다. 그래서 눈을 통해 빛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대의 귀는 응축된 소리이다. 그래서 귀를 통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남자든 여자든 누구에게나 넋은 통제되어야 한다. 왜인가? 그것은 형상이요, 몸이요, 물질이기 때문이다. 신(神)이 주인이 되어야 하고 몸 위에 서야 한다. 신이 몸을 지배해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남자인가 여자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내면의 넋이 혼에 길들여져야 한다는 데 있다. 혼만이 찾고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여성이 뒤에 있게 되면 혼은 완벽하게 본질 속으로 파고들 수 있다. 여성이 뒤에서 그를 후원해 주고 있다는 걸 시인이 알게 되면 그의 시는 아주 높이 솟아오를 수 있다. 여성이 항상 그와 함께 있다는 것을 남성이 알게 되면 그는 커다란 힘을 갖게 된다. 그는 어떠한 모험이라도 감행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이 떠나버린 걸 알게 되는 순간 그는 힘이 쭉 빠져 버린다. 이제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꿈뿐이다. 그러나 그 꿈들은 무력하다. 거기에는 에너지도 없고 자각도 없다. 자각의 요인은 여성이지만 꿈꾸는 요인은 남성인 것이다. 하나님을 찾거나 진리를 구할 때는 남성이 앞장서고 여성은 뒤를 따라야 한다. 그대의 내면에서 혼이 스승이 되어야 하고 넋은 제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명심하라. 이것은 그대가 남자냐, 여자냐 하는 것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옛 사람들은 세속을 초월하여 순수 본질로 돌아가기 위해 조잡한
용재를 완전히 단련하는 방법을 썼다.
여성은 정적이고 남성은 동적이다. 그래서 여성은 그렇게 편안해 보이고 남성은 안절부절해 보인다. 심지어 그대가 어렸을 때, 아주 작은 꼬마였을 때부터 그렇게 차이가 났었다. 남자 아이는 덤벙대며 이것을 쥐려고 하고, 계속해서 어딘가로 가고 싶어한다. 그는 골치덩어리다. 그러나 여자 아이는 골치를 썩히지 않는다. 인형을 가지고 얌전하게 논다. 마치 하나의 인형과 같다. 정말 편안한 모습이다. 휴식이 여성의 원리라면 분주한 것은 남성의 원리이다. 그래서 여성은 원만하고 아름다우나 남성은 쉴 새 없이 들떠있다.
그러나 성장하기 위해서는 쉬지 않는 원리가 필요하다. 성장은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성은 대개 관습적이지만 남성은 관습적이 아니다. 여성은 항상 현 상태를 지지하지만 남성은 무모한 개혁이라도 강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 변화하는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찬성한다. 변화가 나쁜 것이든, 좋은 것이든 그것은 별로 상관할 바가 아니다. 변한다는 점에서 무조건 좋을 뿐이다. 여성은 항상 옛 것, 기성의 것을 지지한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옛날에 그러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 그녀들의 생각이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대 속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녹아야 한다. 그대 속의 여성은 하나의 얼음과도 같다. 그대가 강물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녹아야 한다. 그러나 강물 또한 강둑을 필요로 한다. 강둑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다. 기억하라. 둑이 없으면 강물은 결코 바다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강물이 얼어 있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강물은 녹아 물이 되어야 함과 동시에 고정되어 있는 강둑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완전한 인간은 그의 동적인 특성을 강물로 사용하고 그의 정적인 특성을 둑으로 사용한다. 이것이야말로 완전한 균형이다. 그때 그대의 혼은 성장하는데 쓰이고 그대의 넋은 그 성장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확고부동한 하나의 사실이 되게 하는데 쓰인 것이다.
이것은 넋을 제거하여 혼을 보양하려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대개 보면 남자와 여자를 막론하고 모두가 다 고정적이 되어 버렸다. 남자들조차도 너무나 관례적이다. 기독교도, 힌두교도, 이슬람교도, 자이나교도 등 모두가 다 그렇다. 그들은 그들의 넋의 희생물이 되어 버렸다. 그들의 혼은 억눌림 당해 버렸다. 그것은 자유를 얻어야 한다.
그것이 여기서의 나의 모든 노력이다. 그대의 혼을 넋의 손아귀에서 구출해내는 것. 일단 혼이 해방되기만 하면 그때는 넋을 이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혼이 해방을 얻기 전까지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동적인 명상법들을 그렇게 강조하는 것이다. 나는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비파사나( Vipassana ) 명상법을 추천해 준다. 그들의 혼이 흐르는 것을 본 다음에라야 추천해주는 것이다. 그때는 그들이 자신들의 넋을 이용할 수 있는 단계인 것이다.
비파사나나 차센(Zazen)은 정적인 방법이요, 여성적인 방법이다. 수피 춤( Supi dancing )이나 혼돈 명상(Dynamic Meditation), 나타라쥬 (Nataraj) 등은 동적인 방법들이다. 우선 그대는 강물이 되어야 한다. 그때에 가서야 비로소 강둑들도 그대를 도울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빛을 회전시키는 것이야말로 음을 제어하고 넋을 지배할 수 있는
탁월한 비결이다. 이 비결대로 수행하면 정수(精水)가 저절로 충실해져
올 것이다. 신화(神火)가 발생하고 의토(意土)도 응축되고 견고해질 것이다.
그리하여 성태(聖胎)를 맺게 되는 것이다.
성태(holy fruit)는 남성도 여성도 아니다. 성태는 그대가 전체적일 때만 자란다. 그대의 음과 양이 마치 새의 양날개처럼 서로 협력할 때, 바로 그때 에로스(eros)와 로고스(logos)와 직관(Intyihon)이 발현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는 발은 여전히 땅에 둔 채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한다. 나무가 하늘 높이 자라기 위해서는 땅 속 깊이 뿌리를 드리워야 할 필요가 있다. 땅은 음이요, 하늘은 양이다. 그리고 나무는 하늘로 솟으면 솟는 만큼 땅으로 뿌리를 뻗어야 한다.
하나를 이루고 있는 참 본성이 하늘의 궁전(house of the creative)에
떨어지면 혼과 넋이 분열된다.
하나님은 일원성의 존재이다. 그러나 창조가 이루어질 때는 둘로 나누어진다. 음과 양이 그것이다. 그것이 없이는 어떠한 작업도 이루어질 수가 없다. 그것이 없다면 어떠한 변증법적 전개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정과 반(反)으로 나눈다. 그래야만 거기에 도전과 대립과 투쟁이 생겨나고 그 투쟁과 마찰을 통해서만 에너지가 창출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두 개의 돌맹이를 맞부딪쳐 불을 얻어내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마치 양손바닥이 맞부딪칠 때 소리가 나는 것과 같다.
선사(禪師)들은 묻는다. "한 손바닥에서 나는 소리가 무엇이냐?"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 대극을 초월하여 '하나'를 발견하라는 소리이다. 그 '하나'란 바로 궁극의 존재인 하나님을 의미한다. 그 '하나'가 바로 우리의 고향이다. 그리고 그 고향은 우리가 양극성을 초월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곳이다. 이제 그 양극성은 통합되어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인생의 모든 예술이요, 내가 바로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산야신들은 남성과 여성의 통합이어야 하고, 밤과 낮, 속세와 탈속, 정신과 물질, 그리고 하늘과 땅의 통합이어야 한다.
혼은 하늘의 마음(heavenly heart :제3의 눈)에 존재한다. 그것은 양
(陽)이요, 가볍고 맑은 기(氣)이다. 우리는 그것을 태허로부터
받으며, 모양은 원시(元始)와 같다. 넋은 음(陰)이다.
여기에 여성의 신비가 있다. 어떤 남성도 그 신비를 풀 수는 없었다. 양쪽을 초월해야, 붓다가 되어야만 남성과 여성 양쪽의 신비를 다 알 수 있다. 그렇지 않고는 어떤 남성도 여성의 심연으로 들어갈 수 없다. 여성은 어둠에 가려진 채 밤의 신비로 남아있다. 그대는 환히 볼 수 없다. 더듬거리는게 고작이다. 그대는 논리적으로는 결코 여성에 대해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여성은 절대로 논리를 쫓지 않는다. 그녀는 지그재그로 움직인다. 마치 계단을 밟는 것과 같다.
직관적이라는 점에서 여성은 하나의 시인이다. 시를 짓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여성은 전혀 시를 쓰지 않으면서도 시인이다. 그녀의 삶은 시집이다. 그녀의 삶은 시처럼 신비하고 애매하며 불분명하다. 여성의 신비는 벗겨지지 않는다. 언제까지나 물음표로 남는다. 그러나 남성은 등불처럼 분명하다. 그래서 남성은 깊이가 없어 보이고 여성은 깊이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남성은 완전히 표면에 머물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를 알기란 어렵지 않다. 그리고 그를 알게 되면 그의 미래를 예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코 여성은 예견할 수 없다. 그녀에 대해서는 예상이란게 불가능하다. 그녀는 어둠에 가려져 있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이다.
그것은 무겁고 탁한 기(氣)이다·
그리고 여성, 즉 여성 원리는 그대를 땅에 묶어 놓는다. 그것은 중력이다.
그것은 유형적인 혈육의 마음에 매어있다. 혼은 삶을 좋아하지만
넋은 죽음을 열망한다.
여성은 훨씬 더 죽음에 가깝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라. 이것은 하나의 설명일 뿐이다. 만약 '혼'이나 '넋' 또는 '남성'이나 여성'이라는 단어가 문제가 된다면 대신 'x'와 'Y'라는 문자를 써도 상관없다. 그러나 『태을금화종지』는 고유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비유의 체계이다. 인간적인 비유를 쓸 때 훨씬 이해하기가 쉬워지는 것이다.
남성은 삶에 관심이 있고 여성은 안정에 관심 있다. 남성은 사랑에 관심이 있지만 여성은 안정에 관심을 둔다. 남성은 모험에 관심이 있지만 여성은 안락과 편리에 관심이 있다. 여성은 죽음이다. 죽음이라는 말에 어떤 비난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안전을 의미할 뿐이다. 죽은 자에게만 안전은 찾아온다. 그대가 존재하지 않을 때만, 그리하여 그대에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때만 그대는 안전하다. 그러나 남성은 모험을 찾아 나서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남자는 계속해서 다른 여자를 찾아 나서고 여자는 그러한 남편의 뒤를 밟는다.
여자들은 남편들이 왜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갖는지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여기에 이렇게 살아있는데..... 그러나 남성 원리는 언제나 새로운 것에 관심이 있다. 쇼킹하고 스릴 넘치는 것이면 무엇이나 좋다. 어떤 때는 이런 일도 일어난다. 부인이 아주 예쁠 때 남편이 못생긴 여자들에게 관심을 갖는다. 아무도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자네에겐 그렇게 아름다운 부인이 있는데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그대는 남성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남성 원리는 근본적으로 일부 다처제 주의이다. 반면에 여성원리는 일부일처제 주의이다. 여성은 머물기를 원한다. 여성은 사랑보다는 결혼에 더 관심이 있다. 그녀가 사랑에 관심을 갖는 것은 결혼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남성은 사랑 때문에 결혼을 한다. 이런 말도 있다. 남자들이 한 사람도 결혼하지 않고 여자들은 모두 결혼한다면 이 세상은 그대로 천국이 될 거라고. 그러나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혼은 삶을 좋아하지만 넋은 죽음을 열망한다. 일체의 감각적 욕망
(好僖)과 격한 감정들은 넋의 작용이다. 그러나 수련자는 음을 완전히 정제
(精製)하는 방법을 터득하여 그것을 순수한 양으로 화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이 연금술은 남자와 여자 각자 속에 있는 이러한 두 가지 원리를 이해해야만 가능하다. 즉 그대 속의 음에 해당하는 넋을 양으로 변형시키는 것. 그리하여 그 음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움직여 양을 돕도록 하는 것이다. 음이 양을 도울 수 있을 때 진정한 결혼이 일어난다. 그것은 내면적인 결혼이다. 그러면 그대는 통합되어지기 시작한다. 그때 그대의 빛은 깊이를 더하게 된다. 어둠의 깊이까지 흡수했기 때문이다. 그때 혼과 넋은 하나가 된다. 혼과 넋이 용해되어 하나가 되면 그때는 세상도 사라진다.
그대는 다시 하나로 돌아간다. 그리고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길이다. 둘로 남아있는 것은 세상에 남아있는 것이다. 이제 그 신비는, 그 실험은 그대의 내면에서 일어나야 한다. 그것은 바깥세상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내면에서 이 두 원리는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그것은 삶과 죽음, 어둠과 빛, 남성과 여성, X와 Y등 어떻게 불러도 상관이 없다. 그렇지만 이 두 가지 원리는 분명히 그대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다. 끊임없이 싸우면서. 거기서 온갖 고뇌와 비애와 지옥 같은 삶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것들을 친구로 삼아라. 그대의 에너지가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속으로 흘러들어 하나가 되게 하라. 내면의 남성과 여성이 교합하여 오르가즘이 생기게 하라. 탄트라에서는 그것을 가리켜 유가나다 (yugana-ddha)라고 한다. 그것은 내면의 남성과 여성의 교합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탄트라다. 남자와 여자의 외적인 만남은 그림자에 불과하다.
숟다(sudha)가 탄트라 그룹을 이끌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탄트라는 이제 시작되어야 한다. 그녀는 단지 그대를 준비시키고 있을 뿐이다. 내가 그대의 남성과 여성이 서로 하나가 될 준비가 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을 때, 그때에 가서야 비로소 진정한 탄트라 그룹이 시작될 것이다. 그대의 관심이 더 이상 바깥으로 치닫지 않고, 더 이상 그대를 구속하지 않을 때, 그때에 가서야 진정한 탄트라 그룹이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새로운 모임이 형성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탄트라 그룹은 완전히 다른 성격과 분위기를 낼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경이로운 체험이다. 그리고 이 실험은 우주적 환희와 전체적인 오르가즘을 그대 속에 불러일으킬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