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부제 인간
기복진
이른 아침 단체로 풀베다
새참은 빵과 물
비닐에 밀봉된 삼립빵
플라스틱에 담긴 제주 삼다수
방부제로 유통기한이 길다
자연에 살리라 말해도
방부제로 채운 영생불사의 꿈
꺾이면 금새 흙이 되는 풀이
내게 진심으로 권하는 말
넌 화장해야 쓰겄다
(2023.9.3..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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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나무 꽃
기복진
긴 장마 지고,
피는 건 햇살만이 아니다
북쪽 고개 넘어 가는 길 옆엔
붉디붉은 배롱꽃 진땀 내며 피는 중이다
길 따라 길게 길게 도열한 배롱나무
한창 죽음 따라 끝없이 끝없이 피는 중이다
이무기의 피를 묻힌 채,
절벽으로 사라진 임을 따르는 중이다
태양보다 더 뜨거웠던 다짐보다
더더욱 처절했던 사랑의 끝을 따르는 중이다
북쪽 고개 넘어간, 너무 뜨거운 사랑에
배롱나무 흐느끼며 상여 메고 가는 중이다
(2023. 8.1.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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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나 됨은
기복진
수확 앞둔 꾸지뽕밭
풀을 벤 뒤
남긴 삼잎국화
순교자들의 위령비
(2023.9.2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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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
기복진
홀통 갯벌쪽배 하나
썰물에 포박쉼
,꽉 꽉 실은 채
(2023.9.3.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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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斷想)
갈 길은 먼 데
기복진
산 등이라도 꾸역꾸역 딛고 가야지
아직은 가을
보름달은 더 가야 하는데
채 이루지 못한 꿈들
여린 풀벌레는 밤새도록 울어대는데
어째야스까
갈 길은 먼 데 날은 왜 추워지냐
그래도 가야지
가서 말해야지 꼭 말해야지
산 고개 넘는 길이
보름달, 너 하나만 보고 왔다고
멀어도 가야지,
산 등 걸어 넘어 가야지
겨울을 생각케 하는 밤이 이어집니다.
기어이 오고야 마는 겨울이 더디기를 바라는 건, 아직 가을을 다 거두진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리숙한 핸드폰 카메라는 산등성이를 넘는 반달을 제대로 담지 못해 보름달을 담았습니다.
나도 가끔은 나의 둔함으로 반달을 온달로 착각하곤 합니다.
그랬습니다.
삶은 언제나 제대로 된 적이 없지만 나는 너무나도 자주 자만하였습니다. 자만의 끝은 언제나
후줄그레하였습니다. 그렇게 젊은 여름을 건너 이제 가을의 중턱에 섰습니다.
시월의 가을 밤, 아직은 풀벌레가 산자락의 공허를 채우고 있습니다. 가야할 곳도 해야할 일
도 나보다는 여유로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마냥 쫒기는 것은 아닙니다.
가을이 오기까지 어쩌면 조금 더 튼실한 과실만 남겨진 감나무가 저와 비슷할 것 같습니다.
지난 여름 비바람이 몰아치고 가을 초입 태풍이 닥치면서 여기저기 내동댕이쳐진 풋열매들이
있었기에 지금 감나무를 붉게 만든 열매들이 더 돋보일 것입니다. 어차피 떨어져야 할 것들이
있었기에 남겨질 것도 있는 것임을 가을 막판에야 아는 것입니다.
밤이 깊습니다. 온달을 향한 반달은 오늘도 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