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춘마곡추갑사'
신록의 계절, '한국의 아름다운길' 공주 마곡사
[한국여행사진뉴스] 한국여행사진작가협회 여행본부 실크로드 투어단 '한국의 아름다운길 100선 테마여행' 회원40여명이 지난 25일 명실공히 세계문화유산이 있는 '춘마곡추갑사'(春麻谷秋甲寺)라 할 만큼 봄의 경치가 빼어나다는 공주 마곡사를 찾았다.
매월 네번째 토요일은 한국의 비단길 즉, 한국의 실크로드를 찾아가는 여행길에 이번 마곡사길이 6번째 인 셈이다.
2015년 송산리 고분군(무령왕릉)과 공산성이 백제역사 유적지구에 포함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이후, 지난해에는 마곡사를 포함한 7개 사찰이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세계유산이 됐다.
세계유산이 된 7개 사찰은 불교 신앙을 바탕으로 종교활동과 의례, 강학, 수행을 지속해서 이어온 한국의 대표적인 종합 불교 승원이다.
도시에 세워진 사찰 대부분이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폐사됐지만, 산지 사찰들은 그 기능을 이어왔다. 자연에 순응해 가람 배치가 비대칭적이고 비정형적인 것이 특징이다.
마곡사 역시 태극 모양으로 휘어 흐르는 마곡천이 남원과 북원으로 나눈다.
대지가 좁은 북원의 중심 건물인 대광보전은 지세 흐름에 맞춰 서남향을 향하고 남원의 중심 건물 영산전은 동남향을 향해 서로 교차한다. 해탈문과 천왕문이 그 사이에서 방향을 적절하게 틀어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다.
마곡사는 많은 화승(畵僧)을 배출한 남방화소이기도 하다. 승병의 집결지였던 마곡사는 일본의 침략으로 막대한 피해를 봤지만 전란 후 대규모 야외 법회가 열리면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고 이것이 전후 복구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17세기 대규모 야외 법회가 대중화하면서 대형 불화인 괘불도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초기 뛰어난 작품들이 마곡사를 중심으로 한 중부 지방에서 제작돼 동남부 지역으로 전파됐다.
조선 말 마곡사에 머무는 승려 300명 중 불화를 배우는 승려가 80명에 이르렀다는 기록도 있다. 마곡사 석가모니불괘불탱(보물 1260호)에는 승려와 일반 신도 등 시주자 명단이 자세하게 적혀 있다.
태화산(423m) 동쪽 자락에 자리 잡은 마곡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기록이 전한다.
우선 '마곡사사적입안'은 신라 고승 자장율사가 당나라에 다녀온 뒤 643년 선덕여왕의 후원을 받아 세운 7대 가람 중 세 번째 사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다른 기록은 보조선사 체징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신라 말부터 고려 전기까지 폐사됐다가 고려 중기(1199년) 보조국사 지눌이 중창하고 대가람을 이루었다 한다.
마곡사(麻谷寺)라는 이름은 보철 화상이 법을 얻어 오자 사람들이 삼(麻)처럼 모여든 데서 유래했다 한다.
그러나 중국의 마곡 보철이 우리나라에 왔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래서 신라 말에 보철의 법을 받아온 무염 대사가 스승을 기리기 위해 마곡사라는 절을 개창했다고도 한다.
수행 공간인 남원에는 현재 마곡사에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영산전(보물 제800호)이 있다. 천불을 모시고 있어 천불전이라고도 한다. 영산전 현판은 마곡사에 들른 세조가 써서 남겼다.
영산전 옆 매화당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던 곳이다. 김시습은 수양대군(세조)이 단종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계유정난 이후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른 뒤 이곳에서 은신하고 있었다.
세조가 자신을 만나러 온다는 소식에 김시습이 먼저 떠나고 없자 세조가 '김시습이 나를 버렸으니 가마를 타고 갈 수 없다'며 두고 간 연(가마)도 마곡사에 있다.
극락교 건너 북원에는 가장 높은 곳에 대웅보전(보물 제801호)이, 그 아래 앞마당에 대광보전(보물 제802호)과 오층석탑(보물 제799호)이 일렬로 자리 잡았다.
대웅보전은 밖에서 보면 2층으로 보이지만 내부는 하나의 공간이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현판은 신라 명필 김생의 글씨라 한다.
대광보전은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이 동쪽을 향해 모셔져 있다. 현판은 시문서화(詩文書畵) 사절로 꼽히는 표암 강세황의 글씨다. 바닥 장판을 걷어 올리면 참나무로 짠 삿자리가 깔려있다.
이 삿자리에는 걷지 못하던 자가 백일기도를 드리는 동안 정성으로 삿자리를 짜고 마지막 날에는 제 발로 걸어 나갔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785년(정조 9년) 다시 지었다. 안팎으로 구성과 장식이 풍부하고 건축 수법이 독특해 조선 후기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오층석탑이다. 2층 기단 위에 5층 탑신은 일반적인 석탑의 형태지만, 꼭대기 상륜부에 금동보탑이 올려져 있다.
이는 국내에서는 유일하고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것으로 알려졌다. 고려 말 티베트 불교(라마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자취
백범 김구 선생은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 군인을 살해하고 옥살이를 하다 탈옥해 삼남 지방을 떠돌다 마곡사로 숨어들었고, 이곳에서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으로 출가했다.
'백범일지'에는 '사제 호덕삼이 머리털을 깎는 칼을 가지고 왔다. 냇가로 나가 삭발 진언을 쏭알쏭알 하더니 내 상투가 모래 위로 툭 떨어졌다. 이미 결심은 하였지만 머리털과 같이 눈물이 뚝 떨어졌다'고 기록을 남겼다.
마곡사는 김구 선생이 머물렀던 백련암과 백범당, 마곡천 옆 삭발 바위와 징검다리, 송림욕장 등을 잇는 백범 명상길을 조성해 놨다.
해방 후 마곡사에 들른 김구 선생은 대광보전 기둥의 주련 '돌아와 세상을 보니 모든 일이 꿈만 같구나'라는 문구를 보고 감개무량하여 앞마당 왼쪽에 향나무를 심었다 한다.
백범당에는 이 주련이 똑똑하게 보이는 앞마당에서 찍은 사진, 김구 선생의 진영과 함께 생전 즐겨 쓰던 휘호도 걸려 있다. 휴정 서산대사의 선시로 김구 선생의 친손자인 김양 전 국가보훈처장이 마곡사에 기증했다.
踏雪野中去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不須湖亂行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 말라.
今日我行跡 오늘 내가 가는 이 발자취가
遂作後人程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
마곡사에서는 템플스테이(magoksa.templestay.com)를 하며 하룻밤 머물 수도 있다. 전통 한지 공예나 생활 공예 등을 배우는 체험형과 소나무 숲을 걷거나 스님과의 차담을 할 수 있는 휴식형으로 운영된다.
한국여행사진작가협회 여행작가본부 상조회장 운암 조승현 댁을 찾아 맛난 소머리국밥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다
운암 조승현씨는 5대째 마곡사 위에 위치한 마을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으며 직장을 따라 인천에서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늘 고향에 향수에 젖여 이곳에 별장 겸 향후 거주할 집을 지어 놓은 것이다.
이제 몇년안에 이곳에서 노후를 보내게될 조씨 집을 방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