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 소낙비가 내린다.
퇴근쯤에는 비가 그쳐야 할 것인데,
점심을 먹은 이 시간은 무료하고 잠이 절로 온다.
언제쯤인지 알 수 없지만 습관적으로 ‘Wechat’ 을 살핀다.
몹시도 소식이 궁금했던 중국 지우(知友)의 문안을 받고 불현 듯, 당(唐)나라 시인 왕발(王勃)의〈촉주로 부임하는 두소부를 보내며(杜少府之任蜀州)〉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海内存知己 天涯若比隣(해내존지기 천애약비린)”
해내에 지기가 있음에 천애 먼 곳이 이웃만 같아라.
비록 먼 곳이라도 마음이 통하는 벗이 있으면 거리가 멀다고 느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대체로 인류사회가 줄곧 발전과 진화의 연속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눈부신 발전의 이면에는 퇴보도 있는 법이다. 불과 15-6년 전만해도 주위 모든 분들의 연락처를 기억하였건만 이젠 핸드폰에 맡긴지 오래다.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명필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탄연(坦然, 1070-1159)의 글씨인 <청평산문수원기(淸平山文殊院記)>에는 임금과 신하와의 정겨움이 담긴 시가 있다.
願得平生見 思量日漸加 (원득평생견 사량일점가)
高賢志難奪 其奈予心何 (고현지난탈 기나여심하)
평생에 만나 보기를 바랐더니, 생각은 날로 점점 더해가네.
높고 어진 뜻 빼앗기 어려우니, 나의 마음을 어떻게 할거나.
이 시는 금석문의 주인공인 희이자(希夷子) 이자현(李資玄)을 그리는 고려 예종(睿宗)임금의 사랑과 존중이 스며있다. 이자현은 일찍이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29세에 관직을 버리고, 청평산에 들어가 참선하며 은거하였다.
그는 벼슬을 버리고 ‘이번에 가면 다시는 도성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맹세를 하며 임진강을 건넜으며, 이웃한 화악사(華岳寺)의 주지로 있던 혜조국사(慧炤國師)와 교유하면서 선의를 깨쳤다.
이후 예종(睿宗)께서 궁궐로 나오라고 하였으나 공이 임진강을 건널 때의 첫 마음을 저버리고 싶지 않아서 왕명을 받들지 않았다. 정화7년(政和7年, 1117년)에는 왕이 친히 남경(南京, 오늘의 서울)에 행차하여 공을 뵙기를 청하며 위의 시를 짓고 써서 보냈다.
거듭 사양하였으나 임금의 뜻이 간절하고 거두지 않으시므로 그 해 8월에 남경에서 만나게 된다. 임금은 “도덕이 높은 어른을 여러 해 마음을 다해 사모했으니 신하의 예절로 만날 수 없다”(道德之老 積年傾慕 不可以臣禮見之)고 하시면서 굳이 전(殿)위에서 절하라 명하고, 임금께서도 답례의 절을 하셨다고 한다.
아! 어찌 그 옛날의 선인들이 정겹고 그립지 아니한가.
우리의 고인(古人)들은 남녀노소 직위고하를 불문하고, 서로의 그리움을 서신으로 왕래하며 자신의 명분을 지키고 살았다. 비록 곤궁했을지언정 대의와 목표가 뚜렷하며 자잘하고 구차한 것들을 물리쳐 버릴 수 있는 기개가 있었음이다.
오늘이 매년 행하는 미술대전 심사 날이다.
이 세상이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해 졌다. 어느 누구든지 ‘나무를 보면 숲은 못 본다’는 격언대로 세세한 일들에 정신 팔리지 말고, 본래의 자기를 잃지 않으며 서예계의 미래를 생각하길 바란다.
자꾸만 움츠러들어 작아지는 가슴의 우리들보다 고인들이 차라리 행복했지 않았을까?
오늘 아침 '비가 올테니 우산 가지고 출근하라'는 마누라 말이 귓전에 맴돈다.
'마누라 말 잘 들어서 손해보는 일 없다'고 또 한번 충고를 감수해야 할 것 같다 .
첫댓글 남쪽엔 여우비가 잠시 내리더니 흐리기만 합니다^^
서실서돌아오는길에
갑자기쏟아지는 소나기를 흠씬맞으며 시원했습니다
상쾌한기분으로 동감하며 잘~머물렀습니다...감사합니다 선생님~안온한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