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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지상에서 가장 고립된 초소(哨所)
김 광 욱
1
9월 초, 끈적이던 여름도 가고 서늘한 바람이 포플러 가지 사이로 팔랑거리며 스민다. 땀에 절은 병사들의 옷이 시큰한 냄새를 풍기며 초가을 바람을 맞는다.
8월 초부터 시작된 남북한군 포로들의 교환 송환은 9월 초까지 장장 한 달 동안 이어져 어느덧 끝나가는 듯, 판문점 정전회담 초소 앞까지 길게 늘어선 장사진 행렬이 조금씩 그 길이를 줄여 가고, 운없게 막차를 탔던 포로들의 얼굴에서도 희망의 미소가 번진다.
2년 동안 미군과 북한군 대표 사이에 수없이 열렸던 한국전쟁 휴전회담이 성사되는 듯했다가 북한의 고집으로 무위로 끝나거나 번복되어 원점으로 돌아가기를 수십차, 그걸 잘 아는 병사들은 이번에 체결된 정전협정이 언제 또 어떻게 뒤바뀔지 몰라서 판문점에 도착해서도 불안했다.
송환에 필요한 신분 확인 절차를 밟는 동안에도 김일성의 적화통일 야욕이 되살아나서 포로 송환을 중단하고 전투를 계속한다면 포로들은 다시 포로수용소로 돌아가야 한다.
휴전선 최전선에서는 정전협정을 무시한 채 아직도 전투가 계속되고, 피투성이 영토 전쟁이 계속되고, 지금 이 순간에도 숱한 젊음이 꽃처럼 스러져 갔다. 전쟁은 말만 휴전이지 아마도 공산 철의 장막이 부숴지지 않는 한, 민주와 공산 진영 강대국들의 자존심 싸움이 멈추지 않는 한 한국땅에서 전쟁은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정전협정, 휴전협정은 피의 전쟁을 일시 중단하자는 언어 유희에 지나지 않았다. 그 정전협정 때문에 교착 상태에 빠진 남북한 전쟁은 오히려 치열해지고 최후 발악하듯 잔인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휴전이 되면 양쪽의 약속에 따라 남과 북의 군사분계선이 그어지고 그곳에 철책과 철조망이 굳건히 가로막혀 더 이상 땅뺏기 전쟁이 불가능해질 것이기에, 그러기 전에 한치라도 내 땅을 만들자는 ‘애국심’이 군 지휘관들을 전쟁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
인민을 전쟁의 꼭두각시로 삼는 김일성에게는 휴전협정이 본전치기겠지만 수많은 동포와 전우를 잃은 남한 국군들에겐 휴전협정은 억울한 약소국의 통분이었다. 서해평야와 금강산 고지를 사수하기 위한 피의 전투가 이 시점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보고가 속속 들어오고 그걸 정부에서 막을 재간이 없었다.
전쟁은 강대국들의 것이지만 생명의 아픔은 우리 민족의 것이었다. 통분과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한 채 한국 정부의 의지와는 다르게 정전협정이 맺어졌고, 판문점에서는 휴전회담의 최대 이슈였던 양쪽 군포로 송환이 한 달여 동안 성공리에 마무리되어 가고 있다.
그 포로들의 숫자는 국군과 유엔군이 1만 2,773명, 북한군과 중공군이 7만 5,823명이었다. 삼팔 휴전선 최전방에선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고 한쪽에선 교전이 계속되는 사이에 삼팔 휴전선 최전방 판문점에서는 엄청난 숫자의 군 포로들이 정전협정 원칙에 따라 희망자에 의하여 자국으로 보내졌다. 북한군 포로 중에는 2만 2천여 명이 송환을 거부하고 고향행을 포기한 채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넘겨져 제삼국행을 기다렸다.
김일성의 고집으로, 북한군 중 송환 거부자들은 남한으로 곧바로 송환되지 않고 브라질, 인도 같은 중립국에서 생각의 여유 다시 말해 좀 뜸을 들인 후 기왕이면 북송되도록 교육을 받는 절차를 밟았다. 그러나 최종 결정은 포로들의 마음이었다.
양쪽 포로들은 같은 송환 기간에 판문점 군사분계선 내에 있는 ‘자유의 다리’와 ‘돌아오지 않는 다리’ 두 개의 경계지점을 통과하여 전자는 남한으로, 후자는 북한으로 각각 돌아갔다. 다리와 다리 이름은 달라도 내 조국 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점은 동일했다. 그리고 내 조국은 더더구나 동일했다.
북한군 포로들은 영천, 대구, 논산, 마산, 부산, 광주, 부평, 거제도 등 전국 각지의 국군 헌병대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던 포로병들로서 기차와 군 트럭을 타고 포로송환위원회에서 지정한 일정에 따라 판문점에 호송되었다.
북한군 포로들은 미군과 유엔군의 감시를 받으며 남측 포로송환위원회 초소 사무실 앞에서 줄서서 대기하고 있다가 자기 차례가 되면 신원 확인과 송환 의사를 결정한 후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통과해서 북측 초소로 넘어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으로 돌아갈 의사가 없는 포로는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넘겨지고 거기에서 또 제삼국행을 선택하기 위한 조사를 받았다.
일단 북한군 포로병 또는 포로 장교의 신분 확인이 끝나면 최종적으로 송환 의사를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는데 그것은 북측도 마찬가지였다. 억압에 의한 의사 결정은, 유엔 감시단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있을 수 없고 미리 준비된 자신의 각본에 따라 가겠다 또는 안 가겠다 확실히 의사 표현을 하면 되었다. 그 시간은 매우 짧았다. 회유하거나 달래고 자실 시간도 없었다.
인민군 소위 계급장을 단 여군 포로가 마현재 대위 앞으로 걸어왔다. 송환위원회의 마지막 관문인 송환 의사를 확인하기 위하여 통상 한두마디의 질문이 주어졌으나 이 괴뢰군 소위에게는 질문이 아닌 대화로 시간을 끌었다. 뒤에서 다른 포로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그 대화는 두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게 빠른 말씨로, 지키고 있는 유엔 감시단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속도로 내뱉듯이 속삭여졌다.
그 여자 인민군 포로 장교는 누구인가? 왜 대위는 그 깡마른 미모의 여군에게 그리도 빨리 몇마디의 긴 대화를 속삭여야 했던가? 그것은 한국전쟁이 이 땅의 민간인 동포들뿐만 아니라 피와 눈물도 없이 총칼을 들었어야 했던 남북한 군인들에게 숙명처럼 안겨 준 비극이었다.
2
두 사람은 같은 북한군 부대에서 전투에 참여했던 장교들이었다. 마현재는 인민군 대위로 있을 때 다리에 부상을 입어 유선정 간호장교의 도움을 많이 받았었다. 고향이 같다는 이유에서 마현재 대위에게 더 잘해 주고, 죽은 오빠와 나이가 같다는 이유에서 따스한 눈빛으로 대해 주었다.
전장에서 깊이 사귈 틈도 없고 북조선 군대의 상황이 남녀 장교의 교제를 허락할 만큼 인간적인 것도 아니어서 아기자기한 스토리는 없었다. 식사할 때 장교 식당에서 만나면 가벼운 눈인사를 주고 받는 정도였다.
그러나 마현재는 유선정을 생명의 은인이라 생각한다. 포탄에 맞아 절단할 뻔했던 오른쪽 다리를 유선정의 극진한 간호로 절반은 나았다. 미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이 후퇴하고 있을 때라 의사도 부족하고 약품도 귀할 때였다.
유선정은 자신이 직접 집도하여 다리에 박힌 파편을 제거하고 비상용으로 숨겨둔 약을 써서 상처가 썩는 것을 막아 주었다. 전선에서 중상은 곧 죽음으로 연결되는 예가 많았다. 그러고 보면 유선정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었다.
중부전선을 국군에게 빼앗기고 후퇴할 때 헤어진 뒤에도 그는 유선정 소위를 잊지 못했다. 마현재는 지금도 오른쪽 다리를 절뚝거린다. 마현재가 국군에게 투항하고 포로 신세가 된 뒤에도 그 여자의 안부를 알고 싶었지만 소식 두절이었다.
마현재는 인민군 포로 장교로서는 특별 케이스로 한국군 장교가 된 드문 행운아였다. 북한군의 주요 요새로 넘어가는 통로를 알려주고 작전 정보를 제공하여 한국군을 승리로 이끈 공로가 인정된 것이었다.
마현재는 국군 대위가 되어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정훈 장교로 국군 정신교육과 인민군 포로들의 반공교육을 맡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능수능란한 언변으로 많은 북한군 포로들을 반공포로로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미국과 북한이 한국 정부의 의사를 무시하고 정전협정에 조인하려고 할 때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들이 지키고 있는 인민군 포로수용소의 반공포로들을 석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정전협정이 진행 중인 1953년 6월 18일 0시를 기하여 전국의 포로수용소에서 2만 7,388 명의 인민군 반공포로들이 탈출에 성공했다. 마현재 대위는 한국 헌병대를 통하여 모 부대 포로수용소에 유선정이 편한 대우를 받고 잘 있다는 정보를 알아냈으나 그 포로수용소에 교육 일정이 잡히지 않아서 그 여자를 만나지는 못했다.
다만 그 여자의 부모형제가 북한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철저한 김일성 공산주의 사상이 몸에 박힌 여자라 반공포로 대열에 합류하지 않았단 것만 알고 있었다. 만나면 가슴만 아플 것 같아서 일부러 만나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마현재도 북한에 부모님이 생존해 계시고 형제 일가친척도 많았다. 그러나 그는 남한을 선택했다.
유선정을 만나면 해 줄 말이 꼭 있었다. 김일성은 전쟁에 미친 놈이라고. 그놈에겐 민족도 동포도 조국도 없고 오로지 숙청의 괴뢰정부만 있을 뿐이라고. 전쟁터에서 그 여자의 치료를 받고 있을 때 해 주고 싶었던 말이지만 이미 때가 늦어 있었다. 그녀는 다른 부대의 부상자들을 위해 떠나야 했다.
그가 남한에 투항 귀순을 결심한 것은 부상병에 대한 인간 이하의 대우와 아픈 몸으로 김일성을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우라는 교지. 그 잔인한 인간 말살의 이데올로기에 분노해서였다.
유선정이 판문점 남측 송환위원회 초소 입구에 나타났을 때 마현재는 반가움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만남보다 헤어질 그 순간이 착잡하고 가슴 아팠다. 군 정보를 통하여 유선정이 오늘 송환 대열에 끼어 있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그의 가슴은 생선처럼 파동치고 있었다.
과연 그 여자가 내 말을 들어 줄 것인가. 그 답은 엑스였다. 그 여자도 마현재가 국군 정훈장교가 되었다는 걸 알 것이다. 그 여자를 직접 만나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인 경로를 통해서 회유하고 귀순을 종용하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 왔었다.
그 간접 경로를 통해 마현재가 유선정을 만나고 싶어한다는 말도 했다. 그 여자의 답은 싫습네다 였다고 한다. 기런 배신자는 만나지 않을 것이야요.
“왜 날 회유하려 하십네까? 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장교야요. 장교가 어드러케 수령 동지를 배신한단 말입네까?”
그 여자의 카랑한 목소리가 꿈결에서도 들렸다. 그 말을 듣고 정나미가 떨어져서 아예 면회할 생각을 포기했다. 밤이면 꿈속에 나타나서 배신자 마현제를 저주하고 욕을 하던 여자였다. 그 여자 생각 때문에 밥을 먹어도 소화가 안 되고 잠을 자도 온잠이 오지 않았다.
3
유선정. 너는 도대체 뭔가? 왜 내가 너 같은 괴뢰정부 충성파에게 관심을 떼지 못하는 거지? 내 목숨을 살려 준 은혜 때문에? 아니다. 꼭 은혜만이 아니다. 다른 무엇이 있는 거야. 그 이유를 나도 모르겠다. 그는 유선정 때문에 괴로워하고 울기도 많이 했었다.
기다리던 오늘이 왔다. 유선정 소위는 원래 깡마른 체격이었지만 전보다는 살이 쪄 있었다. 포로수용소에서 북한군과 중공군에 대한 대우가 그리 나쁘지 않다고 들었다. 소문에 들은 바로는 인민군(중공군 포함)에 대한 대우가 좋다는 말을 듣고 투항한 공산 포로들이 많다고 했다.
공산 빨치산도 예외가 아니었다. 북한군 포로 중에는 비정규군인 빨치산 인민 유격대원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군 포로 중에 나이 어린 의용군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듯이.
미군과 유엔군의 참전으로 병력보다는 물자 면에서 여유로운 국군에 비해 북한군, 중공군은 무기와 물자 면에서 열세였다.
한국전쟁이 장기전으로 치달으면서 물자 부족, 식량 부족으로 굶고 병들어 죽는 병사들이 많아 김일성 충성보다는 투항 쪽을 택한 것이라라. 북한군 포로들이 국군 포로보다 훨씬 많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추측일 뿐, 포로 송환 사십 년이 지난 후 아직도 천여 명 이상의 국군 포로가 북한에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북한 정부가 많은 국군 포로들을 살해하고 그 숫자도 줄여서 통보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유선정같이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인민군은 포로가 된 뒤에도 남한 정부를 욕하고 미국에 대한 적개심이 변하지 않아서, 미국에서 포로들을 위해 지원하는 물자와 음식을 배척하고 심지어 반공 포로를 살해하기도 했다.
마현재는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유선정이 그런 무리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여자의 치료와 간호를 받으면서 나눈 몇마디 대화에서 그런 사상과 사고방식의 차이가 느껴져서 찬피동물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철혈 공산주의 사상이 골수에 박힌 여자라도 인간이다. 나는 믿는다. 그 여자가 생명을 존중하고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만큼은.)
(한국 정부에서 나에게 송환 포로들의 마지막 의사 결정의 확인 임무를 부여한 것은 유선정 같은 여자라도 자유 민주주의로 귀환할 기회를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대통령의 배려가 아닐까 한다. 미국과 유엔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반공포로 석방이란 이승만 대통령의 쾌거는 민주주의에 대한 강인한 신념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유선정을 회유하지 못한다면 나는 이 자리에 설 자격이 없다.)
마현재는 유선정을 회유하는 것이 곧 통일을 위한 초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전쟁의 종결이었다. 그 여자가 북으로 돌아간다면 지금까지 한국 정부가 그에게 베풀었던 인간적 사랑, 이 정전협정과 포로 송환까지도 의미가 다 없어지는 것이다.
유선정 소위는 더 건강해지고 늠름해진 듯 보였다. 송환위원회 실무위원이 된 마현재 대위를 본 순간 눈이 샛별처럼 반짝거렸고 반가움보다 비웃음의 미소를 살짝 흘렸지만 그것은 마현재의 생각이었다.
그녀는 무표정하게 마현재 앞으로 걸어와서 꼭 가야겠냐는 짧은 질문에 대답 대신 이를 꼭 깨물었다. 배신자가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할 자격이 있냐는 듯이 들리지 않게 속으로 코웃음쳤다.
“당신을 회유하라고 한국 정부에서 날 여기 보낸 거요. 유선정 당신을. 알겠소? 남한 정부는 당신을 따뜻이 맞아 줄 거요.”
그것이 대화의 전부였다. 그 여자가 마현재를 판문점에서 처음 본 순간의 놀람과 경멸은 사라지고 입가엔 비웃음 비슷한 엷은 미소가 스쳐갔다. 미소는 슬픔으로 바뀌었다. 아주 빨리 번개처럼 찰나에 표정이 바뀌는 것을 그는 읽었다. 모든 것이 찰나에 이루어졌다.
전쟁은 길고 지루한 장마처럼 끈질겼지만 만남과 헤어짐은 너무 짧고 순간적이었다. 유선정 소위는 처음처럼 딱딱해진 모습으로 북쪽 출입문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다리’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한 사나이의 목멘 절규가 판문점 초소 마당을 쩌렁쩌렁 울린 건 이때였다.
“안 돼! 가지 마! 그 지옥 같은 철의 장막 뭐가 좋다고!”
헌병들이 달려와서 ‘돌아오지 않는 다리’로 달려가려는 마현재 대위를 붙잡았다. 두 개의 줄에서 이루어지던 송환 확인 절차가 그 소동에 잠시 중단되는 듯했다가 다시 속개되고, 마현재는 제자리에 돌아와 있었다. 그의 눈은 ‘돌아오지 않는 다리’만 애타게 바라보고 있었다.
포로 송환 기간 중에 벼라별 일이 다 있었기 때문에 그쯤의 소동은 가벼운 웃음거리로 치부되어 그 누구도 마현재를 질타하는 사람이 없었다. 내 동포 간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적의 치하로 보내야만 하는 사나이의 눈물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 중간에 군사분계선 표시가 그어져 있고 그곳을 넘으면 북한땅이었다. 군사분계선 앞에서 유선정은 걸음을 늦추더니 살며시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결심한 듯 돌아서서 그녀가 왔던 길로 힘없이 천천히 걸어왔다.
군사분계선 앞까지는 넘어가든 돌아서 오든 그녀의 자유였다. 그 선을 넘어가면 돌아올 수 없다고 해서 붙여진 다리 이름이다. 유선정의 두 눈에서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그리고 시간은 거기에서 정지되었다. 다른 모든 눈물의 시간들과 함께.
4
전국기업인협회 회장단이 탄 관광버스가 임진각 초소를 통과할 때 두 명의 군인이 차를 세우고 승객들의 신분증을 검사했다. 신분증 확인이 끝나자 판문점 견학시 주의사항을 세세하게 일러주었다.
관광이 아니고 견학이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과 비무장지대에 들어갈 때는 군용버스로 갈아타고 이동하며 위험물로 의심되는 소지품은 지참하지 말라는 것. 남북한 초소가 보이는 곳과 회담장 등 모든 장소에서의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허용된 곳에서만 촬영하라는 것.
잠시 후에 임진각 광장에 도착하여 군용버스로 갈아탈 때 안내 병사가 똑같은 주의사항을 말하고, 총을 멘 군인이 신분증을 재확인했다. 북한군을 향해 웃거나 손짓하거나 말을 걸어서는 안 된다는 주의사항을 덧붙였다.
군용버스가 휴전선 군사분계선이 있는 판문점으로 향해 달려갈 때 승객들의 표정은 병사들처럼 약간 굳어 있었다. 분단의 상징이며 남과 북의 유일한 대화 통로이자 지상에서 가장 위험한 초소가 대치하고 있는 판문점을 기행의 목적지로 정할 때만 해도 기실은 관광이 목적이었다.
허나 전쟁은 관광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지금 전투만 하지 않을 뿐 휴전이란 이름으로 전쟁은 내부에서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한국전쟁의 아픔을 체표로 느끼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군인들의 차림과 표정에서 후방의 군인들과는 다른 써늘함을 느꼈다.
관광버스에는 40여 명의 기업인들이 타고 있었고 그들은 모두 쟁쟁한 대기업체의 회장, 총수들이었다. 정일토건의 마현재 회장도 승객 중의 한 사람이었다. 회원들 중에는 머리털이 온통 하얀 노기업인도 있고 마현재처럼 반백발의 중늙은 기업가도 있었다. 하마처럼 생긴 뚱보 여자도 두 사람 보였다.
마현재와 나란히 앉은 오정수란 여류 기업가는 마현재와 친분이 있는 철강회사 회장이고, 마현재보다 더 많은 계열사를 가진 백대 재벌 중의 한 사람이었다. 마현재는 그 여자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었다.
오늘 정기모임에 나올 수 있냐고 오정수 회장이 전화로 물었을 때 마현재는 간부들과 비상회의 중이었다. 십 오 년 전에 중소기업체였던 정일토건회사가 부도 위기에 놓여 있을 때 전무이사였던 마현재가 그 회사를 인수하여 오늘의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는데, 격심한 내수 불황으로 다시 그때와 같은 부도 위기가 목전에 닥쳐왔다.
국내보다 해외 건설 쪽에 치중하여 국내 건설의 적자를 메꿔 왔던 정일토건이 대통령 선거 자금 다시 말해 비자금 조성에 협조하지 않았단 이유로 대통령에게 밉보여 거래 은행들의 대출이 중단되고 사원들의 월급을 주지 못하여 모기업인 정일토건부터 페업할 위기에 놓여 있었다.
모기업이 문을 닫으면 그 밑에 딸린 지사와 계열사 협력업체, 그리고 협력업체에 납품했던 관련 업체들까지 줄줄이 도산할 판이었다. 십 오 년 전의 부도와는 비교도 안 되게, 그 몇십 배, 몇백 배의 천문학적인 부채를 떠안고 교도소에서 옥살이를 해야 할 입장에 놓여 있었다. 몇 년 간 징역을 살고 나올지 아니면 평생을 교도소에서 썩을지 알 수 없었다. 대통령에게 밉보인 대가가 그만큼 혹독했다.
그에게 힘이 되고 위안이 되는 사람은 아내 유선정뿐이었다. 외롭고 힘들 때마다 마현재의 지렛대 받침대 역할을 해 주었던 아내의 내조가 있었기에 오늘의 정일토건이 대기업의 대열에 설 수 있었다.
5
유선정은 북한군 포로 송환 대열에서 극적으로 마음을 돌려 대한민국 국민이 된 후 정부의 도움 없이(정부에서 많은 포로들의 생계를 다 책임질 수 없어 전향 포로 스스로가 생계를 꾸려야 했음) 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정일토건 간부였던 마현재와 결혼했다.
슬하에 2남 1녀를 낳아 행복하게 살던 차에 회사가 부도를 맞아 남편 마현재가 그 회사를 인수하여 사장이 되고, 그녀도 간호사를 그만두고 남편과 함께 회사를 운영해 왔다. 정일토건이 대회사가 된 것은 돈보다 인간 관계 즉 의리를 우선시했던 아내 유선정 전무의 힘이 컸고, 지금도 그녀의 그 탁월한 지도력 없이는 회사 존립이 불가능했다.
유선정 전무가 지방의 지사와 계열사, 협력업체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회사 형편을 설명하고 임원과 사원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었기에 이만큼 지탱해 왔다고 봐야 한다. 거래 은행을 찾아가서 대출 책임자를 설득하고 접대비로 많은 돈을 썼다.
뿐만 아니라 정부 관리들을 찾아다니며 엄청난 급행료를 뿌렸다. 이삼 년마다 있는 대선, 총선과 정치자금으로 염출하는 돈은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대기업 총수의 체면을 세우려고, 또 후환이 두려워서 울며 겨자 먹기로 회사 예산을 거덜내면서까지 정부와 정치에 대한 충성심을 보였다.
그렇게 하려면 회장이 받는 월급 외에 비자금이란 걸 만들어 비축해야 했는데 그 액수가 모기업인 정일토건 사원들의 한 달치 인건비와 맞먹었다. 접대할 곳은 점점 늘어나고 수입은 축소되고. 그 상황에서 대선자금을 대선 출마자들의 요구대로 다 감당할 수가 없었다. 누가 대통령으로 당선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여당과 주요 야당의 출마자들을 다 챙기다 보니 당선자에게로 가는 돈 액수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대선자금을 교활하게 형식 출연만 한 기업가는 대통령과 연고지가 같고 배경이 좋아서 희희낙락 건재하고, 대통령이 당선된 후에 잘 봐달라고 봇물처럼 비자금을 쏟아부었다.
마현재 회장은 운이 없어 당선될 사람에게는 돈을 덜 쓰고 낙선될 사람에게는 멍청하게 쏟아부은 어긋난 케이스였다. 대통령이 그걸 알고 정일토건에게 모든 은행의 돈줄을 끊으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한 것이다. 은행 대출이 끊기면 기업은 살아날 수 없고 그 시점으로부터 부도였다. 내수 불황으로 인한 적자를 해외 건설 수익으로 메꿔왔기에.
이런 상황에서 한가하게 술 마시고 노는 기업인협회 모임에 참석할 마음의 여유도 없고 관광 여행은 사치였다. 마현재 회장이 바빠서 갈 수 없다고 하자, “토건회사들이 할 일이 없어 노는 회사가 많고 그 덕분에 건축 자재 파는 나도 놀고 있는데 뭐가 그리 바쁘냐”며 오정수 회장은 화를 내었다.
마현재는 사실대로 회사가 지금 부도 위기라고 죽는 소릴 했다. 오정수 회장이 정일토건의 사정을 모를 리 없고 그녀의 회사도 사정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그녀는 태평하다.
“그럴 때일수록 힘을 내야죠. 오세요. 와야 됩니다. 안 오면 나 마 회장 미워할 테야.”
하고 오 회장은 전화를 끊었다. 생각해 보니 오정수의 말을 거역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망할 땐 망하더라도 놀고 보자. 부하들에게 판문점 간다는 말을 하지 않고 내일 지방 출장간다고 둘러붙이고 회사에서 나왔다. 아내에게 전화했다. 아내는 퇴근해서 집에서 밥 지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