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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Apostle)라는 직분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의 명칭으로 된 직분이다. 이는 구약성경 출 6:11절에서 바로에게 보냄을 받은 모세나, 왕상 18:1절에서 아합왕에게 보냄을 받은 것으로 나오는 엘리야의 경우와 유사한 의미의 명칭이기도 하다.
그런데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마 28:16)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며 보내신 열한 제자들과 달리, 바울은 그 자신 외에 그의 사도권에 대한 객관적 보증이 될 만한 부르심의 증거가 없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그가 사도로 행세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의 사도권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가장 시급했을 것이다.
하지만 잘 아는바와 같이 그는 정작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께 부름을 받은 뒤에 거의 곧장 다메섹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사역을 시작한다(행 9:20). 그러니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했을 때(행 9:26)에,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않았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사실 열한 제자들과 당시의 그리스도 교회가 그를 사도로 인정하게 된 것은, 그에 대한 스펙(specification)이 아니라 그가 지닌 “복음”(The gospel) 때문이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에게 갔을 때에, 비록 바나바가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을 전해주었을지라도(행 9:27), 결정적이었던 것은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에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오직 복음의 확실함만이 보냄을 받은 그의 직분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갈 1:11-12절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의 복음에 관해 이르기를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그의 사도직에 관한 배경적인 설명 하나를 드러내는데, 갈 1:15-17절에서 바울은 이르기를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고 말했다. 따라서 행 9:26절 말씀은, 바울이 열한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도됨을 인정받으려고 갔던 것이라고 기록하지 않고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했”다고 기록한 것이다.
이처럼 신약 교회의 대표자들이며 지도자들로서, 그들의 가르침 위에 교회가 세워지는 사도직과 관련한 그 어떤 문턱도 성경은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분명하고 확실한 기준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복음의 순수성과 확실함이다.
그러나 복음의 순수성과 확실함이란 결코 주관적인 순수성이나 확실함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갈 1:7절에서 사도 바울이 확실하게 말하는바 “다른 복음”은 없는 것이다. 오직 확실하고 분명한 한 복음이 있을 뿐,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복음이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8절에서 바울은 이르기를 “우리가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담대히 말한다.
결국,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바울에게 필요한 것은 먼저 된 사도들의 인정이 아니라, 그에게 있는 그리스도 복음의 계시를 명료하고 확실하게 새기기 위해, 다만 아라비아로 가는 일이었다. 복음의 진리 외에 그에게 당장 필요하고 시급한 문제는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이란, 바로 그와 같은 것이다. 복음의 진리가 항상, 그리고 확실하게 있는 것 외에 분명한 소명은 없으며, 그것 외에 시급한 문제도 없는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갈 2:4)로 인해 미혹되는 갈라디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5절)고 사도는 말한 것이다.
한마디로 바울이 아라비아로 간 까닭은,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복음의 진리 가운데 있고자 함 외에 다른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이 그의 부르심의 가장 근본적인 근거인 것이다.
지금 당신(혹은 우리-교회-)에게 복음의 진리가 확실한가? 확실하다면 얼마나 확실한가? “나의(우리의)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확실하게(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확실한가 말이다. 사도 바울은 갈 3:1절에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고 말한다. 그는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눈 앞에 밝히 보여준(눈 앞에 보이는 듯 명백하게 나타내준) 것이다. 바로 그것이 사도로 부르심의 목적이요 본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