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전날에 설날을 맞을 준비를 다 마치고 산책차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숨어 있는 성북동 길상사를 찾게 되었다.
그 곳에 서려있는 백석시인과 자야의 지고지순한사랑이야기부터 내려 놓고 다녀 온 이야기를 전개하려 한다. 인터넷 검색에서 알게 된 이야기를 아래로 길게 이어 내려 간다. 백석시인과 그의 연인 기생 자야의 애틋한 사랑이야기
천재시인 백석(白石)의 사랑과 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 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 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 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 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 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 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위 시는 시인 백석(1912 ~1995)이 기생 자야(子夜)와 사랑에 빠져있을 때 읊은 시다. 김영한(金英韓, 1915 ~1999, 子夜는 필명)이 본명인 기생 진향(眞香)은 최근에 화제가 되었던 법정스님의 사찰 길상사의 전신인 요정 대원각의 여주인이다. 시가 천억 원이 넘는다는 대원각을 흔쾌히 시주한 여장부이자 당대의 기생으로 이름을 날린 명기(名妓). 이름난 천재 시인 백석이 진향과 사랑에 빠지고 그들의 애달픈 순애보가 알려지면서 법정스님- 길상사-대원각의 내력이 화제가 되고 백석의 시도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시인 백석(본명 백기행)은 오산고보 졸업후 도쿄로 건너가 영문학을 공부하고 1935년 詩 <定州城>을 조선일보에 발표, 문단에 나왔다. 잘 생긴 얼굴과 젠틀한 성품, 게다가 청산유수의 말솜씨로 모던 보이(modern boy)라는 애칭으로 불리면서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백석이 김영한을 만난 것은 그가 함흥 영생여고의 영어교사로 있을 때였다. 자야가 우연히 영생여고 교사들 회식장소에 나갔다가 백석을 만난 때가 1936년, 백석은 옆 자리에 앉았던 그녀에 첫눈에 반해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내 사랑 백석>에서) 그러나 두 사람은 백석이 만주로 떠나면서 잠시 헤어졌다가, 그가 다시 함흥에 돌아왔을 때는 자야는 서울로 돌아가버린 뒤.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못하는 생이별을 하게 된다. 백석은 고향 정주에 머물면서 글을 썼으며, 6·25 뒤에도 북한에 그대로 남았다. 민족주의 지도자 고당 조만식의 비서를 지내며 솔로호프의〈고요한 돈 강〉 등을 번역했다고 전해진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했고 6.25전쟁 중 중국에 머물다가 휴전 후 귀국하여 협동농장의 현지파견 작가로 활동했다고 알려져 있다. 1936년의 시집 〈사슴〉〈여우 난 곬족〉(조광, 1935.12)〈고야 古夜〉(조광, 1936.1)에서처럼 고향인 평안도의 지명이나 이웃의 이름, 그리고 무술(巫術)의 소재가 자주 등장하며 정주 사투리를 그대로 썼는데, 이것은 이용악 시의 북방 정서에 나타나는 것처럼 일제강점기에 모국어를 지키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남한에서 시집 <백석 시전집>(1987), <흰 바람벽이 있어>(1989) 등이 출간되었다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않는 이름'
나는 지금도 젊은 그 시절의 백석을 자주 꿈에서 본다. 그는 나의 방문을 열고 나가면서 아주 천연덕스럽게 "마누라! 나~ 나 잠깐 나갔다 오리다"하고 말한다. 한참 뒤에 그는 다시 들어 오면서 "여보! 나 다녀왔소!"라고 말한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세월을 반백년이나 흘러 보냈는데도…
내 나이 어언 일흔셋 홍안은 사라지고 머리는 파뿌리가 되었지만, 지난날 백석과 함께 살던 그 시절의 추억은 아직도 내 생애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우리들의 마음은 추호도 이해로 얽혀 있지 않았고 오직 순수 그것이었다.
그와 헤어진 뒤의 텅 빈 세월을 살아 오면서 나는 차츰 말이 어눌해지고 내 가슴 속의 찰랑찰랑한 그리움들은 남이 아무리 쏟으려해도 결코 쏟기지 않던 요지부동의 물병과 같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시 전집이 발간되었다는 소식은 지금껏 물병에선 수십 년 동안 고였던 서러움이 저절로 콸콸 쏟아져 나온다.
- 자야의 회고록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계간 창작과 비평) 전문에서 생전에 김영한은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은 일체의 음식을 전혀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자야는 백석이 사귄 다섯 여자 중 진정으로 사랑했던 단 한 사람의 여인이었고 그녀 또한 백석에 대한 사랑을 평생 올곧게 간직했던 여인이었다. 백석에 의해 자야라 불리웠던 김영한은 일찌기 부친을 여의고 집안이 파산하게 되자, 당시 고전 궁중 아악과 가무에 조예가 깊었던 琴下 河圭一(1867~1960)이 이끌던 정악전습소와 조선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기생이라고는 하지만 경성 관철동의 꽤나 개화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하였고, 동경 문화학원을 수학한 모던한 취향의 엘리트 여성이었으며 <삼천리> 잡지 등에 여러 편의 수필을 발표하기도 했던 이른바 문학기생이기도 했다. 백석이 북으로 떠난 후 38선 때문에 그와 생이별한 김영한은 백석을 잊기 위해 혼자서 대원각을 냈다는 소문이고 우리나라 제일의 요정을 일구어낸 여걸이었지만, 진심으로 사랑했던 백석이 죽도록 보고 싶으면 그녀는 줄담배를 피워댔다고 한다.
그 담배 연기가 이 가련한 여인을 그냥 두겠는가, 기어이 폐암으로 몰아 넣었다. 죽음이 임박해지자 김영한은 자신이 운영하던 요정은 절에, 자신이 만지던 2억원의 현금은 백석문학상 기금으로 내놓는다.
기자가 물었대 시주로 천억을 내놓았는데 후회되지 않냐고 무슨 후회? 라고 반문했다나봐 - 그 사람이 언제 제일 생각나냐고? 그랬더니 - 사랑하는 사람 생각나는 데 어디 때가 있나! 그랬대요 기자가 다시 물었대요 - 그 사람이 어디가 그리 좋으세요 - 천억이 그 사람의 詩 한 줄 만도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를 쓸 꺼야라고
*이생진의 詩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시인 백석을 사랑한 김영한)>에서
길상사가 문을 연지 2년만인 1999년 83세에 훌훌 서방 정토 세계로 떠난 여인, 백석을 위해 전생의 삶을 보낸 멋쟁이 여인 진향이란 이름의 기생 김영한이었다. 그의 유해는 유언대로 눈이 하얗게 쌓인 길상사 앞 마당에 뿌려졌다. 출처:http://blog.daum.net/poetlsh/6935555
길상사홈피에서 옮김
* 길상사를 찾은 현장 이야기는 여기서 부터 시작입니다 *
길상사 뜰 산책중 만난 작은 새..2012.1.22.월
맑고 향기로운 길상사를 찾아 나섰다 2012.1.22.일요일 오후
지난해 시마을 송년문학모임에서 영상작품을 통해 길상사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성북동 대원각이란 곳은 가 보진 않아도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그곳이 애틋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길상사란 사찰임은 모르고 있었다. 절묘히 어우러진 영상과 시와 낭송가의 낭송에서 깊은 울림을 받게 되었다.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상세한 내용을 알고자 인터넷 검색을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되어 벼르다가 이번에 찾게 되었다. 이리도 가까이 있는 것을..명절 전날 일을 잘 마치고 산책차 다녀왔다. 겨울 혹한이 찾아 든 날이지만 몸을 든든히 꾸리고 찾아 나섰다.
지하철 4호선을 타고 한성여대입구에서 하차, 6번 출구로 나갔다. 길상사 봉고차 운행시간을 보니 한참을 노천에서 떨어야 하기에 택시를 이용했다. 기본요금으로 갈 수 있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 해 있었다. 도보로는 20분 소요.. 춥지 않으면 운동차원에서 걸어 볼 만한 거리였다.
삼각산 길상사 일주문
길상사는 성북동 저택들 숲 명당자리에 드넓게 자리했다. 봉고차가 일주문 앞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대기중이었다. 설명절을 다음날로 끼고 있어 혹여 홀로 산책이지나 않을까 염려도 했다. 그러나 사찰뜰을 거닐며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되었다. 7000평의 경내를 이리저리 거닐며 미리 알고 온 숨은 이야기에 젖어 든다.
길상사 경내 측면에서 바라 본 일주문
일주문 들어서면서 바로 만나게 되는 길상사 극락전으로 오르는 계단
극락전 좌측 길로 오르면 음식점으로 사용되었던 수십채의 별채가 지금은 '침묵의 집'등 대부분 스님의 수행도량으로 이용되고 있다. 정문에서 우측에 자리잡은 화장실은 산사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해우소라는 용어대신 '정랑'이라고 표현되었다.
길상사(吉祥寺)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삼각산 남쪽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고급요정 '대원각'을 운영하던 김영한(법명 길상화)이 대원각을 송광사에 시주하여 탄생하였다. 1995년 6월 13일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의 말사인 '대법사'로 등록하였으며 1997년에 길상사로 사찰명을 바꾸어 창건하였다. 사찰 내의 일부 건물은 개보수하였으나 대부분의 건물은 대원각 시절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경내에는 극락전, 범종각, 일주문, 적묵당, 지장전, 설법전,길상헌, 종무소, 관세음보살석상, 길상화불자공덕비 등이 배치되어 있다.
사찰의 대웅전격인 극락전에는 아미타부처를 봉안하고 좌우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시민운동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도량으로 해마다 5월이면 봉축법회와 함께 장애우, 결식아동, 해외아동, 탈북자 등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음악회를 개최한다. 승려이자 수필작가인 법정이 1997년 12월부터 2003년 12월까지 회주(會主: 법회를 주관하는 법사)로 주석하였다.
2010년 3월11일 법정스님은 길상사에서 78세 (법랍 54세)로 입적하였다. 현재 6대 주지로는 덕현 스님이 취임 중이다. 길상사의 원전인 대원각을 시주한 고 김영한은 근대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알려진 '자야' 와 동일 인물이다. 출처:네이버 백과
극락전...길상사의 본존 건물이다. 원래 길상사가 고급요정이어서 인지 사찰형태가 아닌 사대부가의 건축형태이다.
1960~70년대에는 정치인들과 군장성들이 은밀히 만나 정치적인 현안문제를 해결하는 막후정치가 유행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막후정치는 주로 요정(料亭) 이라는 곳에서 이루어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