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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백대영
파라오가 10가지 재앙을 당하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들의 땅의 길로 이끌지 아니하시니, 가까움이니,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를 “그 백성이 전쟁을 볼 때에 후회하고 이집트로 돌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13:17).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리더(leader)시며, 가이드(guider)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갈 길을 이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갈대의 바다의 황야의 길로 주위를 돌게 하시고 순서 바르게 정렬한 그들이 이집트의 땅에서 올라갔습니다(출 13:18).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직선 경로가 아닌 황야의 길로 돌려 이끄십니다. 직선 경로에는 적이 있으며 우리에게는 전쟁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적을 마주하면 약속의 땅을 포기하고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위에 돌아서 가게 하십니다. 편안한 길이 좋아 보이나 이 길을 걸을 때에 약속의 땅을 포기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거친 황야의 길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황야의 길로 이끄시는 것은 우리를 위한 배려인데, 그 백성이 그동안 훈련되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황야의 길에 있다면 하나님께서 이끄신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넓고 편안한 길이 아니라 황야의 길로 이끄십니다.
이와 같은 말씀은 물질의 복을 말하는 순복음교회의 “3박자 축복”이나 조엘 오스틴의 “잘되는 나”라는 가르침과는 얼마나 반대되는 것인가요? 이 세상은 약속된 것을 받는 곳이 아니라 그곳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며 신자들은 황야처럼 거칠고 고달픈 길을 통과하는 과정에 놓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이 땅에서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에 있지 않고 우리를 하나님의 왕국에 맞는 백성이 되게 훈련시키시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는 황야의 길을 걸으며 하나님의 왕국에 맞게 훈련되어야 합니다. 그 길 너머에 약속의 땅이 있습니다.
모세가 요셉의 뼈들을 그와 함께 취하니 요셉이 맹세하게 하였음이니, “너희가 나의 뼈들을 여기에서 오르게 하노라.”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출 13:19).
그들이 황야의 끝에 천막을 쳤습니다(출 13:20).
야훼께서 낮에 이스라엘을 이끄시기 위해 구름의 기둥 안에 걸으셨고 밤에는 그들에 비추시기 위해 불의 기둥 안에 그러하셨으니, 그들이 낮과 밤에 가기 위해서였습니다(출 13:21). 낮에 구름 기둥이 물러가지 않고 밤에 불의 기둥이 앞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이끄시는 분이시며 그는 리더가 되십니다. 그의 백성을 가까운 길로 이끌지 아니하시고 황야의 길로 이끄셨습니다. 그들을 이끌게 하시기에 구름의 기둥 가운데에 걸으셨습니다.
1. 하나님께서 파라오와 그 군대에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 4절에 “내가 파라오와 모든 그의 군세에 영광을 받으며 내가 야훼인 것을 이집트가 알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4장 2절에 “바다의 곁에 진을 칠 것이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파라오가 말하였기를 “그들이 그 땅에 당황하였으며, 그 황야가 그들에 대해 닫았노라”고 말하였습니다(출 14:3).
하나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강하게 하셨고 그가 그들 뒤에 추적하고, 하나님께서 파라오와 모든 그의 군세에 존중함을 받으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야훼시라는 것을 이집트가 알 것입니다(출 14:4).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리로 이끄신 의도는 존중되시기 위해서입니다.1)
그때에 파라오와 그의 종들의 마음이 바뀌게 되었습니다(출 14:5).
파라오가 그의 전차를 묶고 그의 백성을 취하였습니다(출 14:6).
파라오는 선택한 전차 600대와 모든 전차와 장교들을 취하였습니다(출 14:7).
야훼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강하게 하시고 파라오가 그 뒤에 추적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높은(오르는) 손 안에 나왔습니다(출 14:8).
이집트가 그 뒤에 뒤따르고 바닷가에 진을 친 그들을 따라잡았습니다(출 14:9).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 뒤에 이동하는 이집트를 보고 두려워하였고, 그들이 하나님께 외쳤습니다(출 14:10).
그들이 말하기를 “이집트에 매장지가 없어서 황야에서 죽게 만드느냐, 무엇 때문에 당신이 우리를 이집트로부터 나오도록 만들었느냐? 우리가 이집트에서 ‘우리가 이집트를 섬길 것이라’고 말하지 아니했느냐 우리가 이집트를 섬기는 것이 황야에서 죽는 것보다 좋기 때문이라”라고 말하였습니다(출 14:11-12).
그들은 ‘이제껏 살던 대로 이집트를 섬기며 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이 이집트 땅으로부터 그들을 나오게 만든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왜 그들을 나오게 만들었는지 따지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노예로 이집트를 섬기며 사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 우리를 끌고 나와서 황야에서 죽게 하느냐’고 모세에게 따졌습니다. 황야에서 죽는 것보다 이집트를 섬기며 사는 것이 좋다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이제 여러분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되어 보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은 “이집트”라는 강대국에 노예가 되어 종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침에 눈을 뜨면 소집되어 성읍을 건축하는 일에 동원됩니다. 거대한 돌을 운반하여 피라미드를 쌓아 올리고 성벽을 세워야만 합니다. 식사 시간이 되면 소가 헤엄치다 사라진 것 같은 멀건 국물이 나옵니다.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과 같은 반찬을 먹을 수 있습니다. 이집트가 식사 시간에 이러한 음식을 제공한 이유는 무엇이었겠습니까? 배고프면 노동할 수 없기에 힘쓸 수 있게 최소한의 음식을 준 것입니다. 어쨌든 그들은 강제 노동에 징발되어 이집트를 섬긴 노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종 모세를 통해 이집트로부터 나오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음식 걱정 없는 대신 노예로 살아감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모세를 따라 척박한 황야로 들어서는 모험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어쨌든 그들 중에 그냥 이집트를 섬기며 살겠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위 사람들이 우르르 길을 나서니 얼떨결에 따라나섰습니다. 그리고 지금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져 황야에서 죽을지도 모르게 되니까, 이집트를 섬기면서 살던 노예 시절이 좋았다고 불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불평하던 그들의 반응을 통하여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예전에 믿지 아니하던 때에는 악마의 노예로 악마를 섬기며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자 예수를 통해 암흑의 왕국에서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일이 평탄하지 아니하고 황야와 같이 거칩니다. 진퇴양난의 상황에,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뒤로 물러서지도 못합니다. 과거를 돌아보면서 ‘예수 안 믿던 때가 좋았지’라고 말하지는 않습니까?
이렇게까지 말하지는 아니할지라도 불신앙자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은 것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나오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일주일간 추구하는 것이 불신자들과 구별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혹은 불신자들이 원하는 것을 원하고 바라는 것을 바라며 살았습니까?
악마를 섬기면서 사는 사람들에게 악마는 많은 것들을 제공해 줍니다. 황야에서 결코 맛볼 수 없는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게 해 줍니다. 다시 말하면 악마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누릴 수 없는 것들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누릴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신자들보다 더 잘나갑니다. 우리의 눈은 어디 있습니까? 그런 모습을 부러워하며 추구하며 삽니까? 그렇다면 이집트를 섬기는 것이 좋았다는 이스라엘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전의 상태를 부러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14장 13-14절에 “두려워하지 말 것이라 야훼의 구원을 보라 이는 너희가 이집트를 다시는 영원까지 보기에 더하지 아니할 것임이라. 야훼께서 너희를 위해 싸우실 것이고 너희는 침묵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아담이 죄를 범하자, 그에게 두려워하는 감정이 생겼습니다(창 3:10). 그는 하나님의 눈앞에 자기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앞에 자신이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창 15:1). 우리는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창 22:12, 42:18).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따르는 이집트를 보고 두려워합니다(출 14:10). 그러므로 모세는 그들에게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우리 자신의 약함과 적의 강함만을 바라볼 때에는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도하셨으므로 두려워하지 아니하여야 하겠습니다. 진퇴양난의 상황에서도 위가 뚫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아가거나 물러나는 양쪽이 다 어려운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한 때에,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곧 다가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아야 합니다.
구원은 앞과 뒤에서 오지 아니하고 위에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사방으로 포위된 상황 속에 있어도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구원하십니다. 절망처럼 보이는 상황 속에 있다 하여도 두려워하지 아니하여야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를 기대하였으며(창 49:18), 모세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고 하였습니다(출 14:13).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직접 싸우시는 것입니다(출 14:14). 그가 우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니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여야 합니다. 불평하거나 불신앙의 말을 내뱉지 아니하고 그 대신 침묵하여야 합니다.
야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 말씀하시기를 “무엇 때문에 나에 외치느냐, 너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향하여 말하라 그러면 그들이 진행할 것이고. 너는 너의 막대기를 올린 후 너의 손을 바다 위에 내뻗고 그것을 쪼개라, 그리하면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바다의 중앙에 마른 땅에 들어갈 것이고. 내가 이집트의 마음을 강하게 하겠으며 그들이 그들 뒤에 들어갈 것이고 내가 파라오와 그 군대와 그 전차와 그 기병들 안에 영화롭게 될 것이고. 그때에 내가 야훼인 것을 이집트가 알리라”고 하셨습니다(출 14:15-18).
우리가 싸울 필요는 없어도, 우리는 우리의 길을 진행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싸울 필요는 없어도, 우리는 바다의 중앙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외치고만 있어서는 안 되고, 하여야 할 일을 하여야만 합니다.
“무겁다”는 말은 여러 뜻으로 사용됩니다. 은금의 중량이 무거운 것은 “부유하다”는 뜻입니다(창 13:12). 사람의 무거움은 “존중”입니다(창 34:19).
소돔의 죄가 매우 무겁다고 표현되었습니다(창 18:20). 이스라엘의 자손들 위에 그 노동이 무겁게 되었습니다(출 5:9).
파라오의 마음이 무거웠고 그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출 9:7). 야훼 하나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무겁게 하셨습니다(출 10:1).
야훼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강하게 하셔서 그들 뒤에 따르게 하셨는데, 야훼께서 파라오와 그 군세에 무거움 받으시기 위한 것입니다(출 14:4).
여기 “무겁다”는 “존중하다”, “영광스럽다”는 뜻으로 쓰였는데 야훼 하나님께서는 파라오와 그 군세에 의해 영광스럽게 되실 것입니다.
파라오의 마음이 “무거워” 이스라엘을 보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지만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화롭게 되시고 존중받으시는 것에 관심을 가지시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구원하심으로 영화롭게 되셨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들 중에 하나가 감사를 바치는 것입니다. 감사를 제물로 바치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시 50:23).
“영화롭게 하다”라고 번역된 단어(카바드)는 “무겁다”를 뜻하는데 영어 성경들에 “존중하다”나 “영광을 찬미하다”로 번역됩니다. “존중(尊重)”이라는 한자어는 “높이어 무겁게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13장 2절에 “아브람이 가축과 은과 금에 대단히 무거웠노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금덩이가 무겁다는 것은 그만큼 가치가 많이 나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무겁다”가 사람에게 적용될 때에는 “존중하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을 높여 중하게 대하는 방법이 감사를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감사를 제물로 바치는 자가 하나님을 존중하는 사람입니다. 감사를 제물로 바치는 자는 하나님을 존중하고 길을 바르게 놓습니다. 감사를 제물로 바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구조를 보이십니다.
순종의 길을 확고한 결심으로 걷는 자는 하나님을 구조를 봅니다.2)
고난의 날 안에 하나님을 부름으로 영화롭게 할 수 있으며(시 50:15), 또 감사를 제물로 바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시 50:23). 하나님께 기도하고 감사를 제물로 바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게 됩니다. 기도와 감사로써 사람의 최고 목적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야훼 하나님께 감사드릴 것이라고 고백하였는데 하나님의 구원하심 때문에 감사할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역대상 16장 4절에 “그가 야훼의 궤의 앞에게 봉사하는 자들을 주었고 기억하고 있게 하기와 감사하게 하기와 찬양하기에니.”라고 하였습니다.
감사보다는 기억이 먼저 언급되는데 기억하여야 감사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생각할 때 감사하게 됩니다. 감사하지(thank) 아니하는 것은 생각하지(think)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think, thank”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된 것만으로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역대상 16장 29절에 “너희는 야훼께 그의 이름의 영광을 돌려라 너희는 공물(an offering)을 가져오고 그의 앞에 들어오라(come) 너희는 야훼께 성별의 치장(array) 안에 예배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공물을 가져오고 하나님의 앞에 와야 합니다.3) 감사는 마음만이 아니라 공물을 가져와 바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공물을 가져오고 하나님의 앞에 오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행복은 찾는다고 찾아지지 않지만 감사하는 때에 나의 것이 됩니다.4) 감사는 행복의 비결이기도 하니 우리는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그 마음에 정말로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행복을 잡을 수 있으며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말입니다. 행복은 감사의 문을 통하여서만 들어옵니다. 우리는 풍성한 감사를 표현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5)
감사를 제물로 바치는 자는 자신의 길을 바르게 배열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나님의 구조(salvation)를 보게 하실 것입니다.
말세의 증거가 바로 감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게 되면서 감사가 식어진 것입니다. 믿음과 감사는 서로 비례하여 믿음이 충만하면 감사도 충만합니다.6)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요 배은망덕한 사람입니다. 감사하지 아니하는 것은 교만한 마음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입니다.7)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아니한다면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는 말씀을 들어도 귀 안에 들어오지 아니하는 막힌 귀와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아니하는 메마른 마음으로 주어지게 됩니다.8)
감사는 힘이 있습니다. 감사하며 살아가면 사람이 더 젊게 되고 삶이 더 싱싱하게 됩니다. 미국인에게 배워야 할 점이 “Thank you”라고 감사하는 것입니다.9)
뉴잉글랜드의 한 작은 어촌에 동네 사람이 다 고기잡이를 떠났습니다. 그들이 고기를 잡으려고 떠난 오후가 되자 커다란 폭풍이 다가왔습니다. 아내들이 모래사장에 나가 사고 없이 돌아오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하는데 한 집에서 불이 났으며 불은 그 집을 태우고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10)
그런데 밤이 지나고 아침에 어부들이 무사히 다 항구로 돌아왔습니다. 풍랑을 만나 방향을 잃어버리고 죽을 수밖에 없는 절망에 처하였을 때에 불빛을 보고 방향을 잃은 어부들이 방향을 찾고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불난 집이 그 마을의 어부들을 구원하는 등대 역할을 하였습니다.11)
불행처럼 보일지라도 나중에 돌아보면 감사거리가 됩니다. 감사가 사라지면 그 입에 불평과 비방이 가득 차게 됩니다.12) 우리의 입술에는 원망과 불평 대신에 감사와 찬양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감사를 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제물, 즉 예배는 크리스트교의 생명입니다. 우리는 제물을 바침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갑니다.13)
내 주 예수 주신 은혜 한없으니 내 주 앞에 적은 것 다 드려야 합니다. 감사로 드릴 때, 주 예수께서 그 정성을 받으실 것입니다(찬송가 317장).
“감사” 그 자체가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입니다. 예배는 감사의 태도로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14)
우리는 옷을 찢는 위선이 아닌 마음을 찢는 회개를 하여야 합니다. 회개하는 자의 예배 때에 늘 용서와 구원의 감사가 따르게 됩니다.15)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라고 찬송합니다(찬송가 305장). 큰 죄악에서 건지셔서 하늘 고향에 인도하여 주심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 예배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감사가 있을 때에 우리의 예배가 향기로운 제물이 될 수 있는 것이며, 감사와 구원의 감격이 빠질 때에, 불완전한 예배일 수밖에 없습니다.16) 감사를 제물로 바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구조를 보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진영의 앞에 걸은 그 하나님의 천사가 이동하고 뒤로 갔고 구름의 기둥도 그들의 앞으로부터 이동하고 그들의 뒤로부터 섰습니다.
야훼께서 낮에 이스라엘을 이끄시기 위해 구름의 기둥 안에 걸으셨고 밤에는 그들에 비추시기 위해 불의 기둥 안에 걸으셨습니다(출 13:21).
이스라엘의 진영의 앞에 걸은 그 하나님의 천사가 이동하고 뒤로 갔고 구름의 기둥도 그들의 앞으로부터 그들의 뒤로 움직였습니다(출 14:19).
야훼 하나님께서 오셔서 구름의 기둥과 불의 기둥 안에 걸으셨습니다. 우리도 우리와 함께 걸으시는 하나님의 이끄심에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모든 그 밤에 이것이 이것에게 가까이 올 수가 없었습니다(출 14:20).
하나님의 천사가 이스라엘에 가까이 올 수 없게 막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천사는 그의 백성의 앞과 뒤에 적으로부터 보호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던 구름의 기둥이 적에게는 암흑이 된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바다를 마른 땅으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출애굽기 14장 21절에 “그리고 모세가 그의 손을 그 바다 위에 내뻗고 하나님께서 바다를 강한 동쪽의 바람으로 모든 그 밤에 가게 만드셨으며 그가 그 바다를 마른 땅에 놓으시고 물이 쪼갬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시편 74편 13절에 “당신의 힘에 의해 바다를 쪼개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다의 파도들을 고요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시 89:9).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그 바다의 중앙 안에 그 마른 땅으로 들어갔으며 물이 그들에게 그들의 좌우편으로부터 벽이 되었습니다(출 14:22).
하나님께서 바다에 길을 강력한 물에 지름길을 주셨습니다(사 43:16).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바다 사이의 길로 바다를 건넜습니다.
이집트가 따르고 파라오의 모든 말들과 그의 전차들과 그의 기수들이 그들 뒤에 그 바다의 중앙에 들어왔습니다(출 14:23).
아침에 야훼께서 이집트의 진영에 불과 구름 기둥 안에 내려다보셨고, 이집트의 진영(army)을 혼란시키셨습니다(출 14:24).
그가 그의 병거들의 바퀴를 제거하시고 그를 무거움 안에 몰게 하시고 이집트가 말하기를 “우리가 이스라엘의 앞으로부터 도망하겠노라 왜냐하면 야훼가 그들을 위해 이집트 가운데 싸웠음이라”고 하였습니다(출 14:2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기를 “너의 손을 그 바다 위에 내뻗어라 그래서 물이 이집트와 그의 전차들과 그의 기병들에 돌아가게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14:26).
모세가 그의 손을 바다에 내뻗었고 그 바다가 세차게 흐르게 돌아왔고 이집트가 도망하고 하나님께서 이집트를 바다 안에 털어 버리셨습니다(출 14:27).
물이 다시 돌아오고 그 전차들과 그 기병들을 파라오의 군세에 덮었고 그들 안에 하나까지도 남겨지지 않았습니다(출 14:28).
그리고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그 바다의 중앙 안에 마른 땅에 걸었으며 물이 그들에게 그들의 좌우편으로부터 벽이 되었습니다(출 14:29).
야훼께서 그 날에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손으로부터 구원하셨고 이스라엘이 그 바닷가 위에 죽은 이집트를 보았습니다(출 14:30).
그가 파라오의 병거들과 그 군세를 바다 속에 던지셨습니다(출 15:4). 깊음이 그들을 덮었으며 그들이 깊은 곳들 안에 내려갔습니다(출 15:5).
출애굽기 15장 6절에 “당신의 오른손이 힘에 영광스럽게 되며 당신의 오른손이 원수를 산산이 부숩니다.”라고 찬양하였습니다.
3. 우리는 구원자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합니다.
시편 136편 12-15절에 “강한 손과 펼치신 팔에 그렇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자비가 영원에. 갈대의 바다를 조각(part)에 자르시는 자에게 이는 그의 자비가 영원에. 이스라엘을 그것의 중앙에 지나가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자비가 영원에. 파라오와 그의 군세를 바다에다 터셨으니 이는 그의 자비가 영원에”라고 찬양하였습니다.
갈대의 바다를 부분(part)들에 가르신 하나님께 감사하니(시 136:13). 이는 그 자비가 영원에 지속함입니다.
“부분”(게제르)은 아브람이 자른 고기 조각에 쓰였는데(창 15:17), 하나님께서 갈대의 바다를 고기 조각을 가르듯이 둘로 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다 괴물로 의인화된 바다를 둘로 가르신 것입니다.17)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그 중앙 안에 지나가게 만드셨으니(시 136:14), 이는 그 자비가 영원에 지속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의 길을 막고 있던 혼돈의 바다를 둘로 가르셔서 그 백성으로 하여금 바다의 중앙 안에 통과하게 하셨습니다.18)
하나님께서 파라오와 그 군세를 바다 안에 털어 버리시니(시 136:15), 이는 그 자비가 영원에 지속함입니다. 믿는 자는 악마의 군세를 물리쳐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합니다.
구원영생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대적들을 멸하시고 승리하심으로써 영화롭게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당하는 신자들을 구원하심으로써 영화롭게 되십니다.
우리가 진퇴양난 가운데서 우리를 위해 싸우실 하나님을 기대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바다를 쪼개셔서 우리로 하여금 건너갈 수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앞을 막고 있는 바다를 마른 땅으로 바꾸실 것이고 우리의 뒤에 따르고 있는 적군들을 바다 가운데에 침몰시키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날에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손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크리스천도 악마의 왕국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보배로운 피로 우리는 죄 씻음을 받았고, 믿음을 통하여 구원함을 받은 자들인 우리가 감사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제물로 바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게 됩니다. 우리는 구원자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하니 그 자비가 영원한 까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마의 왕국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승리하셨습니다. 이런 자비의 하나님께 감사를 제물로 바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시다!
홍해를 둘로 자르셔서 그 중앙에 지나가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하나님께 감사를 바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복된 구원영생교회 성도들이 됩시다!
1) John I. Durham, 『출애굽기』, WBC 성경주석 3, 손석태·채천석 옮김 (서울: 솔로몬, 2011), 329.
2) Craigie, 『시편 1-50』 (서울: 솔로몬, 2008), 493.
3) 편집부, “감사의 노래”(대상 16:30-36), 『강단비서 2010』.
4) 편집부, “감사로 예배하는 사람”(시 50:22), 『강단비서 2010』.
5) 편집부, “감사로 예배하는 사람”(시 50:22), 『강단비서 2010』.
6) 편집부,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시 50:22-23), 『강단비서 2010』.
7) 편집부,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시 50:22-23), 『강단비서 2010』.
8) 편집부,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시 50:22-23), 『강단비서 2010』.
9) 편집부,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시 50:22-23), 『강단비서』.
10) 편집부,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시 50:22-23), 『강단비서』.
11) 편집부,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시 50:22-23), 『강단비서』.
12) 편집부,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시 50:22-23), 『강단비서』.
13) 편집부,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시 50:22-23), 『강단비서』.
14) 편집부,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시 50:22-23), 『강단비서』.
15) 편집부,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시 50:22-23), 『강단비서』.
16) 편집부,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시 50:22-23), 『강단비서』.
17) 김정우, 『시편 주석 Ⅲ』, 659.
18) 김정우, 『시편 주석 Ⅲ』, 659.